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기행 #1  (바다와 맺은 인연)

필자 주 :


하와이 기행은 2013년 3월, 자녀들의 특별한 배려로 유람선을 타고 15박 16일 동안 하와이 관광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 쓴 글들입니다. 


필자가 쓴 하와이 기행은 모두 15부로 작성하였는데, 그 중 


     제4부 "항해중에 맞은 결혼기념일"은 "결혼 생활 57년 중에 있었던 희비 쌍곡선"이란 제목으로 "사랑게시판 제347호"로 올린 바 있고


     제6부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라는 제목으로 이미 "사랑게시판 제326호"로 올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제9부 "하와이 섬의 활화산"은 같은 제목으로 "사랑게시판 제330호"에 올렸습니다. 


그간 필자는 하와이 기행 내용에서 중간 중간 일부를 발췌하여 다른 글에 인용한 바 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기행들의 게재를 그간 유보하였던 것입니다. 2년이 지난 지금, 뒤늦게 올리게 되었음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중간 중간 이미 올린 다른 글과 중복되는 것이 약간 있을 것임을 미리 알려 드리면서 양해를 구하는 바입니다.


서론 


1933년 2월에 출생한 필자는 금년(2013년) 2월 제80회 생일을 맞았다. 필자  부부는 팔순 감사예배를 마친 다음 자녀들의 주선으로 2013년 3월 4일 Cruise Century호에 올라타고 15박 16일의 하와이 관광을 떠난 바 있다.


2013년 3월 4일 아침, 살고 있는 Lake Forest 집에서 차편으로 San Diego항구로 내려가, 유람선에 올라 태평양을 횡단하여 Hawaii 3개 섬에 있는 4개 항구에 입항하여 상륙하였고, 귀로에는 Mexico Encenada 항에 잠시 기항하였다가 19일 집으로 돌아왔다. 



16일 동안 필자가 타고간 배가 항해한 거리를 계산해 보았더니 4895 마일(海浬)에 이른다. 이 거리는 육상에서 시용하는 마일(陸浬 = S/M) 보다 243 m가 더 긴 해리(海浬 = N/M) 로 계산한 것임으로, 이를 미터(m)로 환산해 보았더니 그 거리는 9250740 m(1852 m X 4895 마일=해리)이고, 육상에서 사용하는 마일로는 5748.3 마일(9250740 m /1609.3 육리)에 해당하는 장거리였다. 



필자가 탔던 섬나라와 같은 유람선 Century호는 희랍 출신 선장이 움직이는 71545 톤의 선박이었다. 이 유람선은 유람선으로서는 조금 작은 편에 속하지만, 그 안에는 906개의 객실이 있고, 거기에 수용된 승객은 모두 1814 명이나 된다. 그리고 선박을 움직이는 해기사(海技士)와 선원 그리고 승객에게 봉사하기 위해 승선한 요원들이 1000명에 근접한 인원이라고 하니, 근 3000명에 이르는 많은 인원이 떠 다니는 도시(都市) 안에서 먹고 마시며 즐기면서 함께 생활하는 여행이었다.


선박의 규모는 상하 14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안에는 9개의 승강기와 에스카레타가 쉴 사이 없이 움직이면서, 모든 승객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었다. 유람선 안에는 2개소의 식당(Buffet Restaurant, Grand Restaurant)과 천주교 미사실, 극장, Pool장, Fitness장, SPA실, 의료실, 미용실, 이발소, 사진실, 꽃집, 무도장, 죠킹장, 도박장 등 많은 선내 시설을 승객들이 찾아 다니면서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야 말로 중소 도시 보다 더 수준 높은 문화 시설을 갖추고 있어, 한 마디로 말해서 없는 것이 없는 호화 찬란한 움직이는 섬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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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ury호의 모습  (필자가 촬영한 사진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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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ury호의 발코니 있는 객실  (필자가 촬영한 사진은 아님)


 


"Century 유람선에 관한 동영상 보기"  (필자가 촬영한 동영상은 아님)


 
그리고 San Diego를 떠날 때, 16일 동안 소비하기 위해 부식물과 과일 등을 적재한 양(量)을 선박측이 공개하였는데, 그 수치를 살펴 보니 쇠고기 3700 LB, 양고기 1900 LB, 돼지고기 2400 LB, 통닭 3800 LB, 닭살고기 1800 LB, 달걀 2400 타, 과일 68000 LB, 양파 3600 LB, 야채 4000 LB, 감자 11100 LB, 그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생선 등을 많이 싣고 떠났다고 한다. 그야 말로 그 양은 엄청난 것이었다.


움직이는 섬나라 생활 16일 동안, 필자가 그곳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피부로 느낀 것이 그야 말로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지난 날 필자가 지나오면서 남긴 발자취 가운데서 필자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기 일보 직전까지 이른 것들이, 하와이 여행을 통하여 다시금 기억 속으로 되돌아 온 것이 너무나 많았기에, 졸필이지만 그 내용들을 올리게 된 것이다.



1. 짧지만 해상 생활을 시작하려 하자


그간 오랫동안(50 여년) 필자는 육상에서만 살아왔다. 유람선에 승선 하기 위해 San Diego를 향해 5번 Freeway를 달려가는 동안, 차창을 통해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를 보게 되었다. 그러자 망각 속으로 점점 사라져 가던 일들이 필자의 머리 속으로 찾아오는 것이었다.



필자는 경북 안동 지역의 한 농촌에서 출생하여 강원도 영월 땅 정양리와 덕포리에서 자라났다. 해방 직후 잠시 서울에 올라가서 고학한 적은 있었지만, 그 때는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너무나 바쁘다 보니 바다를 구경하기 위해 가까운 인천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전혀 만들지 못했다. 그런 관계로 바다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구경해 보지 못한 가운데서 성장한 촌놈이고, 산골 놈이고 감자 바위다. 


 
그러던 필자가 
어떻게 바다와 연관을 맺게 되었는지그것들이 다시금 필자의 머리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가. 한국전쟁이 일어나서
1950년 6월 25일 새벽 6 25 전쟁이 일어났다. 그 때 필자는 영월공립고급중학교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하는 5학년 학생(2학년 때 서울에서 영월로 전학)이었다. 그 때 아버지는 영월화력발전소 기관부에 몸담고 있는 직장인이었는데, 산업 시설의 동력이 되는 전력 생산에 매여 있는 관계로 함께 피난하지 못하고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과 함께 영월군 남면 광천리(굴골)라는 농촌 마을로 난리를 피해나갔다.


피난한지 1주일 정도 지난, 7월 4일 아침이었다. 전쟁에 대한 뉴스를 들어보기 위해 혼자 영월 읍내로 들어갔는데, 생전 보지도 못한 전투모에 붉은 별을 단 기마병 한 사람이 기마소총을 어깨에 메고 들어와, 말에서 내리는 것을 필자는 보았다. 그 인민군은 사람들을 보고 "동무, 국군들이 지금 어디에 있소, 또 식량 창고는 어디에 있소" 이와 같은 것을 묻고, 사람들의 답변을 들은 다음, 속골(束谷) 쪽으로 급히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17세의 소년이던 필자는 겁을 집어먹고, 곧 바로 가족들이 피난 가 있는 굴골로 달려가서 인민군이 영월에도 들어왔다는 것을 어머니에게 고했다. 



그런데 그날 오후 2시경이었다. 한 젊은 이가 헐레벌떡 서강(西江)을 건너 굴골로 달려오면서 피난민들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하기를, "지금 읍내에는 많은 인민군들이 들어왔고,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젊은 이와 학생들을 잡아가고 있다"면서, "내 뒤에 인민군 두 사람이 이 쪽으로 젊은 이와 학생들을 잡기 위해 오고 있다"는 말이었다.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도망가야 살지, 안가면 죽는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몸을 숨기기 위해, 그곳을 떠나가기 시작하였는데 대개가 젊은 이와 학생들이었다.

나. 잠시 피하려고 떠난 필자
     어머니는 “한민아, 너도 어서 피해라. 여기 있다가는 인민군들에게 잡혀간다”고 말씀하시면서, 대충 보기에 4되쯤 되는 쌀이 든 자루를 주면서, 피할 것을 재촉하시는 것이었다. 필지는 얼른 방으로 들어가서 필자가 아껴 보던 신구약 합부 성경책과 찬송가를 들고 나와, 어머니가 주시는 쌀 자루를 받아 들고 피하기로 결심 했다. 그 때 우리 나라는 일본 식민 정치 아래에서 해방된 지 5년밖에 되지 않았던 관계로, 우리 가정의 경제적인 면에서도 좋은 책을 살만한 여유가 없었고, 또 출판 기술도 오늘날처럼 발달되지 않았기에 들고 나온 성경과 찬송가 책은 모두 값싼 책이었다. 그렇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이 나의 영을 살리는 귀한 양식이기에, 어려움을 당한 가운데 있었지만 필자는 성경과 찬송가 책을 잊지 않고 챙기게 되었다. 2-3일 후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바쁘게 떠난 관계로, 주머니 속에는 돈 한 푼 없었다. 그렇지만 전혀 걱정되지를 않았다. 그 이유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요한복음 14장 1절 말씀이 머리에 떠 올랐기 때문이다.



소년 필자는 어머님의 말씀에 따라 잠시 피하면 다시금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단순한 생각에 부모님 옆을 쉽게 그리고 아무런 걱정도 없이 떠날 수 있었다. 그 때 가까운 곳에 피난 나와 있던 학교 친구 최00와 함께, 먼 밧단 아람으로 떠난 야곱처럼 인민군에게 잡혀가지 않으려고 정처 없는 길을 떠나게 되었다. 우리 두 사람이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훔치면서 손을 흔드시는 필자의 어머니와 친구의 어머니(김00 속장님), 우리는 가다가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눈물을 닦으면서 발길을 재촉했다.



굴골 뒷산을 넘어 숲을 헤치고 나아가다가 조그마한 산길을 만났다. 남쪽으로 뻗어 있는 쪽을 향해 쉬지 않고 밤길을 걸어가는데, 음력 5월 19일의 밝은 달은 우리들의 앞길을 비추어 주기에, 밥도 굶으면서 계속 산길을 뛰다가 걷기를 거듭 거듭하여, 밤 9시경 단양군 가곡면(佳谷面)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에 이르렀다. 눈앞에 보이는 조그마한 농가로 들어가니, 집주인은 이미 피난 가고 없고, 여러 명의 피난민들이 들어가서 호롱불을 켜 놓고 밥을 짓고 있기에, 우리도 쌀을 씻어 밥은 만든 후 반찬 없는 맨밥을 먹은 다음, 잠시 눈을 부치려고 방 한쪽 구석에 누었는데,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음으로, 그 이유를 알고싶은 호기심에 우리는 그곳을 찾아가 보니 마을 사람들이 모여 소를 잡고 있었다.



쇠고기 부스러기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말을 부쳐보았더니, 그 대답은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밤 위대한 해방군이 이곳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소를 잡고 있으니, 너희들은 여기에 얼썽거리지 말고 빨리 가라”는 것이었다. 
이 소리를 들은 우리는 화급히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가까운 단양읍을 목적지로 정하고 가고 있던 우리는 가곡면 관내까지 인민군이 곧 들어온다면, 우리가 단양읍에 도착하기 전 그곳에도 인민군이 들어올 것이 뻔할 것이니, 단양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목적지를 단양에서 죽령으로 변경하곤, 밤을 새워 높은 노루고개를 넘어, 남쪽으로 남쪽으로 쉬지 않고 달려갔다.

  다. 부모님과의 재회의 길은 점점 멀어지다 
1950년 7월 5일 새벽 6시경, 어둠이 거쳤는데, 산밑에 중앙선 철로가 보였고 가까이 내려가 보니, 제천쪽에서 남행하던 마지막 열차가 똬리 굴 속에서 동력이 부족하여 정차하는 바람에, 열차에 탔던 모든 사람들(주로 피난민)이 흑인 같은 모습이 되어 굴속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우리도 굴에서 나오는 그들과 함께 철로를 따라 죽령(竹嶺) 역까지 가서 기다렸더니, 오전 9시경, 도착한 기차에 우리도 몸을 싣고 풍기, 영주를 거쳐 오후 5시경 안동 역에 이르렀다. 피난민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객실 화물 칸은 물론 기차 지붕 꼭대기까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기차에서 내려 밖으로 나가는데, 승차권을 가진 사람은 여행자 임으로 간단한 검문을 거친 다음 바로 나갈 수 있었으나, 승차권이 없는 사람과 특히 젊은 사람들은 안동경찰서에서 나온 경찰관들로부터 손바닥에 굳은살이 있는지(총기 취급으로 인하여 생긴 굳은살)를 가려내려는 세밀한 검사를 거친 후, 안동 읍내 한 학교 교실로 인도되어 그곳에서 하룻밤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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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들이 너무나 많아 객차 화물 칸은 물론 기차 지붕 위까지 타고 있다



1950년 7월 6일 아침 다시 안동에서 기차 편으로 경주로, 7월 7일 아침에도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에 도착하니 많은 피난민들을 서면에 있는 성지국민학교로 인도 하여, 그곳 교실에 임시 수용되는 것이었다. 얼마 동안 그곳에서 건네주는 하루 한끼의 주먹밥으로 연명하게 되었는데, 혹시나 인민군이나 간첩들이 피난민을 가장하여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착하는 곳마다 철저한 검문을 받았고, 수용된 후에는 철저한 감시 아래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게 되었다. 갈 곳 없는 필자는 수용되어 있는 교실 바닥에서 배고픔을 달래면서 소일하다가, 주일이 되면 가까이 있는 서면교회로 나가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돌아오는 것이 가장 큰 낙이었기에, 언제나 어서 주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 속에서 천년 같은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외로운 가운데 처해 있는 우리들에게는 영월에서 떠난 사람이라면 부모형제를 만난 것처럼 그렇게도 반가웠다. 영월 출신들이 모이고 모인 것이 드디어 14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 지금까지 기억에 떠 오르는 사람들을 거명 한다면, 학교 동창인 최00, 전00과 그의 누님 전00, 곽00, 그리고 마차에서 온 이00, 그 후에 진해에서 만난 엄00 등이다.


 


   라. 바닷가 농가에서 머슴살이 하는 필자
   머지않아 여름 방학이 끝나면 피난민들이 수용되어 있는 교실을 초등학교에서 사용해야 하고, 또 부산으로 밀려오는 많은 피난민을 부산시 단독으로는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경상남도(당시 부산시는 경남도 관활 하에 있었음)는 부산에 모여든 피난민을 도내 각 농촌으로 분산 배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8월 1일 필자와 친구들 일행은 배정 받은 거제도로 옮겨가기 위해, 조그마한 목선에 올라타 통영(지금의 충무)을 거쳐 거제도로 들어갔다.



필자가 배정된 곳은 거제군 동부면에 있는 한 농가였다. 한 두 명씩 농가로 분산 배정되어, 끼니마다 농가에서 주는 밥을 먹고, 농가에서 시키는 일을 하는 머슴 아닌 머슴이 되어, 종일 지게를 짊어지고 농사일을 도왔다. 매일 같이 쇠꼴을 뜯어오고 쇠죽을 쒀서 소를 먹였고, 때로는 변소의 오물을 퍼서 저 날리는 등, 농사 일을 도우면서 며칠을 보냈다. 저녁이 되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사랑방에 누어 잠을 청했지만,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포성은 하루가 다르게 점점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곳은 섬이고 또 농촌이기 때문에 전세가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걱정과 근심이 쌓이기 시작했다. 



만약의 경우 전쟁에서 한국이 패하면, 나의 장래는 어떻게 될지? 부모님과 가족이 모두 죽임을 당하면, 나는 전쟁 고아가 되지 않을까? 또는 영원히 이 집의 종살이하는 지경에 빠지지는 않을까? 예상할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하기 때문에, 하루 속히 그곳을 벗어나야 하겠다는 생각에 잠겨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며칠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다가, 일행들 모두의 의견에 따라 섬을 떠나 부산으로 가기로 결정 했다.

  마. 학생복 차림의 노숙자


농촌 마을에 와 있던 필자와 동향 학생들 모두 육지로 나가기 위해 농가를 떠났다. 배를 타려고 제일 먼저 거제 항을 찾았더니, 전세(戰勢)가 불리하게 되어 육지로 가는 뱃길이 끊어진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다는 절망적인 답변을 들었다. 그래서 다시 걸어서 육지가 가장 가까운 성포(城浦) 항으로 갔는데 거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농가에 있을 때는 끼니마다 주는 밥으로 굶지는 않았다. 농가에서 나오니 행동의 자유는 있으나 배속에서 나오는 쪼르락 소리는 누구도 막을 길이 없었다. 밤이 되었는데 성포 항 부두 가에 허기에 찬 몸으로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누웠더니, 찾아오는 배고픔과 처량함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피난민 하나가 그곳 특산물 멸치 몇 포를 사왔기에, 시급한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마른 멸치를 모두 앉아 까먹었다. 굼주리고 허약해진 창자에다 멸균도 되지 않았고, 또 기름끼 많은 멸치를 먹었으니 조용할 까닭이 없었다.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부터 모두의 배속에서는 한국전쟁 아닌 또 다른 새로운 전쟁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화장실 문을 박차면서 들락날락 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고 보니 배는 고프지만 멸치 까먹는 것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우리 모두는 기진맥진한 몸으로, 부두가 가마니 위에 누워 찬 이슬을 맞으면서 별을 처다보는 가운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바. 삶의 바닥으로 떨어진 거지 소년


아침이 되었다. 어느 누가 말하지도 않았지만, 각자는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쪽박이나 깡통도 들지 않고, 구걸할 목적으로 각자 남의 집 문전을 찾아가게 되었다. 필자도 학생복을 입은 옷차림으로 남의 집 삽작(집 안팍을 구별하기 위해 만든 간이 문) 앞까지는 갔지만 차마 밥 한술 달라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는다. 머뭇머뭇 하다가 용기를 다해 인기척을 내었더니, 식구들이 모여 앉아 아침밥을 먹다가 방문을 열고서 내다보는 것이 아닌가? “학생 어떻게 왔어” 하고 묻지만 차마 “밥 좀 주십시오” 라는 말이 나오지를 않는다. 물어보던 아주머니는 “학생 배가 고픈 모양이군” 하더니, 밥 한 그릇과 국 한 그릇을 조그마한 상에 받혀 주시지 않는가? 아주머니를 보는 나의 눈에는 아주머니가 마치 구세주처럼 보였다. 이틀을 굶고 중간에 심한 설사까지 하였으니, 두 그릇을 더 준다고 하더라도 먹을 자신이 있을 정도로 맛있게 먹었다. 나는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면서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지난 17년 동안 배 고프지 않도록 미리 미리 먹을 것을 찾아 주셨고, 또 춥지 않도록 입을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지. 지금 나는 부두가 가마니 위에서 이슬을 맞으면서 별을 처다 보고 누워야 하고, 또 허기를 달래기 위해 문전걸식 하는 신세가 되었으며, 지나간 한 달 동안 목욕 한 번 하지 못하고 땀이 찬 옷, 더러워진 옷을 계속 그대로 입고 살아야 하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서야, 몰랐던 부모님의 은혜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각 각 구걸하기 위해 각개약진으로 시급한 민생고인 먹거리 문제를 해결한 일행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성포로부터 먼 거리에 있는 장승포(長承浦)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늦게 장승포에 도착하여, 수소문 하니 육지로 나가는 배편을 얻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전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선박 운행이 크게 제한을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성포를 떠나 쉬지 않고 장승포로 가느라 점심 얻어먹을 시간이 빼낼 수가 없었다. 그런 연고로 배는 몹시 고팠다. 우리 일행은 오늘 저녁부터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디에서 잠을 잘 수 있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이 때 머리에 떠오르는 성경 말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6장 25 - 26절에 기록되어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 임이 입증되는 순간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장승포읍교회 기독학생회 회장이 우리를 찾아와서 학생회 사업으로, 우리 일행(모이고 모인 것이 모두 14명)을 돌봐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부터 학생들이 공급해 주는 주먹밥을 먹었고, 또 그들이 알선해 주는 곳에서 쉴 수 있게 되었기에,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 동안 봇짐 속에 깊이 넣어 두었던 성경책을 꺼내어, 그 날부터 다시금 규칙적으로 성경 읽는 생활로 되돌아 가게 되었다.

  아. 바다와 인연을 맺으려고
장승포경찰서에서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거제도에 와 있는 피난민들을 예의 감시하면서, 우리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파악하고 있었다. 1950년 8월 
5일, 경찰관과 함께 해군 모병관이 우리를 찾아왔다. “젊은 학생들, 지금 우리 나라는 위급에 처해 있습니다. 지금 저 포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경남 일부만 남고 모두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니, 나라를 구하기 위해 여러분들이 나서야 합니다. 해군에 입대하여 나라를 위해 싸우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해군 입대를 호소하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 가운데 여학생과 나이 많은 사람, 그리고 몸이 불편한 자와 군 입대를 원하지 않는 자 몇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입대지원서를 작성하여 서명 날인한 후 모병관에게 제출했다. 
입대하기로 결정한 우리들은 한결같이 장승포교회 기독학생회장에게 남아 있는 사람들을 끝까지 돌보아 달라는 부탁을 하고서는, 모병관이 징발한 작은 목선에 몸을 싣고 1950년 8월 8일 진해 경화동에 있는 해군 신병교육대 영내로 들어가 해군 군인이 되는 길로 한 걸음 다가섰다.

  자. 뱃 사람이 되기 위한 혹독한 훈련
  
   해군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단정술, 기류신호, 수기신호, 결색술, 응급구호법, 수영 등 그 외 여러 가지 기본 훈련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 그와 같은 많은 과목을 이수하기 위해서는 훈련 소요 기간이 3개월로 정해져 있었는데, 유독 1950년 8월 15일 입대한 우리들에게는 3개월이 아닌 1개월로 그 훈련 기간을 단축하여 실시되었다. 분명히 해군에 입대한 것인데 해군 군인의 기본 훈련은 뒤로 미루고, 방아쇠를 먼저 당기면 살고, 늦게 당기면 죽는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 시키면서 육전 훈련에 치중한 훈련을 일제 치하 때 우리 민족이 혹독하게 노역하던 그 말 그대로 "월월화수목금금" 매일 새벽 4시 반에 기상하여 밤 9시까지 혹독한 훈련이 계속되는 것이었다.


 


훈련은 역경 속에서도 참을 수 있는 인내심을 키우기 위해, 매일 새벽 기상 직후 실시하는 구보로 체력을 단련하였고, 한 사람의 태만으로 생기는 군함의 침몰을 막아야 한다면서 한 사람의 잘못이 있을 때 항상 연대 책임을 지우는 단체 기합으로 단결심을 키우는 훈련, 또 단 1분이라도 지각하면 출항한 군함에 탈 수 없다는 것을 인식케 하는 철저한 시간 준수 훈련, 민간인의 정신을 군인 정신으로 개조 하겠다면서 "삼천만 동포의 선물"이라는 글귀가 써 있는 야구 방망이로 궁둥이를 때리는 가혹한 매질로 시행하는 정신 훈련과, 교육대 가까이 있는 마진고개는 자동차를 타고 올라가도 힘든 고지를 돌격하여 올라가는 힘겨운 훈련을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받았다. 그러면서도 바다의 사나이가 되었다는 의식을 주입 시키려고 다음과 같은 군가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계속 부르는 훈련이 한달 동안 계속 되었다.


  


해군신병교육대 노래 
동해에 푸른 물결 하늘에 솟고
남해 바다 한산도에 파도가 친다
삼천리 이 강산에 새봄이 오니
교육대 젊은 용사 이곳에 뭉쳤다 


   그리고 



     해양가 
푸른 하늘 푸른 바다 한곳에 이은 곳
흰구름 뭉게 뭉게 수평선에 솟을 때
돛단배 물결 위에 두둥실 떠간다
가자 가자 희망봉을 청춘의 꿈이다
바다로 가세 바다로 가세
새나라 위하여 태극기 달고
아 - 이 물결은 출렁출렁
어기여차 배 띄워라


한 달간의 혹독한 훈련이 끝나자, 많은 동기생들은 군 트럭에 실려 매일 같이 전선으로 보내지는 것이었다. 나중 휴전 된 후에 알게 된 바로는 많은 필자의 동기생들이 해병대로 차출되어 가서 통영상륙, 인천상륙, 원산상륙 작전의 최선봉에서 총알받이로 나가 싸웠던 관계로, 유명을 달리한 자들이 너무나 많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동기생들은 소모품용 군인이 되기 위해 1개월 간의 속성으로 양성되어, 한 번 쓰고 버려진 전쟁 소모품이었다고 생각 된다. 그러나 필자는 해병대로 차출되지 않고 진짜 바다의 사나이가 가는 길인 전투함으로 배속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강원도 산골에서 자라난 감자 바위가 바다의 사나이로 탈바꿈 하여 바다를 지키는 해군의 일원으로 부과된 책임을 다할 수 있게 되었었다. 


 
  차.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1950년 바다와 인연을 맺은 다음 군인이 되어 탄 배는 전투함이었으나, 2013년 하와이로 여행하기 위해 탄 배는 유람선이엇다. 63년 전에 탄 배는 진해 군항을 출항할 때 마다, 내가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를 예측할 수 없는 가운데 전쟁터로 나가는 배를 탔으나, 이번 탄 배는 16일이 지나면 San Diego 항으로 다시 돌아와서 집으로 돌아가는 기약 있는 유람선이었다. 옛 날에 탄 배는 600톤에 불과한 오막살이 같은 작은 배였으나, 이번 탄 배는 72000톤의 대궐과 같은 큰 배를 탄 것이다. 



63년 전에 탄 배와 이번 탄 배를 비교해 보는 가운데 생각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지금까지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으며, 또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호화찬란한 유람선을 감히 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감사를 드릴 뿐.......



2 - 3일 동안 인민군에 잡히지 않겠다고 부모님 곁을 떠난 것이 바다와 인연을 맺고, 험난한 온갖 세상 문제를 혼자 해결하면서 살아가게 되었고, 바다의 사나이로 살던 7년 동안, 적의 포탄이 생명을 위협하는 최전선 해상에서 때로는 죽음에 직면했던 긴장 속에서, 때로는 추위 속에서, 때로는 굶주림 속에서 그리고 외로운 가운데서 바다의 사나이로 나날을 보냈었다. 


철 모르는 어린 소년이 위에 적은 것과 같은 어려움 속에 살 때, 즐겨 불렀던 노래는 유행가가 아니고, 다음과 같은 가사를 가진 찬송가인데, 지금 찬송가에는 없는 찬송이다. 곡은 민요 로레라이 곡으로 위에 적은 주소로 가면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