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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기행 #6 (일몬의 진주만 기습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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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08-22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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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기행 #6  (일몬의 진주만 기습 공격)

 

 6. 진주만(Pearl Bay)을 보고


    2013년 3월 10일 주일 아침이었다. San Diego를 출항한지 여섯 번째 날 아침, 가족끼리 모여 앉아 주일 예배를 드린 다음, 부슬 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난생 처음 Hawaii 땅을 밟는 외출을 갖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침 8시부터 외출 하였으나,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떠나느라 10시 가까운 시간이 되어 유람선에서 내렸는데, 유람선은 밤 12시 다시 출항키로 되어 있으니, 그리 많은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Hawaii 땅을 밟은 우리 일행은 여러 차례 Hawaii로 여행한 바 있는 작은 딸의 제안에 따라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시내 버스 편으로 진주만울 구경키로 했다. 유람선이 접안해 있는 전용부두(아래 지도상 붉은색 별과 붉은 글씨로 Honolulu라고 써 있는 중간)에서 보세구역을 빠져 나오니 바로 시내버스가 다니는 길이기에 "Pearl Bay"로 가는 버스를 타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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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waii에서 두 번째로 큰 섬 Oahu 섬, 


Honolulu 국제공항, Wakiki 해변과 진주만(Pearl Harbor)이 지도상에 나타나 있음



    


    진주만이 눈 앞에 보이는 순간이었다. 필자가 국민학교(오늘의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인 1941년 12월 8일(하와이에선 12월 7일) 일본이 미국 하와이 섬에 있는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기습 공격한 진주만 공격 사건이 머리 속에 떠 올랐다. 일본은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는, 남의 나라에 대하여는 인정사정 없이 무자비 하게 행동하는 민족이었다. 그렇기에 일본이 우리 한국 민족에게 가혹하게 행한 사건들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하와이 진주만을 목격하는 순간이기에 미국을 상대로 자행한 진주만 공격 사건을 기술하려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72년 전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을 때, 필자는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식민 치하에서 살았었는데, 지금은 그 때 공격을 당했던 나라인 미국의 시민이 되어 미국 땅에서 살고 있음으로, 그 때 일이 잊어지지를 않는다. 그래서 필자는 그 때 일에 관하여 보고 듣고 문서로 확인한 모든 것을 총동원 하여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주 : 본문 중 괄호로 묶은 청색 문장이나 문구는 읽으시는 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한 내용을 다시 다른 나라 글로 표현하거나 구체적인 설명을 가한 것임.



  A. 전쟁이 시작되기 전 


    가. 야심 많은 일본


    일본은 바다에 둘려 싸여 있으면서 인구가 많은 섬나라로, 협소한 영토 속에서 항상 자원의 부족을 안고 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토를 넓히고 자원을 풍족하게 써 보겠다는 야심을 가진 민족이라는 것을, 어린 시절 필자는 선조 어른들로부터 수 없이 들은 바 있고, 또 지금까지 살면서 직접 피부로 느끼면서 눈으로 목격한 사실들이 너무나 많다. 고대로부터 일본 민족은 그런 목적 의식 속에서 살면서 끊임 없이 군사력을 육성하여 주변 나라들을 침략한 나라이기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당연지사처럼 여기는 이기주의 적인 민족이었다. 그들은 이웃 나라를 침략 하고 사람들을 살상 하고, 착취하고, 또 침략한 땅의 선량한 부녀자들을 자신들의 성 노리개로 끌고 가는 등, 규탄 받을 범죄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한 경력이 많은 민족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저질러 놓은 사실들을, 지금에 와서는 그런 사실이 전혀 없다고 철저하게 부인하는 것을 현실 속에서 우리는 보고 있다.


 


    일본이 그런 나라이기에


      1592년 조선(이씨 조선=우리 나라)을 침략하려고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그 이후에도 계속 한반도를 손에 넣으려고 헤아릴 수 없이 침공을 가해 왔다. 그리고


      1895년에는 청일전쟁(淸日戰爭)을 일으켜 청(淸) 나라로부터 타이완(Taiwan=臺灣)과 발해만에 있는 요동반도(Liáodōng=遼東半島=여순 대련이 있는 반도)를 빼앗아 일본 영토로 삼았으며, 


       1904년에는 노일(露日) 전쟁을 벌려 1905년 노서아(Russia=露西亞)로부터 사할린(Shkhalin) 섬 북위 50도 이남 땅과, 쿠릴열도(Kuril Islands)를 빼앗아 화태(からふと=樺太)와, 천도열도(ちしまれっとう=千島列島)라는 이름을 새로 부쳐 자신들의 영토에 편입 시켰다. 그리고


      1910년에는 한일합병이라는 미명 하에 우리 나라를 강점하여 식민통치를 시작했다.


 


【重要資料】開戦前の東亜【拡散】




        



    이 지도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직후 작성한 문서에 등재되어 있는 지도로서, 그 문서에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일본 지도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지도를 보면 아시아 여러 나라를 일본이 침략하여 빼앗아 자기들의 영토로 편입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도 윗쪽에 기록되어 있는 일본어를 번역하면 "12월 8일은 아세아 해방의 날이다. 대동아 전쟁을 침략전쟁이라고 말하는 나라들까지도 일본에게 감사하라"는 뜻을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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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일본이 관활하고 있던 영토와 점령지 도면



  


    이 자료는 "동경 정보 대학, 근 현대의 역사, 제11회 제2차 세계 대전과 일본(東京情報大学「近・現代の歴史」第11回第二次世界大戦と日本)이라는 문서에서 입수한 것임. 그 문서의 주소 : https://teachme.jp/contents/8071로 가면 볼 수 있음.



    나. 일본은 한반도 북쪽에 만주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웠다.


    일본이 세력을 확장해 가면서 동 아시아를 침략해 나가는 그 사이, 고대로부터 중국 대륙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중국은, 여러 군벌들이 난립하여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1920 년대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중국의 국내 사정이 바뀌어 지기 시작했다. 1927년 장제스(한국 발음으론 장개석=蔣介石)이 이끄는 국민당이 북벌에 나서면서 점점 그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하게 되니 많은 군벌들이 장개석을 따르게 되었다. 그것을 본 일본은 장개석 정권의 세력이 커지기 전에 그 싹을 잘라야 하겠다는 계산을 갖게 되어, 일본은 즉각 만주사변(滿州事變)을 일으켜 만주의 기세를 꺾고서는, 1934년 3월 1일, 청(淸)나라 마지막 황제로 있다가 1912년에 실각한 푸이(溥儀)를 데려와서 대만주제국(大滿州帝國)의 강덕제(康德帝)라는 칭호를 가진 명목상 황제로 세운 다음, 실제론 일본 군부가 만주를 다스렸으니, 만주국은 일본제국의 괴뢰 국가로 세워진 것이다.


 


    다.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


    만주를 장악한 일본은 1937년 다시 중국을 침략하려고 중일 전쟁(일본에선 지나사변=支那事變)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일본군은 북경(北京)을 점령하였고, 당시 중국 수도인 남경(南京)까지 점령한 후, 일본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오늘날까지 이슈가 되고 있는 남경 대학살 사건까지 저질렀으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사람의 생명을 우습게 보는 독한 사람들이다. 정확한 통계는 찾지 못하였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약 2-30만 명(일본 주장 20만, 중국 주장 30만)의 중국인이 학살 당했다는 여러 기록들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중국 장개석 정부는 일본군의 세력이 너무나 강한데다 대항할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정면으로 대항하지 못하고 내륙 도시인 중경(重慶)으로 수도를 옮겨 도망간 신세가 되었다. 장개석은 그곳에서 비밀 루트를 통하여 영국령 버마(ビルマ=오늘날의 미얀마)를 거쳐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무기를 지원 받아, 중국 곳곳에서 게릴라 전법으로 일본군을 습격하기 시작하니, 중일전쟁은 쉽게 끝을 맺지 못하고 장기전으로 빠져 들었다.


 


    라. 일본을 향한 미국의 쓴 소리


    장기전이 된 중일 전쟁으로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 조달이 어려워진 일본은, 원료의 부족 현상이 심각해 짐으로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거기에다 중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일본을 향하여 미국은 중국 등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자 일본은 나라의 운명을 걸고 일으킨 전쟁이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묵살해 버리자, 1939년에 이르러 미국은 미일(美日) 간에 체결되어 있는 통상 조약을 파기 하고서는, 일본으로 수출하던 석유와 철강 등의 지하 자원 수출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미일 양국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게 되면서,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철강과 석유·고무 등의 물자 공급이 부족해 짐으로써 큰 충격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은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는 한반도와, 허수아비 정권을 새운 만주 땅에서 나오는 모든 자원을 싹쓸이 한다 하더라도, 도저히 수요를 충족 시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 이와 같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것이, 프랑스 식민지인 인도차이나(French Indo China=印度 支那)를 침공하여 거기에서 부족분을 얻기 시작했다. 이것이 일본의 동남아 침공의 시작이었다.


    


    마. 인도 차이나를 수중에 넣은 일본


    그 때 유럽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기에 프랑스 영토인 인도차이나가 쉽게 일본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는데,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이 네덜란드, 벨기에, 폴란드 등을 모두 무너뜨린 다음 프랑스를 정복하였다. 독일은 페탱(Henri Philippe Benoni Omer Joseph Pétain)으로 하여금 독일 지배 아래에서 움직이는 괴뢰 프랑스 정부를 만들었고, 같은 시기 영국으로 망명한 드골(Charles André Joseph Marie de Gaulle)은 영국 땅에서 프랑스 망명 정부를 세우고는 독일에 항전하기 시작하였으니, 이 때 친독 프랑스 정부와 반독 프랑스 정부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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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아세아 여러 나라 침략 상황을 연도별로 나타낸 지도




    그러니 일본이 프랑스 식민자인 인도차이나를 침공해 들어갔지만, 인도차이나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 군대를 지원해 주는 프랑스 정부가 없음으로,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주둔군은 그대로 철수하고 말았다. 인도차이나를 쉽게 점령한 일본은 인근에 있는 여러 곳으로 다시 손을 뻗기 시작했다.



    바. 미,영과의 전쟁도 불사 하겠다는 야심찬 일본


    이와 같이 복잡하게 얽혀 있을 때, 일본 국내에서는  


       첫 째 "미국과 영국의 요구에 응하여 중국에서 철수할 것인가?", 


       둘 째 "유류 부족으로 인한 군사력 약화가 생긴다 하더라도 조용하게 기다려야 할 것인가?", 


       셋 째 "미국 영국과 충돌해서라도 동남 아시아의 자원 획득을 시도할 것인가를 논의한 끝에, 


    마지막 셋째 방안을 선택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의견으로 국론이 모아졌을 때인 1941년 7월 18일 내각 총리대신으로 있던 고노에 후미마로(このえ ふみまろ=近衛文麿)가 총리직에서 사임 함으로, 군(軍)의 요직을 두루 거친 현역 육군대장인 도죠 히데키(とうじょうひでき=東條 英機)가 1941년 10월 18일 제40대 내각 총리대신으로 들어서면서 미국과의 전쟁 계획이 구체화 되기 시작했다.


 


    사.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평화선(Rhee Line) 분쟁이 있었던 1952년까지, 우리 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과 불편한 사건들의 내용을 요약하여, 이미 "사랑게시판 #274번 및 You/Yoo/Yuhan Family Cyber 의 Open Square #50 및 51번에, "일본이 우리 민족의 선한 이웃 사촌일까"라는 제목으로 올린 바 있으니, 그곳에서 한일 간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사랑 게시판 (248번) "일본이 우리 민족의 선한 이웃 사촌일까?" "내용 보기
유씨 가족 홈피 (50번) "일본이 우리 민족의 선한 이웃 사촌일까 #1?" "내용 보기"
유씨 가족 홈피 (51번) "일본이 우리 민족의 선한 이웃 사촌일까 #2?"  "내용 보기"

                            


  B. 태평양전쟁의 시작


     가. 필자가 전쟁 시작을 알게 된 것은?


    72년 전(2013년 현재)인 1941년 12월 8일(미국에선 12월 7일), 그 때 필자는 영월금(にしき=錦)국민(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2학기말 시험까지 모두 끝나고 2 주만 지나면 겨울 방학이 시작될 무렵이다. 12월 10일 수요일 아침, 강원도 내륙지방의 겨울이라 그 날도 꽁꽁 얼어붙는 영하의 날씨지만, 평소와 다름 없이 1000 여명의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조례(朝禮)가 시작 되었다. 일본인 마쓰모도 구라노스게(まつもと くらのすけ=松元 蔵助) 교장 선생님이 예복을 입고 손에는 하얀 장갑을 끼고 나타난 것을 보자, 오늘도 틀림 없이 일본 국왕이 내린 긴 칙어(ちょくご=勅語=우리 말로는 임금님의 교시로 당시 행사 때 마다 낭독하는 칙어는 교육에 관한 칙어)를 읽을 것 같아, 학생들의 생각 속에선 "오늘 아침도 긴 조례 때문에 모두 동태가 되겠구나"라며 걱정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단으로 올라간 교장선생님은 칙어를 읽기 시작한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의 입에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내용의 칙어를 읽는데, "天佑ヲ 保有シ 萬世一系ノ 皇祚ヲ 踐メル 大日本 帝國 天皇ハ.........(중략).........昭和 十六年 十二月 八日" (뜻 : "신의 가호 아래 있는 만세 일계의 대일본 제국 천황은..........(중략).........소화 16년=1941년 12월 8일)" 로 칙어 낭독이 끝났으니, 옛날 보다 훨씬 짧은 칙어였다. 그런데 그 내용을 들어 보니 전쟁이 시작 되었음을 알리는 새로 나온 "가이센노 쇼쇼(개전의 조서=開戦の 詔書)"인 것을 알게 되었다. 


  


    연 이어 교장 선생님의 훈시는 "이틀 전 8일, 우리 대일본 제국 천황폐하는 미국과 영국 두 나라를 상대로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미국에선 태평양전쟁)을 선포하였다. 개전 즉시 우리 일본 함대는 미국 Hawaii 진주만에 있는 태평양 함대를 공격 하였는데, 미국 함대는 힘 없이 모두 무너졌다. 그러니 이 전쟁의 승리는 우리 대일본 제국의 승리가 될 것이다. 


 


    "그럼 전쟁이 시작 되었으니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 1904년 일노전쟁(露日戰爭을 뜻함)이 시작 되었을 때, 우리 대일본 제국의 함대 사령장관이던 도고 원수(とうごう へいはちろう げんすい=東郷 平八郎 元帥)가, 전 해군 장병에게 하달한 명령문이 지금 생각난다. 그래서 나는 너희들에게 그것을 소개하려는 것이다". 그는 "皇国の興廃 此の 一戦に あり 各員 一層 奮励 努力せよ(뜻 : 황국의 흥망이 이 전쟁에 달렸으니, 각 사람은 한층 더 분발 노력하라)라고 명령했었다. 그 때 모든 장병들이 그가 명령한대로 일사불란 하게 움직였기에 일노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므로 우리 학교 선생들과 학생들 전원은 개전 된 대동아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모두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의 훈시로 조례가 끝났다.


      


     나. 일본의 진주만공격


    일본은 방심하고 있는 미국을 무력화(無力化) 시킨 후, 아세아 지역에 많은 영토를 얻은 다음 자원을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래서 일본은 1941년 11월 26일 Hawaii에 있는 미국 태평양 함대를 기습공격 할 목적으로, 항공모함 6척, 그리고 이를 호위 또는 지원하기 위한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9척, 급유, 보급선 8척, 잠수함 8척 도합 36척의 함정과 350기의 함재기를 항공모함에 탑재하고는 Hawaii를 향해 출항 시켰다. 1941년 12월 7일(일본 12월 8일 월) 진주만의 일요일 아침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평온한 휴일의 일과가 시작되려는 미명이었다. 진주만 북방 200 마일 해상에서 차가운 물결을 가르며 항진하던 함대가 항해를 멈추고, 항공모함 6척으로부터 진주만에 폭격을 가하기 위해 함재기 제1진 138대를 시작으로, 제2진, 제3진이 계속 발진하여 진주만을 향하여 날아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진주만에 도착한 함재기들은 고요히 잠들어 있는 새벽 6시, 일제히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때 일본이 공격하려던 주된 대상은 진주만에 정박하고 있는 화력이 큰 함정과 이를 호위하는 공군력, 그리고 해병대 병력을 목표로 삼았다. 이 전쟁을 가리켜 진주만 공격(しんじゅわんこうげき=ハワイ海戦=布哇海戦=Attack on Pearl Harbor)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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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8, 1941 The New York Times 1941년 12월 9일 일본 요미우리(讀賣) 신문 석간

 


      1) 일본 함대를 현지에서 지휘한 사령관


               관직 : 제일 항공 함대 사령장관 (第一 航空 艦隊 司令長官)


               계급 : 해군 중장 (海軍 中将)


               이름 : 나구모 쥬이찌 (なぐも ちゅういち=南雲 忠一)


 


      2) 진주만을 공격하려고 출정한 일본 병력


        가) 함정 (함정 36척)




 중요 임무


함정 종류


함정명칭


  함정 중량


총 함정수


공습대


(空襲隊)


항공모함(航空母艦) 赤城(あかぎ) 41300톤 6척
加賀(かが) 42541톤
蒼龍(しょうりゅう) 18500톤
飛龍(ひりゅう) 20165톤
瑞鶴(ずいかく) 29800톤
翔鶴(しょうかく) 29800톤

지원대


(支援隊)


전함(戦艦) 比叡(ひえい) 36600톤 2척
霧島(きりしま) 36668톤
중순양함(重巡洋艦) 利根(とね) 13320톤 2척
筑摩(ちくま) 13320톤

경계대


(警戒隊)


경순양함(軽巡洋艦) 阿武隈(あぶくま) 5570톤 1척
구축함(駆逐艦) 谷風(たにかぜ) 2033톤 9척
浜風(はまかぜ) 2033톤
磯風(いそかぜ) 2033톤
陽炎(かげろい) 2500톤
霞(かすみ) 2400톤
霰(あられ) 2400톤
秋雲(あきぐも) 2033톤
狭霧さぎり) 1980톤
蓮(はす) 770톤

초계 및 공격


(哨戒・攻撃)


잠수함(潜水艦) 伊號 第19(いごうだい19)  2198톤 8척
伊號 第21(いごうだい21)  2198톤
伊號 第23(いごうだい23)  2198톤
伊號 第16(いごうだい16)

2184톤


伊號 第18(いごうだい18)  2184톤
伊號 第20(いごうだい20)  2184톤
伊號 第22(いごうだい22)  2184톤
伊號 第24(いごうだい24)  2184톤

보급대


(補給隊)


유조선, 보급선


(油槽船, 補給船) 


極東丸(きょくとうまる)


10051톤 8척
健洋丸(けんようまる)   
国洋丸(こくようまる)  
神国丸(しんこくまる)  
東邦丸(とうほうまる)  
東栄丸(とうえいまる)  
日本丸(にっぽんまる)  9974톤
선명 미상   1척  




        나) 함재기 (함재기 350기)

함 재 기


  임무별 구분


 동원 수


총 비행기수


항공모함 탑재기(搭載機)


전투기(戰鬪機)   78기

350기


폭격기(爆撃機)  129기
공격기(攻撃機)  143기

 


    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이 입은 피해


    일본의 기습 공격을 받은 미국은 16척의 함정이 침몰 또는 파괴 되었고, 188대의 비행기가 파괴되었으며, 2,403명의 군인이 사망 또는 부상, 그리고 68명의 민간인 사망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진주만이 기습 공격을 당함으로 미국이 입은 함정 피해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침몰된 함정   (6척)  




USS Oklahoma


전함


BB-37


27500톤


1943년 인양 1947년 침몰(태풍)


USS Alizona


전함


BB-39


32100톤


인양 포기, 그 위에 기념관 설치


USS California


전함


BB-44


37000톤


1942년 인양 1943년 전열 복귀


USS West Virginia


전함


BB-48


32600톤


1942년 인양 1944년 전열 복귀


USS Oglala


기뢰 부설함


CM-4


3746톤


1942년 인양 1944년 전열 복귀


USS Utah


표적함


AG-16


21825톤


인양 포기



  


        2) 파손 당한 함정   (12척)



USS Pennsylvania 


전함


BB-38


31400톤


1942년 전열 복귀


USS Tennessee


전함


BB-43


37000톤


1944년 전열 복귀


USS Maryland


전함


BB-46


32600톤


1941년 전열 복귀


USS Nevada


전함


BB-36


27500톤


1942년 전열 복귀


USS Rall


경순양함


CL-7


7450톤


1942년 전열 복귀


USS Honolulu


경순양함


CL-48


10000톤


1942년 전열 복귀


USS Helena


경순양함


CL-50


10500톤


1942년 전열 복귀


USS Cassin


구축함


DD-372


1500톤


1942년 전열 복귀


USS Shaw 


구축함


DD-373


1500톤


1942년 전열 복귀


USS Downes


구축함


DD-375


1500톤


1943년 전열 복귀


USS Curtiss 


수상기 모함


AV-4


8625톤


1942년 전열 복귀


USS Vestal


공작함


AR-4


 8100톤


1942년 전열 복귀


  


        3) 미국이 작성한 피해도와 일본이 작성한 전과도


          가) 미국이 작성한 피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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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7일 하루 사이에 미국이 당한 함정 피해 표시도(미국 정부 작성)


  


          나) 일본 군부가 작성한 전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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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측에 피해를 입혔다고 일본 군부가 작성한 전과 보고서



   위 문서 오른쪽 하단에 적혀있는 글을 번역하면 


      軍極秘 = 군대의 극비 문서


      布哇海戰 = 布哇은 Oahu섬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Oahu섬에서 벌린 해전이라는 뜻


      對水上艦艇戰果圖 = 수상 함정에 공격을 가하여 얻은 전과를 나타낸 도면이라는 뜻


      昭和十六年十二月八日 = 소화 16년(1941년) 12월 8일, Hawaii에선 1941년 12월 7일



        4) 미국 전함이 침몰하고 있는 처참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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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공격을 받고 침몰 중인 미국 전함 Alizona함


 


아래는 태평양전쟁과 관계 있는 동영상이니 원하시는 분은 열어 보시오.



    1. "THE WORLD AT WAR"      (09분 26초)


          " 보기https://www.youtube.com/watch?v=e20pjPDne0I


  


    2. "World War II Submarine Warfare - rare footage"  (1시간 25분 56초)



       " 보기https://www.youtube.com/watch?v=x8DxhS8wpoI



 


    라. 승리감에 도취했던 일본


    국민학교 학생들이 학교에 나가면, 조례 때마다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대승하고 있다는 교장 선생님의 담화, 그리고 교실로 들어가면 담임 선생님의 전황 설명, 또 "勝つたそ 日本 嘆じて 勝つたそ, 米英 今こそ 擊滅だ, 太平洋の 敵陣營は, 根こそき 屈れて 聲も 無し”(뜻 : 이겼다 일본, 장하게도 이겼다. 미국과 영국군은 지금 격멸 한다, 태평양의 적진은 뿌리채 무너지고, 소리도 없다)라는 군가를 연일 학생들로 하여금 부르게 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10億 人の  鬨の 聲"(10おくじんの どきの こえ=10억인의 함성)라는 주간지 신문을 통해, " 대본영(大本營) 발표"라면서 "오늘은 미국 전함 몇 척을 격침 시켰고, 어느 섬과, 어느 곳에 있는 미국과 영국군 기지를 점령했다"는 등의 전과를 발표하면서 자축에 빠져 있던 그들이었다.


 


    주 : 1. 당시는 미국을 한자로 표시할 때 美國이라고 쓰지 않고 米國 또는 亞米利加라고 썼다.


        2. 10억인이란 일본이 아세아 10억인을 대신하여 모두 잘 살게 하기 위해 궐기 했다면서 대동아 공영권(大東亞共榮圈)으로 묶었다고 주장했었다.


        3. 대본영(大本營)은 당시 군부 정치 체제하에 있는 일본의 전쟁 진행상황 등을 발표하던 공식적인 기구다.


 


    마. 일본을 향한 미국의 선전 포고


    이 때 미국은 태평양 함대 가운데, 3척의 항공모함과 유류 보관소, 그리고 병기창을 진주만 아닌 다른 곳에 두었던 관계로, 진주만이 피격 당할 때 태평양 군사력 전부를 잃지 않고 일부를 살렸다.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 공격을 당하자, 미국 국민들의 참전 여론이 들끓게 되어, 루스벨트(Roosevelt) 미국 대통령은 일본과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 이태리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내림으로, 공식적인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연합국인 미국, 영국 두 나라와 동맹국인 일본, 독일, 이태리 3개국 간의 대전이었다.


 


    당시 각 나라를 이끌던 실권자들은 다음과 같다.


        미국 대통령 :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영국 수상 :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일본 수상 : 도죠 히데키(とうじょうひでき=東條 英機)


        독일 총통 겸 총리 : 힛틀러(Adolf Hitler)


        이태리 총리 : 뭇솔리니(Benito Andrea Amilcare Mussol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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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 전쟁 초기 고전한 미국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후 전 세계적으로 군축 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 독일과 일본은 외적으론 군축에 동조하는 척 하면서도, 몰래 군비를 키워나갔다. 그렇지만 미국을 위시한 많은 나라들을 군축에 호응하였고, 또 방심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시점에 미국은 일본으로부터 기습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일시에 많은 군사력을 잃었다. 그런 관계로 군사력의 보강이 이루어질 때까지 미국은 무척 고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개전 초에는 Philippines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여 밀려나게 되어, 극동 미 육군 사령관(U.S. Army Forces in the Far East)인 맥아더 장군(General Douglas MacArthur)은 1942년 3월 12일 밤, 조그마한 어뢰정(PT)을 타고 도망치듯 Philippines을 떠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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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Arthur 장군이 Philippines에서 탈출할 때 사용한 같은 종류의 어뢰정



     


    사. 세력을 동남아로 넓힌 일본


    그와 반대로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 함대가 무너짐에 따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이, 서태평양에 있는 많은 지역(Singapore, French Indo China, Thailand, British Malaya, Burma, Sumatra, Borneo, Jakarta, West India 그 외 다수 지역)을 점령하였다. 일본이 이와 같이 동남아 여러 나라를 점령 하여 거기에서 탈취해 온 물자로 자축에 빠졌다. 일본 정부는 Singapore을 함락 시킨 기념 선물이라면서 전 국민학교 학생들에게 고무 공 하나씩을 나누어 주었다. 당시 국민학교에 다니던 필자는 태어난 후 한 번도 만져 보지 못한 고무 공을 선물로 받았으니, 필자와 같은 철 모르는 1000 여명의 학생들은 학교 교정에서 즐거워 하면서 뛰어 놀던 그 때의 일이 지금도 생각난다. 식민 치하 국민 학교 학생에게 그와 같은 선물을 주었다면 자기네 나라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선물을 주었을지 생각해 볼 문제다.


 


   C. 식민치하 백성들에게 가한 압박


    가. 정신적 사상적 그리고 신앙적인 면에서 가한 압박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을 이기기 위해 식민 통치 하에 있는 한반도에선 어떤 형태로 날뛰었나? 


    정신적인 통일을 기하기 위해, 아마데라스 오 미까미(あまてらす おおみかみ=天照大神)라는 신을 봉했다는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고, 또 


    일본 왕을 신격화 하여, 하늘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난 신, 아라히도 가미(あらひとがみ=現人神)라면서, 정기적인 행사와 특별한 행사 때마다 동경에 있는 천황폐하(天皇陛下)를 향해 큰절을 하라는 궁성요배(きゅうじょうようはい=宮城遥拝=동방요배=東方遥拝)를 강요 하였다. 그리고 


    야마도 다마시(やまとだましい=大和魂)라는 사상을 주입 시키면서, 국왕에게 충의(忠義=우리 말로는 충성)를 다하기 위한 좋은 기회가 이르면 꼭 참여하라고 유도했다.


  


    그 중 신사참배와 궁성요배, 이 문제에 대하여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상의 이유로 반대하기에 이르자, 반대하는 자들을 체포 구금 탄압하다가, 나중에는 기독교 말살 정책을 펴나갔다. 그 방법 중의 하나가 1개면(面)에 1개 교회만 남기고는 강제로 통폐합 시킨 후, 사용하지 않는 예배당 건물을 매각하여 전쟁 비용으로 헌금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찬송가 가사 중에 특정한 문구(예 : 임금, 왕 등등)가 들어 있으면,  독립 사상을 유도할 수 있다는 이유로 사용 금지 하거나 가사 내용을 먹물로 지웠기 때문에, 고친 내용을 종이에 써서 덧 발랐다. 그럼으로 찬송가 책이 누더기가 되었다. 또 교회의 종(鐘)과 각 가정에서 사용하는 놋그릇 놋 수저 등을 모두 수거해 갔다.


 


    주 : 일제의 기독교 말살 정책을 더 자세하게 알고 싶으신 분은 "대한 예수교장로회 경안(慶安)노회" - "홈피" - "경안노회 70년 사" - "노회의 창립과 시련"에 들어가면 일제의 정책 내용도 볼 수 있고, 또 교회가 탄압에 굴복한 부끄러운 역사들도 함께 볼 수 있다. 보시려면  "내용 보기"를 클릭해 보십시오.


 


     "노회의 시련과 수욕"     "내용 보기"


     http://www.kyungan.or.kr/70history/70history2_no_chang.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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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데라스 오 미까미(天照大神)라는 귀신을 봉한 신사 참배 강요로 신사에 참배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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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인신(現人神)이라는 일본 국왕이 사는 궁성을 향해 요배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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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인권을 유린한 인력 동원


    인력을 동원한 면을 보면, 청년에게는 징병령을, 장년들에게는 징용령을, 청소년과 학생들에게는소년 항공대 지원을, 그리고 순진한 소녀들은 감언이설로 속여 정신대(ていしんたい=挺身隊)라는 명목으로 끌고 가서 전쟁터에 나가 있는 군인들의 성 노리개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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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로 끌려가서 성 노리개가 된 어린 소녀들과 도망 가지 못하게 지키는 일본군인



  


    또 소년 항공대 요원을 준 강제적으로 모집하여 전쟁터로 내 몰았다. 이 항공요원 모집은 외형적으로는 항공 요원을 모집하는 것 같았지만, 실은 지원한 자들을 일본 이바라키현(いばらきけん=茨城縣) 가스미가우라(かすみがうら=霞ヶ浦)에 있는 해군 항공대 예과련(豫科練)으로 보내, 속성으로 비행기 조정 기술을 가르친 다음, 가미가제 독꼬다이(かむかぜ  とっこうたい=神風 特攻隊)가 되게 했다. 특공대가 출정하기 직전, 일본 천황이 하사했다면서 온시노 사개(おんしの ビール=恩賜の酒)와 온시노 다바코(おんしの たばこ=恩賜の煙草)라는 것을 주었다. 천황폐하로부터 이와 같은 큰 은사 품을 받았으니 죽기까지 충성하도록 만들어, 비행기에 폭탄을 달고 미국과 영국 군함 굴뚝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 자폭토록 하는 인간 폭탄(人間 暴彈=神風特攻隊)이 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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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가제 독고다이(神風 特攻隊)가 조종하는 비행기가 미국 군함에 자폭하려고 접근하는 모습




    그리고 국민학교 학생들에게는 후방에서 노력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퇴비 증산, 솔뿌리 캐기(항공유 추출 원료) 등 잠시도 쉬지 않고 일 하도록 혹사했다. 그리고 부녀자가 어렵게 지은 농가의 소출은 공출(供出)이라는 명목으로 모두 빼앗아 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식량난으로 콩 깨묵을 먹거나 칡뿌리를 캐서 먹으면서 연명했다. 


 


    다. 항일 독립 운동가와 그 자손에 대한 가혹 행위


    여기서는 필자 가까이 계시던 분들로부터 들은 내용과, 실제 그분들이 핍박 당하는 것을 목격한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1) 인간으론 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


    1941년 풍기북문교회에서 장로로 장립하신 A 장로님이 당한 내용이다. 그 분은 젊은 시절인 1919년, 삼일 독립 만세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상해 임시 정부에서 쓸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 정부로 보냈다고 한다. 그 일을 계속 수행하고 있던 1921년 초, 모급을 강요 받은 돈 많은 우리 민족 한 사람이 일본 경찰에 밀고하여 체포 당하였다. 체포된 A 장로님은 "대정(大正) 8년 제령(帝令) 제7호 위반 및 협박 또 다른 기록에는 보안법 위반과 협박"이란 죄목으로 입건 구속 되었는데, 젖은 수건에 고추 가루를 뿌린 다음, 그 수건으로 코를 틀어 막는 가혹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손톱 밑에 대나무 침을 박는 등의 인간에게 가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을 일본 경찰로부터 받았다. 그는 1921년 5월 6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고 안동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와 같은 야만적인 고문을 예사로 여기는 사람들이 바로 일본 경찰이고, 또 일본 민족이다. 



    형을 마치고 석방된 후에는 조선 사상범 보호관찰령(朝鮮 思想犯 保護觀察令)에 의거, 여행도 허가를 받아야만 떠날 수 있고, 주거지를 옮기면 바로 신고하여야 하였으며, 모든 행동과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 항상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으면서 살았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이 한참 진행되던 1943년 풍기북문교회 장로로 시무할 때 신사 참배를 반대한다 하여, 김성수(金性洙) 담임 목사님과 다른 몇 분의 장로님과 함께 다시 일본 고등 경찰에게 잡혀 옥고를 치른 바 있다. 


 


    주 : "조선 사상범 보호관찰령"은 일제가 강제 정령하고 있을 때, 사상범으로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사상범들을 체계적으로 감시하고 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했던 법령이다. 처음에는 일본 국내에서 시행하고 있던 "사상범 보호 관찰법"을 적용하여 관리 하다가, 1936년에 이르러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을 제정 시행하였고, 1941년에는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도 제정하여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과 함께 시행했던 법령이다.


   


       2) 올가미를 씌워 밥줄을 끊다


    1950년대 초 영월중앙교회에서 장로님이 되신 B 장로님이 당한 내용이다.  B 장로님은 위에서 언급한 A 장로님의 아들이라 하여, 젊을 시절에는 일본 경찰의 감시와 간섭으로, 직장 다운 직장을 얻을 수 없어 항상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 갔다. B 장로님의 모친이 1923년부터 영월교회(오늘날 영월중앙교회)에서 10 여 년간 전도부인으로 시무한 것이 인연이 되어, 1938년 영월교회 엄부환씨의 도움으로 영월화력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본 경찰은 직장에서 제거할 트집을 잡으려고 계속 감시 하였었다. 그러던 중 1945년 3월 28일 직장 내에서 업무적인 마찰로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 싸움이 B 장로님의 선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몰아 세워, 같은 해 4월 5일 체포 구금하여, 1945년 6월 7일 춘천지방법원 원주지원에서 1년 징역형의 올가미를 씌워 춘천형무소에 가두었다. 그런 관계로 모처럼 얻었던 직장도 빼앗기게 되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8 15 조국 해방을 맞음으로 영어의 몸에서 풀려나 햇빛을 봄과 동시 복직하는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


  


       3배우려는 어린 아이의 의지를 무자비 하게 자르다


    1960년 대 부산 어느 교회(필자가 알 수 없음)에서 장로님이 되신 C 장로님의 사연이다. C 장로님은 위에서 설명한 항일 운동가이신 A 장로님의 손자이다. 그는 일제 치하인 1941년 3월, 영월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게 될 때, 해주 사범학교에 진학하려고 응시 하였다가 낙방하였고, 1년을 재수하여 다시 안동 농림과 제천 농림 두 학교를 응시 하였으나 역시 낙방하였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떠나야 할 그의 부친 B 장로님이 항일 운동가의 아들이기 때문에, 일본 경찰로부터 여행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그런 관계로 영월경찰서에 여행 허가 신청서를 제출해야만 떠날 수 있었다. 응시자를 데리고 갈 보호자가 여행 허가 신청서를 제출하면, 그 신청을 허가해 주면서 뒤로는 해주와 안동, 제천 등의 경찰서로 연락하여 입학코자 지원한 학교로 하여금 어린 학생의 입학을 막았던 것이다. 그들의 생각 속에는 만약 항일 사상을 가진 자의 자손이 고등 교육을 받거나, 특히 사범학교를 나와 교육자가 되면, 배우지 못한 사람 보다 더 강력한 항일 운동가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미연에 막기 위해 피어 오르는 새순을 무자비 하게 짤라 버리는 아주 야비하고 혹독한 무서운 정책을 그들은 폈었다. 그래서 국민학교를 졸업한 그는 상급학교의 진학을 포기하고, 어린 소년의 몸으로 노동에 종사 하다가 광복 후 성인이 되어 만학으로 배우지 못한 학업을 채울 수 있었다.


 


   D. 전세가 달라지다


    가.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


    전쟁이 시작된 후, 미국에서는 진주만에 침몰된 군함들을 하나 하나 인양하여 수리를 가하기 시작하였고, 또 미국의 산업 체계가 전시 산업으로 전환하여 군수 물자를 생산하기 시작할 때까지 미국은 상당한 기간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다가, 서서히 전세를 역전 시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42년 5월 7일 Battle of the Coral Sea에서 벌어진 산호해 해전에서 미국과 일본은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고,


   1942년 6월 4일 미국은 Battle of Midway 해전에서 일본의 주력 항공모함 4척과 300기 이상의 비행기와 숙련된 조종사 등을 모두 격파 함으로써, 일본에게 막대한 피해를 가하였다.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사이에는, The Battle of Guadalcanal 등 여러 지역 국지전에서 미국이 승리 힘으로써, 일본의 패전이 점점 굳어져 가기 시작했다. 


 


    주 : 반자이 도쓰게키(ばんざいとつげき=萬歳 突撃)란 한국어로는 만세 돌격, 영어로는 Banzai Charge 또는 Banzai Attack라고 표기한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미 영군과 접전하여 궁지에 몰리면 자신들이 휴대하고 있는 아리사카(Arisaka) 개인 소총에 착검(着劍)을 하고서는, “텐노 헤이가 반자이”(뜻=천황폐하 만세)를 외친 다음, 돌격하는 백병전을 강행했었다. 이 반자이 도쓰게키는 1904-5년 노일전쟁 때, 일본군이 212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이 방법을 통하여 목적하던 고지를 점령한 바 있었다. 그 때 노서아군 전사자는 약 4천 명이었고, 일본군 전사자는 약 1만 6천명 이었지만, 전쟁에서 승리한데 더 큰 의미를 두었던 관계로, 태평양전쟁 때도 수세에 몰린 일본군은 이 방법으로 위기를 타개 하려 했다. 그러나 새로 개발된 기관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는 미 영군과의 전투에서는 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에는 전멸(옥쇄=玉碎)하는데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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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사이 도쓰게키(ばんざい とつげき=萬歲突擊)로 공격하다 처참하게 죽은 일본 군인들



 


    주 : 교꾸사이(ぎょくさい=옥쇄=玉碎)의 어의는 "구슬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것으로, 대의(大義)나 충절(忠節)을 위해 미련 없이 죽는다는 말이다. 이 옥쇄란 단어가 일본군대에서 처음으로 사용 된 것은, 알류샨 열도(Aleutian Islands)의 아투(Attu) 섬을 수비하던 일본 군대가 전멸한 직후 생겨난 단어이다. 미군의 압도적인 병력과 강한 화력을 견디지 못한 일본군이 자포자기한 가운데, "반자이 도쓰게키"로 돌파구를 열어 보려고 하였으나 결과는 전원 목숨을 잃었다. 죽기까지 일본 국왕에게 충성하였다는 것을 드높이기 위해 생겨난 말이다. 


 


      나. 일본군이 옥쇄한 전투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이 교꾸사이(옥쇄=玉碎)로 끝 맺은 전투는 다음과 같다. 기록에 따라 전사자와 생존자의 수가 약간의 차이가 있는 곳도 있다.





전  투  지 


전투 년월일


지   휘   관


전 사 자


생존자


Attu 섬


1943년 5월 29일


육군대좌


야마자끼 아스요 


 2650명


13명


Makin, Tarawa 섬


1943년 11월 25일


해군소장


시바자키 게이지


 4836명


17명


Kwajalein 제도


1944년 2월 6일


해군소장


아끼야마 몬자


 7850명


263명


Saipan 섬


1944년 7월 7일


해군중장


육군중장


나구모 쥬이치


사이토 요시스쿠


41280명


민간인 5000명


2300명


Tinian 섬


1944년 8월3일


해군중장


육군대좌


가쿠다 가쿠치


오가다 게이샤


 8000명


없음


Guam 섬


1944년 8월 10일


육군중장


다카시나 다케시


18000명


없음


Peleliu 섬


1945년 1월 18일


육군대좌


니카가와 구니오


 3200명


446명


Iwo Jima(유황도)


1945년 3월 17일


육군중장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20129명


804명




    다. 일본 해군 최고 지휘관 아마모도(山本 五十六) 대장의 죽음


    일본이 태평양 지역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무엇 보다 먼저 미국 태평양 함대를 궤멸 시켜야 가능하다고 강력하게 주장 하여, 내각으로부터 그 작전 계획 수립을 지시 받고, 그 계획을 수립한 후 책임 있는 부사령관에게 실행을 맡긴 자가 바로 일본 해군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스로구 해군 대장(やまもと いそろく=山本 五十六=사후 원수로 추대)이다. 개전 초 미군이 진주만 기습 공격을 당한 관계로 크게 고전하고 있는 사이, 일본은 각 지역 전투에서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The Battle of Guadalcanal 등 여러 지역 국지전에서 패전한 후부터, 일본군의 작전 정보가 노출되기 시작했다. 미군은 통신 감청을 통하여 일본 해군의 최고 지휘관이, 1943년 4월 18일 전선 시찰을 위해 군용기 편으로 Rabaul을 떠나 Bougainville로 간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긴급히 P-38 전투기 편대를 현지로 출격 시켜, 야마모토 대장이  탑승한 비행기가 Bougainville 상공을 이른 것을 보고 격추 시켰다. 최전선에서 작전을 진두 지휘하던 최고 지휘관이 죽자, 일본군의 기세가 크게 꺾기면서 패전이 더욱 가속화 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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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baul과 Bougainville이 있는 곳



 


    라. 일본 본토 폭격을 위한 비행기지 구축


    Saipan이 속해 있는 제도를 Mariana Islands라고 한다. 이 마리아나 제도는 남쪽에 있는 Guam부터 시작하여 Tinian, Saipan 섬 등 15개의 섬들이 북쪽으로 뻗어나 있다. 그런데 이 섬들의 지배권은 고대로부터 스페인, 불란서, 미국, 독일, 영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 분산되어 있을 때도 있었고, 때로는 섬의 지배권이 개별적으로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등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섬들이다. 1898년부터 Guam은 미국이 지배하고 있었고, 북쪽 14개 섬은 독일 지배 하에 있었는데, 1914년 독일이 지배하던 14개 섬이 일본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14개 섬을 수중에 넣은 일본은 그 섬에 군사 기지를 구축한 다음, 1941년 12월 7일(진주만 공격 전날), 미국이 지배하고 있는 Guam을 기습 공격하여 이틀 만에 점령 함으로써 마리아나 15개 섬 모두를 일본이 장악하게 되었다.


 


    미국은 Guam을 빼앗겼고 또 다음 날엔 진주만 공격을 당했기 때문에 일본을 상대로 선전포고는 하였으나, 일시에 많은 병력을 잃은 관계로 개전 초기 엄청 고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44년 6월에 이르러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자  Guam을 탈환하기 위해 Saipan 공격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Saipan에 있는 일본군 4만 여명을 몰아내기 위해 미군은 육해공 입체 작전으로 지상군 7만 여명을 상륙 시켜 치열한 공방전으로 3천 여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드디어 Saipan에 있는 일본군을 완전히 격멸(일본 말로는 옥쇄=玉碎) 시켰다. 연 이어 미군은 Guam과 Tinian섬들을 차례로 점령하고, 이오지마(Iwo Jima=硫黃島), 오끼나와로 작전 영역을 넓혀 나갔다. Saipan 섬과 Mariana 섬을 점령한 미군은 1945년 초, 태평양에 있는 섬으로부터 직접 일본 본토까지 발진할 수 있는 비행 기지를 확보 함으로써 본토 폭격을 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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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 일본 중요 도시에 공습을 가하는 미군


    태평양 상에 비행 기지를 확보한 미군은 1945년 3월 8-9일, B29 폭격기 344대를 출동 시켜, 도교 시내 오늘 날의 고토구(こうとうく=江東區)와 주오구(ちゅうおうく=中央區) 일대에 2,400 여 톤의 소이탄(燒夷彈)을 투하하는 융단 폭격을 가하여, 반경 약 15km의 지역을 완전 잿더미로 만들었고, 10만 여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 폭격으로 주택 약 42만 채와 군함을 제조하고 수리하던 조선소 그리고 많은 군수 시설 등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일본은 지진이 많은 나라 임으로 많은 건물들이 목조로 되어 있음으로, 소이탄 폭발로 인하여 일어난 불은 순식간에 모든 건물을 태웠고, 또 사람의 피부에 달라붙은 불은 사람의 몸이 완전히 타 없어질 때까지 계속 불 탓다고 한다. 뜨거움을 견디지 못한 어떤 사람은 강물로 뛰어 들었으나 강물 위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로 인하여 고통을 겪으면서 죽었다고 한다. 폭탄을 투하하고 돌아가는 B-29 승무원들도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시체 타는 냄새를 맡을 정도였다고 하니 폭격의 참상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미군은 종전이 되기까지 일본 본토 중요 도시에 폭격을 계속 가하였는데, 요코하마(よこはま=橫濱), 오사카(おおさか=大阪), 나가사끼(ながさき=長崎)、후꾸오까(ふくおか=福岡)를 비롯하여 약 150 여 개의 도시에 폭격을 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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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본토 폭격에 나선 B29 폭격기



 


    바. 인명 피해를 줄이려는 미군


    미군은 인명 피해를 최소한 줄이기 위해 아래와 같은 폭격 예고 삐라를 사전에 공중 살포하여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갈 수 있도록 유도 하였다. 아래 삐라의 뜻은 다음과 같다. "일본 국민에게 고합니다. 당신은 자신과 친 형제와 친구들의 생명을 도우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도와 주려면 이 삐라를 잘 읽어 보십시오. 몇 일 안에 뒤면에 적혀 있는 도시나 그 중 일부 도시를 폭격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군사 시설과 군수품을 만드는 공장들이 많음으로, 미군은 전쟁을 길게 끌고 가는데 사용될 병기들을 모두 파괴할 것입니다. 그러나 폭탄에는 눈이 없음으로 어디에 떨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미국은 인도주의적인 국가 임으로 죄 없는 사람들이 살상되는 것을 원치 않으니, 뒤면에 적혀 있는 도시에서 모두 피난해 주기 바랍니다.....(중략).....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서 평화를 회복 시키는 것도 어떻습니까? ....... (하략)", 이와 같은 내용이다. (아래 그림 참조)


     주 : 만약 아래 그림들이 화면에 뜨지 않을 경우 그림 밑에 청색 글씨로 적은 주소를 명령란에 복사하여 붙힌 다음 엔타를 치면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사. 원자 폭격을 받게 된 일본


    그리고 국제 사회에서도 오만에 차 있는 일본을 향하여 항복하고 포스담 선언(Potsdam Declaration)을 준수하라고 요구 하였으나, 일본은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묵살하면서, 폭격에도 아랑곳 없이 계속 항전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미군은 일본의 군 부대와 군수 공장, 그리고 군사 시설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을 골라 그 중에서 히로시마(ひろしま=廣島), 고구라(こくら=小倉), 니이가다(にいがた=新潟), 나가사기(ながさき=長崎) 등지를 원자 폭탄 투하 대상지로 선정했다. 그리하여 1945년 8월 6일 제1차로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을 투하 하였고, 8월 9일에는 고구라에 투하 하려고 현지까지 비행해 갔지만, 기상 여건이 여의치 않아, 투하할 장소를 나가사기로 변경하여 투하하였다. 원자 폭탄 투하에 따른 피해가 엄청나자 일본의 패망은 더욱 확실해졌다. 거기에다 소련은 어느 쪽의 전세가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관망하고 있다가 원자폭탄으로 히로시마가 쑥 밭이 된 것을 보고서는, 1945년 8월 8일 일본을 향하여 선전 포고를 내리면서, 만주 일대에서 일본군에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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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본토에 원폭을 투하하기 위해 비행한 폭격기의 왕복 항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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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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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8월 6일 원자 폭탄 투하로 폐허가 된 일본 히로시마



 


    아. 삐라를 통한 심리전


    그 후 미군은 인명 피해를 줄이고 항복할 것을 촉구하기 위해 비행기를 통해 아래와 같은 삐라를 계속 공중에서 살포하였다. 삐라 내용은 "日本 國民に告ぐ!!、卽刻 都市より 待避せよ"(번역하면 "일본 국민에게 고한다!!. 즉각 도시로부터 피난하라)라는 것이 제목이고, 본문은 "이 삐라에 적혀 있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임으로 주의 깊게 읽어 보라. ........ (이하 생략)" 는 내용을 전재한 다음, 일본 국민들의 마음을 자극하기 위해, "일본에게 좋은 내용의 항복 조건을 제시하였으나 계속 무시하고 있음으로 소련도 선전 포고를 하였다. 미국은 새로 발명한 원자 폭탄을 거대한 B29 폭격기 2000기를 일시에 출격 시켜 일본 전국에 폭격을 가할 것이다. 그 폭탄의 위력은 히로시마가 당한 피해를 보면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니, 빨리 천황폐하에게 종전할 것을 청원하라. 종전이 빨리 이루어 지지 않으면 미국은 부득의 원자 폭탄을 사용하여 강제적으로 종전케 할 것이다. 그렇게 될 것이니 빨리 도시를 벗어나 피난하라"는 내용의 경고 삐라를 일본 전국에 뿌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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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에 공중 살포한 삐라의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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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에 공중 살포한 삐라의 뒷면



 


    자. 일본의 항복


    상황이 이와 같이 불리한 쪽으로 전개되자, 1945년 8월 10일 일본 군부는 항복을 결의하고 포스탐 선언(Potsdam Declaration)을 수락하겠다고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일본 군부 지도부의 일부(전쟁을 일으킨 주모자들)가 크게 반발하면서 끝까지 항전 하겠다고 고집 함으로, 즉각적인 발표를 유보하고 있다가, 1945년 8월 14일 일본 국왕이 "무조건 항복한다"는 결정을 연합군에 통보 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1945년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しげみつ まもる=重光葵)가 동경 만에 정박 중인 미국 전함 Missouri호 함상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 함으로서 일본의 패망이 확정된 것이다. 


   


    주 : 위 동영상은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가 항복 문서에 조인하는 장면인데, 시게미쓰가 다리를 저는 것은 1932년 4월 29일, 중국 샹하이(上海) 홍커우 공원(虹口公園)에서 열린 천장절(天長節=일본 국왕의 생일) 축하 장소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으로 한 쪽 다리를 잃어 의족을 착용했기 때문이다.


 


   E. 전쟁의 후속 처리


    가. 전쟁 범죄자들이 진 책임


    전쟁이 종료된 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전범자들을 체포하여, 1946년 1월 9일 시행된 조례에 따라, 일본 도쿄에 극동 국제 군사법정에서 심리를 시작하여, 1948년 11월 12일 도죠 히데키 등 7명에게는 교수형을, 또 다른 16명은 종신형을, 1명은 금고 20년을, 1명은 금고 7년의 형이 선고 되었고, 또 다른 B C급 전범자들도 모두 처벌되었다. A급 전범자 중 도죠 하데키 등 7명은 1948년 12월 23일 동경 스가모 구치소(巣鴨拘置所=Sugamo Prison)에서 교수형으로 그 형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일본 국왕 쇼와(昭和)에 대하여 전쟁 범죄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점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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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범들이 재판 받는 모습


  


    나, 교수형에 처해진 A급 전쟁 범죄자 중 7명 



도죠 히데키

とうじょう ひでき


東條 英機


65


진주만 불법 공격


무토 아키라

むとう あきら


武藤 章


57


포로에 대한 학대


이타가키 세이시로

いたがき せいしろう


板垣 征四郎


64


중국 침략과,미국에 대한 전쟁


마쯔이 이와내

まつい いわね


松井 石根


71


남경에서 중국인 대학살


기무라 헤이타로

きむら へいたろう


木村 兵太郎


61


영국에 대한 전쟁


도히하라 겐지

どひはら けんじ


土肥原 賢二


65


중국에 대한 침략 전쟁


히로타 고우키

ひろた こうき


広田 弘毅


71


소련과 중국에 대한 침략 전쟁



      비고 :


        (1)   야마모도 이스로구는 종전이 되기 전인 1943년 4월 18일 비행기 추락으로 이미 죽었고, 


        (2)   나구모 쥬이찌는 1941년 7월 6일 사이판 섬에서 패전할 때 할복(割服) 자살하였으며,


        (3)   그 외에도 일본의 전세가 불리해 졌을 때와 전범자로 체포령이 내려 젔을 때 자살한 자도 있고, 재판 전에 신병으로 사망한 자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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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들의 혼백까지 합사한 야스구니 신사(やすくにじんじゃ=靖國神社) 



  


    주 : 야스구니(靖国) 신사에는 A급 전범들의 혼백까지 합사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에게 침략 당했던 한국을 비롯한 아세아 동남아 여러 나라와 민족들이, 일본 각료들의 참배를 극구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다. 침략 당했던 나라들의 해방


    일본에게 침략 당하여 억압 받던 한국은 물론 극동으로부터 동남아에 이르는 여러 나라들은 해방이 되어 본래의 자리로 환원하게 되었다. 36년 동안 일본의 쇠사슬에 묶여 억압 받던 우리 나라는 1945년 8월 15일 풀려나, 3년 후인 1948년 8월 15일 정부를 수립하였으니, 잃었던 국권을 되찾으면서, 국적, 언어, 신앙의 자유, 그리고 풍습 등 모든 분야에서 우리의 것을 그리고 자유를 되 찾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떳떳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었다. 쇠사슬에 매여 있던 36년 동안 엄연히 우리들의 국기, 국가, 국화, 등이 있었지만, 우리의 것을 사용하지 못하고 원수인 일본의 일장기를 국기라고, 그리고 그들의 국가인 기미가요와(君 代)를 국가라고 불러야 했고, 또 벗 꽃을 국화라면서, 그들의 군왕에게 충성을 강요 당하였던 슬픔으로부터 해방 되였으니, 이 모든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대한 민족에게 특별히 내려주신 놀라운 은혜였던 것이다.



   F.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말살 하려던 음모의 미수


    가. "조선 총독부 보호관찰령 제3호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일제는, 만의 하나 미군과 영군이 한 반도에 상륙하게 되면, 항일 사상이 강한 기독교인들이 미군과 영군에 편승하여 일본군에 항거하는 세력으로 변하여 큰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판단 아래, 그와 같은 일을 사전의 차단하기 위한 대책으로, 독립 운동가와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사전 검거하였다가 1945년 8월 18일 0시를 기하여 모두 살해하겠다는 계획을 조선총독으로 있는 아베 노부유끼(あべ のぶゆき=阿部信行)가 세운 다음, 자신의 관할 아래 있는 각 경찰서와 헌병대에 비밀리에 하달한 지령을 말한다.


 


    나. 비밀로 내렸던 지령이지만


    이와 같은 일제의 학살 음모 지령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해방되기 직전 경성부(京城府=해방 전 서울의 지명) 종로경찰서에 근무하던 최운하(崔雲霞)의 폭로로 햇빛을 보게 되었다. 그는 종로경찰서 고등계(일본에 대항하는 사상범을 전담하는 부서) 형사 주임으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내용을 알게 되어 폭로하게 된 것이다. 그는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 서대문경찰서장을 역임하다가, 1950년 6 25 전쟁이 일어난 직후, 북한군에게 납치되었다.


 


    주 : 서울시내 많은 동명들이 해방 후 얼마 동안까지 왜색으로 된 동명을 그대로 사용되다가 개명 되었다. 그 중 일부를 예시하면 ....... 서울특별시=京城府, 종로 X가=鐘路 X丁目, 을지로 X가=黃金町 X丁目, 충무로=本町通り, 세종로=光化門通り, 퇴계로 X가=大和町 X丁目 등 등 


 


    다. 필자가 이 내용을 알게 된 것은


    해방 직후 필자가 영월교회에 다닐 때였다. 그 때 전도 강연을 위해 영월에 오신 김대진(金大進) 선생(후에 목사가 되었고, 김연오로 개명)이 영월교회에 와서, 전도 강연을 할 때였다. 전도 강연 중에 밝히기를 "일제는 우리 교계 지도자들을 8월 18일을 기해 모두 처형 하려고 계획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3일 전에 일본의 계획을 꺾으시고 구해 주셨다"고 말씀 하시면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희생을 그대로 보고 넘어 가시지 않고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구해 주신다"고 말씀하였다. 그러나 그 때 필자는 주의 깊게 듣지 않고 가볍게 생각한 관계로 그대로 넘어갔었다. 그런데 금년 8월 15일, 새벽기도를 마친 다음 나성영락교회 담임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미주 복음방송을 통하여 흘러 나오는데, "오늘은 우리 조국이 해방 된 광복절 입니다"라고 전제한 다음,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이 줄줄이 들려오기에, 필자는 귀가 즉시 인터넷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추가로 확인하게 되었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내용들은 미국 북장로교로부터 한국으로 파송 되었던 마포삼열(Samuel H Moffett) 선교사의 저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The Christians of Korea)이란 책에서 일제의 살인 음모 사건을 밝혀주고 있으며, 또 방위량(William N. Blair) 선교사는 1945년 8월 중순경 한국인 기독교 신자들을 모두 학살하려고 일제가 계획하였다가 미수로 끝났다는 증언이 있다고 확인 되었다. 그리고 역사학자인 문정창(文定昌)씨는, 일제의 이와 같은 악랄한 계획이 수립 되어, 처형 대상자로 구속 되었던 자가 무려 5만 명에 달한다고 하고, 또 함경도 지방에는 학살 대상자를 굴속으로 몰아넣은 다음 모두 질식사 시키려고 영변군 영변면 외산곡에 20평 규모의 살인 굴을 준비해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엄준용 목사의 글에서는 일제는 서울 모처에 있는 지하실에 4 만명을 한꺼번에 가둔 다음 고압선을 흘려서 죽이려고 계획하였었다는 내용도 있다.


    라.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1945년 8월 15일에 있었던 해방은 틀림 없이 우리들에게 큰 기쁨을 주신 해방이었다. 이 해방은 우리 민족 전체에게 주신 해방이요, 또 주님의 택한 백성에게 주신 해방이기도 하고, 억압 속에서 어려움을 겪던 교회에 주신 해방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해방은 정치적인 해방인 동시 신앙적인 해방이기도 하며, 우리 민족 모든 가정이 당하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하고, 또 배움에 제한을 받던 차별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하다. 물론 이와 같은 조국의 해방은 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투쟁과 항거, 그리고 생명을 버리면서 얻은 결과인 것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보다 더 큰 것은 믿음의 선열들이 부르짖은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내리신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필자는 단언하는 바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만날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린 것이라"고 하셨으니,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기 때문에 맺어진 열매라고 믿는다.


 


    마. 다른 분의 글 보기    (보기 원하는 분은 제목이나 URL을 클릭하십시오.)





주          제       목


저자 또는 출판사


조선의 기독교 지도자 대학살  #1


엄준용 목사(총신 신대원 99회 졸업)


신사참배 거부자들의 출옥


고신대 역사신학 이상규 교수 저서


일제 말 한국 기독교인 집단 살해 음모 #3


소요유


미소 조선진격 예상, "8월 18일 처형 계획 #4


한국교회 이단상담 연구소


일제의 한국 교회 지도자 학살 음모 #5


두란노 - 빛과 소금




   


   G. 우리 한민족이 경계해야 할 것은


     72년 전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가 패전한 일본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서 우리는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다. 현재 일본을 이끌고 있는 아베 신조(あべ しんぞう=安倍 晋三) 총리는 집권 초기부터 태평양전쟁을 미화하면서, 헌법을 고쳐 옛날과 같은 군국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필자가 생각 하기엔 일본이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이웃 나라를 침략해서 영토를 넓혀 보겠다는 야심 찬 의지가 깔려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본을 더욱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한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일본의 현 총리가 왜 그와 같은 방향으로 일본을 이끌어 가려고 할까? 쉽게 한 마디로 말하면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는 결과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그의 몸 속에 흐르는 피가 군국주의 극우파 정치인의 피가 흐리기 때문이다. 자세히 설명하면 그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きし のぶすけ=岸 信介)는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전승국에 의하여 A급 전범자로 체포 되었다가 풀려난 자로, 그 후 극우파 자민당을 등에 업고 총리의 자리에 오른 자이다. 그리고 그의 부친 아베 신다로(あべ しんたろう=安倍 晋太郎)는 1957년부터 2년 동안 기시 노부스케 총리의 비서로 활동하다가 외무상에 올랐던 자이고, 그의 외종조부인 사토 에이사쿠(さとう えいさく=佐藤 栄作) 전 수상, 그리고 요시다 시게루(よしだ しげる=吉田 茂) 전 수상, 또 아소 다로(あそう たろう=麻生 太郎) 전 수상 등 군국주의 극우파 많은 정치인들이, 그의 친척 또는 혼인을 통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는 사이인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일본 왕실도 연결되어 있으니, 그들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참고 : 일본 수상의 친인척 관계를 확인해 보시려면 다음에 따라 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安倍 晋三 일본 총리의 가계도를 보려면


 


    1. "google search"에서 "安倍 晋三"를 입력한 후 엔타를 치면 "wikipedia"에서 작성한 글이 보일 것임


    2. 그 제목의 글을 열어서


    3. "目次"로 내려 가서, "5 人物"로 옮긴 다음, 


    4. "5.3 系譜"를 클릭하면 "山口県長門市" 로 옮겨질 것임, 


    5. 설명과 사진이 화면에 보일 것임,


    6. 밑으로 내려가면 계보 도표가 나올 것입니다.



    


    주 : 사토 에이사쿠는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인데, 형제 간에 성이 다른 이유는 외조부의 성 사토를 이어받은 관계이다. 


 


    현 수상인 아베 신조가 자라날 때의 환경이 그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그도 그들이 걸어간 것을 보고 배운 그대로, 지금 그 길을 찾아가고 있는 것임으로, 일본과 이웃하고 있는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주의 깊게 일본을 경계해야 된다는 말이다. 


 


   H. 하나님의 뜻을 역행한 자의 결과


    일본에는 기독교가 우리 나라 보다 약 200년 정도 먼저 들어 갔다. 그렇지만 오늘 날 그 나라에는 극소수의 기독교인이 그들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일본의 바탕이 다신주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선 기독교가 전파되기 어렵다는 이유를 1990년대 초 인근 모 교회에 오셔서 부흥회를 인도하신 일본인 목사님이 밝힌 적이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일본 민족의 마음 바탕이 다신주의적인 기초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전하면서, "일본 사람들의 눈에는 자연 만물이 모두 신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태양, 달, 별, 바람, 천둥 등의 신도 있고, 토지, 논, 산, 강, 바위 등의 신도 있으며, 집안에서는 부엌, 부뚜막, 변소 등에도 신이 있다고 하며, 말, 개, 등의 동물, 그리고 소나무, 대나무 등의 식물에도 신이 들어 있다면서, 약 800만의 신이 그들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다고 했다. 그런 민족이기에 처음부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생각 조차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자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진리는 옛날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대에 살던 사람들도 신의 힘이 작용하는 것임을 믿었기 때문에, 명심보감 천명편(明心寶鑑 天命篇) 제1장을 보면 "순천자는 존하고 역천자는 망한다"(子曰 順天者存 逆天者亡=공자가 말하기를 하늘을 순종하는 자는 살고, 하늘을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고 교훈 하였다. 72년 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인의 생각 속에는,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미국 태평양 함대만 무너트리면, 태평양 일대의 모든 땅들이 자신들의 지배 하에 들어오게 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반한 자를 절대 그대로 두시지 않으신다. 도저히 일어 설 수 없을 것 같았던 미국을 다시 일으켜 세워, 야비하고 오만 방자한 일본을 무너지게 하심으로, 36년 동안 일본에게 짓밟힘을 당하면서 가련하게 살던 우리 한민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길을 열어 주셨고, 또 처형 직전에 있던 많은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구해 주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태복음 7장 24-27절을 통해 말씀 하시기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고 하셨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시지 않고 그와 같은 은혜를 내려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은혜는 개인에게도 주시고, 집단, 사회, 민족, 국가에도 내려 주시는 분이시다. 그와 반대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에 반한 국가, 하나님의 뜻과 다른 길로 가는 민족, 하나님의 뜻을 농담으로 여기는 개인, 그리고 사회, 단체 모두에게 멸망이 이르게 된다는 말씀이 되겠다. 물론 일시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자가 흥하는 사례가 간혹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종국에는 그도 망한다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은 우리 성도들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매사를 하나님의 뜻에 합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음을 항상 감사하면서, 하나님께는 기쁨을 드리고, 각자 각자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가 모두 되어 복 받는 성도들이 되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바이다.


 


    (그림과 미디어는 이해를 돕기 위해 연결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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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주신 별을 잘 받았습니다 / 이기철
김영란 | 2020.05.04 | Votes 0 | Views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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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닮 다락방(번개 모임) (1)
김남걸 | 2020.04.21 | Votes 0 | Views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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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법칙 / 프란체스코
김영란 | 2020.04.19 | Votes 0 | Views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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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에
김영란 | 2020.04.11 | Votes 0 | Views 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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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김영란 | 2020.03.29 | Votes 1 | Views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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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SE(체이스뱅크) Zelle 이체방법
김남걸 | 2020.03.28 | Votes 0 | Views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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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A(뱅크오브아메리카) Zelle 이체방법
김남걸 | 2020.03.28 | Votes 0 | Views 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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