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참전기

1. 전쟁의 발발과 경과 그리고 참전기


 


가. 한국전쟁은 북한의 남침으로 일어났다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조국을 무력 통일 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소련으로부터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무기를 지원 받아, 남침 준비를 착착 진행 하였다. 이렇게 준비한 막강한 군비를 앞세워 1950년 6월 25일(일요일) 새벽 4시, 38선 전역에서 평화롭게 잠자고 있는 대한민국을 침략해 온 것이 바로 한국 전쟁(또는 6 25 전쟁)이다. 


북한군은 242대의 탱크를 앞세워 중장비로 무장한 7개 사단 규모의 막강한 병력으로 침공해 온 것이다. 그에 대항하는 한국군은 M1 소총과 칼빈 소총으로 경무장만 하고 있었고, 탱크라고는 한대도 없었으니, 어른에게 대항 하겠다고 나서는 어린아이와 같았다고 본다. 그래서 총 한번 제대로 쏘아보지 못하고, 파죽지세로 깨어지면서 남으로 남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나. 전쟁이 일어날 때의 필자


필자는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 고급중학교 5학년에 재학하는 만 17세의 소년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필자는 가족들과 함께 가까운 농촌으로 피난가서 숨어 있었다. 그런데 7월 4일 필자가 살던 지역을 침공해 온 인민군들이 병력을 보충하려고 피난민들이 숨어 있는 촌락들을 수색하여 청년과 학생들을 잡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자 필자의 어머니가 "몇 일 동안만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 하심에 따라 "2-3일 후에 돌아오겠습니다"라고 어머니와 약속한 다음, 7월 4일 오후 1시경, 수중에는 가진 돈 한 푼 없었지만 어머니가 싸 주시는 소두 4되쯤 되는 쌀만 들고, 이 정도의 식량이면 2-3일 동안 지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어머니와 작별한 후 뒷산을 넘어 남으로 떠났는데, 인민군에게 밀리는 국군이 후퇴함에 따라, 필자도 남으로 남으로 피하다가, 죽령, 안동, 경주, 부산을 거쳐 거제도까지 단신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마치 오래 전에 방영된 바 있는 드라마 "삼일의 약속" 과 비슷한 꼴이 되었다.


때로는 수용소에서 때로는 문전걸식 노숙으로,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었다. 드디어 정부 시책에 따라 거제도 농가로 배치되어 들어갔다. 낮에는 농사일을 도와주고 또 쇠꼴을 베고 쇠죽을 끓이면서 주는 밥을 얻어먹는 머슴 아닌 머슴이 되었으니, 남의 집 문 앞에서 걸식하면서 가마니를 깔고 잘 때 보다는 그래도 양반 같은 생활로 하루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낮에는 바쁘게 일을 하느라 정신 없이 시간을 보냈으나, 밤 시간 사랑방에 누워 있노라면 하루가 다르게 들려오는 포성은 점점 가까운 곳에서 크게 들려오고 있으니, 아무리 눈을 부치려고 해도 눈물이 앞을 가리어 눈을 부칠 수가 없었다. 비록 잠을 자려고 누워는 있지만, 머리 속을 찾아오는 걱정들, 나라에 대한 걱정과 부모님 생각,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걱정, 만약 나라가 인민군 수중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나?, 부모님을 만나지 못하면 나는 영영 이 집 머슴이 되지 않을까? 우리 나라의 국력이 왜 이렇게 약할까?, 작은 힘이지만 나라를 지키는데 보태면 도움이 될까? 꼬리에 꼬리를 문 걱정이 머리 속을 스쳐가면서, 매일 밤을 뜬 눈으로 지나게 되었다. 


 


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1950년 8월 초, 필자가 있는 마을에 해군 모병관이 나타나서 피난민과 동리 사람들을 향하여 "청년 소년 학생들이여!, 나라가 위급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여러분이 나서서 나라를 구해 주어야 합니다" 하고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청년 학생들이 입대 지원서를 작성하는 것을 보고, 필자도 입대 지원서를 작성 제출했다. 지원자들 모두는 모병관이 주선하는 해군 징발선편으로 진해 해군 신병교육대로 옮겨간 후, 몇 일 동안 가입대자로 영내에 대기하다가, 1950년 8월 15일 입대 선서와 동시 신병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라. 지상전에서 밀리는 우리 국군


필자가 신병교육을 받기 시작한 8월 15일까지는 전쟁이 일어난지 불과 50일 밖에 되지 않은 짧은 기간이었다. 전력이 약한 우리 국군은 인민군에게 밀리고 밀려, 수도 서울을 내어주고 남으로 남으로 밀리게 되었다. 그러자 우리 정부는 대전, 대구를 거쳐 최남단인 부산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나약한 정부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우리 정부가 통치하는 지역은 경상남도 일부에 한정되는 부끄러운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나라 정치가들은 그 정도까지 위급한 상태에 이르러서야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다급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을 통하여 UN에 구원을 호소하였는데, 그것이 열매를 맺어 UN에서 한국지원 결의안을 채택한 다음, 1950년 9월 UN의 깃발을 단 16개국의 군대가 한국으로 파견되어, 한국군과 함께 낙동강 전선에서 적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마. 신병교육 기간의 단축


그 당시 해군의 정상적인 신병교육은 3개월이었다. 그렇지만 국가의 흥망 여부가 결정될 위기에 처해 있었던 관계로, 육전술(陸戰術)만 교육하여 전선에 투입하려고, 신병교육 기간을 1개월로 단축하게 되었다. 9월 중순, 함께 교육을 받은 신병들이 매일 같이 군용 트럭에 실려 어디로 배속되어 가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동기생들은 제주도에서 교육 받은 해병대 3기생들과 함께 통영(統營)상륙, 여수(麗水)상륙, 인천(仁川)상륙, 원산(元山)상륙 등 모든 상륙작전에 투입되었던 것을 필자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동료 전우들이 유명을 달리한 것도 알게 되었으니, 그 때 입대한 우리들은 한 번 쓰고 버리는 소모품과 같은 병사로 양성되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필자는 신병 교육을 마친 다음 신병교육대 본부에서 후배 군인 양성 요원으로 잠시 근무하다가, 해군통신학교에서 무선 통신술을 교육 받은 후, 동해안 전방에 있는 해군부대로 배속되어 거기에서 작전 통신에 종사하게 되었다.


 


바. 전쟁 초기의 우리 해군


   (1) 어린아이와 같을 우리 해군


정부가 수립될 당시 해군의 병력은 불과 3천명 정도였고, 또 보유하고 있는 함정도 일본이 사용하다가 버리고 간 낡은 소형 함정 몇 척뿐이었으며, 거기에는 위력 있는 함포는 달려 있지 않았다. 1950년 4월 해군 장병들이 출연한 기금과, 뜻 있는 분들이 희사한 성금으로,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처음으로 도입된 것이 3인치 포를 장착한 전투함 백두산함(PC 701)을 실전 배치하였던 상태였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 해군은 대소 전투함정 28척과 해병대 병력까지 포함하여 겨우 6,950명이었다. 이에 반하여 북한은 그 때 벌써 함정 80척, 그리고 16,2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남북한의 해군의 군사력은 어린아이와 어른과 같은 꼴이었다.


   (2) 전쟁초기 있었던 해군의 활약


전쟁이 발발한 직후, 서해 옹진 반도에 고립되어 있는 우리 육군 병력을 성공적으로 철수 시켰고, 또 대통령의 해상 호송과 식량 이송, 참전국의 활동 통로를 확보하는 등의 작전을 우리 해군이 수행했다.


   (3) 대한 해협에서 일어난 해전 (1950년 6월 25일)


전쟁초기 지상군이 북한군에게 유린당한 것처럼, 해군도 어려운 가운데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일어나던 날, 우리나라 후방을 교란시키기 위해 북한군은 게릴라 병력 600 여명을 싣고 우리 나라 남해안에 상륙 시키려고 내려오는 것을 발견하고, 우리 해군 PC 701함이 대한해협에서 교전 끝에 북한 함정(1천 톤급)을 격침시킴으로써 후방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만약 거기에서 적군의 상륙을 막지 못했다면, 후방 교란으로 인하여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을 것이다.


   (4) 강릉 옥계 지구에서 벌어진 전투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한 같은 시각인 새벽 4시, 강원도 명주군 옥계 해안과 정동진 등지에는 북한군 549 육전대 소속 1,800 여명, 그리고 삼척, 임원 등지에는 766 유격대 소속 1,300 여명이 옥계 지역에 상륙한 후였다. 그와 같은 정보를 입수한 해군 묵호경비부에서는 새벽 5시30분 경비부 요원으로 편성된 전투부대를 현지로 긴급 출동 시켜, 선제공격을 가함으로 옥계 남쪽 도직리에서 적 33명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긴급 출동한 해군 함정 509정은 같은 날 새벽 7시20분 옥계 근해에서 적 전투함(PC급)과 교전하여 적함을 격퇴시켰으며, 같은 날 오후 3시에는 옥계 북방 해안에 상륙 중인 적을 발견하여 포격을 가함으로 적의 상륙을 저지하였다. 그리고 적 상륙정 1척을 격파하고 발동선 1척을 나포하였다. 


북한군이 목적한 바는 강릉지구에 주둔하고 있는 한국 8사단을 고립시키려는 목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해안을 통하여 남진하려는 적 지상군의 남진속도를 크게 지연시킬 수 있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사. 인천 상륙 작전


   (1) 인천 상륙작전 수행을 뒤한 기반 조성 (1950년 8월 18일 - 9월 14일)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 시키기 위해서는 인천 항 근처에 있는 여러 도서들을 장악하는 것이 필수적인 사항이었다. 그래서 우리 해군은 인천 항 부근에 있는 섬들을 장악하기 위해 701. 702. 704. 513. 301. 307. 309. 310. 313 등의 여러 함정을 출동 시켜, 섬을 점령하고 있는 적군에 사격을 가하면서, 이들 함정에서 차출한 병력으로 육전중대를 편성하여 부근 도서들을 모두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1950년 8월 18일에는 덕적도를, 8월 20일에는 영흥도를 각각 탈환하였다. 그런데 8월 23일 함정 요원으로 편성된 육전중대 요원들이, 인천 상륙작전에 합세하기 위해, 소속 함정으로 복귀하고, 해군 이동기지 육전대 요원 일부만이 현지 도서 청년 의용대의 협조를 받아 치안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9월 14일 밤 선재도로부터 북괴군 1개 대대가 우리가 탈환한 섬으로 기습 상륙해 옴으로, 그들과 치열한 전투 끝에 적군을 모두 격퇴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처럼 해병대가 아닌 해군 함정 요원들이 단독 상륙작전을 통해 적 치하에 있던 영흥도를 수복함으로써, 8월 24일 상륙한 한국 해군 첩보팀과, 9월 1일 상륙한 미 극동군 첩보팀 요원들이 영흥도를 거점으로 삼고, 서로 유기적인 협조를 이룰 수 있게 함으로서,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제공하였다.


   (2) 인천 상륙작전 성공


해군첩보대의 활약으로 인천 상륙작전의 기반 조성이 성숙됨에 따라, UN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1950년 9월 15일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을 실행하게 되었다. "크로마이트 작전"이라 명명된 이 작전에 동원된 함정은 7개국 261척(미국 226, 한국15, 영국 12, 캐나다 3, 호주 2, 뉴질랜드 2, 프랑스 1)이었고, 지상군의 총병력은 약 75,000명이었다.


1950년 9월 13일 모든 함정들이 인천 앞바다에 집결되었을 때, 우리 해군 함정들은 UN군 함정들과 긴밀하게 협조하면서 함께 인천해역에 대한 소해(掃海) 작전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UN 군 함정들이 적 잠수함과 기뢰로부터 보호될 수 있도록 인천 수로를 봉쇄하는데 주력했다.


해상의 소해가 완료됨에 따라 우리 해군의 702함과 703함은 월미도에 접근하여 먼저 적 포대를 격파하였고, UN 군 함정들과 영종도 부근에서, 48시간 동안 상륙한 병력을 엄호하기 위해 해안을 향해 계속 함포사격을 가하였으며, 또 UN 군 함재기는 인천에 남아 있는 적군 병력을 폭격하여 성공적인 상륙을 지원하는데 이바지 했다.


9월 15일 새벽 미 해병 제5연대 제3대대가 선발대로 20척의 상륙 주정에 나누어 타고 월미도 녹색해안에 상륙한 다음, 오후부터는 400 여척의 상륙주정이 4회에 걸친 파상공격으로, 미 해병 제1사단과 한국 해병대가 적색해안과 청색해안으로 모두 상륙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9월 18일에는 미 제7보병사단이 후속부대로 상륙하였고, 9월 24일에는 한국 육군 제17연대가 상륙하였다. 이 작전은 세계 제2차 대전 때의 "노르만디" 상륙작전을 방불케 하는 작전이었다. 그 규모는 타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였고, 또 불리한 여건(수로의 복잡, 조석간만의 차이, 상륙 해안의 지리적 장애물 등) 하에서 과감하게 수행된 상륙작전을 성공 시킴으로써, 공산치하에 들어갔던 수도 서울을 수복할 수 있었고, 또 낙동강 전선에 집결되어 있는 북괴군을 독 안의 가둔 쥐와 같이 만들어, 전세를 역전시킨 다음,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하는, 역사적인 전환점을 만들었다는데 전략적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3) 북한 항구로부터 병력 철수작전 (1950년 12월 5일 - 12월 24일)


지상에서는 국군이 압록강 연안인 초산까지 진격하였고, 유엔군은 북만 국경인 혜산진까지 진격하는 동안, 우리 해군은 북한에 전진기지를 설치하고 북한 해역의 경비와 봉쇄작전을 강화하였다. 그런데 1950. 10월 하순 중공군의 대거 침입으로, 지상군은 비통한 가운데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우리 해군과 UN 해군은 적의 침투로를 함포사격으로 차단하면서, 철수를 위하여 동서 해안으로 집결하는 지상군과 군수물자, 그리고 피난민 철수 작전에 우리 해군도 동참하였다.


원산(50, 12. 5-8)에서 철수하려는 해군(원산에 진주하고 있던 전진 기지 요원)과, 한국으로 가려는 피난민을 LST 함정편으로 철수시켰고, 1950.12.12에는 수도사단 18연대 병력을 성진항에서 철수시켰다. 그리고 흥남에서는 유엔 해군과 함께 가장 대규모인 흥남 철수작전(1950. 12. 12-24)을 펼쳐 도합 10만 5천명의 지상군과, 10만 여명의 피난민, 그리고 17,500 대의 차량, 35만 톤에 달하는 군수 물자를 철수시켰다.


 


아. 원산항만 봉쇄작전


한국전쟁 발발 초기 제해권을 장악한 UN군과 우리 해군은 힘을 모아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목적으로 1951년 2월 14일부터 휴전 될 때까지 원산항 봉쇄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 작전은 한국전쟁 기간 중에 실시한 봉쇄작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전으로, 전략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한 원산항만 봉쇄작전이라고 부르고 있다. UN 해군(한국 해군 포함)은 소해정(掃海艇)과, 전투함정이 혼합된 전대를 구성하여, 원산항을 계속 봉쇄하면서, 점점 그 작전구역을 흥남(興南)과 성진(城津)항까지 넓혀 나갔다.


북한군은 UN군이 원산항만 봉쇄작전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은 원산지역에 병력(보병 3개 사단과 포병 2개 여단)을 고정 배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그들의 지상군 병력을 그만큼 부족 현상을 면할 길 없게 되었다. 그리고 제해권을 빼앗긴 북한군은 UN 해군(한국 해군 포함)의 봉쇄작전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계속 기뢰 방류와 우리 함정을 향해 해안포 공격으로 맞서고 있었다.


   (1) 북한군이 설치한 기뢰 제거


한국군은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는 많은 군함을 가지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동해는 미국 함정들이, 서해는 영국과 카나다 함정이 작전의 중심이 되어, 한국군과 함께 초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서남해에 대한 제해권 모두를 한국 쪽이 장악하고 있었다.


북한은 막강한 UN군 해군의 기동력과 화력에 밀려 적극적인 해상 작전을 포기한 상태로 있었지만, 한국군과 UN군이 북한 땅을 비워주고 후퇴하자, 북한은 원산, 흥남, 진남포 등지로 한국군과 UN군이 다시 상륙하지 못하도록 하는 거부작전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해안 고지대나 동굴, 계곡 같은 곳에는 중공제 장사포를 배치하였고, 항구와 바다에는 소련제 기뢰를 부설하였다.


유엔군과 우리 해군은 이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대비하고는 있었는데, 북한 땅과 인접한 부라지보스토크에 기지를 둔 소련 잠수함 부대가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그 위험도는 더욱 높아졌다. 소련 함정은 미군 함정과는 달리 모든 함정에 기뢰를 부설할 수 있는 장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 해군은 소련의 기술 제휴를 받아 짧은 기간 안에 많은 기뢰를 쉽게 부설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1.4 후퇴 후에 우리 해군에게 부여된 중대 임무는 우리 측 함정들이 동서남해를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통행로를 확보하는 것이기에 대대적인 소해 작전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 선박의 통행을 봉쇄 차단하는 일이었다.


   (2) 북한군이 설치한 기뢰로 UN군 함정들이 당한 피해


전쟁 직후부터 1950년 10월 4일까지 북한군은 소련인 기술자의 지도 하에, 거이 매일 밤 수십 척의 조그마한 배를 이용하여 동서 양쪽 바다에 기뢰를 부설하였던 관계로, 우리 해군은 그 것을 계속 제거하는 작전을 수행했었다.


UN 해군 함정의 피해도 많이 있었다. 1950년 10월 18일 소해 작전을 수행하던 우리 해군 YMS 516함이 원산 영흥만에서 적이 부설한 기뢰에 접촉되어 폭파되었고, 1951년 2월 2일에는 동해 양양 앞 바다에서 소해 작전을 수행하던 미 해군 패트리지함이 기뢰에 접촉되어 침몰함으로써 장교 2명과 사병 6명이 전사하였으며, 1952년 6월 12일에는 미 구축함 워크호가 흥남 근해에서 기뢰에 부딪쳐 26명이 전사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1952년 9월 16일에는 원산 동쪽 80마일 해역에서 미 구축함 바톤호가 기뢰에 접촉하여 5명이 실종되는 일이 일어났다. 우리 해군도 306정, 302정, 502정, 61함 등은 진남포 앞 바다에서 적의 기뢰 부설 활동을 탐지하다가 기뢰에 접촉되는 일이 있었다.


   (3) 애석하게 704함 침몰


원상항 봉쇄작전에 참전한 우리 측 함정도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는데, 그 중 한 가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1951년 12월 하순 원산 해역에서 703함과 임무 교대를 마친 704함은 원산 근해를 초계하고 있었다. 704함을 비롯한 우리 해군 함정, 그리고 UN 함정들은 원산 시내와 낭성리에 있는 적으로부터 박격포와 야포의 공격을, 그리고 갈마반도와 호도반도로부터는 직사포 등의 공격을 자주 받았었다. 적탄이 UN 군 함정과 704함 주변에 떨어지자 모든 함정들은 속력을 높려 안전해역으로 이동하는 등의 작전을 시행하곤 했다. 그러나 704함은 단독으로 계속 적진을 향해 대응 사격을 가하였다. 적탄이 함정 바로 옆에 떨어져 함정보다 더 높은 물기둥이 치솟는 것을 보면서도 겁내지 않고 적진을 맹타했다.


1951년 12월 26일, 이날 따라 도저히 함정이 항해할 수 없을 정도로 폭설과 풍랑이 심한 날씨였다. 그러나 704함은 북한군이 원산 서북방에 있는 성남리에 기뢰와 지뢰를 숨겨두고서는, 야간이 되면 그것을 원산항 부근으로 운반하여 바다에 떠내려 보낸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래서 704함은 결사적인 각오로 이를 봉쇄하기 위해 원산 육지 가까운 해역까지 접근하여, 기뢰를 더 부설할 수 없도록 맹타를 가한 다음 빠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는 최악의 기상상태에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이기 때문에 기뢰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여 기뢰에 접촉되고 말았다.


한 밤중에 큰 폭음을 들은 인근 도서 해병들은 날이 밝은 후 전파된 704함의 함체 잔해와, 시체들이 바다 위에 떠있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시신 수습에 나섰는데, 어떤 장병은 영하 20도 아래의 추운 날씨로, 인근에 있는 돌섬까지 헤엄쳐 올라가서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죽은 자도 있었다. 그리하여 전 승조원 58명이 애함과 함께 전사한 애석한 일이 있었다.


 


    자. 필자가 승조한 705함의 작전


   (1) 705함은?


필자는 1951년, 순환 보직 원칙에 따라 제1함대 705함 승조 발령이 내려졌다. 이 함정은 년전 서해에서 북한군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한 천안함 보다는 그 규모가 조금 작은 전투함으로 당시 우리 해군의 주력함정으로 초계함 또는 포함(哨戒艦 또는 砲艦))이라고 불렀다. 함정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승조원 수도 그에 비해 적다. 그렇지만 갖추고 있는 화력이 막강 함으로 전투 능력은 대단 했었다. 그리고 함체는 작은데다 운항 속도가 높음으로, 풍랑이 심할 때 당하는 함정의 흔들림은 롤링 48도에, 빗징 33도까지 이르렀음으로, 물속을 뚫고 나가는 모습은 꼭 잠수함과 같았다. 간혹 멀미를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먹은 음식이 소화된 후 창자로 내려갔다가 다시 X물이 되어 입으로 올라온다면서 죽는다고 소리 질렀다.


   (2) 일반적인 근무 상황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매월(月) 한 차례, 진해 모항을 출항하여 원산, 흥남, 성진, 북청, 단천, 마양도 근해로 올라가서 20일 가까이, 최전방 해상에서 해안 봉쇄작전 임무를 수행하였다. 교대 함정(주로 706함)이 올라오면 전력을 재충전하기 위해 진해 모항으로 기항하여 10여 일 동안 휴식한 후에는 다시 작전해역으로 출항하는 것이 매월 반복되곤 했다. 


일단 함정이 닻을 올리고 출항하면 그 때부터 모든 승조원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주특기에 따라 3개조로 나뉘어 교대 근무를 해야 한다. 주간 4시간, 야간 4시간씩, 각자의 주특기에 맞는 분야에서 근무하다가, 어떠한 특수상황이 벌어지면, 그 상황을 처리하기 위한 지정된 자리로 배치되도록 편성되어 있다. 당시는 평시가 아닌 전시이기 때문에, 언제 돌발적인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바로 전투배치에 임할 수 있도록 항상 대기하면서 함내(艦內) 생활을 계속하였다.


   (3) 전투 배치 시의 상황


돌발적인 상황은 주로 야간에 발생함으로, 작전해역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교대 함정이 올라와서 임무 교대를 마치고, 모항을 향해 출발하기까지의 밤 시간은, 항상 뜬눈으로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 생활이었다. 그러므로 매월 20일 가까운 출동 기간에는 한결 같이 매일 전문 분야에서 8시간, 작전 수행을 위한 특수분야에서 근무해야 함으로 고달픈 생활의 연속이었다. 당시 저는 함정의 신경과 같은 역할을 하는 무선통신사로 있었다. 전투배치 등의 특수상황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통신실에서 2인 1조가 되어 3교대 근무를 했었다. 그렇지만 전투 배치 등의 특수상황이 벌어지면 주 특기 분야에서 근무하는 3분의 1은 고참에게 돌아가고, 3분의 2의 병력은 주특기가 아닌 다른 전술 분야로 배치되도록 편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처음에는 3인치 포 탄약수로 배치되었다가 나중에는 함교에서 내리를 함장의 명령을 장포장(掌砲長)에게 전달하는 전화수의 임무를 수행했었다.


   (4) 705함의 주된 작전


필자가 승조한 705함이 최전방 해상에서 수행한 주된 작전은 원산항만 봉쇄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원산항만을 봉쇄하여 북한군 선박의 출입을 막고, 북한군이 흘러 보낸 기뢰를 제거하고, 또 원산 항만에 있는 작은 도서에 주둔하고 있는 해병 첩보부대를 보호하면서, 북한군의 많은 병력을 원산 지구에 묶어 두자는 것임으로 항상 기동성 있게 움직였다.


   (5) 작전 중의 기뢰 제거


물론 기뢰를 제거하는 작업은 소해정 편대가 주로 수행하였다. 그렇지만 전투함인 705함이 초계하다 보면 자주 레이더실이나 소나실 또는 견시(見視)로부터 함체에 위해를 주는 기뢰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온다. 발견한 기뢰는 파도에 의하여 물위로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하기 때문에 눈으로 보기에는 작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저렇게 작은 것이 무슨 위력이 있겠는가 할 정도로 생각되지만, 그것을 함포로 사격하여 폭파 시켜보면 그 위력은 매우 놀라웠다. 50-60m 해저로부터 흙탕물이 솟아올랐고, 또 십 여 미터의 물기둥이 목격되었으며,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명태가 물위에 떠오르는 것을 자주 목격하였다.


   (6) 북한의 군사 시설 포격


원산항만 봉쇄작전을 수행하고 있을 때 특별한 정보가 들어오면, 북한 군사시설에 대한 포격을 시행한다. 군사 시설 포격에 대한 한 예를 들겠다. 어느 날 필자가 탄 함정은 원산시내 모 지점에 중요한 군사시설을 폭파하라는 명령에 따라, 전투태세를 갖추고 조심조심 해안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갑자기 북한 땅에서 불이 번쩍하더니 포탄이 우리 함정 옆 바다 물위에 떨어져 터지는 것이었다. 우리 함정은 포탄까지 장전한 상태로 항진하고 있었기에, 즉시 확인된 목표물을 향해 우리 함정의 주포가 불을 내뿜었다. 날아간 포탄은 한방에 시설물을 날려버렸고, 순식간에 그 일대는 불바다가 되었다. 그러자 인민군 수 십명이 나와서 불을 끄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다시 우리 함정에서는 20mm와 40mm 기관포로 사격을 가하였더니, 모두 대피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함정은 육상포의 사격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먼 바다쪽으로 빠져 나왔다. 그 외에도 북한 해안포대를 파괴하기 위한 공격은 거이 매일 실시했었다.


  (7) 첩보요원을 북한 땅으로


전쟁은 적을 알고 나를 알 때 승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적에 대한 정확한 첩보를 입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원산 앞바다 도서에 주둔하고 있는 첩보요원을 북한 땅에 침투시켰다가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작전 중의 하나였다. 먼저 우리 함정에 첩보대 요원 몇 사람과 자그마한 목선 1척을 실은 다음, 목표 지점인 함경남도 단천 근방 해안으로 접근한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 목선을 내려 거기에 첩보 요원들을 태워 육지로 들여보낸다.


그런 다음 우리 함정은 북한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북쪽이나 남쪽 방향으로 수 마일 이동하여, 이미 수집되어 있는 목표물에 함포 사격을 가하는 작전을 수행한다. 그렇게 하는 사이 우리 함정에서 내려준 목선에 올라탄 첩보 요원들은 조심스럽게 해안으로 이동해 들어간다. 수일이 지난 후 우리 함정은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로 옮겨가서 그들의 귀환을 맞는다. 그들이 탄 배는 레이다에 잡히지 않도록 목선을 이용하고 있음으로, 그들을 맞을 때 우리는 주도 면밀하게 살펴, 한 사람의 희생자도 발생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만 했다. 완전 전투 태세를 갖춘 상태에서 해상을 살피다가 이상한 목선이 나타나면, 금방 사격을 가할 수 있는 상태로 그들의 접근을 지켜본다. 가까이 다가온 그들은 인민군 복장에, 인민군 계급장을 단 보기에는 틀림없는 인민군들이다. 그들의 신분을 암호로 확인한 다음, 우리 함정에 승선시킨 후, 그들이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새로운 작전을 짠다.


   (8) 군수물자 수송 열차 파괴


함남 북청 근처에는 해안선을 따라 지나가는 철길이 있다. 당시 북한은 함경도 쪽에서 생산된 군수물자를 매일 밤 두 차례 열차 편으로 남쪽 전선으로 수송해 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수송 열차를 파괴하는 작전을 거이 매일 밤 수행했다. 먼저 미국 함정으로부터 장교 한 사람이 우리 함정으로 옮겨 탄 후, 밤 11시쯤부터 전투 태세를 갖춘 상태로 열차가 지나가는 해안선 가까운 곳으로 접근해 들어가서, 엔진을 멈춘 상태로 기다린다.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내려가는 열차가 그 지역에 도착은 했지만, 우리 함정이 지키고 있는 것을 그들도 알기 때문에 내려가지 못하고, 기관차만 굴 밖으로 내밀고, 2-3m 정도, 전진하였다간 후퇴하기를 반복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음으로, 열차가 내뿜는 석탄 타는 냄새가 우리 함정에서도 맡을 수 있었다.


드디어 우리 함정은 엔진을 가동하고, 해안으로부터 먼 바다 쪽으로 빠져나가면서 조명탄을 발사한다. 조명탄이 터지는 순간 온 세상은 대낮 같이 밝아지고, 우리 함정에 타고 있는 미군 장교가 무선전화로 연락하는 정보에 따라 바다 한 가운데 있던 미 구축함은 불꽃을 내뿜는다. 그와 동시 북한 땅에서는 우리 함정을 향하여 포탄이 날아오고, 열차는 전속력으로 남진해 가기 시작 함으로, UN군과 우리 함정의 집중 포격으로 기차는 전복되고 만다. 


그들은 야간작업으로 파괴된 철로를 수리하고 폭파 전복된 기차를 치운 후, 다시 군수물자 수송을 재개하기 때문에, 우리 함정은 가까운 곳에서 해안의 동태를 살피다가 새벽녘 다시 같은 작전을 전개했다.


   (9) 북한 비행기와의 대치


주간 어느 날, 마양도 근처 해상이었다. 당직 근무자를 제외한 전 승조원들은 야간 작전을 대비하기 위해 쉬고 있었는데, 마양도 쪽으로부터 북한 비행기 2대가 날아오고 있었다. 인근에 있던 미 함정을 비롯한 모든 함정들이 전투 태세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었다. 남북 모두 오늘과 같은 신형 무기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약 40분 동안 서로 틈만 노리는 것이었다. 


비행기가 하늘에서 100m를 날아가더라도  함정은 포각(砲角) 1-2도만 돌리면 따라잡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격권 안에 비행기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비행기 쪽에서는 함정의 폭은 좁으나 길이가 길기 때문에, 비행기는 함정의 길이 방향으로 공격을 가하려고 서로 틈만 노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곳 해상에는 여러 척의 군함들이 있었기 때문에 북한 비행기가 위협을 느낀 나머지 돌아가고 말았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대소 사건들이 있었지만, 반세기 이상의 세월이 흘러 망각의 세계로 깊이 빠져 들어간 관계로 더 이상 논술하기가 어려워 작전에 관한 내용은 생략하려고 한다.


    (10) 그 외의 있었던 일들


전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던 사건은 아니지만 태풍으로 인한 조난으로 주야 3일 동안 식음을 취하지 못하고 함정 안으로 들어오는 바닷물을 퍼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을 거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작전해역은 적전이기 때문에 항상 철저하게 등화관제를 하고 항해했었다. 불행하게도 칠흑같이 어두운 밤, 우리 함정은 레이다가 고장 났다. 그래서 무선통신과 쟈이로 콤파스 만을 의지하여 항해 하면서 육안 경비를 수행하고 있었다. 우리 함정의 레이다 고장을 미리 미국 함정에 통보했기에 큰 화는 면할 수 있었다. 미국 순양함 쪽에서 그들의 래이다 상에 아주 작은 함정 하나가 겁도 없이 자기네 함정 쪽을 향하여 다가오는 것을 보고, 눈 먼 한국 함정이라는 것을 직감하고서는, 만약 한국 함정이 아니고 적함일 경우를 대비하여 완전 전투 태세를 갖추고 우리 함정의 동태를 살피면서 우리 함정 쪽으로 항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레이더가 고장 난 우리 함정은 순양함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순양함 쪽으로 진행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견시의 눈에 검은 큰 물체가 우리 함정 앞에 접근하는 것을 보고, 충돌을 피하기 위해, 키를 크게 좌로 꺾도록 조처했었다. 그래서 정면 충돌만을 피할 수 있었으나, 우리 함정 함수(艦首) 우현(右舷) 쪽이 크게 파열되는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인명 피해만은 없었던 것이 천만 다행이라 하겠다.


 


차. 한국전쟁의 휴전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미소 양국은 협상을 계속하여, 1953년 7월 27일 휴전 조약이 체결되었다.


휴전 당일 필자는 705함을 타고 동해 거진 앞 바다에 있는 알섬(卵島)을 초계하고 있었다. 휴전 조약은 아침 10시에 조인이 되었고, 밤 10시에 전쟁이 종료되도록 약정해 있었다. 그래서 휴전 당일 해가 질 때까지 남북은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지상, 해상, 공중 모든 면에서 종일 치열한 전투를 계속 벌리고 있었다.


우리 함정도 완벽하게 등화관제를 한 상태에서 알섬 주위를 뱅뱅 돌면서 야간 초계에 임하고 있었다. 밤 10시가 임박한 시점에 라디오를 틀어놓고 10시 시보(時報)를 기다렸다. 10시를 알리는 시보가 울리자 마자, 창문을 활짝 열고 밖을 내다보았더니, 모든 함정과 지상에 있는 건물들이 일제히 등화관제를 해제한 까닭에, 바다와 육지가 순식간에 적색등, 녹색등, 백색등으로 울긋불긋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 때 필자는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생각 속에서 기쁨의 눈물이 나의 뺨을 적시는 순간을 맞이 했었다.


 


카. 필자의 제대


해군에서는 전력을 강화하기 위한 계획에 따라 계속 함정을 도입하고 있었던 관계로, 인력 수급에 차질이 없도록 오랫동안 제대를 유보하고 있었다. 그래서 휴전이 되었지만 제대하지 못하고 계속 휴전선 인근해역으로 출전하여 해상 경비를 하였다. 


1957년 6월 5일 필자가 소망하던 제대 특명을 받고, 한미 연합 훈련을 마친 다음인 6월 20일  6년 10개월의 군인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귀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필자는 6년 10개월이라는 긴 세월을 나라를 지키는데 모든 것을 다 받혔던 것이다.


2. 참전자에 대하여


가. 국가가 참전자에 대하여 소홀했던 시절


휴전이 된 후인 1954년 봄, 필자는 함정 수리 관계로 약 4개월 동안 일본 요코스카(橫須賀)에 머문 적이 있었다. 하루는 도교(東京) 구경을 갔다가 우에노 고엔(上野公園)에 갔는데, 공원 중심지 복잡한 곳에 목발을 짚은 사람과, 검은 안경을 쓰고 지팡이를 든 사람이 서서, 소리를 고래 고래 지르는 것을 필자는 보았다. 그들은 세계 제2차 대전에 출전했다가, 다리를 잃은 자와 시력을 잃은 사람이었다. 그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어보니 "그 때 나는 덴노헤이가(天皇陛下)에게 충성한다고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내가 바보짓을 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외치는 이유는 나라가 자신들에게 만족스러운 대책이 없기 때문이었지요.


전쟁 후 한국에서는 어떠했을까? 한국전쟁이 휴전 된 후, 상이군인에 대한 대책이 너무나 소홀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필자가 1963년 00우체국 서무계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이다. 매일같이 상이군인 몇 사람이 우체국을 찾아와서 "돈 달라"고 떼를 쓰면서, 쇠로 만든 의수와 의족으로 책상을 치기도 하고 차면서, 돈 줄때까지 책상 위에 걸터앉기도 하였고, 또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우체국의 재정담당 책임자인 필자로서는 하는 수 없이 그들에게 약간의 현금 봉투를 건네 주면서 설득해서 돌려보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만약 25세에 부상을 입은 군인이 85세까지 살다가 죽는다면, 60년이라는 긴 세월을 눈물과 어려움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도 많던 상이군인들이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오늘 날 우리들의 눈 앞에는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부상 당한 상이군인들이 거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 민족이 한국 땅에서 편히 살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요즈음 정치에 입문하려는 사람의 입에서 나라를 수호하고 있는 해군을 해적이라고 표현하는 말을 들었을 때, 사선을 넘나들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참전한 한 사람으로서 섭섭한 마음 금할 바 없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바이다. 만약 그 사람의 생각이 진정 그렇다면, 필자도 일본 우에노 공원에서 외치던 일본 상이군인들 처럼 "나도 바보 짓을 했다고" 외치고 싶은 심정임을 고백한다.


 


나. 전쟁으로 인한 군인의 피해


   (1전몰 군인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 하드라도 나라만 구할 수 있다면, 이와 같은 숭고한 정신을 가지고 앞날이 창창한 꽃 같은 젊은이가 귀중한 생명을 초개같이 버리고 장렬하게 전사한 군인들이 많이 있었다. 전사자 중에는 지명도 모르는 곳에서, 또는 적군에게 포위되어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면서 헤매다가 굶어 죽거나 사살 당한 자도 있고, 또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 있다가 쓸쓸히 혼자 유명을 달리한 자도 있으며, 애함과 함께 깊은 바다 물 속으로 가라앉거나, 비행기와 함께 장렬하게 산화한 자, 오늘날까지 그 시체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2) 상이 군인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군인들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부상을 당하여 불편한 몸으로 한 평생을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필자 역시 전쟁이 치열할 때, 705함 주포에 탄약을 공급하는 탄약수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함포에서 나오는 굉음으로 고막을 상실하여, 평생(지금까지 근 60년)을 난청의 어려움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묵호경비부 통신대에서 근무할 때는, 통신용 비상 발전기를 수리하다가 왼손 엄지손가락이 회전하는 발전기에 빨려 들어가 뼈가 부서지기도 했다. 또 식수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함정 근무를 오랫동안 하면서 위장 질환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필자의 이와 같은 부상은 다른 전상자에 비해 보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한 것임으로, 필자가 부상 당한 정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볍게 당한 것임을 생각하고 감사할 뿐이다.


   (3) 상이군인에 대한 실화 한 토막


상이 군인에 대한 드라마와 같은 실화를 하나를 소개하겠다. 필자와 학교 동창인 신00씨는 한국전쟁 터에서 큰 부상을 입고, 평생을 고생하다가 하늘나라로 먼저 갔다. 그는 옛날 섬기던 영월교회에서 필자와 같이 기독학생회를 이끌던 친구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육군으로, 필자는 해군으로 각각 입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헤어진 후, 오랫동안 서로의 생사를 모르는 가운데서 약 20년 정도 지냈다. 1970년대 초, 필자가 섬기던 교회에서, 상이군인들을 접대하는 특별한 모임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우연히 그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40대 초반의 목사님을 뵙게 되었는데, 필자는 그의 이름을 보고 옛 친구인 것을 바로 알고 무척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최전방에서 날아오는 박격포탄이 눈앞에서 터지면서 미남형이던 그의 얼굴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시력까지 잃게 되었다. 그는 몇 번이나 자살하려 했다고 말하는 것을 필자는 들었다. 그러나 그의 배후에는 믿음 좋은 부인이 있었기에, 한 맺힌 고난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고 한다. 목사가 되기 전 청년시절에는 서울 성북지역 상이군경 단체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여러 명의 상이 군인들이 함께 몰려나가, 중요 기관이나 회사에서, 공갈과 협박을 가하여 돈을 뜯은 다음,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런 생활을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그의 성품이 점점 험악하게 변하는 것을 본 부인이, 목사가 될 것을 권하고 또 권하고 거듭 거듭 권하여 드디어 신학 공부를 거쳐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목사가 된 그는 서울 우이동에 있는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1987년 경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한 것을, 몇 해 후 필자가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알게 되었다.


신 목사는 귀한 가문의 독자로 출생하였는데, 일찍이 부친을 잃어버리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그가 전쟁터에서 육군상사의 계급장을 달고 싸우고 있을 때, 믿음이 좋은 순박한 농촌 처녀인 그의 부인은, 총각의 사진만 보고 약혼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 처녀는 약혼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약혼한 남자가 전쟁터에서 중상을 입어 얼굴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손도 불구가 되었으며, 실명까지 당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자  처녀쪽 주위 사람들은 파혼할 것을 여러 차례 권하였으나, 처녀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연을 내가 어찌 피할 수 있습니까?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을 내가 대신 봐주겠고, 그가 만지고 들지 못하는 것은 내가 대신 만져주고 또 들어주겠다"면서 결혼을 했다고 한다. 결혼 후 그녀는 방황하는 남편을 목회자의 길로 인도하였고, 또 목회하는 동안에는 그의 눈이 되고 손발이 되어, 성공적인 목회자가 될 수 있도록 내조했다고 한다.


(4) 피해를 많이 입은 연령층


현재 생존하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필자 보다 조금 전에 태어난 사람으로부터 필자와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이 가장 어렵고 험악한 세상에 태어났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에는 조국이 아닌 침략국 일본을 위하여 전쟁터로 끌려갔었고, 또 해방을 맞았을 때는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이 없어 배를 주리며 헐벗은 몸으로, 그리고 그 후에는 북한의 침략으로 일어난 한국 전쟁으로 국가를 지키기 위해 다시 전쟁터로 나갔었다. 그 후에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을 재건하느라 전심전력을 다했으니, 자신의 공부하는 것도 접어야 했고,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버려야 하는 등, 고난의 연속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것을 다른 면에서 생각해 보면, 가장 어려운 역경을 극복한 다음, 지금에 이르러 가장 발달한 현대 문명 혜택을 누리고 있으니, 가장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들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3. 참전유공자로 지정 받다


일본에서 상이 군인들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필자는 생각하기를, 당시 우리 나라는 일본에 비하여 경제적으로 많이 뒤져 있었으므로, 장차 우리 나라는 "참전 유공자에 대한 대우가 일본 보다 못하면 못했지 더 좋아질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지금 우리 조국은 경제적인 면에서 크게 신장되어짐에 따라, 늦기는 하였지만 참전 유공자에 대한 예우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필자는 지난 1월 말 Garden Grove에 있는 재향군인회(한국)의 안내를 받아, 국가유공자 지정을 신청 하였더니, 오늘 한국 정부(국가보훈처)로부터 한국 전쟁에 참전한 국가유공자로 지정 결정되면서, 외국 국적자에게 지급하는 혜택을 수여하겠다는 문서를 받았다.


참전유공자 예우 및 단체 설립에 관한 법률이 약 10년 전에 이미 제정되어 시행 되었으나, 필자는 그간 모르고 지났었다. 혹시나 저와 같이 모르고 지나가는 분들이 아직도 있을 것 같아, 여기에 필자의 한국전쟁 참전기와 함께 한국전 참전유공자로 인정 받게 된 내용을 공개하는 바이다. 여러분 당사자나, 혹은 가족 친척 가운데 한국전쟁과 월남전에 참전하신 분(군인 군속 경찰관 등)으로 아직까지 그 신청을 하시지 못하여 혜택을 받지 못하시는 분이 계시면 바로 신청하시라는 의미에서 여기에 공개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