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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기행 #4 (항해중에 맞은 결혼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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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 user
Date
2018-08-23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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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기행 #4  (항해중에 맞은 결혼기념일)



필자 주 :


이 글은 얼바인사랑의교회 "사랑게시탄" 제347호에 "결혼 생활 57년 중에 있었던 희비 쌍곡선"이란 제목으로 올린 바 있습니다.


http://www.irvinesarang.org/zx1/?mid=bulletin_guestbook&page=3&document_srl=146173



 4. 항해 중에 맞은 결혼기념일


2013년 3월 9일 우리 부부가 승선한 유람선은 Hawaii 가까운 해상에 이르렀다. 바로 이 날은 우리 부부의 결혼 56주년 기념이었다. 이날이 되자 지금으로부터 56년 전 결혼하던 때의 일들과 우리 부부가 지나온 일들이 머리에 떠 오르기에 그 때의 일들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가. 우리 부부가 결혼하기까지


    1) 외가 방문을 자주함으로


경북 의성에 사시던 필자의 막네 외삼촌은 젊을 때 일본으로 밀항해 가셨다. 그런 관계로 외삼촌과 어머니 사이에는 오랫동안 서신이 끊어진 상태가 계속되었었다. 그런데 필자가 해군에 복무하고 있는 1954년 봄, 타고 있던 705함정이 정기 수리를 받기 위해 3개월이 조금 넘는 기간 일본 요고스카(橫須賀)에 체류하게 되었다. 그 때 필자는 외삼촌이 살고 계시는 곳을 수소문하여 정확한 주소를 확인하여 끊어졌던 외삼촌과 어머니 사이의 서신이 다시 복원되도록 해 드렸다. 귀국한 후 필자는 외삼촌의 정확한 주소와 그 외 여러 소식들을 경북 의성에 계시는 다른 두 분 외삼촌의 가정에도 알려 드리려고, 휴가를 얻어 외가를 방문하게 되었다. 지각이 든 다음 처음으로 외가를 방문한 필자는 외가 여러 어른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게 되어, 그 때부터 외가를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 나라는 일제 식민치하에서 벗어난지 9년 밖에 되지 않았고, 정부가 수립 된지도 불과 6년 밖에 되지 않았다. 그간 신생 대한민국은 호된 전쟁을 치루었고, 전비의 지출도 많았으며, 폐허로 변한 국토를 복구하느라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런데다 신생 국가가 감당하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국토 방위에 종사하는 군인들이 많았었다. 그런 관계로 군인들에게 지급되는 급여는 보잘 것 없는 적은 금액이었다. 그래서 현역 군인이 여행할 때는 공무든 사무든 상관 없이 출장 증명서나 휴가증만 가지고 있으면, 군에서 파견한 철도 수송관에게 그것을 제시하여 확인만 받으면, 따로 연결한 군인 전용 열차 객실에 무임으로 승차하도록 제도화 되어 있었다. 



그러면 기차가 다니지 않는 곳의 사정은 어떠했는가? 영업용 버스든 화물용 자동차이든 간에, 지나가는 자동차라면 무조건 세워서 그것을 타고 갈 정도로 군인들의 세도가 당당했던 시절이었다. 만약 군인이 차를 세웠는데도 정차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간, 다른 차를 타고 뒤따라온 그 군인에게 혼이 날 정도로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였기 때문에, 이유가 어떻든 간 차를 일단 세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세운 차의 화물 적재함이 화물로 가득차 올라탈 자리가 없으면, 세운 군인이 운전사나 조수석(助手席) 문밖 발판을 딛고 서서 매달려 간다 하더라도, 경찰관은 물론 어느 누구도 이를 제제하지 못할 정도로 군인들의 위세가 당당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노선 버스의 운행이 하루 몇 대 밖에 되지 않음으로, 승객 전부를 수용하지 못할 정도였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군인들이 타겠다면 태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군인들에게는 아예 운임 내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아무리 운임을 내라고 하더라도 시비만 벌어질 뿐, 받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아예 요구하지 않았던 비정상적인 시절이었다. 그러므로 함정 근무를 하고 있던 필자도, 함정이 모항에 귀항하면 자주 휴가를 얻어, 경북 의성에 있는 외가를 비롯하여, 생전 보지도 못한 여러 이모님 댁도 순차적으로 두루 찾아 다녔다.


    


    2) 양가 부모님들이 정한 우리 부부의 약혼


휴전 후 필자는 서해 백령도 근해를 경비하는 PCEC 52함을 타고 있었다. 1957년 1월 초. 휴가를 얻어 영월에 있는 집으로 가는 도중, 오상동 외가에서 며칠 놀다 가려고 의성 역에서 내렸다. 외가가 있는 동리는 진성 이씨의 집성촌으로 그 곳에 사는 어른들은 모두 필자의 아버지와 옛날부터 잘 알고 지내는 어른들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필자가 가기 1년 전 즘, 어머니가 저의 동생 두명을 그 곳으로 내려보내, 며느리(필자의 배우자) 감을 살펴 보게 한 적이 있었다고 하며, 또 어머니가 친히 친정(저의 외가)을 방문하여 외숙모님(어머니의 올케)에게 "초전댁(처 조모님의 택호) 손녀들이 참하게 자라났지요"라고 칭찬한 것이, 그 집(후일 처가) 귀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모르고 외가를 방문하여 큰 외숙모 댁에 들렸는데, 외가와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그 집(후일 처가)에서는, 필자를 한 번 눈 여겨 보기 위해, 후에 장인 되신 분이 필자가 머물러 있는 외가로 찾아 오셔서 잠시 저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어른이 집으로 돌아가신 다음, 갑자기 큰 눈이 내리기 시작 함으로, 행여나 폭설로 인하여 의성읍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수름재가 막혀 통행이 불가능 하게 될까봐, 필자는 서둘러 그곳을 떠나 의성 역에서 야간 열차를 타고 영월 집으로 올라갔다.


  


내가 영월에 들어간 다음 날 아침이었다. 저의 장인 되신 그 어른이 필자가 떠난 다음 날 열차 편으로 강원도 영월로 올라 오셨다. 모처럼 만난 양가 어른들은 쌓였던 회포를 풀면서 대화를 나누다가, 자녀의 혼사 문제로 화제가 옮겨져, 드디어 우리들의 약혼을 양쪽 부모님들의 합의로 결정한 것이다. 그런 관계로 당사자인 우리 두 사람은 직접 만나 서로 이야기도 나누어 보지 못하였고, 또 처가쪽에서는 저희 집에 대한 자세한 형편을 탐색해 보려고 왔다가, 갑작스럽게 약혼으로 진전되었으니 집안 다른 분들과 의논도 하지 못했으며, 또 필자의 부모님도 아무런 준비 없이 있다가, 옛 친구와 회포를 풀던 중 결정한 것이기에, 아무런 폐물도 건네지 못하고 성경 찬송 한 벌을 사서 약혼의 증표로 드렸던 것이다.


     


    3) 결혼 전 우리들이 주고 받은 첫 편지


당시 필자는 고지식 하고, 또 융통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고, 오랫동안 전시하의 군복무를 하고 있는 사병이었기에 호주머니 속은 텅 비어 있는 빈 털터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휴가를 마치고 함정이 정박하고 있는 진해로 내려가면서 약혼자가 있는 곳에 잠간 들리는 것이 좋으련만, 주머니 속엔 돈도 없고, 또 용기도 없다 보니 들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중앙선 열차를 타고 진해로 내려갔다. 물론 마음 속에서는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했지만, 부모님께 들리겠다고 말하면 돈(여비) 좀 달라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안 그런 척 하면서 참고 지나갔던 것이다. 



그 때 필자는 함정 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함정이 진해 모항으로 귀항해야만, 편지를 보낼 수도 있고, 또 밀려 있던 편지들을 한꺼번에 받을 수도 있는 처지였다. 휴가로부터 함정으로 돌아가자 바로 펜을 들어 사랑하는 이에게 첫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런 다음 차일피일 회신이 올까 기다리고 있었는데, 몇 일 안된 시점에 약혼자가 보낸 편지가 함정으로 날아왔다. 약혼자 역시 필자가 보낸 편지를 받는 즉시 써서 보낸 것이 분명하였다. 필자는 약혼자의 편지를 받고 울렁거리는 마음을 억제하면서, 얼른 뜯어 단숨에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다음, 또 다시 읽고 또 읽었다. 그 후 필자는 그 편지를 근무하다가도 꺼내 보고, 자다가도 꺼내서 보았었다. 그 이유는 편지를 보낸 사람이 장차 한 평생을 같이 할 사람이고, 나를 지극히 사랑해 주는 사람이기에, 그 편지를 보고, 또 보고, 세 번, 네 번, 되풀이해 가면서 보게 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특별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독생자도 아낌없이 이 세상에 보내셔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이와 같은 크신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이, 저에게 보내주신 사랑의 편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 말씀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랑의 하나님께서 주신 이 편지를 나는 어느 정도 열심이 보아야 할 것인가? 만약 게을리 하고 있다면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하는 것이 될 것이니, 그 편지 내용인 창세기로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사랑하는 약혼자가 보낸 편지 보다 더 열심이 보고 보고 또 보아야 할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해군에 복무하는 동안 매일 같이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기로 작정을 하고, 하루 7장 이상을 꼭 읽은 다음 잠 자리에 들도록 생활 습관을 고치게 되었었다.


 


    4) 결혼 전 우리들이 첫 만남


사랑하는 약혼자로부터 보내온 편지 사연 중에는 "지금 가지고 있는 긴 머리를 퍼머하기 위해 자르기 전에 약혼 기념 사진을 찍고 싶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사연을 본 필자는 금 토 주일 3일간(72시간)의 특별 외박을 얻어, 1957년 1월 18일 새벽 4시 진해를 출발하는 첫 통근열차 편으로 출발하여, 창원(昌原), 삼랑진(三浪津), 대구, 그리고 영천을 거쳐, 해가 넘어갈 무렵 의성 역에 도착하여, 중간에 있는 수름재를 넘어 15리의 산길을 지나 오상동 외가로 들어갔다. 이제 약혼한 사이가 되었으니, 약혼녀의 집으로 들어가도 하등의 문제 될 것이 없으련만, 마음 약한 필자는 외가로 들어갔으니, 지금 와서 스스로 생각해봐도 필자는 무척이나 소심하고 옹졸한 사람이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예비 처가의 연락을 받고서야, 약혼녀의 집,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에는 약혼자의 조모님과 부모님이 모두 계시는 장소였다. 그 자리에서 약혼자와의 첫 인사를 나누었고, 가까운 자리에서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그 때 있었던 일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조모님이 이불을 펴 발을 덮어 주면서, 둘이 가까이 앉아 이야기 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남 몰래 이불 속에서 서로의 손을 꽉 잡으면서, 얼굴을 서로 처다 보며, 행복한 심정으로 이야기 하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떠 오른다. 밤 늦도록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예비 장인의 명령이 예비 장모에게 내려진다. "오늘 새벽 일찍, 진해에서 떠나왔으니 피곤할 것이다. 그러니 이젠 그만 내 방에 와서 자게" 하라는 것이었다. 마음 속으로는 조금 더 이야기 하고 싶지만, 그만 일어나서 사랑 방으로 갔더니, 예비 장인이 주무실 자리 옆에 이부 자리가 준비되어 있기에, 내일의 꿈을 설계 하면서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다가 새날을 맞았다.


   


     5) 약혼 사진을 찍으려고


1957년 1월 19일 아침. 사랑하는 사람의 말대로 약혼 기념 사진을 찍기 위해, 15리 밖 읍내 사진관으로 출발하는데, 예비 장모님이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동리를 벗어나자 예비 장모님이 "둘이 재미 있게 이야기 하면서 먼저 가게, 읍에 도착하거든 조금만 기다려 주게" 이렇게 말한 다음 옆으로 빠지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말 많은 반촌(班村=양반 동리)이 되다 보니, 처녀 총각만 보내면 말이 많음으로 동리를 벗어날 때까지,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도 동리 입구로부터는 감시원이 함께 갔었다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비 장모님이 옆으로 빠진 다음, 우리 둘은 간간이 서로 손을 잡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15리 길을 걸었다. 읍에 먼저 도착한 우리는 예비 장모님이 도착할 때까지 잠간 기다렸다가 함께 사진관으로 들어가서 약혼 사진을 찍고,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집으로 돌아 왔는데, 역시 동리 입구에서 기다리다가 함께 집으로 들어왔었다. 



후에 아내로부터 들은 이야기지만, 약혼한 남자를 만나보니 남자로서는 너무나 용기가 없는 사람 같았다는 말을 들었다. 약혼한 사이가 되었으니, 좀더 손도 꽉 잡아 주고 어깨 동무도 할 줄 알았는데, 너무나 얌전하기만 했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 결혼 전 필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필자가 다닌 학교는 남녀 공학이었다. 그 때 우리 반에는 12명의 여학생이 있었다. 매일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동창생이지만, 그들 중 한 사람과 1:1로 대화 하는 경우가 되면, 필자는 얼굴이 화끈거려 이야기도 하지 못했던 얌전이, 그래서 친구들은 필자를 보고 "공부 벌래"라고 말했었다. 


    


     6) 결혼식 거행


한 달 정도가 지난 1957년 3월 초였다. 서해 출동에서 진해로 귀항한 필자는 다시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휴가를 얻어 영월로 올라가, 아버님과 함께 3월 8일 의성으로 내려 갔다. 당시 오상교회(오늘날 의성동부교회)는 너무나 연약하여 담임 목사님도 모시지 못하는 어려운 교회였고, 또 예배당 건물도 흙 벽돌로 쌓아올린 조그마한 건물을 쓰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결혼식은 부득의 예배당에서 하지 못하고 처가 마당에 멍석을 깔고, 다른 교회에 시무하시는 목사님을 모셔와서 주례자로 세워, 1957년 3월 9일 백년을 약속하는 결혼예식을 올렸다.


  


결혼한 당일 해가 넘어 감으로서 처가 앞채 방에서 신혼 첫 날 밤을 맞게 되었다. 차려진 신방에 우리 두 사람이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방문 앞 뜰에는 동리 사람들이 모여와서 첫날 밤을 지켜 보겠다며 떠나지를 않는다. 피곤도 하고 밤도 늦었기 때문에 나란히 잠 자리에 들었는데, 밖에 있던 어떤 사람이 방문 창호지에 성냥을 그어 불을 부치는 것이었다. 창호지에 불이 붙자 온 방안은 밝아졌다. 그는 그 불빛을 통해 방안을 살펴본 다음 불을 끄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창호지가 불탐으로 생겨난 구멍으로 손을 넣어, 안에서 걸어둔 방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와서, 가려져 있는 병풍을 제치고는 신혼 부부가 덮고 있는 이불을 밖으로 끌고 나가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짓궂고 심한 장난이 밤 늦도록 계속되어 큰 곤욕을 치룬 바 있었다.


 


     7) 결혼 후 맞은 첫 주일예배


결혼한 다음 날(1957년 3월 10일)은 주일이었다. 우리 신혼 부부는 아내가 섬기던 오상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였는데, 모인 교인은 한 30명 정도 되엇을까? 당시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영수님(목회자가 없는 곳의 리더)께서 "신랑 신부는 나와서 특창을 해 주십시오"라고 말씀 하시기에 우리 부부는 오늘 날의 찬송가 325장(예수가 함께 계시니)를 부르면서 하나님께는 감사를 드렸고, 우리 서로 간에는 앞으로 시험과 걱정과 근심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물리치면서, 힘을 모아 주님을 위해 살자고 굳게 다짐하면서, 결혼 후 첫 주일 예배를 하나님께 올렸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그 때로부터 56년의 세월이 흘렀다.



찬송가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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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지각한 신혼여행이 조퇴까지


당시 경북 지방의 풍속은 결혼한 신부는 바로 시집으로 가지 않고, 후일 다시 날을 정하여 시집으로 가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것을 "신행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풍속에 따라 결혼 몇 일 후 필자는 처가에 아내를 남겨두고, 군함으로 돌아 가 다시 서해 전선으로 출동하여 백령도 근해 경비에 임하였다. 4월 중순 모항으로 귀항하자 다시 휴가를 얻어, 아내와 함께 대구를 거쳐 벚꽃이 만발한 진해로 지각한 신혼 여행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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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 꽃 만발한 진해의 거리를 6년 동안은 외톨로 걸었고, 일곱번째는 아내와 함께 신혼여행 한 길이 되었지요


   


진해에 사시는 외가 친척이신 박00 선생님 댁에 몇 일 묵었다가, 아내에게 필자가 타고 있는 군함을 구경 시켜 주려고, 해군 통제부 동문을 거쳐 군함이 정박하고 있는 제1부도로 가서 함정 안으로 들어갔다. 결혼한 아내를 데리고 방문 왔다는 인사를 하였더니, "유 하사관은 유조선 O-3함으로 전속 발령이 났고, 그 배는 곧 원양 항해(동남아에 있는 3개국을 친선 방문하는 항해로 겸하여 해사 졸업생을 훈련 시키는 행사)을 떠나게 되었으니, 빨리 부임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부임할 함정의 소재를 확인하니 부산 제1부두에 정박하고 있고, 원양항해로 갈 곳은 태국, 그리고 자유 월남과 자유 중국인 대만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많은 해군 군인들이 함정 인수를 위해 미국을 간다거나, 함정 수리를 위해 일본으로 가는 경우, 그리고 사관학교 졸업생 훈련을 위한 원양 항해를 가게 되면, 머리를 싸매고 서로 그 함정으로 전속 가겠다고 덤벼드는 형편이니, 굴러 들어온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인생의 중대사인 신혼 여행을 도중에 깰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아내를 데리고 진해에서 기차를 타고 창원을 거처 삼랑진 역으로 올라가서, 상행편 열차로 아내를 대구로, 필자는 부산으로 내려가 O-3 함에 부임했다. 그럼으로 지각한 우리들의 신혼 여행이 다시 조퇴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와 같은 기이한 현상은 오직 우리 부부에게만 있는 일이 아닐까?


  


 나. 결혼 56 주년 기념일을 맞이한 날


세월은 유수 같이 흐르고 흘러, 우리 두 사람이 만난 지 어느덧 56년의 세월이 흘러, 두 사람 모두 흰 머리가 나부끼는 늙은 이들이 되었다. 2013년 3월 9일 우리 부부가 맞이한 뜻 깊은 결혼 56주년의 날, 이날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보금자리가 아닌, 망망한 태평양 가운데서 풍랑을 헤치고 하와이를 향해 가는 유람선 안이었다. 우리들이 갖게 된 이번 여행은 자녀들이 힘을 합하여 필자의 팔순과 56주년 결혼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베풀어 준 뜻 깊은 여행이었기에 이 날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유람선 안을 돌아 다니면서, 맛 있는 것을 찾아 먹고 또 볼거리들을 구경하면서 하루의 모든 시간을 즐거움 속에서 보냈다. 



저녁이 되었다. 6시 30분부터 7층 극장에서 Jay Mattioli가 벌리는 Magic과 Comedy Show가 있었기에, 우리는 그것을 관람하고, 밤 7시 반경 객실에 들어오니, 6층에 있는 Grand Restaurant 에서 Happy Anniversary(축 결혼 기념일)이라고 글을 새긴 Cake를 우리들이 들어 있는 방으로 보내왔는데, 그 것이 우리 방 탁자 위에서 주인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침대 위에는 객실 봉사요원이 Cake 에 써 있는 글귀를 보고 우리들의 결혼 기념일을 축하 하기 위해, 큰 수건을 틀어서 두 마리의 학이 하나가 되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만들어 침대 위에 세워 둔 것도 함께 볼 수 있었다. 생전 처음 외국인으로부터 축하 Cake을 받았기에 큰 감회를 느끼면서, 5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부부에게 베풀어 주신 크신 은혜를 다시금 깨달으면서 감사 드리는 순간을 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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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지난 날을 되돌아 보니


    1) 미혼 시절


내가 탄 인생 열차는 1933년 2월 안동군 일직면 소호리 양지 마을에서 기적 소리 울리면서 출발하였다. 안동을 떠나 순흥, 영주, 풍기를 거쳐 점점 북쪽으로 북쪽으로 이동하여, 드디어 영월에 이르렀다. 잠시 풍기와 서울 등지를 나들이 했다가 다시 영월로 돌아와서 정착하게 된 다음, 산수 좋은 영월에서, 진리의 양식으로 영을 키우면서, 또 세상 학문을 배우기 위해 초딩, 중딩의 과정을 지나 고딩이 되어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50년 여름, 영월을 점령한 인민군이 젊은 이와 학생들을 잡으려고 설치자, 필자는 그들을 피해 도망치듯 영월을 떠났다. 부모님 옆을 떠나 외톨이가 된 소년, 의지할 곳이 전혀 없는 거지로 전락한 학생, 거제도의 부둣가에 가마니를 깔고 이슬을 맞으면서 누웠을 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구치면서, 지난날엔 관심 없이 듣던 "꿈에 본 내 고향"이란 유행가 가사가 외로운 소년의 기억 속으로 찾아오면서, 내 신세가 이 노래 가사처럼 되었다고 한탄 하기도 했었다. 



(노래를 들으시려면 아래 붉은색으로 쓴 "꿈에 본 내 고향"을 클릭하십시오)


 


꿈에 본 내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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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8월 필자는 침략자에게 빼앗긴 국토를 되찾기 위해, 날강도와 싸워야 하는 나라의 머슴이 되었다. 바다의 사나이가 된 필자는 그 날의 기상 여건이 좋으냐 험악하냐에 따라, 뱃양반이 되었다가도, 금방 뱃놈으로 변하기를 수 없이 거듭하면서, 때로는 차디 찬 바다 물속에서 어름과 같이 굳어진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함체(艦體) 보다 더 높은 풍랑을 뚫고 잠수함 처럼 요동 치기도 했으며, 기뢰가 깔려 있는 해상을 누비면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항로 없는 바다를 헤매고 다녔다. "내가 정신을 차리면 살고, 방심하면 우리 모두 한꺼번에 죽는다"는 결의 속에서, 때로는 먹는 것도 잊어야 했고, 때로는 자는 것도 미루면서, 몇 며칠을 뜬 눈으로 함포를 붙들고,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7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드디어 1957년 6월, 긴장 속에서 살던 해상 생활을 끝내고, 영월 땅으로 돌아와 7년 동안 멈추어 두었던 인생 열차에 올라타 목적지를 향해 가려고 옛 생활로 복귀했다.


 


    2) 인생 동반자와 함께 떠난 길


1957년 3월 군에서 제대하기 3개월 전,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생사고락을 함께 하겠다는 동행인을 만나 결혼한 후, 그 해 11월 그와 함께 영월 땅으로 들어갔다. 북한 오랑케가 짓밟고 간 폐허 속에서 사글세 단칸 방을 얻어 신혼 살림을 차렸는데, 생각 보다 인생 항로가 만만치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신혼 생활을 가리켜 아름답고 행복하고, 아기자기 하다고 말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세상을 살아 가는데 절대 필요한 연료가 너무나 부족하였고, 주위에서 밀려오는 난관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거세었고 험한 탓에, 계속되는 두려움과 고달픔 때문에, 아기자기 하다고 말하는 신혼 기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어렵게 보냈다.


  


가난 그 가난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  먹을 것 없고 입을 것 없어, 눈 보라와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어둡고 추운 겨울, 열차는 동력이 떨어진 탓에,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언덕길을 넘지 못하여, 전진 후퇴를 수 없이 거듭하면서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계속 그런 가운데서 헤매다 보니, 인생이 가야 할 옳은 길을 분별하지 못하고, 점점 정도를 벗어나 가로등 없는 어두움 속으로 빠져가는 것이었다. 필자의 머리 속에서는 쇠고랑을 차는 한이 있더라도 부정한 수법을 통하여 주머니 속을 채워 볼까? ....., 아니면 스스로 공동묘지를 찾아가 입산 신고를 할까? ....... 도저히 가면 안 되는 막다를 길을 택하고 말까를 수 없이 저울질 했다. 종국에는 자포자기의 늪으로 깊이 빠져 "될 대로 되라"는 생각 속에서 달려가는 인생 열차의 운전대를 마구잡이로 돌리는 한심한 인간이 되고 말았었다.


 


    3) 나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채찍


아내는 한심한 남편의 회심을 눈물로 기도하면서 어려운 가정을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1964년 2월 초순 추운 겨울 오후 12시 20분이었다. 드디어 하나님의 채찍이 필자에게 내려진 것이었다. 그 때 필자가 근무하던 직장(영월우체국)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데, 사무실 천정 합판에 불이 붙어 타는 것이 보이는 것이었다. 조기에 불꽃을 발견한 탓에 소방서의 도움과 주위에 있던 여러 직원들의 노력으로, 제 빨리 진화하였다. 피해액이 경미하다 하더라도 당시 화폐 가액으로 약 20만원 상당을 들여야 원상 복구할 수 있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자 서울체신청으로부터 감사관이 내려와서, 화재의 책임을 누가 져야 할 것인가를 조사 하더니, 주간 근무 중의 화기 책임자는 서무계장으로 지정되어 있으니, 그 책임을 서무계장인 필자가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 하여 공무원법 상의 징계 처분을 받게 되었고, 또 1계급 강등과 동시 경기도 송탄우체국 업무담당 자리로, 보직 없는 자리로 좌천된 것이다. 거기에다 영월경찰서에서는 형법상의 실화 책임자로 입건하여 원주 검찰지청으로 송치하여, 종국에는 기소유예 처분으로 끝나게 되는 여러 모양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면 한 없이 억울한 일이었지만, 도저히 피할 길 없어 그 짐을 혼자 지고 힘든 길을 갈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후에 깨닫고 보니, 이것은 하나님이 필자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채찍은 보다 가볍게, 그리고 은혜는 보다 풍성하게 주시려고 결정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을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4) 너무나 크신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는 실로 놀라웠다. 영월을 떠난 필자는 부모 형제와 정든 고향을 떠나는 것임으로 죽는 줄로만 생각했다. 낯 설고 물 선 땅, 오산비행장이 있는 소돔 고모라 성과 같은 환락의 도시로, 이곳에서는 미군들과 양공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 참아 눈 뜨고 볼 수 없는 문제 때문에, 자라나는 자녀들을 위해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 살겠다고 짐을 풀게 되었으니, 짐을 풀면서 곰곰이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런 곳으로 보냈을까? 거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숨어 있겠지. 죄의 길로 가고 있는 불쌍한 인간을 구하시겠다는 하나님이 뜻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채찍을 드신 것임을 깨달게 되면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낯선 이곳에서 나를 도와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 그래서 필자는 하나님이 계시는 길로 인생 열차를 몰고 갔는데,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송탄 좌동교회였다. 



송탄으로 이사간 후 첫 주일을 맞이하여 교회에 나갔는데, 목사님이 광고 시간을 통해 새로 이산 온 가정이라면서 우리 가족을 소개하셨다. 예배가 끝나자 나이 많은 할머님 한 분이 필자를 찾아와서 "영월에서 오셨다구" 하고 묻길래, "네"하고 대답하였더니, "부모님도 교회 나가시구"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버님은 유위길 장로님이고, 어머님은 이귀순 권사님 입니다" 그래자 "아이구 반가워라, 나는 최두수 권사요, 옛날 내가 영월에 있을 때 아버님은 권사였고, 어머님은 속장이였지, 그리고 옛날에 할머님은 영월읍교회에서 전도부인으로 시무 하셨지, 내가 잘 알지, 내가 잘 알아". 그 말을 듣는 순간 필자의 머리에서는 옛날 영월읍교회 뜰에 서 있던 최두수 권사님에 대한 기념비도 생각이 났고, 또 부모님으로부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생명과 같이 귀한 토지를 아낌 없이 헌납한 최두수 권사님"이 계셨다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주님을 사랑하시는 그 권사님을 지금 내가 여기에서 만나게 되었구나.



몇 년 동안 신앙은 깊은 잠 속에 빠져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죄인을 사망의 길에서 깨우시기 위해 하나님은 채찍을 드신 것이었다. 분명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었다. 주님을 찾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신지라, 죄 많은 저의 지난 날의 모든 죄는 말끔히 용서해 주시고, 다시는 실패가 없는 길로 인도하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주님께서는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죄인인 저를 인도해 주시면서, 유기환 목사님으로 하여금 가나안 복지 바른 길로 이끄는 인도자가 되게 하셨고, 인간적인 외로움을 없게 하시려고 최두순 할머님으로 하여금 나를 보듬어 주시려고 할머님과 어머님의 역할을 담당하게 하신 것이었다. 하나님께로 발길을 돌이킨 필자가 가는 길은 승승장구의 길이었고, 매사가 좋은 열매를 맺는 형통한 길이었으며, 장애물이 모두 제거되는 순탄한 길, 기쁨과 행복만이 솟아나는 탄탄대로를 고속으로 전진하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은혜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미천한 필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다시 섬길 수 있는 은혜를 내려 주셨고, 또 세상적으로는 잃어 버렸던 명예와 지위를 되 찾게 하셨으며, 때로는 관서의 책임자로, 때로는 중앙 부처 남들이 우러러 보는 요직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지난 날 우리 부부가 궁핍과 고통 당함을 불상이 보시고는, 경제적인 밑바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젖소를 사육하게 하시더니, 드디어 허우적거리던 구덩이로부터 건져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천한 이 몸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시고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신 분도 역시 하나님이시고, 기력이 약해진 말년에 이르러서는 부강하고 사회 복지 시설이 잘 된 미국 땅으로 인도 하여, 어려움 없는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평탄한 길로 인도하여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무한하신 주님의 은혜는,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할 막중한 것임을 솔직히 고백하는 바이다.


 


    5) 많은 고통을 혼자 짊어지고 이겨낸 아내


필자의 80년 인생을 나누어 보면, 어린 시절 17년간은 부모님과 함께한 기간이었고, 그 다음 7년간은 필자 혼자 세상 풍파를 뚫고 다녔던 기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56년간은 인생 길의 동반자인 아내와 함께 고통을 극복한 기간이다. 물론 일제의 강점기와 6 25 전쟁을 거친 관계로, 우리 한국 민족 모두가 빈곤 속에서 허덕이는 어려운 삶을 살아야 한 것은 공통적인 것이었다. 더욱이 필자의 가정은 조부님은 일본에 항거하던 독립 운동가이면서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장로님이셨다. 그리고 조모님은 일본이 가장 싫어하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인 관계로, 일제 강점기 하에서 항상 핍박과 감시의 대상으로 살았던 가정이었다. 그런 관계로 남들 보다 더 어려운 밑바닥으로 떨어져 있었기에 쉽게 헤어날 수 없는 역경 속에서 지나온 가정이었다.


 


그러던 중 조국 광복으로 이제 막 밑 바닥으로부터 헤어나려고 애 쓰고 있었는데, 북한이 침략한 전쟁으로 다시 밑 바닥으로 곤두박질 하고 말았다. 그와 같은 시기에 우리 부부는 신혼 가정을 꾸미고 출발 하였으니 도저히 평탄한 길을 기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설상가상 영월 오무개에 살 때, 온 식구가 연탄 가스 중독으로 장기간 많은 약값을 지출해야 하는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거기에다 남편이란 필자는 전쟁으로 인하여 제 때 학업을 마치지 못한 관계로, 남들 보다 뒤 떨어진 학력을 만회할 때까지 여러 면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연유로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 빠져 있는 가정을 이끌어 가는 아내의 고충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남편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실의 속에 깊이 빠져, 인생 열차의 운전대가 흔들렸지만, 아내는 열차가 탈선하지 않도록 운전대를 조정하면서 가정을 붙들고 나갔으니, 아내가 고맙기 그지 없다. 역경 속을 헤맬 때 아내는 강원도의 매서운 추위가 진행되는 겨울에도 동 내의를 마련하지 못한 가운데 추위에 떨면서 겨울을 보냈고, 또 음력 설날을 맞이하여 남들은 떡을 만들고 고기 반찬을 준비하여 즐겼지만 보리 죽 한 그릇으로 아침 끼니를 가름할 수 밖에 없는 어려움도 겪어야만 했다. 그 외에도 어려운 문제들이 많지만 모든 것을 지면에 올릴 수 없어 여기에서는 생략하려 한다...................


 


    6) 필자가 걸어온 전 생애를 그린 시


필자의 인생 일생이 위와 같은 길을 걸어왔음을 시로 만들어, 얼바인 사랑의교회 "사랑게시판" #306과 #276에 게재한 바 있으니, 아래 "바로 가기"를 클릭하면 그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1) 팔십리 인생길" (팔순 감사예배를 드릴 때 발표한 시)


"2) 나그네 일기"  (79회 생일을 맞아 만든 나그네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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