일본이 우리 민족의 선한 이웃 사촌일까?


8월 15일은 우리 조국이 일본의 식민 치하에서 풀려난 지 만 66년이 되는 날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킨 일본의 주역과 그 당시 세대들이 거이 떠나갔기 때문에 이제는 지난날의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선한 이웃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보았으나 그 기대는 완전히 빗나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의 잘못을 전혀 시인하지 않고 도리어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것을 볼 때 안타가운 마음 금할 바 없습니다.


저는 그들이 가르치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였고, 또 그들의 행한 일들을 직접 보기도 했고, 또 듣고, 느끼면서 고통도 당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일본이 그 때와 같은 근성을 버리지 않고 계속 우리 민족을 대한다면, 결코 그들은 우리의 착한 이웃은 아니라는 것을 꼭 알아야만 할 것 같습니다.


"이웃 사촌",  "이웃이 먼 친척보다 가깝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친척은 아니지만 이웃에 사는 사람이 서로가 도우며, 서로가 기쁨을 주면서 가깝게 지낸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에 이르러서는 이 말이 옛날에나 있을 수 있는 말처럼 된 것 같습니다. 물론 생존 경쟁이 너무나 심하다 보니, 내 몸 돌보기가 바쁘고 힘 들기 때문에 이웃을 생각하고 도와 준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 하여 자신이 살기 위해 이웃을 헐 뜯고, 이웃의 것을 빼앗아 자기의 배를 채우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어찌 그것이 바른 삶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어제 아파트 관리 신문에 게재된 기사를 보니 "2층에서 소음이 많이 일어난다" 하여 다투다가 그것이 소송으로 발전, 2층 입주인은 다른 곳으로 이사 나가라는 판결이 나왔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제소한 아래층 입주인이 승소한 것 같지만 사실상으로는 "양쪽 모두 패소"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문제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단체, 기업, 국가 모든 방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같은 피를 나눈 북쪽에 사는 형제 집단이, 어뢰를 발진 시켜 56명을 죽여 놓고도 시치미를 떼기도 하고, 또 포탄을 퍼붓고도 자기 변명만 늘어놓는 일들이 실제 우리들의 눈 앞에 전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쪽 물 건너 있는 이웃은 고대로부터 조공으로 "양곡 00섬을 바쳐라", "미녀(美女) 00명을 바쳐라", "말린 인피(人皮) 00매를 바쳐라"는 등 가혹한 요구를 수 없이 했었지요, 그리고 동쪽 물 건너 있는 이웃은 틈만 있으면 우리 나라를 침략하여 괴롭힌 이웃이 아닙니까?


옛 한문 글귀에 "원교근공(遠交近攻)이란 말이 있는 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고대로부터 먼 곳에 있는 나라와 손을 잡고, 가까운 곳에 있는 나라를 치는 것이 흔히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숙어가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우리들의 조국이 현재 그와 같은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북쪽에 있는 형제 집단은 우리를 잡아 먹으려고 실제 행동하고 있고, 동서 양쪽 물 건너 있는 이웃들은 틈을 노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사면초가에 처해 있는 우리 민족은 먼데 있는 친구와 더욱 친하게 지내면서, 그의 도움을 받아 가까운 이웃으로부터 닥쳐올 피해를 막으려고 하지만....., 우리 나라 구성원들의 생각은 백인백색으로 갈라져 있으니 심히 걱정됩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조국 광복 66주년을 맞이하여 동쪽 물 건너 있는 이웃이 과연 우리들의 선한 사촌인가? 절대 그와 같다고 생각할 수 없기에 지난 날 그들이 우리 민족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를 여기에 소상히 밝히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500 년 동안 그들이 우리 민족을 어떻게 대하여 왔으며, 또 해방 전 36년 동안에는 우리 민족을 어떻게 학대 하였는지를 글과 사진을 통하여 아래에 밝히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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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본 일본과 우리나라와의 불편한 관계


(이 자료는 여러 곳에서 수집한 것을 토대로 작성한 것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1592-1598)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임진년, 선조 25)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부터 시작되어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전쟁을 말합니다. 통상적으로 역사에서는 이를 가리켜 "왜란"이라고 기록하고 하고 있지만 "국가 간의 전쟁" 임으로 다시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개전 초반에는 일본이 한성을 포함한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일년 여가 지나면서부터 창원 이남으로 패퇴하여, 조선군과 의병, 명나라의 조선 지원군, 그리고 우리 수군의 활약으로 밀려, 개전 7년 만에 패배하여 철수해 갔습니다. 


조선왕조 실록에는 제1차 침략을 임진왜란, 1597년의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구분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은 조선 시대 최대의 사건이었으며 정치·문화·경제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언어, 풍속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쟁입니다.


1609년 기유 약조


기유약조(己酉約條)는 1609년(광해군 1) 일본과 맺은 전문 13조의 송사조약(送使條約)을 말합니다. 조약 내용은 주로 쓰시마 도주의 세견선의 왕래 조건에 관한 것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국교를 재개하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끈질긴 통교 요청을 받고 조선 측이 국서(國書) 요구 문제, 범릉적(犯陵賊)의 압송문제, 피로인(被虜人)의 송환 문제 등 대일강화조약의 성립 조건을 제시하자 일본이 이를 이행 함에 따라 조약을 위한 안이 논의되어 조선과 일본의 에도막부(江戶幕府)가 1609년에 체결한 조약입니다


1875년 일본군함 운요호 강화도 침범


운요호 사건(강화도 사건)은 1875년 9월 20일(고종 12년 음력 8월 21일) 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측량을 구실로 정부 동태를 살피다가 수비대와 전투를 벌인 사건을 말합니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병자수호)조약 부산인천 원산 항구 개항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約)은 1876년 2월 27일(고종 13년 음력 2월 3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통상 조약이며, 한일수호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흔히 강화도조약이라고 말합니다. 한일 관계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으며,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맺은 최초의 조약이며, 일본의 강압적 위협으로 맺어진 불평등 조약이라고 말합니다.


1882년 임오군란(대원군 납치)


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고종 19년, 임오년) 음력 8월에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별기군(別技軍)이 조직되었는데, 옛 훈련도감 휘하에 있는 구식 군인들이 별기군과 차별 대우한다는 이유로 일으킨 병란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우발적이었으나 나중에는 흥선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 세력에 대한 배척 운동으로 확대되어 나간 군란인 것입니다.


1894년 청일전쟁


청일 전쟁(淸日戰爭)은 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인 전쟁으로, 중국에서는 갑오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중일갑오전쟁(中日甲午战争), 일본에서는 일청전쟁(日清戦争), 서양에서는 제1차 중일전쟁(First Sino Japanese War)이라고 부릅니다. 


청일전쟁으로 청나라의 퇴보와 무력함을 여실히 드러내면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明治 維新) 이후의 근대화가 중국의 양무 운동에 비해 성공적이었음을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경복궁(景福宮)에서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 梧樓)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들에게 명성황후가 시해된 사건입니다. 


일본 제국이 조선을 침략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인 명성황후 민씨를 살해한 사건으로, 국내에서도 일부 세력이 이 사건에 내통, 협조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참변 또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라고도 부르며, 당시는 을미년의 변(乙未之變) 또는 을미년 팔월의 변(乙未八月之變)이라고 불리어졌던 사건입니다.


1895년 단발령


단발령(斷髮令)은 고종 32년인 1895년 음력 11월 15일(양력 12월 30일)에 김홍집 내각이 공포한 성년 남자는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머리를 하라는 내용의 칙령이었습니다. 


당시 내세운 단발의 이유는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조선의 근대적 개혁을 내세우기 위함이었는데, 여기에는 한국의 전통을 끊음으로 민족 정서를 약화시키려는 일본의 의도도 숨어 있다 하여 많은 백성들의 반대가 일어난 사건입니다.


1904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에 의하여 한일의정서 강제 체결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또는 조일 공수동맹은 무력한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체결된 것입니다. 러시아와의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중립을 주장하는 한국을 세력권에 넣기 위해 1904년 1월 대한제국 황성을 공격하여 황궁을 점령한 뒤, 같은 해 2월 23일 강제로 체결한 조약입니다. 일본이 한국을 협박하여 이지용과 하야시 곤스케 명의로 공수동맹을 전제로 6개의 조항으로 한일의정서가 만들어졌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 강제로 체결(외교권이 일본에게 박탈 당함)


을사조약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 정부의 박제순과 일본제국 정부의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입니다. 체결 당시 정식 명칭은 "한일 협상 조약"이며, 을사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을사조약, 을사오조약, 을사 보호조약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일본은 제2차 한일 협약(第二次 韓日 協約)이라고 부르며, 한국에서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맺은 조약이라 해서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조약은 1965년 한일국교를 정상화하는 한일 기본조약의 제2조에 의하여 무효 되었음을 상호 확인하였습니다. 


1906년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을 감시하기 위해 한성에 통감부를 설치


통감부(統監府)는 일본 제국이 을사조약의 체결로 한성부에 설치했던 관청으로, 한국 통감부 또는 조선 통감부라고도 합니다. 


을사조약에서는 대한제국 황제 밑에 일본 정부의 대표자로 1명의 통감을 두어, 한일의정서 이후 제한되던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통감이 지휘·감리하게 한 내용입니다.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만을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한성(서울)에 주재하도록 하였으니, 사싱상 외교권을 박탈해 간 것입니다.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파견으로 고종 황제 강제 퇴위(退位)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는데, 그 의도는 을사조약이 대한제국 황제의 뜻에 반하여 일본제국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폭로하고 을사조약을 파기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제국과 대영제국 등의 방해와 방관으로, 조선 대표는 회의장 참석과 발언이 거부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 시키고 7월 20일 양위식을 강행하여, 그 뒤를 순종 황제가 즉위하도록 하여 한일신협약을 체결하게 된 것입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대한제국 군대 해산(大韓帝國 軍隊解散)이란, 1907년 7월 31일 밤, 대한제국 순종 황제가 군대 해산을 명하는 조칙을 내려 군대를 해산했다고 알려진 사건입니다. 그러나 후에 순종 황제의 조칙에 의하여 밝혀지기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이완용(李完用)에 의하여 작성된 위조 문서에 의하여 이루어 진 것이라고 밝혀진 것입니다.


1908년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는 조선의 경제를 일본이 독점하고, 토지·자원의 수탈을 목적으로 일본제국이 세운 국책회사로 1909년 1월부터 대한제국 안에서 활동을 개시한 회사입니다. 


1909년 기유 각서


기유각서(己酉覺書)는 1909년 7월 12일(융희 3년),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기유각서의 공식 명칭은 "한국 사법 및 통감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로서, 공식 명칭 그대로,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교도행정에 관한 업무를 일본에게 넘겨 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조약입니다.


1909년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입니다. 그는 일본의 전 총리(총리직 네번 역임)로 1905년 고종 황제를 협박하여 을사조약을 맺는 데 큰 역할을 한 자입니다. 


이에 분노한 독립 운동가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유승렬, 김성화, 탁공규 7인이 거사를 계획하고 준비하여 1909년 10월 26일 로서아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도중, 하얼빈 역에 내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입니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경술국치 8월29일)


한일 합병 조약(韓日 合邦 条約)은 1910년 8월 22일에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맺어진 조약으로,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대한제국은 이 길로 국권을 상실한 것입니다.


1912년 토지조사 사업시작 (1912~1918)


조선 토지 조사 사업은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일본이 한국의 식민지적 토지 소유 관계를 확립하기 위하여 시행한 대규모의 조사 사업입니다.


1918년 만주에서 독립선언서 발표(무오 독립선언)


무오 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은 대한 독립선언이라고도 불리어지며 3 1 운동의 전초가 된 독립 선언서 발표 사건입니다. 당시 만주와 연해주,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 운동가 39명의 명의로 발표된 선언서 입니다. 그 시기가 음력으로 무오년인 1918년 12월(양력으로 1919년 2월)이기에 무오 독립 선언이라고 불리어 집니다. 


만주 지린에서의 무오 독립 선언 직후 일본 도쿄에서는 2 8 독립선언이 발표되었고 곧 이어 전국적인 3 1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19년 고종황제 서거/ 고종 국장일을 맞아 3.1 만세 운동


고종황제는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 1910년 이태왕이 되었다가, 1919년 1월 21일 새벽 덕수궁에서 사망하였는데, 새벽에 일어나 식혜를 마신 후 얼마 안되어 죽었다는 점과 또 그의 시신에 이상한 반응이 있었다는 점 때문에 독살설이 크게 유포되었으나 끝내 규명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에 의해 장례 직후 독림 만세 운동을 버리기로 계획되어 3·1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1926년 순종 서거 국장일을 맞아 6.10 만세 운동


6·10 만세운동(六十萬歲運動)은  6월 10일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을 말합니다


1932년 이봉창 의사 일본 황제에게 수류탄 던졌으나 실패


1932년 1월 8일 이봉창(李奉昌)은 요요기 연병장에서 열리는 육군 관병식에 참석하기 위해 행차하는 일본 황제를 히라주쿠에서 살해하기 위해 수류탄을 던젔으나, 일본 황제가 지나간 다음에 수류탄을 던짐으로 암살하는데 실패한 사건입니다.


1932년 윤봉길의사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의거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虹口公園爆彈投擲事件)은 1932년 4월 29일 중화민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 황제의 생일 축하연이 벌어지는 장소에서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해 시라가와 요시노리 대장(중국 주둔 일본군 총사령관)을 비롯한 일본인 중요 인사들을 죽이고 또 다치게 한 사건입니다.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


1936년 독일 베르린에서 열린 하계 올림픽에서 한국인 손기정(孫基楨)이 마라톤에서 우승하여 목에 금메달을 걸었고, 남승룡(南昇龍)은 동메달을 차지했습니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일본 대표로 뛰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중앙일보가 그 내용을 신문에 보도하면서 의도적으로 유니폼에 그려져 있는 일장기(일본의 국기) 사진을 지운 사건입니다.


1940년 창씨개명 실시


1940년 미나미 다로(南 太郞)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여 일본식으로 창씨 개명(創氏 改名) 할 것을 명령하여 본의 아니게 한국민 모두가 개명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와 같은 일은 대만에서도 시행하였다고 합니다.


1941년 임시정부, 대한민국 건국 강령 발표 및 대일 선전 포고


1941년 11월 28일 대한민국 상해 임시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기본 이념을 제정·공포했습니다. 이 건국 강령은 1944년 제5차 개정 헌법에서 법제화 되었고, 해방 후 1948년 대한민국 제헌 헌법의 기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1943년 일제, 징병 학병제 실시로 조선의 청년을 전쟁 터로 끌고 감


1940년에서 1945년 8월 14일까지 일본 제국은 "대동아공영권"이란 주장을 내 새워 세계 제2차 대전(그들 주장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미국과 일본을 상대로 전쟁했습니다. 


그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 젊은 이들을 징병과 학병 등으로 끌고 가서 전쟁터로 내몰았고, 그 외에도 장년들은 징용령을 내려 전쟁 보조원과 광산, 군수 공장 등의 노무자로 끌고 갔으며, 처녀들은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군인들의 성 노리개로, 그리고 어린 학생들은 소년 항공대로 끌고 가 비행기 조종 교육을 시킨 다음, 폭탄을 싣고, 미국과 영국 함정 굴뚝으로 자폭하게 하는 가미가제 독고다이(神風 特攻隊)로 만들어 죽게 하였습니다.


1952년 평화선 선포에 반발한 일본


평화선(平和線)은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령이 "대한민국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을 공표 함으로서, 대한민국과 주변 국가간의 수역 구분과 자원 및 주권 보호를 위한 경계선으로 공포한 것을 말합니다. 이 선이 선포되자 미 중 일에서는 이승만 라인(Syngman Rhee line李承晩線李承晩ライン)으로 불렀고, 우리 나라에서는 해양 경계선을 획정하여 인접 국가 간의 평화 유지에 그 목적이 있다 하여 "평화선"이라 이름을 부쳤습니다. 


물론 이 경계선에는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로 포함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관계로 이 선언이 나오자 일본은 크게 반대하면서 평화선 우리 해역 안으로 일본 어선을 대량 침투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해경은 물론 해군까지 동원하여 일본과 중국의 불법 조업 어선을 대대적으로 나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 어업 종사자에 대한 사상자까지 나왔습니다. 이 때 저는 대한민국 해군 705 함정을 타고 제주 근해에서 일본 선박 나포하는 임무를 수행한 바 있습니다.


 


지금까지 일본은 한국에 대한 가혹행위에 대하여 공식 사과를 기피하면서, 이를 정당화 하거나, 도리어 착취한 것이 아니고 도우면서 개발해 주었다는 등 허구를 늘어 놓고 있으며, 정신대 문제도 한국 여성들이 돈 벌기 위해 자신 매춘에 참가하였다는 등의 괘변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도의 영유권 주장도 점점 강도 높게 주장하고 교과서의 왜곡 문제도 미화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들의 침략 근성은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일제 식민 치하에서 학교에서 공부할 때, 일제는 외국의 땅을 강탈하여 일본의 영토에 편입 시켰다가,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면서 돌려 주거나, 손 뗀 사례를 들겠습니다.


영토로 표현했다가 환원한 땅


한반도-한국으로, 대만-자유중국으로, 요동 반도-중국으로, 화태-로서아로, 천도열도-로서아로, 


지배하다가 포기한 땅


만주-중국으로, 남양에 있는 많은 땅과 섬(필립핀, 보르네오, 쟈카르타, 싱가폴, 마래 반도, 등)



일본의 침략 근성과, 야만적인 근성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한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상당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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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동안 일본의 만행 사진


(이 자료는 퍼온 것입니다)


게재된 사진을 보시려면 제목을 클릭하십시오. 흑백으로 된 옛날 사진이고 또 해상도가 낮아 보시기 불편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끔찍한 사진들이 너무나 많이 있으니 심장이 약하신 분은 열지 마십시오.


1. 광복 독립군과 독립투사 그리고 양민들이 잔학한 일본군인에게 붙잡혀 집결되어 있다. 일본 군인에 체포 되어 어디론가 이동하기 위해 대기 하고 있는데, 손이 뒤로 묶였고 소리 없이 있다. 1928년부터 일본군의 잔혹하고 악랄한 살육의 강도가 더욱 높아졌다.



2. 독립 투사 또는 양민을 학살 하기 위하여 일본도(日本刀)를 손질하는 일본 군인들



3. 독립 투사를 처형 장소로 데려가기 위해 트럭에 태우고 있다



4. 일본 군인의 칼에 목이 떨어진 독립군



5. 일본 군인에게 끌려 가는 독립군 의병장



6. 무기도 빈약하고 의복도 남루 하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들을 해 치워야 겠다는 의지가 투철한 의병대



7. 총검으로 찔러서 처형하려고 담장 쪽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미 총검 끝에는 선혈이 묻어 있다



8. 체포된 독립군은 결국 처형을 당했다. 칼로 목을 칠 때 넘어 가지 않도록 팔을 줄로 묶어서 뒤에서 당기고 있다.  일본인 칼에 목이 떨어지는 순간이다



9. 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어 비참한 생을 마쳤다. 목을 짤라 철망 위에 올려놓고 입에 담배 까지 물려놓은 비인간적인 행위를 자행



10. 개를 풀어 인간 사냥하는 방법으로 독립군을 잡은 다음 총살로 처형




11. 독립군 간부의 처형 장면이다. 목을 치기  전 뒷편 일본 군인이 웃고 있다



12. 독립군의 목을 작두로 짤라 공중 높이 매달았다. 추운 겨울 날씨로 오랫동안 매달아 경각심을 주기위해 인간이 할 수 없는 최악의 형벌을 자행



13. 누구의 시신인지 구분하지 못하도록 화장한 후 경각심을 주기 위해 온 마을이 유해를 벌였다



14. 손을 뒤로 묶고 물에 수장하는 처형. 이것은 처형이라 말하기 보다 학살이다



15. 일본 군인들은 독립군을 토벌한다면서 민간인까지 사정없이 잡아 죽였다. 떨어진 목을 손에 쥐고 웃는 것은 사람 학살을 장난 삼아 하는 것이다



16. 일제는 포로가 된 민간인과 독립군을 사정없이 목을 잘라 담장 밑에 상품처럼 진열해 두고 있다. 독립군 용사들은 죽어서도 한결같이 한을 품고 있다



17. 양민들을 생매장 하는 것을 보면 일제의 잔혹함이 분명하게 들어 난다. 그들은 숨이 끊어질 때까지 대한독립 만세를 웨치면서 죽었다



18. 일본군 소속 의사 간부가 포로들에게 세균 생체 실험을 하고 있다. 마취도 하지 않고 손을 묶고 해부하고 있으며, 복부에서 창자와 내용물이 나오자 일본인들은 입에 마스크를 하고 보고 있다



19. 일본 군인들이 독림군을 처형하기 전, 목에 수건을 감아놓은 것은 칼이 목을 치기 전 잘린 몸통에서 품어 나오는 피를 막기 위해 수건을 얹어 놓은 것이다



20. 손을 뒤로 묶고 칼로 살육하는 장면



21. 지독한 고문 장면. 하의를 벗기고 혹독한 고문을 통하여 죽음으로 생을 마감케 한 것이다



22. 우리 한국인들에게 벌목 작업 과 혹독한 노역을 시킨 후 처형하였다



23. 총검으로 처형하는 장면이다. 일본인의 입가에는 웃음이 있으니 이는 무엇을 의미 하는가?



24. 총검으로 심장을 찌르는 장면. 천벌을 받을 만행이다



25. 일본도로 목을 자르기 위해 강제로 고개를 잡아서 새우고 있다



26. 잔학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면. 처형하는 순간



27. 칼이 지나간 순간 목이 잘린 상태이다



28. 독립군의 목에 이미 칼이 지나가 목이 잘려진 순간



29. 독립군을 처형한 후 일본 군인 두 병사가 자랑스런 자세로 기념 촬영했다



30. 처형을 기다리고 있는 양민들


31. 생매장된 양민들이 가족들에 의해 시신이 파헤쳐지고 있다



32. 처형을 기다리는 소년 투사.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다



33. 잔악 무도한 일본 군인들이 대량 학살한 뒤의 처참한 광경. 고랑에 즐비한 시체들 중에 뒤에 흰색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과  애국지사의 가족들이 시신을 찾기 위해 살펴 보고 있다



34. 잔혹한 살육 장면. 옷이 벗겨진 여인은 온몸이 상처 투성이다. 목은 짤려졌고 얼굴 모습은 등뒤로 돌려져 있다



35. 강간 후 총으로 치부에 발포한 장면. 엉덩이에 총상 구멍이 선명하게 보인다. 여성의 음부를 일본군이 가려 좔영 하였다. 더 이상 해설이 필요 없는 사진이다



36. 한국 여인들을 찾으러 다니는 일본 군인들. 눈에 띄는 여성은 모두 끌고가 강간한 후 살해했다. 일본군은 여성 보급을 당담하는 사람으로 여러 명의 한국 여성들을 항상 데리고 다녔다



37. 수장된 시신들. 손을 뒤로 묶고 저수지에 수장 시켰다. 살기 위해 허덕이는 사람에게는 긴 막대기로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38. 한곳으로 몰아 넣어 집단으로 무차별 학살 한 후 불 태웠다



39. 1937년, 학살 당한 어린 자식의 시신을 물건 처럼 들고 허탈해 하고 있는 아버지


40. 여성의 옷을 벗기고 마구 살육한 장소. 모래사장에 뒹굴고 있는 시신들. 일본 군인들이 1943년 후퇴하면서 최후 발악을 자행한 흔적이다


41. 1938년이다. 죽이는 방법 시범 실습 현장. 강변에서 총검으로 살육하는 실습을 자행하고 있다. 이런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 동원된 일본 군인들은 이 실습을 관심 깊게 보고 있다


42. 살이 떨리는 공포. 두 사람의 양민이 포로가 되어 일본 군인에게 두 손 모아 애원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으며, 이에 대하여 일본 군인은 무엇인가 소리 치고 있다


43. 산더미 같은 시체. 여성의 하의가 벗겨져 있고 하체에선 선혈이 흘러 나오고 있다


44. 집단 학살. 가슴에는 죄명 아닌 죄명을 달아 놓고 사살했다. 얼굴의 선혈을 보아 총살한 것이다


45. 이성 잃은 일본 군인. 일본 군인은 여성의 음부에 손가락을 넣고 장난하고 있다. 전쟁과 직접 관계 없는 일이다. 일본의 숨은 근성을 엿볼 수 있다


46. 부녀자 강간. 일본 병사의 손을 잡고 애원하는 모습. 이미 젖가슴이 드러나고 반항을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태이다


47. 수장된 시신.  손을 뒤로 묶고 못에 수장했다. 막대기는 올라오지 못하도록 위에서 누르고 있다. 살기 위해 얼마나 바둥 거렸는지 짐작이 간다


48. 갓난 아기의 죽음. 인형처럼 뒹굴고 있는 아이들의 시체. 이성을 상실한 일제


49. 너무나도  억울한 죽음. 잡아온 양민들을 표적 삼아 사격 연습을 하고 있다


50. 부녀자 집단사살. 엄마와 함께 도피 하다가 참변을 당했다. 선혈이 계단을 적시고 있다


51. 집단 사살 현장.  오른쪽 일본 군인이 죽은 시체를 확인하고 있다


52. 부녀자의 절규. 하체를 강압에 의해.... 손에 실반지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단란했던 가정에서 강압적으로 정신대에 끌려간 것으로, 여성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은 한숨 짖고 있는 모습


53. 작두로 처형하기 직전. 곧 목이 작두로 짤려질 것이다


54. 작두로 목을 짜르고 있다. 작두 앞에 잘려진 목이 하나 보인다


55. 작두로 수없이 잘려나간 양민들의 목. 일본군이 장난 삼아 목이 잘린 시체의 손을 자신의 잘린 목부분을 가르키게 해놨다. 저런 끔직한 일은 일본군에겐 장난에 불과했다


56. 1923년 일본 관동대학살. 일본 관동일원에 대지진이 발생하여 10 여만명이 사망 했다. 민심이 극에 달하자 일본 정부는 한국인 폭동설을 조작 유포하여 한국 교포 약 5천명을 몽둥이와 죽창으로 학살하였다


57. 창고에서 독살. 엄청난 시체가 당시 혹독한 진실을 보여 주고 있다


58. 노무자가 노역을 마치면 죽음으로 끝났다. 부릴 때로 부리고 쓸모가 없어지면 장소와 때를 불문하고 이렇게 죽였다


59. 서대문 형무소 뒤 야산 공동 묘지에서 독립 의병 3사람이 총살 당하는 모습. 이 사진은 영국 여행가 비숍 씨가 촬영하여 영국 왕립 박물관에 소장


60. 일본군들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을 말살하기로 작정한 것 같다. 어린아이들까지 죽여 불태웠다. 온갖 수단으로 자행한 행위를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61. 독립 투쟁을 벌이다가 집단 학살 당한 유해들


62. 선량한 양민을 단 칼에 처형하는 지구 상에는 하나 밖에 없는 잔악한 족속


63. 죽음 앞에서도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죽은 독립 투사


64. 참아 볼 수 없는 사진


65. 길거리에서 일본 군인에게 강간 당한 다음 맞아서 내장이 나온 상태


66. 일본군 종군 위안부(정신대)의 거실 내부, 여기에서 일본군은 성욕을 채웠다


67. 근심이 가득한 한국 여성. 일본군 위문품을 만드는 강제 노동을 하다가 일본군의 노리개로 끌려 갔다


68. 성욕을 채우려고 종군 위안부에게 들어 가는 차례를 기다리는 일본 병사들


69. 종군 위안부의 음부를 노출하여 찍은 사진


70.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막사로 실려가는 위안부


71. 위안부의 휴식 시간


72. 일본 병사 근무지로 불려 간 종군 위안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