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ml> title>전쟁의 승패는 하나님 손에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 손에


부제 : 대한해협에서 벌어진 해전


      필자 주 : 필자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년 8월 15일 해군에 입대하여 7년 동안 복무한 바 있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난 당일 대한해협에서는 해상 전투가 벌어졌는데, 우리 백두산함(PC701)이 북한 함정을 격침 시켰습니다. 이 전투를 보고 전쟁은 사람이 하지만 그 승패는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기에, 그 때 벌어졌던 전투 모습을  여기에 소상히 올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필자가 입대하기 50일 전에 있었던 전투임으로 직접 목격하거나 참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필자가 입대한 후 그 전투에 참전했던 전우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도 많이 있고, 또 그 후 여러 기록들을 참고하여 다음 내용을 기록한 것임을 먼저 밝힙니다.


 


1. 조국 광복 후 해안 경비를 담당한 기구


      1945년 조국이 광복된 직후 손원일(孫元一)을 중심으로 한 인사들이 해사협회(海事協會)를 발족 시켰다. 이 해사협회는 같은 해 11월 11일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조직하여, 미 군정청(美軍政聽) 산하에 있는 해안경비국의 업무 협조를 받아, 미군정이 관활하고 있는 지역 내의 도서와 해안의 경비를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해방병단은 일본군이 남기고 간 시설을 접수하게 되었고, 또 조함창(造艦廠)을 세운 다음, 일본이 버리고 간 폐선을 수리하여 취역 시키면서, 1천명 가량의 병력을 확보하여 도서와 해안 경비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필자 주 : 손원일 장군은 필자가 입대하였을 때 해군 총참모장이었다. 그 후 그 직명이 참모총장이라고 변경되었다.


  


      1946년 1월 14일에는 해안경비대로 그 명칭이 개칭되었고, 같은 해 9월 미국 해군으로부터 상륙정(上陸艇) 2척과 소해정(掃海艇)을 인수하였다. 그리고 1947년에는 국내 주요 항구에 기지를 세웠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9월 5일에 이르러 대한민국 해군으로 승격 되면서, 임무 역시 해상 작전과 상륙 작전을 담당하는 조직으로 확대 개편된 것이다.


  


2. 전투함을 갖기 염원하여


      정부가 수립될 당시 해군의 병력은 3천명 정도였고, 함정은 일본이 사용하다가 버리고 간 낡은 소형 함정과, 미국으로부터 도입한 소해정 등, 몇 척 안 되는 소형 함정 뿐이었다. 거기에는 전투함정이라곤 한 척도 없었으니, 전 국민들이 해안을 지키기 위해서는 전투 함정이 꼭 있어야 하겠다는 염원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래서 625 전쟁 발발 전, 해군 장병들이 출연한 기금과, 뜻 있는 분들이 희사한 성금과 국고금 등, 도합 $60000로, 미국 New York King's Point Long Island에 있는 U.S. Merchant Marine Academy로부터 도입한 함정이, 곧 백두산함(PC 701)이다. 이 함정은 대한민국 해군의 유일한 전투함이자 현대식 장비와 무장을 갖춘 함정이기 때문에,1950년 4월 10일 진해 항에 입항하자, 곧 바로 국민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국내 주요 항구인 부산, 묵호, 제주, 목포, 군산, 인천 등의 항구를 순방하고, 1950년 6월 24일 진해 항에 귀항하였다.


 


      해군이 처음으로 도입한 전투함 백두산함은 1944년 7월 미 해군이 함정 번호를 PC-USS 823으로 정하고 취역하여,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대서양에서 독일 잠수함 탐색 작전에 참전한 구잠함(驅潛艦)이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남으로 퇴역한 이 함정은 우리 해군이 인수할 때까지 미국 해양대학에서 실습선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우리 나라가 그것을 $18000 을 지불하고 인수하여, 미국 조선소에서 수리를 가하였고, 또 3인치 함포 등의 무기를 장착하는 등, 총 $60000의 경비를 들여, 대한민국 함정 백두산함(PC 701)으로 명명한 후, Guam을 거쳐 1950년 4월10일 진해 항에 도착한 것이다. 


   


        이 함정의 주요 제원은 


            배수 톤수 : 285톤


              길이 : 52.9 m


              폭 : 7m


              홀수선 : 2 m


              최대 속력 : 20.2 knots(시속 40.7km)


              엔진 : 2880 bhp 디젤 엔진


              승조 정원 : 73 명


              무장 : 3 inch 함포 1문(76 mm), 중기관총(12.7 mm) 2정


    


      필자 주 : 1, 원래 미국에서 이 함정을 건조할 때는 구잠함(驅潛艦)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조하였으나, 한국에서 도입하여 전쟁을 수행할 때는 해상 경계와 전투용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당시 우리 해군에서는 이 함정을 초계함(哨戒艦)이라고 불렀다. 


      2. 625 전쟁 당시 필자는 백두산함(PC 701)과 똑 같은, 한라산함(PC 705함)과, 금강산함(PC 702함)을 4년 넘게 승조하였다.


      3. 필자가 승조한 한라산함(PC 705함)과, 금강산함(PC 702함)에는 40mm 기관포와 대잠 폭뢰 등 더 많은 무기들이 장착되어 있었다.


   


3.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다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조국의 적화 통일이라는 목표를 세우고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소련으로부터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무기를 지원 받아, 남침 준비를 착착 진행했었다. 이렇게 준비한 군비로 1950년 6월 25일(일요일) 새벽 4시를 기하여, 고요히 잠들어 있는 남한을 수륙 양면으로 침공하기 시작했다. 육상으로 내려온 북한군은 38선 전역에 242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중장비로 무장한 7개 사단 규모의 병력이 그 뒤를 따라 내려 왔으니, M1 소총과 칼빈 소총으로 경무장한 한국군은 총 한번 제대로 쏘아보지 못하고, 파죽지세로 깨어지면서 남으로 남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면 해상 방위 태세는 어떠하였는가? 정부가 수립될 당시 해군의 병력은 불과 3천명 정도였고, 또 보유하고 있는 함정도 일본이 사용하다가 버리고 간 낡은 소형 함정 몇 척으로, 위력 있는 함포가 달린 전투함은 오직 백두산함 뿐이었다. 그리고 38선 인근 해상에는 오직 1척의 소해정(YMS)이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1950년 4월 미국으로부터 구입해 온 전투함 백두산함(PC 701)은, 전쟁 발발 하루 전날인 6월 24일 진해 항구에 들어 왔기 때문에, 그 때까지는 전투 능력이 갖추어 지지 않았었다. 그리고 승조원들도 함정 인수하여 태평양을 건너왔고, 연 이어 국내 주요 항구를 순방하는 등, 장기간에 걸친 항해가 끝났던 시점이라, 오래간만에 얻은 외출 외박으로 가족들과 즐기고 있었던 터이었다. 


  


      북한군은 38선 전역에서 육로로 남침을 시작하면서, 해상으로도 병력을 내려보냈다. 6월 25일 새벽 강원도 명주군 옥계 해안과 정동진 등지에, 북한군 549 육전대 소속 1,800 여명, 그리고 삼척, 임원 등지에는 766 유격대 소속 1,300 여명을, 상륙 시켜 우리나라 후방을 교란 시키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전개되자 해군 묵호경비부에서는 새벽 5시30분 경비부 요원으로 편성된 전투부대를 현지로 긴급 출동 시켜, 상륙한 북한군에 공격을 가하여, 옥계 남쪽 도직리에 상륙한 적 33명을 사살했다. 또 긴급 출동한 해군 함정 509정은 6월 25일 새벽 7시20분, 옥계 근해에서 적 전투함(PC급)과 교전하여 적함을 격퇴시켰으며, 같은 날 오후 3시에는 옥계 북방 해안에 상륙하고 있는 적을 발견하여 포격을 가함으로 적의 상륙을 저지하였다. 그리고 적 상륙정 1척을 격파하고 발동선 1척을 나포하였다. 북한군이 강릉지역으로 침공한 목적은 강릉지구에 주둔하고 있는 한국 8사단을 고립시키려는 목적이었다.


 


4. 701함에 내려진 작전 명령


      오랫동안 해상생활을 끝마치고 6월 24일 진해 모항에 귀항한 백두산함(PC 701)은 식량과 유류 그리고 부식과 필요한 군수품의 재보급을 받을 여유도 없었고, 당직자를 제외한 승조원들 모두는 외출 외박을 나갔다. 


  


      그런데 일요일인 6월 25일 오전 10시가 지났을 무렵 정박 중인 701함에 통제부 사령관 김성삼(金省三) 대령이 찾아와서, 701함 당직 사관인 김종식 소위에게 “동해안 옥계·임원 해안에 인민군이 상륙하고 있"음을 설명하면서, 해본 작전명령 갑 제49호를 하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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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적이 된 후 처음으로 승전 쾌보를 올린 백두산함


    


      "해본 작전명령 갑 제49호  "701함장은 통제부 사령관으로부터 YMS 512정과  518정을 인수 지휘하여, 즉시 동해안에 출동하여 제2정대 사령관의 협조 아래, 해상 경비를 강화하는 동시에 적함을 포착하는 대로 격침하라"는 명령이었다. 


 


      701함장 최용남 중령은 작전 명령에 따라 외출 외박 중인 승조원들에 대한 귀함 명령을 내림과 동시, 주부식, 유류, 탄약 등의 물자와, 만약에 대비하여 위생 요원(군의관과 위생하사관)도 확보하는 등의 출항 준비를 완료하고서, 통제부 사령관에게 출항준비 완료를 보고하였다. 사령관으로부터 상세한 작전상의 주의사항을 지시 받은 후, 1950년 6월 25일 오후 3시 YMS-512정을 지휘하여 진해 항을 출항하였다. 그 때까지 출항 준비가 완료되지 아니한 518정에 대해서는 완료 되는 즉시 출항하도록 지시하고, 512정과 종렬 진을 형성해 동해로 항진해 나갔다.


  


5. 정체불명의 선박 발견


      당시 701함 승조원들은 해전 경험이 전혀 없었고, 또 새로 도입한 함정의 주포에 대하여도 포탄 가격이 너무 비싼 관계로 1발도 발사한 경험이 없는 상태였다. 진해 모항을 출항한 701함은 오후 6시 30분 부산 앞 오륙도 등대 옆을 지나 침로를 045도로 잡고 북상하고 있었다. 오후 7시 30분 경 다시 침로를 028도로 변침하여 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 8시 12분 방위 045도, 거리 약 7㎞ 되는 수평선상에 솟아 오르는 검은 연기가, 함교(艦橋)에 있던 견시(見視)의 시야에 들어왔다. 


 


      701함은 방향을 바꾸어 정체불명의 선박을 향하여 최대 속도로 항진하면서, 뒤따르고 있는 512정에도 전속력으로 뒤따를 것을 명령하고, 기동력이 강한 701함 단독으로 정체불명의 선박을 추적해 갔다. 얼마 후 짙어 가는 노을 속에서, 추격하는 정체불명의 선박은 수평선 위에 검은 점으로 뚜렷하게 포착 되었을 때, 701함장은 전투 배치 명령을 내렸다. 이 무렵 보급품 적재를 완료하고 뒤 따라오는 518정도 가까운 해상까지 접근해 왔음을 확인하였다. 


 


      드디어 정체불명 선박과의 거리가 약 5마일 정도가 되었을 때, 701함은 발광(發光) 신호로 정지신호를 잇달아 보냈으나 전혀 반응이 없다. 거리가 약 3마일 정도로 좁혀지자 괴 선박은 갑자기 선수를 동쪽으로 돌리더니 시꺼먼 연기를 내뿜으면서, 전속력을 내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적함이 아니고서는 도망갈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701함은 정체불명의 선박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1,000톤 급으로 보이고, 무엇을 실었는지 워터라인이 엄청 들어가 있는 것이 확인된 가운데, 수평선만 끝없이 펼쳐진 해상에서 추격전이 2시간 정도 계속되었다. 701함이 위험을 무릅쓰고 가까이 다가가자 정체불명의 선박은 일반 상선처럼 항해등을 켜고 항해하였으니, 701함을 속이려는 기만 작전으로 나왔다. 


 


      필자 주 발광신호란, 고촉광 불빛을 기계적인 방법으로 단속하여, 모루즈 부호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통신 방식이다. 예를 들어 상대방의 국적을 알기 위해 "너의 국기를 게양하라"고 통신 할 때는 "JF"(도쓰쓰쓰 돈돈쓰돈 = ._ _ _   .._.)이라고 보내면 된다.


 


6. 신분 확인을 위한 수하 질문


      정체불명의 선박은 소련에서 건조한 선박으로 보였고, 선체를 검은색으로 칠하여 있었으며, 국기도 달지 않았고, 선박 이름도 써 있지 않았다. 북한 함정이라는 의심은 가지만, 정체불명의 선박이라 하여 확인 없이 공격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함부로 공격 하였다가 국제적인 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701함은 30분 동안 국제해양신호규정이 정한 바에 따라 발광 신호 다음과 같이 선박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 하였다.


  


      "JF" = "너의 국기를 게양하라",


      "NHIJPO" = "너의 국적을 밝히라",


      "IJG" = "언제 어디를 출항하였는가?",


      "LDO" = "목적 항구가 어디인가?" 등의 질문을 던졌으나, 계속 응답하지 않고 침로 180도, 속도 12 knots로 남하하고 있었다. 적함이 틀림없다고 의심한 701함은 포탄 장전을 하고서는, 밤 11시51분 정체불명의 선박 우현 100m 가까이 접근해 갔다. 정체불명의 선박 선수(船首) 갑판에는 함포가 있고, 선교(船橋) 뒤쪽에도 중기관총을 천으로 덮어 놓은 것이 보였다. 갑판에는 완전 무장한 군인이 빼곡히 타 있는 것도 보였다.


 


      모든 정황으로 보아 북한 함정이라는 의심은 점점 깊어 갔다. 틀림 없는 확인을 위해 701함은 정체불명의 선박에 접근하면서 정지 명령을 수차에 걸쳐 보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어, 북한 함정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굳어졌다. 그래서 701함은 15 knots의 속도로 정체불명의 선박에 접근하면서 Search Light로 조명하였다.


  


      국기도 게양하지 않았고, 선명도 표시되지 않았으며, 갑판 뒤쪽에는 중기관총 2정이, 그리고 수병복을 착용한 수많은 무장 군인들이 타고 있는데, 그 복장은 북한 정규 해군 및 육전대의 복장임이 확인 되었기에, 적함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701함은 즉각 적함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해군 본부에 긴급 보고 하기를 “확인된 선박은 북한의 1000톤급 수송함정으로, 많은 북한군이 승선하고 남하 중에 있음. 상륙을 기도하는 것으로 판단됨”이라고 타전 보고했다.


 


      701함이 해군본부에 상황을 보고하자 적함을 나포하라는 회신이 곧바로 날아왔다. 그러나 공해상에서는 나포하기 어렵다는 것을 감지한 해군본부는 적함을 격침하라는 두 번째 명령문을 보내 왔다. 26일 0시 30분, 701함장의 "전투 개시" 명령이 내려지자 포술장(砲術長) 유용림 중위의 "사격 명령"과 함께 3 inch 주포는 불을 내뿜었다. 포탄은 적함의 마스트를 통과하여 적함의 좌현 해상에 떨어져 물기둥이 치솟았다.


  


7. 포탄을 주고 받는 전투로


      701함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적함은 급선회를 시도했다. 701함은 거리를 더욱 좁혔고, YMS 518정도 701함의 좌현 후미에서 37㎜포로 사격을 개시하자, 적함은 57㎜포와 중 경기관총 등으로 대항하는 치열한 포격전이 전개되었다. "거리 1500, 발사" 다시금 발사된 701함의 3 inch 포탄은 보기 좋게 적선의 메인 마스트에 명중했다. 이 때 적함은 한줄기 광선을 내비치며 Search Light로 701함을 찾기 시작했다. 함장의 지시에 따라 포술장은 "신호등을 겨눠라"는 명령을 내리자, 날아간 포탄은 적함의 신호등을 명중 시켜 박살을 내었다. 적함은 도망가는 것을 단념하고 화력을 701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캄캄한 바다 위에는 701함과 적함이 쏘아대는 기관포와 주포의 붉은 예광이 계속 줄을 긋고 또 그으면서 날아갔다. 마침내 적함의 이동 속도가 줄어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으로 기우는 것이 목격되었다. 적함이 기울어짐에 따라 흘수는 점점 낮아져 가고 있었다. 


   


      이때 35발의 포탄을 쏘아댄 701함의 3 inch 주포가 고장을 일으켰다. 격발장치의 고장으로 사격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이를 알아차린 적함은 최후의 반격을 시도했다. 적함과는 약 1000 m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적함은 침몰 하면서도 701함 쪽 400 m 가까이 까지 다가왔다. 적함은 공격 목표를 701함으로 집중하더니, 적함의 후 갑판에 있는  85 mm 포에서 발사한 포탄이 701함의 조타실 중앙하부에 명중했다. 


 


      이로 인하여 조타수 김창학 삼등병조(三等兵曹)는 파편상을 입었지만 계속 키를 잡고 있었고, 또 주포 전화수 김춘배 삼등병조 역시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음에도 전화기를 놓지 않고 버티다가, 애석하게도 이 두 하사관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포탄을 주고 받던 치열한 포격전은 적함이 뿌연 증기를 내뿜으면서, 바닷물 속으로 자취를 감추는 순간, 격렬하던 전투는 끝을 맺었으니, 그 시각은 6월26일 새벽 1시38분이었다. (화염에 휩싸였다가 침몰한 적 수송함 사진은 게시 파일 용량 관계로 올리지 못했음을 양해 바랍니다).


 


8. 해상 전투는 남한 함정의 승리로


      이 해전 쌍방 함정의 전력을 먼저 간단히 비교해 보려고 한다. 함정의 크기는 적함이 더 크지만 기동력은 우리 군함이 더 우위였다. 화력은 함정에 고정된 화력으로 볼 때는 우리 함정이 더 강한 편이나, 적함에는 게리라 병력들이 우리 나라 후방으로 침투하려고 적재한 85mm(3.4 inch) 짜리 대 전차포를 비롯하여, 600명이나 되는 많은 게리라 병사들이 육전에서 사용하기 위해 소지한 기관총과 개인 화기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모두를 종합해 본다면 적함의 화력이 우위에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우리 측엔 2척의 YMS(소해정=목조선) 함정이 작전에 동참하였는데, 이 함정은 150 톤급 소형 함정으로 속력도 느리고 또 화력도 약한 함정이었다. 


 


      우리 군함 701함


          건조 국가 : 미국


          배수 톤수 : 285 톤


          길이 : 52.9 m


          폭 : 7 m


          함정 유형 : 대잠함으로 건조된 전투함


          최대 속력 : 20.2 knots(시속 40.7 km)


          승조 인원 : 함정 승조원 73 명, 


          무장 : 3 인치 함포 1문(76 mm), 중기관총(12.7 mm) 2문


          협력 함정 : 150톤급 YMS(소해정) 2척


   


      적 수송함


          건조 국가 : 소련


          배수 톤수 : 약1000 톤


          길이 : 약 70 m


          폭 : 약 10 m


          함정 유형 : 전투 능력을 갖춘 수송함


          최대 속력 : 12 knots(시속 22,3 km)


          승조 인원 : 승조원 외 무장 병력 약 600 명


          무장 : 85 mm 대전자포 1문, 57 mm 포 1문, 중기관총 2문, 그 외 개인 화기 다수


          협력 함정 없음


     


      적함에 타고 있는 게리라 군인들은 남한의 침략을 목표로 이미 고도의 훈련을 마친 특수 요원들이었고, 우리 701함은 새로 도입한 함정인 까닭에, 함정과 함포 등에 대한 운용술이 익숙하지 않았던 시점이다. 거기에다 바로 전날 모항에 입항한 관계로 훈련할 겨를도 없이 전투에 임한 것이니, 적함을 제압하기엔 어려운 입장이었다. 만약 근접 전투를 벌렸다면 우리 함정이 크게 불리하였을 것이지만, 적함인 것을 확인하자 신속하게 거리를 둔 것이 현명한 작전이었다고 본다.


         


      이 전투에서 701함은 1000톤급의 적 수송선을 격침시켰으니 타고 있던 많은 게리라 특수 병력과, 적함 승조원 전원을 수장 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그와 반면에 우리 군함은 적의 포격으로 조타실 일부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고, 김창학 김춘배 2명의 하사관이 전사했으며, 또 김종식 소위와 1명의 병사가 부상을 입는 것으로 끝났다. 그 후 확인된 바에 의하면, 침몰한 적 수송함은 북괴의 특수 부대원 600명을 태우고 남하하여 부산 지역에 상륙 시키기 위해 내려 보낸 것』이라고 확인되었다. 


 


9. 이 해전에서 승리 함으로 얻은 결과


      비록 이 전투는 소규모의 해전이었고 잘 알려지지 않은 전투였지만, 그 의미는 매우 크다고 본다. 그 이유는 북한군 수송함을 해상에서 격침 시켰으니, 북한이 기도한 우리 나라 후방 교란은 무산되고 말았다. 만약 이 해전에서 아군 함정이 패하였다면 부산이 쉽게 북한군에게 점령 당함으로, 끝내 우리 나라는 재기할 수 없게 되었을지 모른다. 


 


      우리 해군이 이 전투에서 이김으로 우리 나라 해상 수송로를 확보할 수 있었기에, 한국을 지원하려는 유엔군이 부산항을 통해 속속 입국하여, 낙동강 전선을 방어하던 국군에게 반격의 발판을 마련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서울이 함락된 1950년 6월28일,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사단 21연대 1대대인 Smith 특수 임무부대와, 또 총포탄 300만 발을 실은 탄약 수송선 2척이 일본 사세보(させぼ=佐世保) 항으로부터, 무사히 부산에 7월1일 입항할 수 있었다. 그 뒤를 이어 미 제34연대, 미 제21포병대대 등, 모두가 부산항을 통하여 들어와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전사가(戰史家) 노먼 존슨(Norman Johnson) 박사는 그의 저서 "6·25 비사"에서 대한해협 해전을 “625 전쟁의 승패를 가른 분수령”이라고 표현했다.


  


10. 경제적 우위 속에 남침 준비한 북한


      일제는 36년 동안 우리 조국을 식민지로 통치하는 동안, 산악이 많은 북한 지역에는 전력과 광공업 위주로 개발하였고, 평야가 많은 남한 지역에는 농업 위주로 경제 활동을 육성하여, 우리 땅(일제 식민지)에서 생산되는 공산품과 농산물 등을 공출 등의 여러 가지 명목을 들어 탈취해 가는 정책을 장기간에 걸쳐 시행 하였다. 그런 관계로 북한 지역은 전력과 광공업이 뿌리를 내렸고, 남한 지역은 농업 위주로 곡물 생산에만 주력하는 농업 체재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런 이유로 1945년 일본이 패전하여 조국이 해방될 때, 남한의 경제사정은 북한 보다 뒤진 상태에서 해방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 조국이 해방되고 분단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48년 5월, 북한은 남한에 송전(送電)하던 전력을 단절하고서는, 잉여 전력을 만주 지역에 매각할 정도로 북한은 전력이 남아돌았다. 그런 반면 남한에서는 전력이 너무나 부족하여, 서울 시내를 달리던 전차가 길 거리에 서 있는가 하면, 가정용 전등은 시간제로 공급하고, 고장은 심야에 가동해야 하는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아래 문서 내용은 한국 전력에서 발행한 "참고자료(전자소자팀/4. 14)"라는 문서 내용을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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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電 參考資料


(전자소자팀 / 4. 14)


1. 韓電 일반현황


     (중간 생략)


 


2. 전력설비 규모


    ◦ 8. 15 광복당시 남북한 전력설비 현황   (단위 (천kW)


구     분            남    한                       북    한                      합    계


발전설비 규모          198                 1,524                1,722


                     (11.5%)              (88.5%)              (100%)


 


       ※ 남한지역의 발전설비는 소규모의 수력과 영월, 당인리 등의 낡은 화력발전 설비가 전부였던 반면, 북한 지역은 풍부하고 값싼 수력발전으로 전기 생산에 여유가 있었음. 당시 남한은 필요한 전력의 60% 정도를 북한으로부터 송전 받아 충당하였으나, 1948년 5월 14일 북한은 일방적으로 송전을 중단.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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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북한은 일본이 패망하면서 두고 간 많은 공장(군수 공장 포함)을 수리하여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북한 경제는 날로 성장하는 반면, 남한 경제는 공장도 많지 않은데다 전력까지 부족하여 경제 성장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다. 거기에다 농업 기술의 개발 없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구 증가(정상적인 자연 증가와 북한에서 월남하는 피난민과, 해외에서 돌아오는 인구 등)로 마침내 식량 부족 현상까지 일어났다. 그러자 대통령이  외국에 식량까지 구걸해야 하는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참고로 그 후 한국은 경제 개발 정책을 시행 하여, 2차 산업을 육성 함으로써 서서히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아래 주소를 클릭하면 1961-2003년까지 사이 남북한 국민소득을 비교한 도표를 보면 거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애당초 도표를 이 자리에 올리려고 했으나 게시할 수 있는 파일 용량의 제한 관계로 도표를 올리지 못하였으니, 아래 주소로 가서 직접 열어 보시기 바랍니다).


http://m.blog.daum.net/taeocho/312


 


      해방 직후 남한의 경제 사정이 어려움에 처하여 허덕이고 있을 때, 북한은 경제적인 호황 속에서, 소련의 기술 지원을 받아 무기 개발과 생산에 박차를 가하여, 드디어 남한을 제압할 수 있는 군비를 갖춘 후, 625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1950년 전쟁 발발 당시 남북한 병력은 한국군 104559명에 비하여 북한은 198380명, 그 중 육상 전투요원은 한국군 94947명에 비하여 북한군 191680명이니, 북한군의 병력이 2배나 되는 막강한 병력이었다. 거기에다 한국군이 가지지 아니한 전차를 북한군은 무려 242대나 가지고 있었고, 장갑차는 27:54의 비율로 북한의 우세, 그 외 많은 전투 장비들의 수가 북한군이 우위였다. 거기에다 군인들의 전투 경험 역시 북한군은 중국 팔로군 출신이 많은데 비하여, 한국군은 전투 경함이 전혀 없는 자들이 많았다. 자세한 내용을 보려면 다음을 클릭해서 확인할 수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D%95%9C%EA%B5%AD_%EC%A0%84%EC%9F%81


  


      이상 내용과 같이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북한이 기습 공격을 가해왔기 때문에 북한군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였고, 또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경상남도 일부를 제외한 남한 모든 지역이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래서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 전쟁은 북한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남한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다.


  


11. 하나님의 은혜로


      시 127:1 을 보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


      삼상 17:47 에는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과 억압과 어려움 속에 빠졌을 때,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음 을 통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해결한 사례를 우리는 성경에서 수 없이 찾아볼 수 있다. 


      마 7:7-8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 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진실로 그러하다. 전쟁은 사람이 한다 하더라도 그 승패의 결정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주를 찾고 의지하는 자 편에 서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물론 해방되기 전까지는, 북한에 사는 기독교인들의 믿음이 남한에 사는 기독교인들 보다 더 뜨거웠다고 교회사 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해방 후, 북한에는 김일성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자,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해 왔다. 그와 반대로 남한 땅에는 자유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서 신앙 부흥운동이 일기 시작 함으로써, 많은 남한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으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들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자비의 손이 남한으로 옮겨온 것이다.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은혜를 내리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을 찾는 남한 백성에게 승리를 안겨 주시려고, 대한 해협 해전부터 승리로 이끌어 주신 것이다. 불래셋 골리앗 장군에게 떨고 있는 이스라엘을 구하시려고, 소년 다윗의 손을 빌려 물맷돌로 적장을 쓸어 트려 승리로 이끄심 같이, 하나님께서는 전쟁에서 패전할 징조가 짙어가는 한국 백성을 구하시기 위해, 대한 해협 해전에서 승리케 하셨음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백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관련 있는 동영상 보기      (6분 4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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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와 사진 음향 동영상은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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