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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러웠던 해방 후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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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 user
Date
2018-08-22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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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러웠던 해방 후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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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  


    1. 아래 내용은 우리들의 조국이 해방 된 그날부터 625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5년간 혼란했던 조국 사회의 모습과, 한 철부지 소년이 그 속에 남긴 발자취를 함께 엮은 내용입니다. 


     2. 유사한 사건을 묶다 보니 날자 순서가 약간 바뀐 점이 있으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945년 8월 15일, 36년 동안 일제의 쇠사슬에 매여 있던 우리 조국은 해방을 맞음으로 한민족 모두는 큰 기쁨을 맞이 하였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 조국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 되어, 사회는 것 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다. 1946년 시골에서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13세의 철 없는 소년은 배움의 꿈을 이루어 보려고 겁도 없이 서울로 올라갔다. 군정청 옆 소격동에 있는 적산 가옥 부속 건물 단 칸 방에 자리를 잡고, 동사무소에서 빈민들에게 무상으로 배급해 주는 밀 가루로 배를 채우고, 또 난방 시설도 없는 다다미(일본어=たたみ=畳) 방에서 미닫이 틈 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에 쫓겨 새우 잠을 잘 수 밖에 없었다.



    남들이 잠자는 어두운 밤 거리를 땀을 흘리면서 뛰어야만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고, 한 푼의 교통비(전차표 값)라도 더 아끼기 위해, 학교 가는 고개 길을 발 품으로 해결했다. 그리고 체력의 한계를 이기지 못하여 밀려오는 졸음을 참으면서, 수업 시간을 보냈던 것이, 막 노예 생활에서 풀려난 약소 국가의 소년들이 가야 하는 고달픈 길이었다. 그 때 소년은 배달하던 신문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것을 파악하여, 혼란한 세상 풍파에 대처하여 어려움을 헤치면서 가야할 방향을 찾아 갔었는데, 때로는 심신의 고달픔을 억눌러야 했고, 때로는 외로움을 달래면서, 어린 한 때의 발 자취를 그 속에 남겼다. 흘러가는 세월과 더불어 희미해진 옛날을 더듬어, 당시의 혼란했던 사회상과, 철부지 소년이 그 속에 남긴 발자취의 한 토막을 여기에 기록한 것이다.


      


1. 조국의 해방


  가. 제2차 세계 대전의 종료


    1945년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8월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ひろしま=廣島)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세계의 눈은 일본의 멸망을 기정 사실로 보면서, 일본이 항복할 시기만을 수수꺾기로 남겨 두었었다. 그러자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의 강대국들은 전후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여러 차레에 걸쳐 협의 하다가, 결국에는 일본이 항복하면 한반도를 미 소 양국이 분할 점령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합의가 성립 되었다.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 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은 끝이 났고, 우리 조국은 강대국들이 이미 합의 결정한 바에 따라 미소 양군이 진주하게 되는 수순으로 처리되고 있었다.


  


  나. 치안권과 행정권의 이양 요구


    1945년 8월 15일 아침, 일본의 항복이 발표되자,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민족 주의자 여운형(呂運亨)은 경성부 대화정(大和町=오늘의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えんどう りゅうさく=遠藤 柳作)의 관저를 찾아가, 치안권과 행정권의 이양과 다음과 같은 5개 조항을 요구하였다.


      1. 전국적으로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2. 서울의 3개월 분 식량을 확보할 것.


      3. 치안 유지와 건국 운동을 위한 정치 운동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4. 학생과 청년을 동원하여 단체를 조직하고, 또 그들을 훈련 시키는 일에 간섭하지 말 것.


      5.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 일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등을 요구하여, 약속을 받아냈다.


   


  다. 여운형이 조직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일제 치하에서 노예로 살던 한민족은 입이 있어도 말 할 수 없는 벙어리, 그리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는 귀머거리가 되어 있었으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도 없었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일만 꾸벅꾸벅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갇혔던 독립 운동가들이 석방 되는 것을 보고서야 일본이 항복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때부터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길 거리로 쏟아져 나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해방된 것을 기뻐하면서 환호하기 시작했다.


    


    선견지명이 밝았던 여운형(呂運亨)은, 멀지 않아 일본이 패망할 것을 예견하였기에, 1945년 8월 초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단체를 비밀리에 결성하고서는 조직을 넓혀가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해방이 발표되자, 바로 다음 날(16일), 그는 이미 조직해 두었던 조선건국동맹이라는 조직체를, 조선건국준비위원회라는 단체로 탈바꿈 하면서, 서울 YMCA 회관에서 다음과 같은 건국 준비 강령을 발표하였다.


       1. 우리는 완전한 독립 국가를 건설한다.


       2.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을 수립한다.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 생활의 안정 확보를 기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발족된 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8월 말까지 전국 각처에 145개의 지부를 결성하고서는, 그 조직을 통하여 일본인 자본가와 지주들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과 토지 등을 접수하고서는, 조선인들에게 배분하는 것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찰들이 도망간 빈자리에는 전국의 뜻 있는 청년들을 모집하여 치안대를 조직하여 치안 유지를 시작했다.


  


  라. 일본의 패전 소식을 시골에서 접한 소년


    1945년 8월 15일 그 때 소년은 영월금(寧越錦)국민학교 6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다. 그 날은 여름 방학 중간 소집일 이어서 학교에 나갔다. 조례 자리에서 일본 교장 선생님이 단에 오르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천황폐하께서 미국과 영국을 향하여 전쟁을 그치자고 명령하셨다" 이와 같은 짤막한 말을 한 다음, 단에서 내려가는 것으로 그날의 조례가 모두 끝났다. 그 소리를 들은 소년은 단순하게 전쟁이 끝난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다음 날인 16일 낮이었다. 동강 덕포(東江 德浦) 나루 가까운 곳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는데건너편 강변(영월 중심지 쪽) 나루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팔을 들었다 내렸다 하는 모습이 보였고, 또 서 있는 화물차 적재함에는 하얀 천에 무슨 글을 써 부친 것이 눈에 띠였다. 그것이 너무나 궁금하여, 100 m도 더 되는 강을 헤엄 처 건너가 가까운 곳에서 살펴 보니차에 두른 천에는 "삼천만 동포여 해방은 왔다"라고 써 있었고또 "조선 독립 만세"를 계속 부르는 것이었다. 수영을 빨리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말씀 드렸더니, 어머니는 맨발로 마당으로 뛰어나가, 둥실둥실 춤을 추면서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이 해방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도 돌아오신다"면서 기뻐하시는 것이었다.



  마. 옥중 생활에서 풀려나신 소년의 아버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 柳作)와 민족주의 자 여운형(呂運亨)과의 합의한 바에 따라, 1945년 8월 16일부터 전국 곳곳에 있는 형무소에서는,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과 경제 사범들이 석방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형무소 측에서는 수감되어 있는 사람 모두를 일시에 석방하면, 사회적인 혼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여러 차례 나누어서 석방하게 되었다. 그 때 소년의 아버지는 1년 징역형을 선고 받고 춘천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그 안에서 취사 업무 분야에서 일하고 있었던 관계로,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모든 죄수들의 식사 문제를 해결해 주고, 마지막 날인 8월 21일에야 형무소 문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형무소에서 일하던 일본인들이 모두 떠나고, 몇 사람 안 되는 우리 동족 관리만 있을 때, 그의 도움을 받아 소년의 아버지는 자신의 신상 기록을 열어보았더니 "항일 사상이 강한 자임으로 만기 출소할 때, 집으로 보내지 말고 함경도 탄광으로 보낼 자"라는 메모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만약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면, 소년의 가족들은 생 이별을 당해야만 하는 이산 가족이 되었을 것인데......, 하나님의 크신 은혜는 실로 놀라웠던 것임으로,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바. 조국이 남북으로 분단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나고 한 달 정도가 지난 9월 어느 날, 북위 38도선을 기준 하여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각각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한 후, 군정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 분할이 정치적인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민족 분단의 비극이 싹트는 시발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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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에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



    이 때 분단선은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 되었으니, 그 선은 동서로 뻗은 일직선이었다. 그런 관계로 황해도와 경기도, 강원도 3개도는 남북으로 분단 되면서, 하루 사이에 도(道), 군(郡), 면(面), 동리(洞里), 그리고 같은 필지(筆地)의 농토나 집이, 어떤 집은 안방과 사랑방이 남북으로 갈라지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황해도 남쪽에 있던 여러 군(郡)들이 남북으로 분단 되면서, 38 이남에 남은 황해도의 일부 땅(옹진, 연안, 백천 등)은 38 이남 관활이 되었다. 그러나 그 땅에 들어가려면 이북 땅을 거쳐 갈 수 없음으로, 가로 막고 있는 바다와 한강을 선편을 이용해서만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해주만과 경기만에 산재해 있는 많은 섬들(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용매도, 대수압도, 소수압도, 무도, 순위도, 용호도, 어화도, 창린도, 기린도, 마합도)은 모두 38도선 이남에 있는 땅 임으로, 미군정 관할 아래 있게 되었다.


   


  사. 점점 높아지는 분단의 벽


    처음 38선이 분단 되었을 때는 남북 모두 경비 초소를 많이 두지 않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직업적인 안내인의 도움을 받아 야간 또는 일기가 불순하여 경비가 느슨한 날을 택하여 많은 사람들이 안내원을 따라 내왕 했는데, 그들이 왕래하게 된 목적은 여러 가지였다. 어떤 이는 신앙의 자유를 찾으려고,  어떤 이는 사상적 자유를 찾으려고,  어떤 이는 상업적인 목적으로,  어떤 이는 방문 목적으로, 또 어떤 이는 어느 쪽이 더 살기 좋은지를 탐색하기 위해 남 몰래 왕래 하다가, 점차 많은 사람들이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자, 북한에서는 경계를 강화하고 엄한 통제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런 엄한 경계망을 뚫고 월남 하다가 어떤 이는 경비원에게 적발되어 뇌물을 주고 빠져 나왔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총격을 받아 목숨을 잃기도 하였으며, 또 어떤 이는 업고 있는 어린아이가 울면 들킬가봐  어린 아이에게 잠 자는 약을 먹이고, 넘어온 자도 있었다고 하니, 갈라진 분단선은 점점 슬픔과 걱정과 한숨과 눈물과 아픔을 가져오게 하는 선으로 변해갔다. 이와 같은 비극적인 38선에 대하여는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수수꺾기와 같은 선으로 변하더니, 625 전쟁이 터지면서 완전히 왕래가 단절되었다. 그 후 휴전이 성립 되면서 새롭게 그어진 분단선, 이것을 가리켜 휴전선이라 하고, 이 휴전선은 절대 넘을 수 없는 단절의 굳은 벽이 되고 말았다.



  아. 삼팔선에 대한 민족적인 비애 


    조국을 분단한 38선을 탄하면서 남인수씨가 부른 "가거라 삼팔선"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1947년에 만들어져서 남인수씨가 불러 히트 친 대중 가요인데, 그 가사의 의미는 삼판설이 막힘으로 고향 땅을 가고파도 갈 수 없게 된 것을 가슴 아파 하면서, 산이 막힌 것도 아니고 물이 막힌 것도 아닌데, 가고파도 갈 수 없고, 소식을 듣고자 애를 써도 들을 수 없어, 그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음에 대한 한 맺힌 심정을 그린 노래다. 



    분단된 삼팔선으로 인하여 생 이별 한 사람들 가운데는, 서울 땅에 공부하러 왔다가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진 자도 있고, 또는 물건을 사기 위해 평양으로 갔다가 헤어진 자, 장터에 갔다가 헤어진 자, 잠간 동안 공무로 출장을 갔다가, 혹은 친정 집에 다니러 간 것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헤어지게 되었으니, 그 사연은 천태만상이었다. 남인수씨의 애절한 목소리가 담긴 이 노래는, 분단으로 인하여 이산 가족의 한이 맺혀 있는 많은 분들의 심금을 울렸던 관계로, 한 때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애창한 유명한 노래가 되었다.


   


  주 : 처음 이 노래가 발표 되었을 때는 남북한 사람 모두 애창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1948년 9월 9일 김일성 정부가 들어서면서 금지 곡이 되었고, 1948년 11월 20일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반공 사상을 약화 시킬 수 있다 하여 가사 일부의 수정 없이는 부를 수 없다는 조건부 금지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자 작사자 이부풍씨는 당국 조치에 반항하여 잠적해 버리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애창하는 노래가, 금지 곡이 될 것을 막기 위해, 당시 가요계 원로들 10여명이 합의 결정하여, 아래 가사 내용 가운데 붉은 글자로 표시한 것처럼 일부는 수정하고, 2절을 새로 삽입 함으로써 다시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가거라 삼팔선   [노래 듣기]


  


                     이부풍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 


              처음 만든 가사 전문


      1. 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다 같은 고향 땅을 가고 오만 


           남북이 가로 막혀 원한 천리길 꿈마다 너를 찾아 꿈마다 너를 찾아 삼팔선을 맨다


   


      2. 아- 어느 때나 터지려느냐 아- 어느 때나 없어지려나 삼팔선 세 글자를 누가 지어서


           이다지 고개마다 눈물이더냐 손 모아 비나이다 손 모아 비나이다 삼팔선아 가거라


   


              노래를 살리기 위해 고친 가사 전문


      1. 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다 같은 고향 땅을 가고 오만 


           남북이 가로 막혀 원한 천리길 꿈마다 너를 찾아 꿈마다 너를 찾아 삼팔선을 한다


    


      2. 아- 꽃필 때나 오시려느냐 아- 눈 올 때나 오시려느냐 보따리 등에 메고 넘는 고갯길 


           산새도 나와 함께 울고 넘었지 자유여 너를 위해 자유여 너를 위해 이 목숨을 바친다


   


      3. 아- 어느 때나 터지려느냐 아- 어느 때나 없어지려나 삼팔선 세 글자를 누가 지어서


           이다지 고개마다 눈물이던가 손 모아 비나이다 손 모아 비나이다 삼팔선아 가거라


   



       


  자. 휴전 후에 새로 그어진 분단선


      (1) 육지에 그어진 휴전선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일어난 625 전쟁은 밀고 밀리기를 거듭하다가, 1953년 유엔군과 북한이 휴전 협정을 협의하게 되었다.


    지상에 대한 휴전선은 남북 양군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지역을 기준으로 별 문제 없이 쉽게 그었는데, 그 선이 아래 도면에서 붉은 색으로 표시된 선이다. 


    휴전선과 38도선을 비교해 보면 동해 쪽으로는 휴전선이 더 북쪽으로 올라갔고, 서해 쪽은 그 반대다. 


    그리고 해상 분계선(NLL)에 대하여는 아래에서 자세히 언급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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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선과 NLL선 그리고 38도선


 


       (2) 해상에 그어진 분계선(NLL)


    해상 분계선에 대하여는 좀 달랐다. 625 전쟁이 일어난 직후, 막강한 유엔군과 한국 해군의 전력에 밀린 북한 해군은 전멸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휴전이 될 때까지 유엔군과 한국 해군이 북한의 동서 연안을 모두 봉쇄하고 통제하고 있었다. 그럼으로 38선 남쪽 지역은 말할 것 없고, 38선 이북 지역에 대하여도 많은 도서들(아래 도면 참조)을 유엔군과 한국 해군이 장악하고 통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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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당시 한국과 유엔군이 점령하고 있던 서해와(왼쪽 도면) 동해 원산항만 도서들(오른쪽 도면)




       휴전 협정을 체결하려고 할 때, 유엔군과 우리 해군은 위와 같은 유리한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클라크(Mark Wayne Clark) 유엔군 사령관이 정전 협정의 정신에 따라 남북한 간의 해상 무력 충돌을 방지하겠다는 의도로, 유엔군이 점령하고 있는 북한 연안 많은 섬들을 비워주겠다고 도에 넘치는 양보 의사를 표하자, 북한측은 자신들에게 너무나 유리한 조건 임으로, 군소리 하지 않고 조인에 응했던 것이다. 만약 휴전 협정 당시 북한이 동의하지 않았다면 휴전이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고, 또 휴전 협정 후 상당 기간이 흐를 때까지 아무런 이의 없이 내려온 경계선이다. 동서 NLL선은 아래 도면과 같다. 이 선이 바로 1953년 8월 30일에 그어진 NLL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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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쪽 NLL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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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쪽과 동해쪽NLL선



      (3) 점령하고 있던 해상을 기준으로 분계선을 그었다면


    만약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양보하지를 않고 점령하고 있던 곳을 기준으로 NLL선을 그었다면, 동서 연안 모두 현재 그어져 있는 NLL선 보다 훨씬 북쪽으로 올라가서 아래 지도에 표시한 붉은 선과 같이 그어야만 했다. 



    옛말에 "물에 빠진 자를 건져 주었더니 봇다리 내 놓으라"는 격이니, 참으로 가소로운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오늘 날 NLL이 잘못 그어졌다고 주장하는 북한과, 남한 일부 무리들의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으로 당시 베풀어 준 은혜를 원수로 갚겠다는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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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그어졌어야 할 NLL선


 


   차. 언론계로 일 자리를 옮기신 소년의 아버지


    소년의 아버지는 해방되기 전부터 오래 동안 영월화력발전소에 다녔다. 그런데 1945년 봄, 발전소에 석탄을 공급하는 일본인 회사 직원들이 발전소에 석탄을 납품하면서, 납품하는 양을 속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문제로 인하여 발전소 보일러실 요원들과 납품 회사 직원들과, 업무적인 마찰이 일어났다. 그것이 발전되어 1945년 3월 28일(해방되기 5개월 전), 발전소 보일러실에 근무하는 한국인 14명과 일본인 회사 직원 3명 사이에, 패 싸움이 벌어졌다. 일본 경찰은 소년의 아버지가 한국인들을 선동하여 일본인에게 항거하게 만든 항일 사건이라면서, 소년의 아버지와 다른 관련자 14명을 모두 구속 송치하여, 그 중 중요 지위에 있던 자 6명에 대하여는 1년 내지 6개월의 징역 형이 각각 선고 되면서, 6명은 좋은 직장인 영월화력발전소로부터 해고 당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벌금 등으로 풀려났다.


   


    조국이 해방 되자, 갇혔던 자 6명 모두 출감하는 것을 본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신상에 위해가 가해질까 염려하여 야반도주(夜半逃走) 하게 되었다. 그러자 발전소에 다니던 많은 일본인들이 덩달아 도망 가는 바람에, 발전소 가동이 어렵게 되었다. 발전소 측에서는 발전 시설을 가동하기 위한 필수 요원 확보가 시급하여, 일본인들이 떠난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해직 되었던 자들의 복직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소년의 아버지는 "발전소에는 다시 나가 일할 생각이 없다"면서 거절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00신문사 사장이신 000씨(1950년 제2대 민의원-1954년 교통 사고로 사망)가 영월 지방으로 순회 강연을 나오셨는데 소년의 아버지가 그 분을 만나게 되었다. 그 분의 부인은 강병주(姜炳周) 목사님의 따님이시고, 강신명(姜信明) 목사님의 누이 동생이다. 그리고 옛날 강병주 목사님이 풍기교회를 담임하고 계실 때, 소년의 조부님, 부모님 모두가 같은 교회를 섬겼기 때문에 옛날부터 서로 간에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런 분으로부터 "언론계에 들어와서, 앞으로 정치계에서 활동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받게 되자, 소년의 아버지는 곧 바로 동의 하면서, 서울로 올라가 00신문사에 입사하여, 사장님의 비서 겸 경호원이 됨으로써, 가족들은 모두 영월에 두고 일터가 있는 서울로 올라 가셨으니 순식간에 이산 가족이 되었다.



  카. 내리막 길을 만난 소년의 가정 형편


    당시 사회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소년의 아버지가 입사한 00신문은 극우파 신문으로, 매일 같이 사설과 논설 등을 통해 좌익계와 중도 파를 향해 독설을 퍼부었다. 그런 관계로 신문사 안에 침투해 있는 좌익계 세포 요원들이, 오늘 00신문 사설에는 좌익계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특종 기사가 포함되어 있고, 지금 인쇄하기 위한 조판이 만들어졌다고  밀고하면, 곧 바로 좌익계 단체에서는 건장한 청년 수십 명을 인쇄소로 급파하여, 조판을 마친 인쇄 원판을 때려 부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났다.  



    그리고 해방 직후 서울에는 좌익 사상을 따르는 정치인들이 우익 사상을 따르는 정치인 보다 더 많았다. 그리고 우후죽순 나타난 많은 신문으로 신문사 경영이 매우 어려운 가운데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아버지가 다니는 00신문사에서는 점차 미 군정청 요원들이 많이 입당해 있는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까지 필설로 가격하기 시작 하니, 자신들의 귀에 거슬리는 신문사를 도와 줄리 만무했다. 



    그런 관계로 신문사는 경제적인 지원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많은 저항을 당하다 보니, 회사로부터 제 때 월급이 나오지 않음으로, 소년 가정의 생활비는 서울에서 영월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고영월에서 농사 지은 식량이 서울로 올라가고 있으니가정의 생활 수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밑으로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2. 매였던 쇠사슬은 풀렸지만


  가. 이념의 차이로 인한 분열


    우리 민족은 가혹한 압제로부터 갑작스레 벗어난 관계로, 모두가 과격한 흥분 속에 빠져 있었고, 또 수많은 정당과 사회 단체가 통일에 대한 핵심체 없이 난립하기 시작하여 사회 혼란의 바람이 일기 시작 했다. 그럴 즈음에 상해 임시 정부가 곧 귀국하면, 정권을 담당하게 되리라고 기대하고 있던 송진우(宋振宇) 계열의 사람들이 있었고, 또 미군이 진주할 때까지 민족 대표 기관(자신이 만든 건국 준비 위원회)을 통해, 미군과 협의 하여 통일 정부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가진 여운형(呂運亨) 계열의 사람들 사이에 의견과 행동이 분열되기 시작했다.



    여운형(呂運亨) 측이 이미 조직해 둔 건국 준비 위원회는 일부 민족 주의자를 위시하여 많은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하면서 다른 정당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을 폭 넓게 받아, 거대한 조직체를 만든 다음 그 이름을 인민공화국(가칭)이라고 정했다. 그렇게 되자 상해 임시 정부가 곧 입국하면 신생 조국의 권력 주체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던 인사들과, 군정청 요원들이 많은 한국민주당(한민당) 당원들, 그리고 좌익계에 가담하지 않은 민족주의자들이 모두 하나로 뭉치면서, 여운형(呂運亨) 계통의 사람들과 대립 하면서 사회 혼란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나. 해외에 있던 독립 운동가들의 귀국


    1945년 9월 경,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할 즈음에,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인사들이 속속 입국하기 시작하였다. 광복군 요원들, 그리고 하와이에 있던 이승만(李承晩), 또 중국에 있던 김구(金九)를 비롯한 임시 정부 요인들 모두가 돌아왔다. 아무리 그들이 입국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의 힘으로는 분열된 사람들의 마음을 합칠 수 없어, 고조된 사회 혼란은 도저히 잠 재울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다. 미군의 진주


    1945년 9월 어느 날이었다. 소년이 살고 있던 영월 땅에도 미군이 진주하였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그들의 진주를 환영하면서 맞이했었다. 그런데 막상 군용차를 타고 들어오는 사람들 모습이 너무나 이상하게 보였다. 눈은 파랗고 머리칼은 붉으스레 하며 얼굴색은 하얀 사람, 태어나서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이상한 모습이기에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 저런 사람도 있는가 하면서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라. 가난했던 우리 민족들의 부끄러운 모습


    영월에 진주한 미군은 매일 한 차례식, 짚차에 츄레이러를 달고 강변으로 나와 생활 쓰레기를 버리고 갔다. 그런데 많은 어린아이들이 떼를 지어 그곳으로 몰려가서, 그들이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와 깡통 등을 줍기 위해 몰려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군들은 풍부한 물자 속에서 살던 사람들이기에, 자신들이 사용하는 물품과 생활 필수품을 허술하게 보관 관리하다가 도난 당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일어났다. 그런 관계로 당시 미군들의 눈에 비추어진 한국 사람의 모습은 어른들은 모두가 도둑놈이고 아이들은 모두가 거지라는 말까지 나돌던 것이 생각난다. 



    참으로 창피한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모습은 거짓이 아닌 사실이기에, 해방 직후 어렵게 살던 우리 민족의 비참한 모습의 단면이라 하겠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어떻게 하랴?, 36년 동안 일본의 학정 아래에서 굶주리고 헐벗으면서 어렵게 살던 민족이기에, 당시 한국 땅 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똑 같은 처지였으니, 부끄럽다는 말이 도리어 잘못된 말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 같다. 


   


3. 진학의 문이 열린 소년


  가. 절망에서 희망으로


    조국 해방이 되면서 학년 초가 3월로부터 9월로 바뀌었다. 1946년 6월 국민학교를 졸업한 소년은 상급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하고, 어머니가 하시는 농사일을 돕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중학교를 간다고 야단 법석인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농사 일에만 매달려 일만 꿍꿍 하고 있었다. 이것을 보신 어머니가 아들의 측은한 모습을 보시고, 서울에 있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아들의 진학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를 상의하게 되었다. 그것을 받아보신 아버지가 사장님께 상의하였더니, 사장님은 자신이 설립했고 또 자신의 처남 강신명 목사님이 교장으로 있는 중학교(서대문구 천연동 61=석교감리교회 옆)에 입학 시키라고 하심으로, 1946년 6월 말경 아들을 데려가기 위해 서울로부터 아버지가 내려 오셨다.



  나. 진학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간 소년


    1946년 7월 4일, 13세의 소년은 희망찬 진학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화물차 짐칸에 올라 타고 제천으로 나가, 서울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는데, 기차는 완행 열차인지라 놀며 놀며 달려갔지만, 오후 늦은 시간 청량리 밖 망우 역에 도착하였다. 몇 일 동안 계속 내린 장마비로 중랑천이 범람하여 청량리역과 망우역 사이 철교에 위험성이 있다 하여 기차가 더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년의 부자는 망우리에서 화물 자동차 짐칸에 올라타고, 청량리로 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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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군정청,중앙청으로 사용하다 철거된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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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서울 시민의 발이었던 전차



     


    소년은 난생 처음 보게 된 전차에 몸을 실었다. 움직이기 시작한 전차는 동대문 옆을 지나, 종로통(鐘路通=종로)을 거쳐 광화문통(光化門通=세종로)에 이르렀기에, 거기서 내린 다음, 걸어서 군정청(軍政廳) 앞을 지나, 다시 경성의전병원(京城醫專病院) 앞, 그리고 건춘문(建春門)과, 광화문(光化門) 앞을 지나, 정착할 소격동(昭格洞)에 있는, 00신문사 사장님 댁 가까이 있는 적산 가옥(敵産 家屋)방 한 칸에 짐을 풀었다


    그 때 들어간 집 한 채에는 네 가구가 방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어, 마치 시골에 있는 여인숙과 같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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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청과 사간동(司諫洞) 사이 길 


좌- 경성의전병원, 우- 경복궁 돌담 광화문 건춘문


 


  주 : 적산(敵産) 재산(토지와 가옥)이란?


    용어 상의 뜻은 적(敵)이 가지고 있던 재산이란 뜻인데, 일본 치하일 때 우리 땅에 있는 토지 또는 가옥 등의 재산을 일본인이 찬탈하여 소유하고 있다가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후, 그들이 두고 간 재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 신문 배달로 하루를 시작하는 소년


    서울에 도착하자 곧 바로 아버지는 정치인인 사장님을 경호하기 위해 전국 각지로 계속 출장 나가시고 거이 혼자 있게 되었다. 그런데 소년이 서울 사람이 된지 겨우 3일 째가 되던 날(7월 7일)부터 신문사에서는 신문을 배달 하라면서, 야간 통행을 위한 신분증과 독자 가정의 주소 성명이 적힌 기록물을 넘겨 주는 것이었다. 배달할 가정 수는 30 집이 채 되지 않았는데, 매일 같이 신문사에서 주는 신문 부수는 100부를 주겠다면서, 얼마 동안은 그 중 25부는 대금의 6할을 신문사에 납부하고, 남는 신문으로 구독자를 확장해 나가라는 것이었다. 세상 물정도 모르고, 서울 지리도 모르며, 사회 경험도 없는 어린 촌놈이, 남들이 잠자는 새벽 3-4시에 일어나, 군정청 정문 가까운 곳에 있는 신문사로 달려가 신문을 받아, 멜빵을 만들어 한쪽 어깨에 둘러 맨 다음, 인왕산 아래 7개 동(적선, 내자, 체부, 누상, 누하, 필운, 사직동)을 뛰어다니면서 독자의 집을 찾아, 대문 틈 사이로 방금 인쇄되어 나온 조간 신문을 넣어주었다. 그러면서 선전용 무가지(無價紙)를 뿌리면서 구독자 확장을 위한 일을 시작했다.  


 


  라. 극우 신문이라 테러의 위험성을 안고


    00신문은 매일 같이 좌익계를 필설로 두들기는 신문이었던 관계로, 신문사는 물론 배달원들까지 좌익계 사람들로부터 자주 테러를 당하기도 하고, 배달하던 신문을 빼앗기는 경우가 많았다. 겨우 13세 밖에 되지 아니한 어린 소년이 사상에 대하여 무엇을 알겠는가? 그저 시키는 대로 일하러 나간 것 뿐이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두운 새벽 시간, 힘도 없는 어린 것 혼자 공포의 밤거리를 뛰어 다녔지만,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아무런 사고 없이 지날 수 있었으니, 하나님의 크신 은혜 감사할 일이다.



  마. 항상 피곤한 몸을 이끌고


      (1) 바쁘게 움직이는 생활


    매일 같이 새벽 일지기 일어나는 관계로 육신은 항상 피곤했다. 그런 관계로 어떤 자리던 앉기만 하면 꾸벅꾸벅 졸 수 밖에 없는 피곤한 생활이 계속 되었다. 9월 초, 입학식을 마치고 공부가 시작 되었으니, 새벽에는 일어나 신문을 배달해야 하고집으로 돌아와서는 아침밥을 만들어 먹어야 했으며다시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새벽 시간 뛰어 다니던 방향으로 발길을 옮겨 배화여고와 사직 공원 옆을 지나, 인왕산 줄기 고개(오늘 날 사직 터널 위에 있는 고개 길)를 넘어, 서대문 밖 천연동에 있는 학교로 갔다. 그리고 학교 공부가 끝나면 다시 사직동 고개를 넘어, 신문 배달 구역으로 들어가서, 미수 된 신문 대금을 수금한 후집으로 돌아와 저녁 먹거리를 만들어 먹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2) 독자 가정으로부터 받은 사랑


    어느 날 낮 시간 신문 대금을 수금하기 위해, 적선동에 있는 000 독자의 가정에 들렸는데, 아주머니가 보시더니 "아이구 우리 집에 신문 넣어주는 고학생이구만, 우리 집 000만한 어린 학생이 배달하고 있군, 배고플 터이니 들어와서 점심이나 먹고 가"라면서 밥상을 차려 주는 것이었다. 오래간 만에 먹어보는 하얀 쌀밥, 그것을 먹으면서 영월에 계시는 어머니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60년이 훨씬 넘은 긴 세월이 흘렀지만 그 때 적선동의 그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훤하게 보이고 있다....... 고마웠던 그 분들은 지금도 살아 계실까? ..........



      (3) 시간을 아껴 쓰는 고학생들


    학교에 가면 수업을 받는다고 교실에 들어가 앉지만 퍼붓는 졸음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눈을 부라리면서 억지로 졸음을 참고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 오전 공부를 마치고 점심 시간이 되면, 도시락을 싸올 수 없어 굶는 학생들이 상당 수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고학하는 학생들이었다. 점심 시간이 되면 그들은 약속이나 한 것 같이 남들이 보지 않는 곳으로 모두 옮겨가서, 몇 사람씩 그룹을 지어 수업 시간에 졸음으로 놓친 내용들을 서로가 묻고 답하면서, 만회하는 기회로 삼는 귀중한 시간으로 활용했었다. 



  바. 소년 고학생의 생활 이면


      (1) 계속되는 외로운 삶


    아버지와 같이 있다고는 하나, 혼자 있는 것과 다름 없었다. 아버지는 정치인 사장의 비서 겸 경호원이기 때문에, 군정청 고관인 민정장관 안재홍(安在鴻)씨, 경무관 조병옥(趙炳玉)씨, 수도 경찰청장 장택상(張澤相)씨, 그리고 돈암장 이승만(李承晩) 박사, 죽첨장 김구(金九) 선생, 서북청년단 서상천(徐相天)씨와, 광복군 출신 이청천(李靑天=본명-지대형) 장군 등, 많은 정치인들을 만나느라 매일 같이  새벽 일지기 나갔다가 밤 늦게 돌아 오시곤 했다. 거기에다 자주 지방으로 출장까지 나가시니, 함께 집에 있는 경우는 거이 없었다.


  


      (2) 그렇게도 먹고싶던 떡


    찬 바람이 부는 초 겨울 밤, 사과 궤짝을 책상 삼아 공부를 하는데, 먼 곳에서 처량하게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가 소년의 고막을 울리고 있다. 귀를 기우려 들어 보니 "찹쌀 - 떡, 개피 - 떡"이라는 장사꾼의 외치는 소리였다. 찹쌀 떡은 국민학교 다니던 일제 때, 천장절(てんちょうせつ=4월 29일=天長節=일본 임금의 생일)이나, 지구절(ちきゅうせつ=3월 6일=地久節=일본 왕후의 생일)이 되면, 학교에서 전 학생들에게 찹쌀 떡(もち=餅) 한 개씩 나누어 주어 맛 있게 먹은 적이 더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찹쌀 떡은 맛 있는 떡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개피 떡은 도대체 어떤 떡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 수가 없어 무척 궁금 하기도 했고 또 먹고 싶기도 했다. 물론 그것도 찹쌀 떡처럼 맛 있는 떡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 먹기 때문에 팔고 다니겠지, 먹고 싶은 생각이야 굴뚝 같았지만, 사 먹을 처지가 되지 않음으로, 귀 동양으로 넘어 가기를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들려오던 떡 장수 소리는 먼 곳으로 사라졌다가, 얼마 후 다시 들려오면서 고학생의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3) 고학생의 식생활


    얼마가 지나가자 집에서 가지고 온 보리쌀은 모두 바닥 났다. 그러므로 식량을 구매해야 할 처지가 되었는데, 때 맞추어 동사무소로부터 식량 배급을 받아 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 식량 배급은 식민 지배를 받다가 방금 해방된 미개한 나라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세게 여러 나라에서 보내온 잉여 농산물을, 군정청이 인수하여 동사무소를 통해 무상으로 나누어 주는 구호 물자 밀가루였다. 계속 밀 가루가 배급된 관계로 많은 서민들은 칼 국수, 수제비, 빵 등으로 끼니를 이어가는 실정이었으니당시 우리 민족 서민들의 주식은 쌀이 아니고 밀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는 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 때 고학생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계속되는 밀 가루 배급으로 칼 국수 만드는 선수가 되어 있었는데, 하루는 밀가루가 아니고 통밀 배급이 나왔다. 배급 받은 밀로 음식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걱정이 되어, 옆에 사시는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맷돌로 갈아서 가루를 뽑은 다음, 가루와 밀기울로 각기 맞는 음식을 만들라고 하기에, 맷돌을 돌려 보았더니 너무나 힘이 들고, 또 손 바닥에 물집이 생기기도 했다.



      (4) 고학생의 의복 손질


    소년은 신문 배달 하기 때문에 뛰어 다니는 경우가 많아, 옷을 자주 빨지 않고서는 땀 냄새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갈아 입을 여유 옷이 있다면 빨래거리를 모았다가 함께 빨면 되겠지만, 일본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민들의 형편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집에서 입는 막 입는 옷 한 벌과,외출 때 입는 교복이 전부였다. 그런 관계로 매일 같이 공동 수도 가에서 교복을 손빨래 해서 입을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빨래한 옷은 밀 가루 풀을 먹인 다음, 햇볕에 말려, 다시 마른 옷에 물을 품어, 주름 살을 편 후, 발로 밟아, 말리는 것으로 다림질을 대신 했다.



      (5) 주일이 되면


    어느 날 소년에게는 안국동 길 거리에서 구두 수선하는 사람이 파는 중고 단화 한 컬레를 아버지가 사 주셨다. 그래서 주일이 되면 교복에다 그 것을 신고 사장님의 자녀들이 인도 하는 대로 안국동교회로 나가 주일을 지켰다. 그러던 어느 주일 아침, 같은 건물에 살고 있는 단국대학생 한00씨와, 사장님의 운전을 담당하는 강00씨가 찬송 성경을 들고 교회에 간다면서 나가기에 소년도 그들을 따라 나섰다. 약 3-40분 정도 걸어서 중구 저동에 있는 베다니교회(후에 영락교회로 개명=한경직 목사 시무)에 이르러, 그들과 함께 한경직 목사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들으면서 예배를 드렸다. 그 후에는 거이 베다니교회로 나가서 주일을 지켰다.



      (6) 고생 중에 느낀 행복


    당시 베다니 교회는 마치 이북에서 넘어 오신 분들의 면회 장소와 같았다. 매 주일 예배가 끝나면 새로 이북으로부터 월남해 오신 분들이 가져온 새로운 소식을 나누었기 때문에, 월남하신 분들이 모이는 유일한 만남의 장소이자, 친교 하는 장소였다. 물론 소년의 고향은 38 이북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외롭게 사는 것은 그들과 같았기에, 그들을 만나는 가운데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일제 치하 우리 어른들은 애써 지은 농산물을 공출(供出)이라는 명목으로 침략자인 일제에게 모두 빼앗기고 먹을 것이 없어 굶을 때가 많았던 것을 많이 보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혼란한 세상 속에서 혼자 고학하는 소년이기에, 비록 아침에는 어머니가 보내준 잡곡으로 밥을 지어 먹고, 또 점심은 굶고, 저녁은 밀 가루로 만든 음식을 먹을 망정........옛 어른들의 삶에 비하면 그래도 양반이 사는 생활이라고 생각 되었다. 그 뿐 만이 아니었다. 자유롭게 일도 할 수 있고. 또 공부도 할 수 있으니, 이 모든 것이 행복한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와 같은 행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 향수 속에서 깨달은 어머님 은혜


    서울에 올라간지 열흘 정도가 지난 7월 13일, 아버지는 경남 지방으로 출장 가고 안 계시던 토요일이었다. 그 날도 새벽 일찍이 일어나 신문 배달을, 그리고 낮 시간에는 옷을 빨아 햇볕에 말렸고, 저녁을 먹은 후, 내일 교회 갈 때 입을 옷을 손질하고 있었다. 미닫이 문을 열고 하늘을 처다 보니, 맑은 하늘에는 둥근 보름 달이 나를 비추어 주고 있었다. 한참 동안 밝은 달을 처다 보던 소년은 외로움 속으로 빠져 들어가, 자신도 모르게 향수에 잠기면서 눈물이 솟아 오르는 것이었다. 지금 영월에 계시는 어머니도 저 달을 보고 계시겠지, 호열자(전염병 콜레라=Cholera)가 창궐한 경남 지방으로 출장 가신 아버지도 역시 저 달을 보고 계시겠지? 


   


    외로움 속에서 문뜩 생각 난 것은, 지난 13년 동안 내가 어떻게 자라났는가? 세상 걱정 모르고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운 일들을 부모님이 대신해 주셨기에 편안히 자라날 수 있었던 것 아니냐? ...... 지난 날 어머니가 나에게 베풀어 주시던 많은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 속에 떠 오르면서, 한참 동안 깊은 향수에 빠져 있다가, 어느 순간 외로움의 눈물이 감사의 눈물로 변하는 것이었다.


   


  주 : 1946년 여름 우리나라에서 가장 극심한 콜레라(호열자) 질병이 발생한 적 있었다. 1946년 5월 초, 부산 앞 바다에는 3000여명의 귀국 동포를 실은 중국 선박이 들어왔는데, 그 선박에는 일제 때 싱가포르로 징용 당해 갔다가 돌아오던 청년 한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는 배 안에 있을 때 토하면서 심하게 앓다가, 배에서 내리자 마자 곧 사망하였는데, 그 병이 무서운 전염병 콜레라였다고 한다. 콜레라는 급속도로 번져나가 몇 일 사이에 경상남도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그로부터 약 6개월 동안 전국을 휩쓸다가 첫서리가 내리는 11월에야 기세가 꺾였다. 당시 경남 도내에서 사망한 자가 무려 1만 여명이라고 하고, 전국적으로는 3만 여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아. 다른 고학생을 보고 위로 받은 소년


    그 때 신문사 사장님 댁에는 영월에서 혼자 서울로 올라와서 야간학교를 다니는 남자 고학생 최00라는 학생이 있었다. 그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 집에서 식모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하고 있었다. 그 때 사장님 댁 형편을 보면, 사모님은 신문사 주필이기 때문에 항상 공무에 바빴고, 열 살이 갓 넘은 딸 둘(한 사람은 친척인 듯)이 있었으며, 또 어린 꼬맹이 아들 하나가 있었다. 영월에서 올라 온 고학생은 시장 가서 장봐 오고, 밥하고 반찬 만들고, 빨래하면서,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돌봐 주는 일에 정성을 다해 묵묵히 일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소년은 공부를 하기 위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신문 배달 정도는, 그 형이 하고 있는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꾹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 때 고생하면서 공부하던 그 형은 모든 공부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영월로 내려가 교편을 잡고 일하다가, 마침내 영월중학교 교감 선생님이 되신 것을 나중에 보고, 참 훌륭하신 분이라고 한 번 더 우러러 보게 되었다.


   


4. 사상적 차이로 가중되는 사회 분열


  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군정 방법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처음에는 조만식(曺晩植)을 내세워 인민위원회를 조직케 하고 군정하의 행정을 담당케 하다가, 곧 이어 김일성(金日成)에게 위원장 직을 맡기면서 북조선 인민위원회 조직을 강화하도록 만들어, 공산주의 정치 체제의 정착 작업을 다듬어 나갔다. 북조선 인민위원회는 소련군정의 힘을 업고 반대 세력을 일찌감치 숙청하고서는 사상과 체제에 맞는 세력을 규합하게 됨으로써, 짧은 시일 안에 정치적인 안정을 구축하였다. 그렇게 한 다음 남한사회의 혼란을 획책하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통일 국가를 이루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남한 흔들기에 손을 뻗기 시작했다. 남한 흔들기 위한 방법은 세포 요원을 남한으로 침투시켜 요인에 대한 납치와 테러, 그리고 중요 시설에 대한 파괴와 공작 등을 그 실천 방법으로 채택했던 것이다.



  나. 해방 직후 남한에 있었던 좌익 세력


      (1) 수적으로 많은 좌익 정치인 


    36년 동안의 일제 강점 하에 있을 때, 나라를 구하겠다는 뜻 있는 애국 지사들이 조국을 떠나 해외로 빠져나가 일제에 항거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조국 땅과 가까운 곳일수록 활동하는데 경비가 적게 들고, 또 국내 사정도 쉽게 파악할 수 있으며, 일본에 대한 항거도 용이하였고, 많은 애국 지사들이 서로 간에 연계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던 관계로, 먼 미주나 서구지방으로 나가기 보다 가까운 만주나 중국 등지에서 활동하신 분들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었다. 만주 지방은 소련과 인접해 있는 곳이어서 소련의 영향을 받아 소련식 공산주의 사상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사상이 좌익 계통으로 치우쳐 있었는데, 막상 조국이 해방되자 그들이 배우고 가진 사상을 그대로 들고 귀국 하였기 때문에, 남한 사회에도 좌익 사상을 가진 정치가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 사상이 좌우로 갈린 남한 사회


    해방된 우리 나라 북쪽은 공산주의 사상 국가인 소련군이 진주하여 군정을 펼치고 있었고, 또 좌파 사상을 가진 자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공산주의 체계로 안정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남쪽에는 민주 국가인 미국 군대가 진주하여 군정을 펼치고는 있으나, 사상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을 보장한 관계로, 비록 사상이 다르다 하더라도 그들 정당 또는 단체들이 하는 일들을 자율에 맡기고 전혀 억압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자유 민주주의 정치 체제가 전개되고 있는데다, 해외로부터 귀국한 많은 독립 운동가들 가운데는 중국이나 만주 등지에서 활동하던 분들이 월등하게 많다 보니, 우익 보다 좌익 세력이 더 강할 수 밖에...........



      (3) 좌익 세력들의 준동


    해방 직후 서울에 생겨난 좌파 계열의 많은 정당과 단체들이, 크고 작은 많은 사건들을 주도하면서 문제를 일으켰다. 그렇지만 미군정은 자유를 보장한다면서 지나친 통제를 가하지 않았다. 그러자 좌익계 인사들은 합법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공산주의 운동이라면서, 노동자농민들을 선동하여 각종 파업 투쟁 등을 주도하게 되었다. 좌파 세력들은 남한의 정치, 경제, 사회를 교란 시키기 위한 술책의 도를 점점 높여가면서 여러 사건들을 주도하여 일으켰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서 자세히 언급) 그리고 계속 일어나는 혼란을 틈타 여러 가지 정당 단체들이 조직되어 나왔다. 그 중 중요한 것을 들면,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노동당, 남조선신민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전평)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청년총동맹, 부녀총동맹 등 각종 분야에서 여러 가지 좌파 단체들이 생겨났다. 



    얼마 후 위의 여러 좌파 단체들이 연합하여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을 형성하였고, 그 사무실이 바로 남대문 옆에 있었다. 이 때 좌파 단체에는 상해 임시정부 시절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던 김원봉(金元鳳), 장건상(張建相), 성주식(成周寔), 김성숙(金星淑), 그리고 중도 우파에서 활동하던 이극로(李克魯), 천도교 간부 오지영(吳知泳), 여운형(呂運亨), 박헌영(朴憲永), 허헌(許憲), 이주하(李舟河),  김삼룡(金三龍), 이관술(李觀述), 이현상(李鉉相 등이 여러 좌파 단체에 가담 하였고, 여러 좌파 단체들이 사회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4) 남조선로동당


    해방 후 미 군정 시절, 남한에서는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은 여러 좌파 정당과 단체들이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결성도 하였고, 또 활동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45년 조선공산당이 정판사 위조 지폐 발행 사건(아래에서 상세히 설명)을 일으키자, 미 군정이 통제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활보하던 조선 공산당의 활동은 지하로 숨어 들면서, 그 활동은 거의 정지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좌익계에서는 1946년 11월 23일 남한에 있는 공산주의 세력을 재정비하기 위해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을 합당하여 "남조선로동당 (南朝鮮勞動黨=줄여서 남로당)"이란 이름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여운형(呂運亨)을 남조선로동당의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 되었고 부위원장엔 박헌영(朴憲永) 선출 되었다. 그러나 당내 주도권 장악 문제로 여운형(呂運亨)과 박헌영(朴憲永)은 지속적으로 갈등을 일으키다가, 박헌영(朴憲永)이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여운형(呂運亨)이 추진하는 좌우 합작을 비판하기 시작하자, 여운형(呂運亨)은 탈당하여 근로인민당을 창당했다. 1946년 12월 2일, 허헌은 기자 회견에서 사로당(사회로동당)을 겨냥하여 "기회주의적이고 영웅주의적인 태도로 인민의 갈 바를 혼란 시키는 것은 절대로 배격하는 바"라고 비난하면서, "진실로 독립과 인민의 이익을 위하여 싸우려는 진정한 동지는 남로당에 모두 들어오라"면서 좌익계의 단결을 호소했다.



    1948년 8월 남로당과 북로당은 연합중앙위원회를 설치하고, 1949년 6월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으로 그 조직 명칭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 합당은 일반 당원들에게는 비밀로 한 합당이었다. 그래서 1949년 6월 합당 후에도 남한에서 활동하는 노동 당원과 게릴라들을 선동하고 격려하는 문서에는 계속 남로당이라는 명칭이 사용 하였다. 그 이유는 남한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북한이 개입하여 일으킨 것이 아니고, 남쪽의 인민들의 자발적으로 봉기한 저항이라고 위장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미 군정청이 좌익계 인사들의 검거를 강화하기 시작하자, 박헌영(朴憲永)을 비롯한 좌익계 많은 인사들이 월북해 갔다. 처음 그들은 북한에서 상당한 세력으로 자리 잡았으나, 1955년에 이르러 김일성(金日成)에 의하여 그들은 모두 숙청 되었다. 이후 남조선로동당은 공식적으로는 사라졌지만, 대한민국 안에서  "남로당"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혼란을 야기 하였는데, 그것은 조선로동당의 지부를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라고 본다. 



      (5) 기타 좌파 정당과 단체


    그 외에도 여러 좌파 정당 단체들이 많이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생략하겠다



  다. 난립하는 우파 정당과 단체


      (1)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1946년 2월 8일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가 조직 되었는데, 이 단체는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중앙위원회와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 등 여러 단체가 합하여, 독립이 완전하게 이루어질 때까지 힘을 합한다는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 때 총재에는 이승만(李承晩), 부총재에는 김구(金九), 김규식(金圭植), 고문에는 권동진(權東鎭), 김창숙(金昌淑), 함태영(咸台永), 조만식(曺晩植), 오화영(吳華英), 회장에 오세창(吳世昌) 등이 추대되어, 이 단체에서는 반탁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의 반대 운동, 좌익 봉쇄 등의 광범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후일 위 인사들 중 일부는 의견의 대립으로 중도파로 옮겨간 인사들이 있다.


    


      (2) 한국민주당


    1945년 9월 4일 우익 진영의 인사 82명이 서울 종로국민학교에 모여 한국민주당(한민당) 준비위원회 발기 총회를 개최했다. 한민당 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 8일 성명을 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만이 정권의 주체"라고 선언했다. 1945년 9월 9일 미 24군단이 한반도 입성하여 군정을 선포하였고, 9월 10일에는 한민당 계열 오금선이 미군 장교와 만나, 한민당의 송진우(宋鎭禹)를 소개하였으며, 그 다음 날인 9월 11일에는 군정사령관과 미 정보참모부 요원들이 한민당의 주요 인물인 조병옥(趙炳玉), 윤보선(尹潽善), 윤치영(尹致暎) 등을 만나 한반도 상황을 청취했었다. 그리고 1945년 9월 16일에는 천도교 강당에서 1600 여 명의 발기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대회를 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 정부로 맞이할 것을 다짐하였다.


   


      (3) 한국독립당


    1928년 이시영(李始榮), 김구(金九), 안창호(安昌浩), 조소앙(趙素昻) 등이 상하이(上海)에서 독립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독립 운동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1930년 만주에서 내려온 독립 운동가 지청천(池靑天=본명은 지대형인데 독립 운동 활동 시 이청천이란 가명으로 활동하다 귀국 후 지청천이라고 했다), 여준(呂準) 등과, 또 조선 혁명당 인사인 이탁(李鐸),현익철(玄益哲) 등을 만나, 그들 모두가 뜻을 같이 하기로 합의한 후, 새로 태어난 한국독립당으로 재정비 하였다. 이 때 한국독립당은 복국(復國=나라를 다시 세운다) 구족(救族=민족을 구한다) 구세(救世=세상을 구한다)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채택하면서 김구(金九)의 영도 하에 강력한 항일 투쟁을 향해 나아갔다. 


  


    1938년에는 충칭(重慶)에서 광복군을 조직하여 임시 정부의 정규군으로 삼고 실력으로 국토 광복전을 획책하는 등 상하이(上海) 난징(南京) 창사(長沙) 광둥(廣東) 쓰촨(泗川) 충칭(重慶)으로 본부를 옮기면서 해외 투쟁사의 주류를 이루었다. 광복을 맞아 임시 정부와 함께 귀국한 뒤에는 국민의회 독립촉성국민회 등의 중심 세력이 되어 반탁 남북 통일 운동에 노력했다. 위 인사들 중에는 후일 의견의 대립 등으로 중도파로 옮겨간 인사가 있다. 


 


      (4) 민중당


    이종형(李鍾滎)을 당수로 한 민중당이 생겨났고, 그 외에도 많은 정당들이 생겨났다.



      (5) 민족청년단


    이범석(李範奭)은 청년들을 광복된 새 나라의 역군으로 조직화하고 훈련하는 것이 제일 시급한 일이라 판단하고,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민족청년단"을 창설하였다. 미군정도 청년단체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 되었기에 1946년 중반, 비밀리에 지원하였다. 비밀로 한 이유는 북한에 진주한 소련에서 문제들 들고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동경에 있는 맥아더(MacArthur) 사령부로부터 자금 지원과 차량 지원, 제복 공급 등을 지원 받도록 도와 주었다. 그리고 안호상(安浩相)으로 하여금 족청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게 했고, 김활난(金活蘭), 백낙준(白樂濬), 최규동(崔奎東), 현상윤(玄相允) 등을 이사로 영입하여 이사회를 구성케 도왔으며, 수원에 있는 구 일본군 육군병원 건물을 족청 중앙본부로 쓸 수 있게 하였다. 



    족청은 1946년 10월 9일 창설 직후에는 300명에 불과했으나, 1년 뒤에는 30만 명, 2년 후에는 120만 명이 되었다. 1947년 4월 한국 광복군 총사령관이던 지청천(池靑天) 이 귀국하여 대동청년단을 결성하면서, 족청과 합류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범석(李範奭)의 합류 거부로 대동청년단은 족청과의 경쟁 관계로 돌입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총선에서 족청에서 6명의 당선자가 나왔으며, 나중엔 원내 교섭 단체까지 구성할 정도로 그 세력이 커졌다. 



      (6) 대동청년단


    1947년 4월 광복군 총사령관이었던 지청천(池靑天)이 귀국하여, 청년 단체의 대동 단결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우익계열의 32개 단체를 통합, 결성하였다. 이후 우익 단체 간에 권력 다툼이 가열되기 시작하였다. 대동청년단은 625 전쟁이 일어난 후 인민군에 의하여 많은 단원들이 학살 되면서 그 자취를 감추었다.


   


      (7) 서북청년단


    서북청년단은 미군정 당시 조직된 대한민국의 반공주의 청년 단체이다. 해방 정국에서 우익 청년 단체로 활동하면서 대한혁신청년회, 함북청년회, 황해청년부, 북선청년회, 평안청년회 등 이북 출신 청년회를 통합하여 그 세력을 확장했다. 위원장은 1946년 2월에 월남한 선우기성(鮮于基聖), 그리고 활동 자금은 한반도 서북부 출신 사업가들과 미 군정청 고위 관리들, 그리고 이승만(李承晩) 계열의 대한독립 촉성국민회에서 후원했었다.



      (8) 대한청년단


    우익 청년 단체들 간의 암투가 치열해지고 다른 청년 단체들도 계속 우후죽순 생겨나자 이승만(李承晩)은 청년 단체들의 통합을 지시했다. 날이 갈수록 커지는 이범석(李範奭)의 족청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도 있었고, 준 국가 기구적인 성격을 띤 대한청년단을 조직하여 위 여러 청년 단체들을 모두 흡수하도록 했다. 1948년 10월 4일 대한청년단을 창립하면서 단장에는 신성모(申性模)가, 감찰국장 겸 건설국장은 김두한(金斗漢)이 맡았다. 10개 도지부, 9개 서울 구 지부, 17개 지방지부, 180개 시 지부, 4천 230개의 군 읍지부로 구성되었다. 1948년 12월 31일 회원 수는 300만에 달하는 거대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라. 중간파의 출현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한의 일부 정치가와 북한측이 벌인 정치적 회합이 있었다. 대한민국 수립 이전에 김구(金九)는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반대하고 김규식(金圭植), 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남북 협상을 통해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입각한 통일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남한 대표들이 참석하기 전인 4월 19일 전(全)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소집하여 28명의 주석단(主席團) 선출을 마친 상태였다. 4월 22일 김구(金九), 김규식(金圭植)은 막상 평양까지 갔지만, 이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무의미 하게 되었음을 판단하고 참석하지 않았고, 또 북한에 있던 우익 지도자 조만식(曺晩植) 역시 참석을 거부하였다. 결국 이 회의는 공산주의자들의 주도(主導) 하에 모든 것이 이미 끝이 난 것이기에, 김구(金九) 일행은 협상의 실패를 선언하는 짤막한 성명서를 발표한 뒤 남한으로 귀환하였다.



5. 모스코바 삼상회의 결과에 따라


  가. 모스코바 삼상회의란


    1945년 12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 영, 소 3개국의 외상 회의는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한 모임이었다. 일본에서 억압 받다 풀려난 모든 지역의 처리 문제, 그리고 얄타 협정에서 결정된 한국 문제에 관한 토의였다. 1945년 12월 27일 이 회의에서는 한국에 관한 문제를 다음과 같이 처리 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1. 신탁통치


        2. 미소 공동 위원회 조직 


        3. 38 도선에 관한 문제를 여기에서 결정하였다.



  나.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


    분단된 우리나라는 미소 양국에 의하여 각기 군정으로 통치되고 있었는데, "모스코바 삼상 회의"에서 한국에 대하여는 최고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한다고 결정하였다. 그러자 이승만(李承晩)을 중심으로 한 우익 세력은 즉각 신탁 통치를 반대하였고, 북한 공산당 김일성(金日成)을 중심한 좌익 세력은 잠간 동안 신탁 통치를 반대하다가, 갑자기 찬성으로 바뀌었으며, 또 김구(金九), 김규식(金圭植)을 중심한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남북 공동 정부 수립만을 고집, 북한을 여러 차례 왕래 하면서 협상하였으나, 끝내 김일성(金日成)과의 협상이 결렬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의 사상과 이념은 좌우와 중도 세 갈래로 찢어지면서 파벌간에 대립이 가열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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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계의 신탁통치 절대 반대 데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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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계의 신탁통치 절대 지지 데모



            


  다. 미소 공동 위원회의 결열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에 의하여 조직된 미·소 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1946년 1월에 열렸고, 이어 3월에는 본 위원회가 열렸는데, 소련측이 장차 세워질 임시 정부를 위한 협의 대상에서, 신탁 통치를 반대하는 정당 사회 단체는 제외해야 된다고 주장 함으로서, 미국측과 의견 대립이 나타났다. 그런 가운데서 진행되던 회의는 시간이 흐를수록 결렬 상태로 빠져 들어가다가, 모든 문제점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다시 2차 회의를 열었다.



    1947년 5월에 열린 제2차 회의는 여러 정당·사회 단체로부터 장차 수립될 임시 정부 정책에 관한 의견서를 수집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이승만(李承晩)을 중심한 한민당과 민족 통일 총본부에서는 모스크바 3상 결정을 취소하고 즉시 독립 과도 정부를 수립하자는 요구였고,


        2. 김구(金九)를 중심한 임시정부 계통의 한국독립당(한독당)은, 국민의회를 구성하여 반탁 운동을 근본으로 하되, 좌우 합작과 남북 통일을 실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3. 김규식(金圭植), 여운형(呂運亨) 등 중간파(중간우파와 중간좌파)들은 좌우 합작 운동을 적극 추진하자는 것으로, 그 방법은 먼저 임시정부를 수립한 후, 미·소 공동위원회의를 통해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각기 다른 주장들이 계속 대립 되었던 관계로, 1947년 5월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기는 하였으나, 미소 냉전이 격화되면서 McCarthyism 열풍이 고조 되면서, 양측의 입장만 확인한 상태로 완전 결렬되고 말았다.


       


6.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사건들


  가. 정판사 위조지폐 발행 사건


    정판사 위조 폐폐 발행 사건은 1946년 5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주동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1945년 소공동에 있는 정판사(精版社) 건물로 조선공산당이 입주하여, 그들의 기관지 "해방일보"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조선 정판사는 일제 때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인쇄소이다. 정판사 건물에 입주한 "해방일보" 사장은 권오직이었고, 편집인 겸 주간은 조일명이었다. 조선공산당 당원인 김창선이가 일제 때부터 정판사 직원으로 근무하였는데, 그가 지폐 발행 인쇄 원판을 훔쳐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조선 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과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 등이 사전 모의하여, 정판사 사장 박낙종과 서무과장 송언필을 설득하여, 조선공산당의 활동 자금 마련과 남한 경제의 교란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개인적인 이권도 노리기 위해, 정판사 시설을 이용하여 약 1천 2백만원 어치의 위조 지폐를 발행하여 시중에 유통 시키다가, 수도 경찰청에 의하여 적발 되었다. 이 사건이 터지자 권오직은 38선 이북으로 도망 하였고, 이관술은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으며, 그 외 관계된 자들이 각각 상응한 처벌을 받았던 사건이다.


   


  나. 전국적으로 일어난 총파업


      (1) 총파업울 일으킨 원인


    1946년 9월 24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가 일으킨 총파업의 규모는 전국적이었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보면, 해방 당시 북한은 광공업 위주인데 반해, 남한은 농업 위주였다. 그렇지만 식량 부족 현상이 일어났다. 전평측에서는 남한 사정에 어두운 미 군정이 영농 정책을 잘못하여 식량 생산성이 떨어졌고, 또 외국에서 식량 원조가 들어오고 있지만, 이 것 역시 관리를 잘못 함으로 식량 부족 현상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러, 민생이 도탄에 빠졌으니, 노동자가 일할 수 있는 생활 조건을 마련해 달라는 이유와 조건을 내세워, 대규모적인 파업을 일으킨 사건이다. 


   


    그리고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첫 째는 미 군정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규제를 가하지 않는다는 점을 악용하여, 공산당이 대중 투쟁을 전개하는 새로운 전술로 전환하여 남한 사회의 붕괴를 촉진 시키겠다는 점이었고, 둘 째는 1946년 5월에 조선 공산당이 일으킨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미 군정청이 "공산당 활동의 불법화"를 선언하면서, 조선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려진 점에 대하여 반발하여 모든 사람들이 식량 문제와 전염병 문제로 고통 당하는 것은, 미 군정의 무능함에 있다는 것을 이유를 들어, 노동자 총파업에 조선공산당이 편승하여 미 군정에 대항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2) 철도 총파업의 전국 확대


    드디어 1946년 9월 13일 서울 용산에 있는 철도국 경성공장 노조원 3000명이 일으킨 농성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들의 요구사항은 계속적인 점심 제공, 일급제를 폐지하고 월급제 실시, 미곡 가격에 상응하는 임금 인상, 식량 배급 등을 요구 조건으로 내 걸었으나, 이 요구 조건이 관철되지 않자, 그들은 태업을 거쳐 파업으로 확대하여, 부산철도국 7,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9월 23일 0시를 기하여 파업을 시작하였고, 다음 날에는 서울철도국의 1만 5,000 여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단행함으로써, 순식간에 파업은 전 남한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모든 열차의 운행이 중단되었고, 남한의 철도 교통망은 일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미 군정청은 더욱 강경하게 대립하게 됨으로써, 파업의 성격이 경제적인 투쟁을 벗어나 사회적인 측면으로부터 정치적인 측면으로 그 성격이 바뀌어졌다.



      (3) 동조 파업 확산과 동맹휴학까지


    철도 파업으로 시작된 파업이 1946년 9월 26일에는 출판노동조합 1,277명의 노동자가 동정 파업을 시작한 것을 선두로, 대구우편국 노동자 400명, 27일에는 서울중앙우편국 600명, 또 다시 중앙전화국 1,000명이 파업으로 확대 되면서, 점차 교통, 체신, 식료, 전기, 토건, 조선, 금속, 해운 등 전평 산하 각 산별 노조원들이 파업에 동참하더니, 각급 학교 학생들까지 동맹 휴학에 들어감으로써, 파업은 대대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드디어 그들의 요구조건에는 식량 배급, 임금 인상, 전재민과 실업자에게 주택 제공 등의 경제적 요구 외에, 노동 운동의 자유, 테러의 배격, 북한과 같은 노동법의 실시, 민주주의 인사에 대한 체포 금지, 정간 중인 신문의 복간 등 정치적인 요구사항까지 첨가하고 나왔다. 파업이 이와 같이 변질 확대 되자, 우익측 노동 단체인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약칭 대한노총)은 처음에는 동조하였으나, 나중에는 발을 빼면서 반대 운동으로 전환했다.


   


      (4) 서울 지역의 총파업 종료


    미 군정청은 파업이 점차 광범위 하게 퍼져 나가면서 폭동화 하자, 9월 30일 새벽 5시, 경찰관 3,000명을 동원하여 농성 중이던 철도 노동자 1,000 여 명을 검거하였고, 서울의 투쟁위원회 본부를 붕괴 시킴과 동시, 대규모의 전평 간부들을 검거 함으로써, 전평 노조 조직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반대로 열세에 있던 대한노총의 조직은 크게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미 군정청은 대한노총과의 원만한 협상이 타결 되어, 9월 14일 서울 지역의 총파업은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지방에서의 파업은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되어, 10월 1일 대구의 대규모 시위(다음에서 언급)를 비롯하여 경상남북도 전역은 물론,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강원도 경기도 등 남한 전역에서 약 2개월에 걸쳐 소란을 피웠다. 총파업의 결과는 전평의 약화와 대한노총의 강화, 그리고 다음에서 언급하는 대구 10 1 폭동 사건으로 번진 최대의 파업이었다.


   


  다. 대구 10 1 폭동사건


    대구 10 1 폭동(大邱 10 1 暴動) 사건은 미군정 하에 있을 때인, 1946년 10월 1일, 대구 지역에서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대규모 시위로 시작한 것이, 폭동으로 까지 번진 유혈 사건이다. 대구는 일제 때부터 미 군정기까지 좌익계 인사들이 많은 곳이었다. 이 때 이 지역에는 콜레라(호열자)가 창궐 하여 2천 여 명의 환자가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염 예방 차원에서 대구 지역 곳곳에 통행을 차단해 버렸다. 그런 탓에 차량은 물론 사람까지 시경계를 넘을 수 없게 되어, 식량을 비롯한 농작물과 생필품 등의 유통이 어려워지게 되었을 때, 전국적인 총파업 시위가 대구에서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대구지역 노동자 총파업 시위를 진압하던 경찰의 발포로 시위하던 황말용, 김종태 두 사람이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흥분한 가운데 빠져 있을 때, 조선공산당이 자극적인 말을 가하게 되자, 노동자 뿐만이 아니라 시민과 학생들까지 시위에 합세 함으로 시위 군중이 만 여명으로 급속히 늘어났다. 


   


    이와 같은 문제가 터지자 대구경찰서장은 스스로 무장 해제 하겠다고 선언하였고, 또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들까지 폭도들에게 굴복하여 석방 시키게 되었다. 그와 같은 시점에 조선공산당 지도부의 통제를 받는 노동자들이 경찰권까지 내 놓으라고 요구하고 있을 때, 거리 한쪽에선 흥분한 군중이 경찰에 투석을 가하자, 궁지에 몰린 경찰관이 군중을 향하여 총을 발사 함으로 시위대 17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은 정 사복 경찰관들을 구타하고, 살해하고, 무기를 탈취하고, 또 무기고까지 열어 무장하고서 시위와 폭동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무장한 군중들은 부잣집을 비롯한 양민들의 가옥을 털어 생활 필수품과 식량 등을 가져와서 길바닥에 쌓고서는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등 무법 천지로 변하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미 군정청은 10월 2일 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무장 군인에 쫓기는 시위대는 미군을 피해 대구 인근인 경산군성주군영천군 등으로 침투해 들어 감으로, 경상북도 전역으로 시위와 폭동이 확대 되면서 시위대와 미군정 간의 충돌이 계속 되어 나가다가, 드디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1946년 말까지 시위와 폭동이 계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달성경찰서 습격을 당하였고, 군청이 화염에 휩싸였으며, 경찰관 여러 명이 살해 당하였고, 달성 군수 등 여러 명의 공직자가 불에 타 죽었다.


   


    이 사건에 앞서 이미 조선공산당의 주요 인물인 박헌영이강국(李康國)이주하(李舟河) 등에 대한 검거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일부는 월북하고 일부는 체포 되어, 시위 군중의 세력이 다소 꺾이었다. 그렇지만 경찰력 만으로는 진압할 수 없어, 각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과 국방경비대를 비롯한 우익 단체 요원들의 협조 하에 상당 기간 작전을 통해 진압을 완료했다. 이 사건에 대한 피해 규모에 관하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구 경북 지역에서만도 무려 공무원 사망자 63명, 일반인 73명으로 총 136명이라고 발표되었고, 또 경북 지역 관청 건물 4동과 일반 건물 6동이 불에 소진 되었다고 하고, 검거된 자도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라. 제주 43 폭동사건


    제주 4·3 사건(濟州 4·3 事件)은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 총선거 실시가 공고 되자,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반대 하기 위해,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당원 김달삼 등 350 여 명이 무장을 하고서는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면서 시작된 사건이다. 이 사건 초기 경찰관, 서북청년단민족청년단독립촉성중앙회 등 극우 단체 회원들이 반란자에게 살해 당하였다. 이에 분노한 극우 세력이 그들에게 대항 살상으로 맞서자, 유혈사태는 더욱 확대 되었다. 해방 직후부터 제주도는 좌익 세력이 강한 지역인 관계로 이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 군정은 4월 5일에 "제주도 비상 경비 사령부"를 설치하고, 각 도에 진압할 요원의 지원을 요청했고, 미군 함정까지 동원하여 해안을 봉쇄하였다. 진압할 요원들이 도착하여 진압 체재를 정비할 때까지, 무장한 반란자들은 계속 선거관리사무소를 습격하였고 또 선거 관리 위원들을 살해하였으며, 투표소를 습격하고 기록물을 탈취하는 등으로 선거를 방해 하였다. 그래서 제주 일부 지역 선거 투표자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 되고 말았다. 다시 미 군정은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했는데, 그 것도 그들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이 과정에서 반란을 진압해야 할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하여 반란 폭도 무리에 가담하였고, 또 경비대 내에서는 하극상의 반란까지 일어났다. 1949년 3월 제주도 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자, 그들은 한라산으로 숨어 들어가, 그들 모두를 소탕하기까지 상당한 시일을 끌었던 사건이었다.


   


  마. 여수 순천 반란사건


     여수 순천 반란 사건(麗水順天反亂事件=여순 사건=여수 14연대 반란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2개월 뒤인 1948년 10월 19일,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를 비롯한 일련의 남로당 계열 장교들이 주동하고 2,000여 명의 군인이 전라남도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에 창설된 국방경비대는 입대자에 대한 신원조회가 허술했던 관계로, 좌익계 사람들이 경찰의 검문과 단속에서 신분상의 보호를 받기 위해 입대한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리고 미군이 군정을 시행할 당시에는 군인들도 정치적 견해를 갖는 것에 대하여 전혀 제재를 가하지 않았고, 또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던 관계로, 남로당에서 을 장악하기 위해 위장 입대 시킨 요원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 연고로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에도 좌익 계열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여수에 주둔하고 있는 국방경비대 제14연대에서 1개 대대 규모의 군인들을 제주지구로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에 반발하면서 일어난 새로운 반란 사건이다. 이 사건을 일으킨 반란군은 여수경찰서장과 경찰서 사찰계 직원 10명, 그리고 한민당 여수 지부장, 대동청년단 여수 지구위원장, 경찰서 후원회장 등을 포함한 우익계 인사와 그 가족 70여 명을 살해 하였다. 여수를 점령한 반란군은 다시 순천으로 이동하여 순천도 장악하였고, 그곳에서도 주민들을 살해하고 약탈과 방화 등을 자행하였고, 10월 21일에는 벌교, 보성, 고흥, 광양, 구례까지, 10월 22일에는 곡성까지 진출하였다. 



    정부는 10월 21일 여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란군을 진압하기 시작하자, 반란군은 진압군에 밀려 그 주력이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도망쳐 들어갔기 때문에, 상당 기간 동안 지리산 공비 토별 작전이 전개 되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강력한 반공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군 내부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는 "숙군 작업"이 실시 되었고,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바. 연일 일어나는 데모대의 충돌


    1947년 봄, 소격동에 살던 소년은 북창동 858번지에 있는 00일보사 건물 3층 사무실 한 칸으로 거소를 옮겼다. 그렇기 때문에 시청 앞, 덕수궁 옆, 서소문로, 그리고 서대문 사거리를 지나 천연동에 있는 학교를 걸어서 다녔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시청 앞에 이르면, 자주 데모대들을 만나게 되었다. 데모대가 길 어귀에 서서 어린 중학생에게까지 "이 길로 가면 애국자, 저 길로 가면 매국노 또는 반역자"라면서 행인들을 자기네 모임으로 끌기 위해 유혹하는 것을 거이 매일 볼 정도로 사회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처럼 연일 좌,우 중간 파들이 각기 데모 집회를 벌린 다음에는, 대오를 편성하고 구호를 외치면서 구보 행진을 하다가 반대파를 만나면, 난투극을 벌려 피투성이가 되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그리고 데모대가 진행하는 길 좌우 인도에는 기마 경찰이 따라잡으면서 사태의 확대를 방지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으니, 사회 혼란은 극에 달했었다.


    


  사. 계속 일어나는 요인 암살 사건


    요인 암살 사건도 자주 일어났다. 


       (가) 1945년 12월 30일 새벽 6시 한국민주당 당수 송진우(宋振宇)가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韓賢宇) 등 자객들의 피습을 받고 살해 당한 사건이 일어났고,


        (나)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에는 서울 혜화동 로터리를 승용차를 타고 계동 자택으로 가던 여운형(呂運亨)을 GMC 트럭에 승차한 한지근(韓智根) 등 괴청년들이 여운형(呂運亨)이 탄 차를 가로막고 여운형에게 총격을 가하는 암살 사건이 발생했다.


        (다)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 15분에는 제기동 자택에 있는 장덕수(張德秀)를 현직 경찰관인 박광옥(朴光玉)과 초등학교 교사인 배희범 등 5명이 찾아와 총격을 가하여 살해하는 암살 사건이 또 다시 발생하였으며,


        (라)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에는 김구(金九)의 자택 경교장을 찾아온육군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가 김구에게 총격을 가하여 살해한 암살 사건이 발생했다.


     


  아. 함정 납북과 육군부대 집단 월북


    남한 사회 구석구석에 세포 망을 구축한 좌익 세력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회 각계 각층에서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사건들을 일으켜 나가고 있었는데, 유엔 총회에서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 정부를 세운다는 결정이 발표 되자, 인구가 적은 북한의 뜻대로 공산 정권이 되지 않을 것이 뻔함으로, 북한은 동시 총선거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가 혼란한 것을 국제 사회에 나타내기 위해 해군 함정 납북을 비롯하여 육군부대의 집단 월북 사건 등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1) 1948년 5월 7일, JMS 통천정 납북


    총선거 실시 3일 전, JMS 통천정이 북한으로 납북됐다는 급보가 해안경비대 사령부에 날아들었다. 묵호 기지에 배속되어 있던 통천정은 주문진 부근 해상에서 38선 인접 해역 경비를 마치고 귀항 중이었다. 북한에서 심은 좌익 승조원들이 정장(艇長) 김원배 소위와 부장(副長) 백경천 병조장을 사살하고, 배를 속초(당시는 속초가 북한 땅)항으로 몰고 갔다.


   


      (2) 1948년 5월 15일, YMS 고원정 납북


    통천정이 납북된 지 8일 후, 또 다시 YMS 고원정이 납북되었다. 고원정은 제주도 근해에서 작전을 수행하다가, JMS 통천정이 납북 당함으로 비어 있는 경비 구역을 메꾸기 위해, 묵호 배속 명령을 받고 묵호항으로 항해 중에, 좌익 승조원에게 납북 당한 것이다.


    


      (3) 1949년 5월 4일, 육군 2개 대대가 집단 월북


    한 동안 함정 납북사건이 잠잠해 지고 있었는데, 춘천과 홍천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2개 대대의 집단 월북사건이 일어남으로써, 군 수뇌부는 발칵 뒤집혔다. 육군 제8연대 1대대장 표무원 소령과 2대대장 강태무 소령이 1948년 5월 4일 북한 인민군과 내통한 다음, 자대 병력을 이끌고 월북한 것이다.


    


      (4) 1949년 5월 11일, YMS 508정(강화정) 납북


    육군 2개 대대가 집단으로 월북한지 일주일이 지난 1949년 5월 11일, 또 다시 YMS 508(강화)정이 납북 당하였다는 급보가 해군본부에 날아들었다. 북한으로부터 밀파된 부장이, 강화정을 타고 나온 정대사령(艇隊司令) 황운수 중령과 정장 이기종 소령을 사살하고, 배를 몰고 월북한 것이다. 


   


      (5) 1949년 5월 20일 일어난 JMS 302정(통영정) 납북 미수


    해군 고위 간부가 희생된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 JMS 302(통영)정이 묵호 해역 경비 임무를 마치고 부산항으로 귀항하여 제3 부두에 정박하고 있던, 1949년 5월 20일이었다. 정장이 상륙하고 없는 사이, 북한으로부터 밀파된 부장 김점복 소위가, 510정 부장 서문걸 소위와 다른 동조자 3명을 불러들인 다음, 그들이 공모하여 밤 10시경 기관사들을 무기로 협박, 엔진을 걸게 하여 월북코자 하였으나, 낌새를 눈치챈 기관장 황명호 병조장 등 6명이 고의로 기관을 고장 나게 만들어, 출항이 불가능하게 만든 후, 당국에 이 사실을 신고함으로써 월북을 막았다.



    위에 적은 사건 이외에도 군내부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더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정확한 내용을 아는 바 없다.


    


  자. 남한 사회의 뒤늦은 안정


    남한에 군대를 파견한 미국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다. 그래서 미군정에서는 처음부터 자유 민주적인 정치 방법을 적용 시켜, 정치 활동의 자유를 보장 하면서, 중립적인 입장에서, 행정적인 문제만 처리해 나갔으니,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처럼 강력한 통제를 전혀 가하지 않았다. 그런데다 북한의 밀지를 받고 남한 사회에 침투한 좌익 세력들로 인하여, 날이 갈수록 사회 질서는 혼탁한 가운데로 깊이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한 곳곳에서는 매일 같이 좌익과 우익, 그리고 중도파 각 단체들이 따로따로 집회를 연 다음 데모를 벌이다가, 그 연장선상에서 일어나는 충돌이 끊이지 않았고, 상호 비방과 폭행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은 여러 가지 사건 사고들이 계속 일어나자, 미 군정청은 사회 혼란을 주도하면서 극한 투쟁을 취하는 세력이 바로 좌익 세력들이라는 것을 파악하게 되어, 1946년 말경부터 사회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칼을 뽑아, 불순 세력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그 일부는 구속되었고, 또 일부는 지하로 숨어 들었으며, 일부는 38 선울 넘어 북한으로 도주함으로써 어지럽던 사회는 점점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7. 소년의 가정이 영월 본가로 합칠 무렵


  가경찰서장 임관을 고민하신 소년의 아버지


    소년의 아버지가 00신문사에 다닐 때이다. 사장님의 비서 겸 경호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당시 군정청 고위직과 정계 유명 인사들과 친밀한 가운데서 교우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어느 날 소년의 아버지에게 38선 접경지역인 연백(延白=분단으로 38 이남에 남아 있는 연안 백천 옹진 땅) 지역 경찰서장 자리가 공석인데, " 임관하여 그 자리에 갈 의사가 있느냐"는 의견 타진이 왔다. 그 때 소년의 아버지는 크게 고민하다가 동의하지 않음으로 그 자리에는 유0씨가 임관해 가셨는데, 후일 그분은 용산구 출신 국회의원이 되셨다.


   


    만약 그 때 소년의 아버지가 그 제의를 받아들여 그 자리로 갔다면, 소년의 가정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말이 있은 후 얼마 안가 625 전쟁이 일어났다. 그곳은 선박으로만 내왕할 수 있는 곳(현재는 북한 땅)이어서, 그 곳에 가 있을 때 전쟁이 일어나 발이 묶였다면, 경찰 가족을 학살하는 인민군들에게 가족 모두가 죽임을 당했을 것이고, 만약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하드라도 지금쯤은 북한 땅에서 반역자라는 대우를 받으면서 고난 속에서 살게 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곳을 탈출하여 서울로 돌아왔다면, 계속 관직 생활을 거친 다음 정계에 입문하여 대성하는 결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때 소년의 아버지가 그곳으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날까지, 생명을 유지 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자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서 내리신 은혜의 결과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것이다.



  나소년의 어머니가 상경하여


    소년의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오신 후 신문사 일이 너무나 바빠서 집에 내려갈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1947년 어느 날 농사일이 바쁘신 어머니가 틈을 내어 농사 지은 보리쌀을 싸 들고 서울로 올라 오셨다. 그런데 너무나 초라하고 고달프게 살고 있는 부자를 보고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모든 식구가 영월 집으로 합치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결국은 그렇게 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소년의 아버지는 신문사를 사임하시고는 영월에서 00일보를 개척 보급하기 위해 영월지국을 계약하였고또 중학교에 다니던 소년은 영월 중학교로 전학하기 위한 모든 수속을 밟았다.


   


  다안정되는 소년의 가정 경제


    수입은 시원치 않으면서 서울과 영월로 갈라져서 두 곳에서 살다 보니 가정 경제는 엉망으로 내려가고 있던 차에, 서울에 있던 부자가 영월로 내려왔다. 그러나 한참 동안 소년의 아버지가 직업을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해방되기 전에 다니던 영월화력발전소 기관부에 결원이 생겼고, 또 소년의 아버지도 복직하는 것을 원했으며발전소 측에서도 복직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생각 보다 쉽게 복직이 허락되어 가정 경제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8. 북한에서 보내던 전력의 단전


  가. 해방 전후 남북한의 전력 사정


    해방 직전인 1944년도 남북한 전국에 대한 전력 수급실적을 보면, 연평균 전력 수급량은 878,069㎾였다. 그 중 압록강 수력발전소에서 만주(滿州)로 송전하던 240,000㎾를 제외하면, 남북한 국내에서 사용하던 전력은 638,069㎾였다. 이를 남북한 별로 구분해 보면 북한은 551,829㎾의 전력을 사용했으니 전체 공급 전력의 87%를 북한이 사용 했고, 남한의 사용량은 86,239㎾로 13%에 불과한 적은 양이었다. 한편 북한에서 송전해 주는 전력을 남한에서 받아 사용자에게 배전 공급한 전력량은, 경성 전기 35,382㎾, 남선 전기 41,677㎾ 그 외 생산 업체인 삼척 전기 6,349㎾, 삼정 전기 2,829㎾ 등이었다.



    광복 직후에는 생산 공장의 운휴로 전력 수요는 전등과 전열이 대부분이었다. 이 때 남한에서는 북한에서 남아도는 전력 중에서 60,000㎾ 정도를 공급 받아 사용 함으로써, 전력 생산 원가가 많이 드는 화력 발전 시설은 가동하지 않고 쉬게 하였다. 광복 다음 해부터는 남한의 전력 수요가 점차 늘기 시작하여 1946년 3월에는 평균 전력 필수량이 87,000㎾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남북한 간에 정치적, 사상적 대립이 심화 되었고, 또 전력 요금 지불 문제가 합의 되지 않음으로 북한 측은 번번이 남한에 대한 송전을 임의 조절 제한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1947년 전력 요금에 대한 지불 금액 합의로 같은 해 11월 남한에서 공급 받은 평균 전력 사용량은 112,507㎾까지 상승 하였으니, 해방 전에 사용하던 수준까지 올라갔었다.



    남한은 북한에서 송전해 주는 전력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남한 자체에서 발전하는 발전량은 겨우 24,715㎾에 불과 하였다. 이 양은 남북한 전체 발전량의 22%에 불과 하였으니, 남한의  전력 사정은 항상 불안전한 상태에 있었다.


   


  나. 광복 당시 남북한의 발전 설비


      (남북한 발전 설비 총계 1,938,139 KW)


     38선 이북 발전 설비


     수풍 수력 발전소         600,000 KW


      장진강 수력 발전소       371,444 KW


      부전강 수력 발전소       223,000 KW


      허천강 수력 발전소       394,000 KW


      화천 수력 발전소           60,000 KW


      부령 수력 발전소           35,800 KW


      금강산 수력 발전소         12,970 KW


        3 8 이북 합계      1,697,214 KW



      38선  이남 발전 설비


     청평 수력 발전소            44,000 KW


      칠보 수력 발전소            16,000 KW


      운암 수력 발전소             6,400 KW


      보성강 수력 발전소           3,900 KW


      영월 화력 발전소           125,000 KW


      당인리 화력 발전소          28,125 KW


      부산 화력 발전소             17,500 KW


        8 이남 합계         240,925 KW




   다. 남한으로 보내던 전력을 단절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는 유엔 감시 하에 총선거를 실시 하여,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이 진행되자, 선거 4일 후인 1948년 5월 14일 0시를 기하여 해방 후 줄곧 남한으로 보내던 전력을 단절 하였으니, 그 날로부터 남한의 전력 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러자 경성 전기에서는 배전선 정비 공사와 기획 배전을 실시하게 되었고, 정부는 기존 발전 시설을 정비하여 발전량을 늘림과 동시 절전 운동을 전개하였다. 전력 증강을 위한 일련의 시책에 힘 입어 1949년 4월에는 수력 33,938㎾, 화력 34,986㎾, 부산 부두 발전함 13,372㎾ 합계 82,296㎾로 발전량이 올라갔다. 정부는 발전 사업의 원활한 운영 관리를 도모하기 위해 1949년 6월 1일 경선 전기, 남선 전기를 모두 조선 전업(오늘 날의 한국 전력)으로 통합 시켜 효율적인 전력 관리를 도모하도록 했다. 그러자 조선 전업에서는 1948년 8월 섬진강 댐 확장공사를 재개하여 발전량 증가를 위해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라. 북한의 전력 단절이 남한에 미친 영향


    해방 전 북한에는 공업 시설, 광업 시설, 그리고 발전 시설이 남한 보다 더 많은가 하면, 남한은 그에 반하여 농지를 통한 식량 생산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런 형편에 처해 있었던 관계로 북한의 발전량은 남한의 약 20배 정도였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이 독립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하는 것을 본 북한은 이에 반발하여 남한에 공급하던 전력을 끊어 버린 것이다. 그러자 서울 시내를 달리던 전차는 멈춰 서게 되었고, 전등용 전력 공급은 저녁 일부 시간에 한하여 공급하는 제한 공급제로 바뀌었다. 전력 공급 사정이 심하게 악화 되었을 경우에는 제한 공급하던 전등용 전력까지 아예 공급하지 않고 단전 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으니, 남한은 전력 부족으로 생산 활동이 거이 마비 상태가 되고 말았다. 


  


    1959년 이전 우리 나라 국민 총생산 지수(GNP)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1960년도 GNP는 $79 이고, 1950년 필자가 해군 복무 시, 군대 동요들이 말하기를 "일본 요코스가(よこすか=橫須賀)나 사세보(させぼ=佐世保)에 있는 미 해군 기지 PX 에서, 조금 값나가는 물건을 사려고 했더니, 한국의 GNP가 $39 에 불과 함으로, 끔 1톨이나 담배 1갑 정도는 팔 수 있지만, 그 이상의 귀중품은 팔 수 없다면서 거절 하더라"는 이야기를 수 없이 전우들로부터 들은 바 있다. 그 때 우리 국민들이 그와 같이 어려운 가운데 살고 있을 때, 북한이 남한에 송전하던 전력을 단절 하였으니, 그 때 남한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상에 대하여는 읽으시는 분들이 각각 생각해 보시면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북한은 자기들이 쓰고도 남는 전력을 남한에 공자로 송전하는 것도 아닌데 사상이 다르다 하여 단절해 버리고는, 군수 산업을 개발하고 생산 하는데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남한을 침략할 준비를 착착 진행하여, 드디어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침을 감행하여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625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9. 영월로 내려간 소년


  가영월중학교에 대한 내력


    해방 될 때까지 영월에는 중학교가 없었다. 해방이 되자 뜻 있는 지방 유지들이 중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시작하여, 영월면 영흥리 중심지에 있는 고적 건물(관풍헌과 자규루)을 교실로 개수하여 중등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1946년 9월 18일 영월공립중학교(초급중학)로 인가를 받게 되었다. 당시 강원도 남부 지방의 유일한 중학교였기 때문에, 영월군 북면에 있는 영월광업소와 정선군 신동면에 있는 함백광업소에서 매일 아침 저녁 영월중학교로 학생들의 등교와 하교용 통학 버스(추럭)를 운행하면서 광업소 직원들의 자녀 교육 편의를 제공하였으니, 갓 태어난 중학교지만 학생수가 상당이 많았다. 


      


  나영월공립중학교로 전학한 소년


    1947년 그때는 학년 초가 9월이었다. 늦은 가을 영월중학교 2학년으로 전학하였는데, 소년이 전학할 당시의 중학교는 3년제 초급 중학교였다. 중학교 제1기생인 3학년 학생은 중학교가 정식 인가 나기 직전에 공부를 시작한 분들로 그 수는 불과 몇 명에 불과하였다. 소년이 전학해 들어갈 당시 2학년 학생은 남학생 60명과 여학생 12명이 모두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남녀 공학이었다.



    소년이 3학년 학기를 마칠 무렵인 1949년 7월 29일, 학생도 많고 또 영월발전소와 인근에 여러 광업소가 있다는 특성 때문에, 영월공립공업고급중학교(6년제)로 승격이 되어, 졸업 하려던 학생 전원은 중학교 졸업 절차를 거치지 않고, 4학년으로 바로 진학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 소년은 전기과를 전공 하기로 정하였다. 1950년 초 정부에서는 9월로 되어 있는 학년 초를 3월로 환원하기 위해, 1950년에는 학년 초를 6월로, 1951년부터는 3월에 시작하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1950년 6월 1일, 소년은 영월공립공업고급중학교 전깃과 제5학년으로 진학 하였다.



  다. 영월에서도 신문 배달 계속


    소년의 아버지가 서울에서 내려올 때, 다니시던 신문사의 자매지인 00일보 영월지국 계약을 체결하고 하향하셨다. 당시 가정 형편도 그렇고, 또 독자도 없는 신문을 보급하기 시작하는 것이니 배달할 사람을 고용할 형편이 되지 않음으로, 배달하는 것은 배달 경험이 있는 소년이 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당시 소년의 아버지는 학교에서는 사친회에 관계하고 계시고, 또 직장과 교회 등 여러 곳에서 안면이 넓음으로 몇 일 가지 않아 30명 정도의 독자가 생겼다. 학교 공부를 마친 다음 학교 옆에 있는 우체국에 들려 서울 본사로부터 우송되어 온 신문을 찾아 그 자리에서 개봉 확인한 다음 배달에 나서는 것이었다.



    독자는 안면에 의하여 거절할 수 없어 억지로 구독하는 분이 많았기 때문에 배달하러 가면 기분 좋게 대해 주지 않는 분들이 꾀 있었다. 그 이유는 영월에 보급되는 다른 신문들은 모두 철도편으로 탁송 되어 옴으로 당일 신문을 받아 보는데, 소년이 배달하는 신문은 우편으로 보내 오니, 독자들 입장에서는 신문(新聞)을 보는 것이 아니고 구문(舊聞)을 보는 것이니, 어느 누가 좋은 소리를 하겠는가?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한결 같이 사설 하나만은 참 좋다고 말 함으로 그 말에 위로를 받으면서 꾸준히 배달했었다. 몇 부 되지 않은 신문이지만 능말(陵洞)로부터 영흥리, 하송리, 덕포 상리 중리 하리 광범위 하게 흩어져 있는 독자 가정을 돌고 나면 녹초가 되곤 했다. 


  


  라. 영월에서의 고달픈 삶


    신문 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몸이 몹시 고달팠다. 그렇지만 어떻게 쉴 수 있으랴....., 책가방을 내려놓기 무섭게 밭에 있는 농작물을 집으로 져 날려야 하고, 또 물지게를 짊어지고 2-300m 떨어진 강으로 가거나, 아니면 산밑에 있는 공동 우물로 달려가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려 지게 양쪽에 물 초롱을 달고 매일 2-3회씩 저 날려야만 했다. 그런데 물 지는 것을 너무나 오랫동안 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물을 가득 채운 초롱 두 개를 양쪽에 달고도 나는 듯이 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장마철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구래물을 바가지로 떠서 초롱에 채우고, 구래물이 맑지 않으면 개구리가 수영하는 우물물을 저 올 수 밖에....... 이것이 당시 우리 민족의 공통된 생활이었으니, 초라하기 그지 없는 우리 민족의 어려운 시기였다. 


   


    여름철 모기가 왱왱 거리는 밤, 마당에 멍석을 깔고 어두운 곳에서 팔뚝에 붙은 모기를 때려서 쫓고, 때로는 화로에 곁 불을 피워 연기로 모기를 쫓으면서, 영양가도 많지 않은 옥수수와 감자, 밀기울 떡을 먹는 것....., 그것도 맛 있다고 어두운 가운데서 입을 찾아 넣는 것이 당시 우리 민족의 보편적인 식생활이었다. 저녁을 먹은 다음에는 방으로 들어가 모기 때문에 문을 닫고 속옷 바람으로 책상에 앉아 새벽 2시까지 공부를 하는 것이 소년의 일과였다. 



  마. 남자가 감당할 수 있는 잡역


      (1) 부역으로 할당된 도로 보수


    당시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신작로)는 아스팔트가 깔린 것이 아니고 자갈을 깔아 놓은 길이었다. 일년에 몇 차례 신작로에 자갈을 다시 보충해야 하는데, 이 작업은 정부 예산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주민들의 부역(賦役)으로 도로를 보수 했다. 동리 이장은 부역해야 할 양을 가구별로 할당하고서는 보수 완료 일을 알리면서 독촉을 가해 온다. 당시 소년의 가족 수는 모두 아홉 명이지만, 매일 직장으로 출근하는 사람과 아이들을 빼면, 도로 작업에 임할 사람은 어머니와 십대 중반의 소년이 할 수 밖에 없었다. 두 모자가 강변으로 나가 자갈을 주서 모은 다음, 어머니는 머리에 이고, 소년은 지게로 저 날려야 하는 중노동의 어려운 일을 감당할 수 밖에 없었다.


   


      (2) 산중에 있는 군 초소에 생활용수 공급


    영월군 하동면 정양리에 있는 영월화력발전소는, 당시 전력이 부족한 남한의 중요한 산업 동력 시설이었다. 그런 관계로 정부에서는 이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육군 독립대대를 주둔케 하여 발전 시설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주둔 군은 발전소를 둘러싸고 있는 산 꼭대기 요소 요소에 보초막을 설치 하고서 초병들이 상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많은 초소 마다 매일 생활 용수 2짐(5g 통 4개) 식을 주민들의 부역으로 공급하라는 것인데, 그 것 역시 자주 돌아오곤 했다. 이 명령이 내려 오면 만사를 제쳐 놓고 경사가 급한 산꼭대기로 물을 지고 가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이 것 역시 소년이 담당해야 할 몫이었다.


   


10. 학생 시절에 있었던 일


  가. 학교 건축 부지 정지 작업


    소년이 공부할 당시 중학교는 영월 중심가에 있는 고적 건물을 교실로 개수하여 사용하였는데, 마침 신축할 부지가 확보되어, 이 땅의 정지 작업을 학생들의 힘으로 정지하게 되었다. 오늘 날과 같이 중 장비가 있다면 쉽게 정지할 수 있었겠지만, 학생들의 노력과 땀으로 하느라, 매일 수업 시간을 단축하여 선생님 인솔 하에 전학생이 그곳으로 가서, 높은 곳의 흙을 파서 낮은 곳으로 옮겨다 메꾸었다. 수백명의 학생들이 몇 달 동안 계속 땀을 흘리면서 정지 작업을 수행한 결과, 오늘 날 그 지역에는 웅장한 학교 건물 3개(중학교, 고등학교, 공업고등학교)가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을 보니 "옛날 우리들이 저 건물이 서 있는 땅을 고르기 위해, 많은 땀을 흘렸지......", 너무나 감개무량 함을 느끼게 되었다. 


  


  나단종애사(端宗哀史) 연극 제작 


    이씨 조선 제6대 단종대왕은 폐위된 후 영월로 귀양 와 계시다가 승하하여 엄흥도(嚴興道)에 의하여 영월 장릉(莊陵)에 안장 되었다. 단종대왕 하면 영월이 생각 나고, 영월하면 단종대왕이 생각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영월중학교 학생들이 출연하여 "단종애사"(端宗哀史=춘원 이광수가 쓴 우리 나라 역사 소설을 토대로 만든 각본)라는 연극을 만들었는데, 연극에 조예가 깊으신 분(순천 병원 의사)의 지도를 받아 배역진 모두가 열심히 준비를 했고, 또 무대 장치에 권위 있는 분을 모셔와서 무대에 세울 장치물도 만들었으며, 영월 향교에서 옛 선비들이 입는 의상들을 빌려 입고, 극장을 임대하여 흥행하였는데, 많은 사람들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그래서 영월군내 여러 지방으로 돌아 다니면서 흥행하여 학교 건축 기금 마련에 큰 도움을 마련한 바 있다. 단종애사가 성공적으로 흥행 됨에 따라 그 후 다시 "금삼(錦衫)의 피"(뜻은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고 죽을 때 폐비가 입었던 비단 옷 소매에 묻은 피)라는 사극을 한 차례 더 만들어 공연한 적 있었다.


  


11. 정부 수립


  가.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


      (1) 유엔 감시 하의 총선거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됨에 따라 유엔은 한국 문제의 처리를 미국측의 제안을 받아 들여 한국에 대한 통일 정부 수립을 진행하게 되었다. 1947년 9월 17일 미국이 유엔에 제출한 한반도 문제는, 유엔 감시 하에 한반도 전역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그에 따라 정부가 수립되면, 미소 양군은 철수 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래서 1948년 1월 초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기구로 호주, 캐나다, 중국, 엘사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립핀, 시리아, 우크라이나 등 9개국 대표로 구성된 한국 부흥 위원단이 설치되어, 한반도에 입국하려고 하였는데, 남한에서는 받아 드렸으나, 북한에서는 소련의 반대로 입국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48년 2월 유엔 총회에서는 북한이 입국을 거부 한다면, 가능한 지역만이라도 선거에 의한 독립 정부를 수립할 것을 가결하고,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유엔 감시 하에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2) 총선거로 제헌 국회의원 선출


    계속되는 좌익계의 방해 공작과 남북 협상파 및 중립계 정치인들의 공식적인 불참 속에서 총선거가 강행 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선거에서는 국회 총 의원수 300명 중, 북한 지역에 배당된 100명을 제외한 200명의 의원이 선출되었다. 당선된 국회의원은 무소속이 85명(42.5%), 대한 독립 촉성국민회 55명(27.5%), 한국 민주당 29명(14.4%), 대동청년단 12명(6%), 조선 민족청년단 6명(3%), 대한 독립 촉성 농민 총연맹 2명, 그리고 대한 노동 총연맹 등 11개 정당 단체가 각각 1명식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31일 선거 위원회의 소집에 의하여, 최초로 제헌국회(制憲國會)가 개원 되어 국회의장에는 이승만(李承晩), 부의장에는 신익희(申翼熙)가 당선되었다. 


  


    주 : 1948년 5월 10일 선거 때 제주도 북제주군 일대는 4.3 폭동 사건이 일어나 투표에 참가하는 인원 수 미달로 선거가 무효 선언 되었다. 위 당선자 수에는 1년 후 재선거를 통하여 당선된 제주 지역 국회의원 수를 합산한 수이다.


        


  나. 대한민국의 탄생


    1948년 7월 17일에 헌법이 제정 공포되었고, 정부통령은 제헌국회에서 아래와 같이 선출 되었으며, 초대 대법원장은 김병로(金炳魯)씨로, 드디어 3부 수장이 모두 정해지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수립을 세계만방에 선포 하였다. 그러자 1948년 12월 유엔 총회의 승인을 받음으로,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합법 정부로 인정 받게 되었다.


       1) 대통령 선출(국회에서 선출)


           이승만(李承晩)   180표    당선


           김   구(金  九)    13표


           안재홍(安在鴻)      2표


           서재필(徐載弼)      1표   미국 국적자 임으로 무효


           총 투표자 수      196


       2) 부통령 선출(국회에서 선출)


     부통령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 이시영(李始榮)이 2차 투표 끝에 한국독립당 소속 김구를 누르고 당선되다.


       3) 초대 내각의 각부 장관(1948년 8월 현재)


          국무총리     이범석(李範奭)


          내무부장관   윤치영(尹致暎)


          외무부장관   장택상(張澤相)


          재무부장관   김도연(金度演)


          법무부장관   이   인(李  仁)


          국방부장관   이범석(李範奭)   겸임


          문교부장관   안호상(安浩相)


          농림부장관   조봉암(曺奉岩)


          상공부장관   임영신(任永信)


          교통부장관   민희식(閔熙植)


          체신부장관   윤석구(尹錫龜)


          사회부장관   전진한(錢鎭漢)


          무임소장관   지청천(池靑天)


          무임소장관   이윤영(李允榮)


          공보처장      김동성(金東成)


          총무처장      김병연(金炳淵)


          법제처장      유진오(兪鎭午)


          기획처장      이순탁(李順鐸)


          심계원장      명제세(明濟世)


      (자료 출처 : 국사 편찬 위원회, 1986년 대한민국 삼부 요인 총람)



  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북한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미군의 군정이, 북쪽에는 소련군의 군정이 실시되었다. 북한에서는 1946년 이미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조직 하여, 언제라도 인민공화국 수립을 공포할 수 있는 만반 준비를 완료한 상태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럴 때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 정부를 수립할 것을 유엔에서 결의하고, 유엔 감시 하에 선거를 실시하기 위해 감시단을 남북한에 파견코자 하였으나, 인구수가 적은 북한의 뜻대로 공산주의 국가가 되지 않을 것이 뻔하자. 북한은 유엔 선거 감시단의 입국을 거부함으로,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그러자 북한에서는 1948년 9월 9일 공산주의 헌법을 채택하고 김일성(金日成)을 수상(후에 주석)으로, 박헌영(朴憲永)홍명희(洪命熹) 등을 부수상으로 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북쪽에 수립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은 평양을 수도로 정하고, 조선로동당에 의하여 지배되는 일당제 체제로 출발 했지만, 김일성(金日成)의 세력이 커지면서 그 주위에 있는 많은 세력들을 숙청 제거하여 드디어 김일성(金日成) 독재 체제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3대 세습으로 변질되는 왕조 체재가 되고 말았다.



12. 남남 갈등의 시작


  가. 반민족 행위자 심사로 인한 남남 갈등


    제헌 국회에서는 일제 시대에 일본에 협조한 악질적인 반민족적인 행위를 자행한 자를 조사하기 위하여 특별 위원회를 구성 하였고, 1948년 9월 7일에는 일본에 적극 협력하여 국권 강탈에 가담 또는 협력한 자, 일제 치하 때 독립 운동가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 박해한 자 등을 처벌하는 목적으로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통과 시켰다. 반민특위는 그 산하에 배치되어 있는 특별 경찰대를 활용, 일제 시대의 악질 기업가였던 박흥식, 일제를 옹호하여 조국의 젊은 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던 최남선, 이광수 등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는 등 민족 정기를 흐리게 했던 많은 친일 분자들을 색출하였다. 그러나 인재난으로 일본에 협조한 자들 가운데서 경미한 자들을 신생 대한민국 정부가 불문에 부치자, 좌익계에서는 이에 대한 극렬한 반대로 반민특위는 그 임무를 완전히 수행하지 못하게 되면서, 남남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나.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인한 남남 갈등


    1949년 3월 제헌국회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김약수, 노일환, 이문원 등 13명이 "내 민족 자결주의의"라는 이름 아래 ① 외국 군대 철수 안, ② 남북 통일 협상안 등 북한 공산당의 주장과 상통하는 주장을 하고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반민족 행위처벌법 제정에 앞장섰던 자들이고, 또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위원회의 활동을 주도할 때에도 "평화 통일 방안 7원칙"을 주장 한 자들이다. 



    그러자 이승만(李承晩) 정부는 김약수(金若수) 부위원장을 비롯한 진보적인 소장파 국회의원 13명을 남로당 공작원으로 활동하면서 정국을 혼란 시켰다는 혐의로 구속하였다. 그 후 그들은 재판을 통하여 최고 징역 10년에서 최하 3년까지 선고 받았다. 수감된 그들은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한군이 와서 석방 시켰고, 그들 대부분은 북한으로 넘어 갔으며, 그 중 일부는 납북되어 갔다.



  다. 농지개혁에 따른 남남 갈등


    대한민국 수립 후 봉건적 소작 관계를 타파하고 영세 농민에게 토지를 재분배 함으로써 농가 경제의 자립과 농업 생산력의 증진을 목적으로 한 개혁. 8·15 직후 남한의 농업 인구는 전인구의 64.5%나 되고, 그 위에 200만 농가 중 자작 겸 소작이 37.9%, 순 소작이 43.2%로 남한에서의 농지 재분배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1949년 6월 21일 "농지개혁법"을 제정 공포한 후 개혁 작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1950년 5월 거이 완료해 가고 있었는데, 625 전쟁이 일어 남으로써 일시 중단 하였다가, 1951년 4월에야 완결 지었다.



    이에 앞서 미군정은 적산 토지 불하령을 발포하여 적산 농지에 한하여 농민에 불하 처분하였다. 농지 개혁의 결과 부재 지주(不在 地主) 및 봉건적 소작 관계가 일시 해소되어 민주적인 토지 제도의 기초가 확립 되었으나, 다음과 같은 이유 등으로 농지 개혁이 성공하지 못했다. 분배 받을 농가수는 많고, 분배할 땅의 면적이 적었던 점과, 단기(短期) 상환 등으로 인한 분배 받은 농지의 전매(轉賣), 새로운 지주 층의 생성, 소작 제도의 부활, 이농 현상 등이 급속히 증가 되면서, 지주들은 거의 몰락 되었고, 농지 개혁은 원만한 성과를 이루지 못하여, 여기에서도 남남 갈등이 싹트게 되었다.


    


13. 혼란 속의 교회


  가. 미소 군정이 교회에 끼친 영향


    해방 직후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갈라지고 미소 양군에 의하여 각기 군정이 실시 되고 있을 동안, 남한은 일제에 의하여 억압 받던 신앙의 족쇄가 미군에 의하여 풀리면서, 신앙 자유의 철저한 보장으로 교회 부흥의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진주한 소련군이 기독교 신앙은 유물 사상에 반한다는 이유로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여, 남한에서는 교회의 부흥이, 북한에서는 교회의 쇠퇴로 각기 상반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남한 교회는 자유 민주 사회에 뿌리를 내리면서, 더 이상 어떠한 외부 탄압도 받지 않고, 급성장의 길로 들어섰으나, 북한 교회는 처음에는 무신론적 공산 정권과의 투쟁으로 많은 교회가 수난을 당하게 됨으로,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어지던 선천과 평양을 비롯한 북한 각지의 많은 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북한에 남아 있는 교인들은 목자 없는 교회에서, 다시 침묵하는 교회로, 그 다음엔 지하 교회로, 그러다가 많은 교인들이 신앙을 버리고 세상으로 옮겨 가게 됨으로써, 교회는 날로 쇠퇴의 길로 빠져갔다.


  


  나. 북한의 권력 실세가 된 김일성


    해방 직후, 소련군을 등에 업고 북한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은 본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김형직(金亨稷)은 선교사가 세운 평양 숭실학교 출신이고 칠골장로교회 장로였고, 그의 어머니 강반석(康盤石=베드로의 이름)은 권사였다. 그리고 그의 외가에 대한 신앙 내력을 살펴 보면 외조부 강돈욱(康敦煜)은 장로교회 장로, 외삼촌 강진석(康晋錫)은 장로교회 목사, 북한의 부주석을 지낸 강량욱(康良煜)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장로교회 목사였다. 세상에 알려지기는 강량욱을 김일성의 외삼촌이라고 전해져 왔으나, 실은 외조부인 강돈욱의 6촌 동생이라고 한다. 



    김일성이 자신을 소개 하기를 "유년시절 나도 송산리교회 신자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청년시절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 하면서 무신론자가 되어, 북한의 권력자가 된 후에는 소련의 정치 이념에 따라,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기독교 탄압을 가한 자로 변신했다.



    청량리에 있는 예장(합) 동도교회에서 당회장을 지내신 최훈 목사님이 생존하고 계실 때 증언 하기를, 자신도 김일성과 같은 고향인 만경대(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출신인데, 김일성은 남리에 살았고 자신은 조그마한 고개를 사이에 둔 송산리에 살았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만경대에는 1907년에 세워진 안식교회와, 1903년 기도처로 세워졌다가 1909년 교회로 승격한 송산교회가 있었다고, 노회(예장 합동 평양노회) 회집 장소에서 대화하는 가운데 필자가 직접 들은 바 있다.


   


  다. 북한의 기독교 탄압


    공산 정권은 1946년 7월에 결성된 북조선 노동당의 강령과,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헌법에 종교에 대한 자유 보장 사항이 명문화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교회에 대해 간접적 직접적으로 탄압을 가하면서 종교 말살에 광분하여 북한의 목회자 286명이 김일성 정권에 의하여 순교 당하였거나 행방불명 되었다고 한다. 1950년대까지 북한 정권은 표면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말 하면서도, 뒤로는 교회를 탄압 하였는데, 그 실례를 살펴 보면


        1. 1946년 3월에 실시한 토지 개혁령으로 교회의 토지와 건물을 강제로 몰수하였고, 교회가 세운 학교를 국유화 하였다. 


        2. 종교인에 대한 차별과 사찰로 직장이나 관청에서 사실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엄한 감시를 받았다. 


        3. 청소년들을 소년단 또는 민청(民靑) 등 세포 조직에 가입케 하여 종교는 비과학적 미신 행위이며, 성직자는 인민의 착취 계급이라는 사상 교육을 시켰다. 


        4. 신자의 자녀들이 주일 학교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청소년의 특별 집회와 행사를 주일에 자주 열었다. 


        5. 공산 정권의 어용 단체인 기독교 연맹을 통하여 성직자에 대한 회유(懷柔)와 포섭 그리고 교회 분열을 획책 하였다. 



  라. 신앙의 자유 속에서 누리는 행복


    일본의 쇠사슬에서 풀릴 때부터 필자는 줄곧 남한에서 살다가 지금은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미국 땅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그 무엇 보다 행복 중의 큰 행복이다. 해방 전에는 기독교인 수가 남한 보다 북한이 월등하게 많았다. 그리고 신앙의 열기도 북한이 더 뜨거웠다. 그러나 38선이 생겨 남북으로 분단 되면서, 많은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열기를 남한에 옮겨 붙임으로써, 오늘의 남한은 세계에서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견할 정도로, 교회의 대부흥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아무쪼록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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