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기행 #2  (추억 속의 뱃길 7년)


2. 군함을 목격하는 순간
     2013년 3월 4일 필자 부부와 두 딸이 탄 승용차는 San Diego Celebrity 회사 전용 부두에 도착하여 유람선 승선 수속을 마친 다음 주변을 돌아 보니, 인근 부두에는 미 해군 군함 여러 척이 정박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필자는 함정을 보는 순간, 옛 날 해군 함정을 타고 어려운 가운데서 전투에 임하던 생각들이 다시금 기억 속에 되 살아나기 시작하였기에 그 내용을 여기에 쓰게 된 것이다. 


 


  가. 막강한 화력을 가진 함정을 보고


     6 25 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년 8월 15일 필자는 해군에 입대하여 7년 동안 복무하였는데, 필자가  처음으로 승조(乘組)하고 참전했던 함정은, 당시 우리 해군의 주력함이었던 705함(한나산함)이었고, 잠시 육상 근무를 거친 다음 다시 승조한 함정은 702함(금강산함)이었다. 휴전이 성립된 후에는 상륙용 함정인 52함(명량함)과. 유조선인 O-3함(부천함)을 탔다. San Diego 항구에는 미국 함정 여러 척이 눈 앞에 보였는데, 이 함정들은 옛날 필자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승조했던 군함들과는 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함정들이었다. 그리고 전쟁 당시 필자가 승조했던 함정에 장착되어 있던 함정의 주포(主砲)는 3인치 포였는데, 눈 앞에 보이는 전함의 주포는 16 인치에다 여러 가지 종류의 미사일 등 현대식 막강한 화력들을 장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이 함정을 호위하기 위해 크고 작은 여러 척의 함정들이 있었고, 또 항공모함에는 함재기도 적재되어 있으니, 어느 누가 감히 이 함대에 대항해 보겠다고 덤빌 수 있겠는가?, 정말로 천하 무적의 대 함대가 눈 앞에 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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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퇴역한 미국 전함(1944년 이 함정 함상에서 일본으로부터 항복 조인을 받은 미주리호)


혹시나 취역 중인 함정의 사진을 촬영하다가 문제가 될까 염려하여 찍으려 하지를 아니했음 


 


  나. 한국 해군이 창설될 때는 소형 함정 몇 척으로


     한국 해군의 창설 과정은 해방 직후 일본 해군이 버리고 간 조그마한 소해정(JMS)으로 바다를 지키겠다는 목적으로 해안 경비대라는 이름으로 발족하였다. 그 후 미국으로부터 소해정(YMS) 몇 척을 무상으로 도입하여 해안 경비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1948년 우리 나라 정부가 수립 되면서 연약한 조직인 해안 경비대가 해군이라는 명칭으로 그 이름이 바뀌어졌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8개월 전인 1949년 10월 17일, 해군 장병들의 출연과 독지가의 후원금 그리고 정부 예산 지원금 등으로 해군 창설 이후 처음으로 6만 달러의 현금을 지불하고 구입한 함정이 바로 3인치 함포를 장착한 701함(백두산함)이었다. 원래 이 함정은 미국의 PC-761급, USS PC- 823 구잠함(잠수함을 제거하는 함정=450톤)이었는데, 우리 나라가 인수하여 701함(백두산함)이라고 명명하고, 우리 해군의 유일무이한 전투함으로 활동하려 할 때, 6 25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럼으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 해군은 함정도 몇 척 되지 않았고, 또 전쟁 경험도 없었기에,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연약한 상태였다.


  


  다. 무공을 세운 701함 


     1950년 6월 25일(전쟁이 일어난 당일) 오후 동해로 남하하는 신원 미상의 괴선박을 발견한 701함은 끈질기게 추적하여 마침내 북한 함정인 것을 확인하고 교전 끝에 격침 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6 25 전쟁을 일으킨 북한은 육상으로는 242대의 전차(戰車)를 앞 세웠기 때문에, 칼빈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는 한국군으로부터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일사천리로 밀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고, 우리 나라 후방을 교란할 목적으로 북한군 게릴라 병력 600명을, 민간 선박으로 위장한 선박에 태우고, 우리나라 남 해안에 침투 시키려고 내려오는 것을, 도입한지 며칠 되지 아니한 701함이 발견하고, 대한해협에서 교전 끝에 격침 시킴으로써 북한 게릴라 병력 600명을 배와 함께 수장 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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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 전쟁이 일어난 당일 오후 대한해협에서 무공을 세운 한국 701함(백두산호)


   


     그런 연고로 북한에게 기습 공격을 받은 우리 나라는 701함과 같은 유형(類型)의 함정이 더 있어야 하겠다는 것을 느끼고, 서둘러 5척을 도입하여 한국 함정의 주력함으로 작전에 투입 하였는데, 이 함정들이 바로 701함으로부터 706함까지의 6척의 함정으로, 그 중에는 필자가 승조한 705함과 702함이 포함되어 있다.


 


필자 주 :


      1950년 6월 25일 오후 대한해협에서 적함을 무찌른 701함(백두산함)에 대한 전공을 위에서 간단하게 언급한 바 있는데, 자세한 내용을 아시기 원하시는 분은 아래를 클릭해도 보실 수 있습니다.


 


사랑게시판 제383호 보기 ]


                     


  라. 추억 속의 함정과 2013년에 탄 유람선


     함정의 전투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많은 무기를 설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만큼 승조하는 군인들이 생활 할 수 있는 공간이 좁아지기 마련이다. 이번 우리 부부가 타고 간 유람선 침실은 침대를 부치면 하나로 사용할 수 있고, 분리하면 2개의 침대로 만들어 각각 양쪽 벽에 부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이번 유람선에서 필자 부부가 유숙한 방과 비슷한 넓이의 공간이라면, 당시 필자가 탄 함정에서는 4단 층층대로 된 침대 2개를 설치하여 8명의 군인이 취침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함정의 무개를 비교해 본다면 필자가 타고 전투에 임했던 함정은 500-600톤에 불과한 소형 함정이었다. 그런데 항공모함은 대형일 경우에는 80000톤 이상, 중형이면 50000톤 내외, 경(輕)형도 15000톤 내외라고 하니, 현재 눈 앞에 보이는 대형 미국 항공모함과 옛날 필자가 승무 하였던 함정과는 가히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필자 주 : 함정의 무게는 배수톤수로 측정한다. 배수톤수(排水屯數=Displacement tonnage)란 함정이 선거(船渠)에서 진수할 때 밀려나는 부피와 동일한 물의 무게로 함정의 무게를 표시한다. 그리고 상선의 무게는 적재톤수로 계산 한다.



그리고 이번에 탄 Century 유람선(71545 톤)에서는 마실 물을 상시 공급해 주고 있고, 또 Buffet 식당에서는 야간 몇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열려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종류의 음식(미국식, 영국식, 아세아식)과, 아이스크림, 피자 그리고 과일 등을 필요할 땐 언제나 찾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미용 체조 교습, Hawaii 전통의 훌러 댄스 교습, 사교 춤의 교습, 또 매일 저녁 극장에서는 노래, 만담, 춤, 마술, 쇼 등의 공연이 진행되고 있고, 한편에서는 도박판까지 벌어지고 있으니, 모든 위락 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는 곳, 그야 말로 오늘의 세상 문명이 만들어 낸 향락의 도시, 바로 현대판 소돔 고모라 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옛날 필자가 승무하던 전투함은 함정의 규모는 작은데다, 포탄을 많이 적재하기 위해, 식수의 적재량을 줄였던 관계로, 식수공급이 하루 30분 정도씩 세 차례만 제한적으로 공급해 주었었다. 그런 관계로 시간이 맞지 않을 경우에는 이를 닦은 다음 침을 뱉는 방법으로 입안을 가실 때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리고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밥도 먹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으니, 사람 위주의 군함이 아니고 전투 위주의 군함이었다. 그러니 위락 시설이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전투에 임했지만 어느 한 사람도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순응하면서 작전에 임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마. 함정과 함께 남긴 추억의 뱃길


 (1) 필자가 승조한 705함


필자는 1951년, 순환 보직 원칙에 따라 제1함대 705함 승조 발령이 내려졌다. 이 함정은 2010년 3월 26일 오후 9시 22분 서해 백령도 근해에서 북한군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한 천안함 보다는 그 규모가 조금 작은 전투함이다. 그렇지만 당시 우리 해군의 주력함정으로 초계함 또는 포함(哨戒艦 또는 砲艦)이라고 불렀다. 함정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승조원 수도 천안함에 비해 적었다. 그렇지만 갖추고 있는 화력이 막강 함으로 전투 능력은 대단 했었다. 그리고 함체는 작은데다 운항 속도가 높음으로, 풍랑이 심할 때 당하는 함정의 흔들림은 롤링(Rolling) 48도에, 빗징(Pitching) 33도까지 이르렀으니, 마치 물속을 뚫고 달려가는 모습이 잠수함과 같다고 할까? 나무 잎사귀 같다고 해야 옳을까? 간혹 심한 흔들림으로 멀미를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X물(뒤로 나가야 할 배설물)과 같은 누런 물이 입으로 올라온다면서 죽을 지경이라고 소리 지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2) 일반적인 근무 상황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매월(月) 한 차례, 진해 모항을 출항하여 원산, 흥남, 성진, 북청, 단천, 마양도 근해로 올라가서 20일 가까이, 최전방 해상에서 북한 해안 봉쇄작전 임무를 수행하였다. 교대 함정(주로 706함)이 올라오면 전력을 재충전하기 위해 진해 모항으로 기항하여 10여 일 동안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작전해역으로 출항하는 것이 매월 반복되곤 했다. 일단 함정이 닻을 올리고 진해 모항을 출항하면 그 때부터 모든 승조원은 각자의 주특기에 따라 3개조로 나뉘어 교대 근무를 해야 한다. 주간 4시간, 야간 4시간씩, 주특기에 맞는 분야에서 근무하다가, 어떠한 특수상황이 벌어지면, 그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수립되어 있는 계획에 따라 미라 짜여져 있는 자리에서 맡은 임무를 수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곳은 전시이고 또 적전이기 때문에 언제 돌발적인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바로 전투배치에 임할 수 있도록 항상 대기하면서 함내(艦內) 생활을 계속하였었다.


 


 (3) 전투 배치 시의 상황


돌발적인 상황은 주로 야간에 발생함으로, 작전해역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교대 함정이 올라와서 임무 교대를 마치고, 모항을 향해 출발하기 전까지의 밤은, 항상 뜬눈으로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 생활이었다. 그러므로 매월 20일 가까운 출동 기간에는 한결 같이 매일 전문 분야에서 8시간(주간 4시간, 야간 4시간)씩 근무해야 하고, 또 야간이 되면 특별히 수행하는 작전을 위해 특수분야에서 근무해야 함으로 고달픈 생활은 계속되었다. 당시 필자는 함정의 신경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무선통신 업무를 수행했었다. 전투배치 등의 특수상황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통신실에서 2인 1조가 되어 3교대 근무를 했다. 그렇지만 전투 배치 등의 특수상황이 벌어지면 주 특기 분야 근무는 고참에게 돌아가고, 3분의 2의 병력은 주특기가 아닌 다른 전술 분야로 옮겨가서 배치되곤 했다. 그래서 필자는 처음에는 3인치 포 탄약수로 배치되었다가 나중에는 함교(艦橋)에서 내리는 함장의 명령을 장포장(掌砲長)에게 전달하는 전화수의 임무를 수행했었다.


 


 (4) 705함의 주된 작전


필자가 승조한 705함이 최전방 해상에서 수행한 주된 작전은 원산항만 봉쇄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원산항만을 봉쇄하여 북한군 선박의 출입을 막고, 북한군이 흘러 보낸 기뢰를 제거하고, 또 원산 항만에 있는 작은 도서에 주둔하고 있는 해병 첩보부대를 보호하면서, 북한군의 많은 병력을 원산 지구에 묶어 두자는 것임으로 항상 기동성 있게 활동하였다.


 


 (5) 작전 중의 기뢰 제거


물론 기뢰를 제거하는 작업은 주로 소해정 편대가 수행하였다. 그렇지만 전투함인 705함이 초계하다 보면 자주 레이다(Radar)실이나 소나(Sonar)실 또는 함교의 견시(見視)로부터 함체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기뢰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온다. 발견한 기뢰는 파도에 의하여 물위로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를 반복한다. 그럼으로 눈으로 보기에는 크게 보이지 않음으로 저렇게 작은 것이 무슨 위력이 있겠는가 할 정도로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막상 함포를 사격하여 폭파 시켜보면 그 위력은 대단했다. 50-60m 해저로부터 흙탕물이 솟아올랐고, 또 십 여 미터의 물기둥이 목격되면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명태가 물위에 하얗게 떠오르는 것을 자주 목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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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뢰(부유 기뢰)가 물 위에 떠 있는 모습과 기뢰가 폭발하였을 때 물이 치솟는 모습


 (6) 북한의 군사 시설 포격


원산항만 봉쇄작전을 수행하고 있을 때 특별한 정보가 들어오면, 북한 군사시설에 대한 포격을 시행한다. 군사 시설 포격에 대한 한 예를 들겠다. 어느 날 필자가 탄 함정은 원산시내 모 지점에 중요한 군사시설을 폭파하라는 명령에 따라, 전투태세를 갖추고 조심조심 해안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갑자기 북한 땅에서 불이 번쩍하더니 포탄이 우리 함정 옆 바다 물위에 떨어져 터지는 것이었다. 우리 함정은 포탄까지 장전한 상태로 항진하고 있었기에, 즉시 확인된 목표물을 향해 우리 함정의 주포가 불을 내뿜었다. 날아간 포탄은 한방에 시설물을 날려버렸고, 순식간에 그 일대는 불바다가 되었다. 그러자 인민군 수 십 명이 나와서 불을 끄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다시 우리 함정에서는 20mm와 40mm 기관포로 사격을 가하였더니, 모두 대피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함정은 육상포(陸上砲)의 사격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먼 바다쪽으로 빠져 나왔다. 이와 같은 군사 시설에 대한 함포 사격은 자주 실시하였다.


 


 (7) 첩보요원을 북한 땅으로


전쟁은 적을 알고 나를 알 때 승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적에 대한 정확한 첩보를 입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원산 앞바다 도서에 주둔하고 있는 첩보요원을 북한 땅에 침투시켰다가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작전 중의 하나였다. 먼저 우리 함정에 첩보대 요원 몇 사람과 자그마한 목선 1척을 실은 다음, 첩보 요원을 상륙 시킬 해안으로 접근해 간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 목선을 내려 거기에 첩보 요원들을 태워 육지로 들여보낸다. 그런 다음 우리 함정은 북한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거기로부터 북쪽 또는 남쪽 수 마일 해상으로 이동하여, 이미 수집되어 있는 목표물에 함포 사격을 가하는 작전을 수행한다. 그렇게 하는 사이 우리 함정에서 내려준 목선에 올라탄 첩보 요원들은 조심스럽게 해안으로 이동해 들어간다.


 


며칠이 지난 다음 우리 함정은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로 옮겨가서 그들의 귀환을 맞는다. 그들이 탄 배는 레이다에 잡히지 않도록 목선을 이용하고 있음으로, 그들을 맞을 때 우리는 주도 면밀하게 살펴, 한 사람의 희생자도 발생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만 했다. 완전 전투 태세를 갖춘 상태에서 해상을 살피다가 이상한 목선이 나타나면, 금방 사격을 가할 수 있는 상태로 그들의 접근을 지켜본다. 가까이 다가온 그들은 인민군 복장에, 인민군 계급장을 단 보기에는 틀림없는 인민군들이다. 그들의 신분을 암호로 확인한 다음, 우리 함정에 승선시킨 후, 그들이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새로운 작전을 짠다.


 


 (8) 군수물자 수송 열차 파괴


함경남도 북청 근처에는 해안선을 따라 지나가는 철길이 있다. 당시 북한은 소련과 함경도 지방에서 생산된 군수물자를 싣고 매일 밤 두 차례 북한군 육상부대 최전방으로 수송해 가는 열차가 지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수송 열차를 파괴하는 작전을 거이 매일 밤 수행했다. 먼저 미국 함정으로부터 연락 장교 한 사람이 우리 함정으로 옮겨 탄 후, 밤 11시쯤부터 전투 태세를 갖춘 상태로 열차가 지나가는 해안 가까운 곳으로 접근해 들어가서, 엔진을 멈춘 상태로 열차를 기다린다.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내려가는 열차가 그 곳까지 왔지만, 우리 함정이 지키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려가지 못하고, 기관차만 굴 밖으로 내밀고, 2-3m 정도, 전진하였다간 후퇴하기를 반복하면서 통과할 기회를 엿보고 있음으로, 열차가 내뿜는 석탄 타는 냄새가 우리 함정에서도 맡을 수 있을 정도 근거리에서 대치했다.


 


드디어 우리 함정은 엔진을 기동하고, 해안으로부터 먼 바다 쪽으로 빠져나가면서 조명탄을 발사한다. 조명탄이 터지는 순간 온 세상은 대낮 같이 밝아지고, 우리 함정에 타고 있는 미군 장교가 무선전화로 연락하는 정보에 따라 바다 한 가운데 있던 미 순양함과 구축함들은 불꽃을 내뿜는다. 그와 동시 북한 땅에서도 우리 함정을 향하여 포탄이 날아오고, 열차는 전속력으로 남진해 가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UN군과 우리 함정의 집중 포격으로 마침내 기차는 전복된다. 그들은 야간작업으로 파괴된 철로를 수리하고 폭파 전복된 기차를 치운 후, 다시 군수물자 수송을 재개하기 때문에, 우리 함정은 가까운 곳에서 해안의 동태를 살피다가 새벽녘 다시 같은 작전을 전개하곤 했다.


 


 (9) 북한 비행기와의 대치


주간 어느 날, 마양도 근처 해상이었다. 당직 근무자를 제외한 전 승조원들은 야간 작전에 대비하기 위해 쉬고 있었는데, 마양도 쪽으로부터 북한 비행기 2대가 날아오고 있었다. 인근에 있던 미 함정을 비롯한 모든 함정들이 전투 태세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었다. 남북 모두 오늘과 같은 신형 무기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약 40분 동안 서로 틈만 노리는 대치 상태가 계속 되었다.


  


비행기가 하늘에서 100m를 날아가더라도  함정은 포신(砲身)을 1-2도만 돌리면 따라잡을 수 있기 때문에, 함정은 사격권 안에 비행기가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비행기 쪽에서는 함정의 폭은 좁으나 길이가 길기 때문에, 비행기 쪽에서는 함정의 길이 방향으로 공격을 가하려고 서로가 틈만 노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곳 해상에는 여러 척의 군함들이 있었기 때문에 북한 비행기가 위협을 느낀 나머지 대치하다가 마양도 쪽으로 돌아감으로써 대치가 끝났다.


  


 (10) 그 외의 있었던 일들


전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던 사건은 아니지만 태풍으로 인한 조난으로 3일 동안 식음을 취하지 못하고 함정 안으로 들어오는 바닷물을 퍼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을 거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작전해역은 적전이기 때문에 항상 철저하게 등화관제를 실시했었다. 불행하게도 칠흑같이 어두운 밤, 우리 함정은 레이다가 고장 났다. 그래서 무선통신과 쟈이로 콤파스(Gyro Compass) 만을 의지하여 항해 하면서 육안 경비를 수행하고 있었다. 우리 함정의 레이다 고장을 미리 미국 함정에 통보했기에 큰 화는 면할 수 있었다. 미국 순양함 쪽에서 그들의 레이다 상에 아주 작은 함정 하나가 겁도 없이 자기네 함정 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눈 먼 한국 함정이라는 것을 직감하고서는, 만약 한국 함정이 아니고 적함일 경우를 대비하여 완전 전투 태세를 갖추고 우리 함정의 동태를 살피면서 우리 함정 쪽으로 항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함정은 레이더가 고장 났기 때문에 순양함과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계속 항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견시(見視)의 눈 앞에 갑자기 검은 큰 물체가 접근하는 것을 보고, 충돌을 피하기 위해, 키를 크게 좌로 꺾도록 조처했었다. 그래서 정면 충돌만을 피할 수 있었으나, 우리 함정 함수(艦首) 우현(右舷=starboard) 쪽이 크게 파열되는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인명 피해만은 없었던 것이 천만 다행이라 하겠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대소 사건들이 있었지만, 반세기 이상의 세월이 흘러 망각의 세계로 깊이 빠져 들어간 관계로 더 이상 논술하기가 어려워 작전에 관한 내용은 생략하려고 한다.


 


필자 주 : 칠흑 같이 어두운 밤 등화(燈火) 관제를 실시한 가운데 충돌도 막고, 또 적군인지 우군인지를 식별하면서 항해하는 방법은?


 


당시 우리 해군을 비롯하여 많은 UN군 함정들이 북한 해안을 완전히 봉쇄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 함정이나 북한의 공작선, 기타 선박들은 우리 함정들이 항해하고 있는 해역까지는 거이 나오지를 못했다. 그렇지만 언제 적함이 나타날지를 알 수 없는 전시였기 때문에 항상 철저한 경계를 수행했었다. 그럼 원거리에 있는 함정을 어떤 방법으로 식별하여 공격 여부를 결정하였는가? 그 요령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오늘날과 같이 신무기가 개발되지 아니한 시절이기 때문에, 이상한 물체가 포착되었다 하더라도 바로 공격할 수는 없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적군인지 아군인지를 알 수 없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체불명의 어떤 물체를 포착한 C. I. C. Room(레이다실 또는 쏘나실)에서는 함내 전화로 Radio Room(무선통신실)으로 "몇도 방향" "몇 마일 해상"에 정체 불명의 물체가 포착되었음을 알린다. 그러면 Radio Room에서는 즉시 방위와 거리 등의 숫자를 음어로 바꾼 다음, 그 지역을 초계하고 있는 연합군 모든 함정이 청취하는 무선 주파수를 이용하여 영어로 신분을 밝히라고 다음과 같은 내용문을 방송한다. "신분 불명의 함정을 나는 포착하였다. 나의 호출부호는 000이다. 신분 불명의 물체는 지금 나로부터 000도 방위에 있고, 그 거리는 00 마일이다. 즉시 너의 신분을 밝히라"고 2-3 차례 반복해서 방송한다. 모든 함정들은 계속 이동하고 있고, 또 신분을 알 수 없는 물체 역시 이동하기 때문에 방송이 나갈 때 마다 거리와 각도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 방송을 청취한 모든 함정은 자신이 의심 받고 있는 존재는 아닌지를 자신들의 레이다나 쏘나를 통하여 확인한 다음, 자신이 의심 받고 있는 대상 함정이라면 즉시 애당초 방송한 함정을 호출하여 "네가 의심하고 있는 존재는 바로 나다. 내가 볼 때 너는 나의 000도 방위에 있고, 지금 너와 나와의 거리는 00 마일이다" 라고 방송으로 통보한다. 그러면 그 방송을 청취한 함정은 다시 정확 여부를 확인하여 상대방의 호출부호를 통하여 그것은 어느 국적의 어떤 함정인지를 곧 알게 된다.


     그러나 2-3 차례 신분을 밝히라고 통보하였음에도 응답이 없을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 이유는 혹시나 무선통신기, 또는 레이다 쏘나 등의 장비가 고장으로 응신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포탄을 날리지 않고 사격을 가할 수 있는 만반 준비를 갖추고는 전투 태세를 갖춘 상태로 신분 불명의 물체가 있는 근접 거리로 다가가서, 발광 신호(불빛 신호-적전이기에 불빛이 멀리까지 가지 않도록 청색 또는 홍색의 휠타를 끼워 촉광을 낮춤)로 암호를 질문하여 우군인 것이 확인되면, 다시 그 신분(호출부호)을 확인한다. 만약 암호 질문에 대한 암호 회신이 없거나 암호가 틀리거나, 도주 또는 신분을 확인에 응신하지 않으면, 하는 수 없이 포탄이 날아가는 것이다.


  


     필자가 담당하고 있는 무선통신사는 타고 있는 함정이 공격을 당하느냐 공격하여 적을 무찌르고 살 수 있느냐의 중대한 문제가 달려 있는 임무였기 때문에, 항상 철저하게 근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의 경우 화장실에 갈 일이 있을 때는 옆방에서  근무하는 작전관을 불러 앉혀놓고 가야만 할 정도의 중요한 위치에서 근무했었다.


 


  바. 경제적인 열세일 때 치룬 전쟁


     일본이 우리 나라를 식민 통치하고 있을 때 일본은 자신들의 욕구 충족을 위해, 농지가 많은 남한 지역에는 농업 위주의 정책을 펴서 생산된 곡물을 수탈해 갔고, 산지가 많은 북한 지역에는 전력 생산과 광공업 위주의 정책을 펴서 침략 전쟁 수행에 필요한 광물 자원과 공산품, 그리고 군수물자 등을 수거해가는 정책으로 통치했었다. 그런 관계로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하여 우리 나라가 해방될 때, 공장이 많고 전력이 풍부한 북한쪽의 경제 수준이 남한 보다 자연 앞 설 수 밖에......... 그런 여건 하에 있는 북한은 일본이 두고 간 많은 공장들을 과거 그곳에서 종사하던 기능공들을 찾아 다시 공산품을 생산하기 시작 함으로써 남한과의 경제적 수준의 차이가 급격히 벌어지게 되었다. 


     해방 후 우리 나라는 38선을 기준으로 분단되어 북한에는 소련군이 남한에는 미군이 진주하였다. 처음 분단하게 된 것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한 분단이었다. 그런 관계로 남아 도는 전력의 송전이 이루어졌고, 또 왕래하는 사람들의 강한 통제도 가하지 않았었다. 그러던 것이 미소 양국의 사상이 다른 관계로 점점 사상적인 분단이 고조 되면서, 왕래의 차단과 더불어 1948년 5월 14일 0시를 기하여 드디어 남한으로 송전하던 전력을 북한이 단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 하여 남한은 전력 난으로 인하여 서울 시내를 달리던 전차가 거리 한 가운데 서 있는가 하면, 가정용 전등은 시간제로 공급하게 되었고, 공장은 심야에 가동해야 하는 현상에 빠짐으로, 북한 보다 뒤져 있던 남한 경제는 더욱 뒤지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의 지도 아래 공산 사상을 가진 통일 국가를 세우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무기를 도입하고, 군비를 비축하면서 전쟁 준비를 착착 진행했던 것이다.


 


  사. 전쟁의 수렁에 깊이 빠진 조국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38선 전역에서 242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기습적인 남침을 가해왔으니, 우리 나라는 밀리고 밀려 한 달도 채 안되어 경남 일부만을 남기고 거이 전국토를 북한군에게 내어주게 되었다. 그 때 우리 나라는 일본 식민치하로부터 해방된지 겨우 5년 그리고 정부가 수립된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관계로 나라의 틀이 전혀 잡혀있지 않았을 때이다. 갑자기 남침해 오는 북한군을 막을 길 없어, 이승만 대통령이 UN을 향하여 병력 지원을 호소하였고, 창피한 일이지만 서방 여러 나라를 향하여 식량 지원까지 구걸해야 하는 어려운 가운데 처하게 되었다. 


     그럴 때 이승만 대통령이 독립 운동을 위해 활동하던 미국이 적극적인 자세로 돕기를 결정 함으로써, 드디어 16개국의 병력이 UN의 깃발을 들고 한국전에 파견되었고, 5개국이 의료 지원, 그리고 2개국이 비공식적인 간접 지원을 함으로써, 낙동강까지 밀렸던 우리 나라는 깊은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 또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다.


 


     필자 주 : 우리 나라에 병력을 지원한 나라는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네델랜드, 뉴질랜드, 프랑스, 터키, 필리핀, 태국, 그리스, 남 아프리카 공화국, 에티오피아, 콜롬비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16개국이고, 비공식적으로 지원한 나라는 대만과 일본, 그리고 의료 지원을 해 준 나라는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인도, 5개국이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인 1950년 8월 15일 필자가 군에 입대하였다. 전세는 패전 직전까지 이르렀고, 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와서 먹을 것도 없고, 일할 곳도 없으며, 주거할 집도 모자라 구석 구석 판자촌이 들어서는 등 사회 혼란은 극에 달해 있었다. 정부 역시 북한군에게 밀려 대전으로, 대구로, 다시 부산으로 옮겨온 피난 정부가 되었으니, 정부 재정도 이미 파탄났고, 행정 체계도 거이 마비 상태에 이른 대혼란기였다. 


     그런 상태에 이르렀으니 전선으로 출정하는 군인들에게 지급하는 무기와 실탄과 보급품, 그리고 주부식 등의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리 만무하였다. 영토가 없고 공장이 없는데 어디에서 군수물자와 식량과 부식물을 생산하겠으며, 아무리 국가라 한들 재정이 없는데 무슨 돈으로 보급할 군수물자를 구매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상태였으니 인력 확보, 물자 확보, 노동력 확보 등 모든 것이 징용과 징발 등 강제적인 비상 수단을 강구하는 방법 외에는 확보할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전혀 없는 기막힌 세상이 계속 되었었다. 그런 관계로 필자와 같이 입대한 1000 여명의 신병들은 교육을 마칠 때까지 한달 동안, 입대할 때 지급 받은 군복(훈련복) 상하 각 1벌과, 속옷 상하 각 1벌, 그리고 담요 한 장으로 훈련을 마칠 때까지 그것으로 버티었다. 그래서 땀과 때로 얼룩진 훈련복은 철조망 밑을 지나가는 포복 훈련과 또 돌격 훈련 등을 거치느라 모두 찢어지고 헤어진 남루한 옷이 되어, 신병의 모습은 거지 중의 상거지 같은 몰골로 변한지 이미 오래 되었었다. 급박한 그런 시기였으니 군인들의 월급? 이 말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용어였다.


 


  아. 약한 자가 강한 자를 누른 것은  


     그리고 당시 해군의 군비는 어떠하였는가? 이에 대하여는 위 "가" 항에서 이미 언급하였기에 여기에서는 간단히 쓰려고 한다. 개전 초 우리 나라가 가지고 있던 군함은, 일본이 버리고 간 소형 소해정 몇 척과,  미국에서 도입한 소해정 몇 척, 그리고 대한해협에서 무공을 세운 701함(백두산함)이 전부였다. 6 25 전쟁이 시작된 후 다급해 진 우리 나라는 긴급하게 701함과 유사한 함정 5척을 추가로 도입하여, 701함과 화력이 비슷한 전투함이 모두 6척이었다. 이 함정들이 최전선에 투입되어 전투를 수행하면서 3면의 바다를 수호하는데 주축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리고 함정 마다 최상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군인들의 생활 환경을 최저의 수준으로 낮추면서 최고의 전투력을 발휘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오늘날의 함정과 비교해 본다면 화력은 기술 개발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뒤졌고, 생활 환경 등은 무장을 강화 하느라 열악했던 것이다.


 


     해군 신병들의 교육 실행 상태는 어떠하였는가? 원래 해군 신병들의 기본 교육은 3개월 동안 교육 시키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우리 동기생들은 그 3분의 1인, 1개월간의 단축된 교육을 받으면서, 그것도 원활한 해군 생활을 도모하기 위한 교육이 아니고 육전(陸戰) 위주의 교육을 받았으니, 해군 군인으론 미숙한 상태로 전선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필자와 같이 입대한 1000 여명의 해군 동기생들 가운데, 절반이 훨씬 넘는 많은 군인들이 해병대로 넘어가서, 인천 원산 등지의 상륙 작전을 수행하다가, 많은 전우들이 전쟁터에서 유명을 달리 하였고, 또 부상을 당하였다. 그럼으로 우리 동기생들은 위급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단축 교육을 받고 전쟁 터에 투입 되었으니, 한 번 쓰고 버리는 미완성 소모품 격인 군인으로 양성 되었던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하게 되었다. 


     북한은 골리얏과 같은 막강한 힘으로 탱크를 앞세우고 약한 남한을 공략해 왔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뜻대로 내버려 두시지를 않았다. 왜? 해방될 때까지 북한 땅에는 많은 그리스도 인들이 있었지만, 그 많고 많았던 그리스도 인들을 박해하고 죽이고, 교회 말살 정책을 시행하였기 때문에, 남한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자행한 집단이기에, 결국 그들의 침략은 실패로 돌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조종하신 것이다. 아무리 약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합할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에 반한 강자를 물리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필자는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뜻이 그러함으로 하나님을 찾는 믿음의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 있는 대한민국을 더 사랑하신 주님은 미국을 위시한 16개국의 UN군을 한국으로 보내어 불의한 강자를 물리칠 수 있게 은혜를 내려주신 것이다.


 


  자. 전쟁으로 피해 입은 군인


    (1) 국가가 참전자에 대하여 소홀했던 시절


     휴전이 된 후인 1954년 봄, 필자는 함정 수리 관계로 약 4개월 동안 일본 요코스카(よこすか=橫須賀) 미 해군 기지(U.S. Navy base in Yokosuka Japan)에 머문 적이 있었다. 하루는 도교(東京)로 갔다가 우에노 고엔(うえのこうえん=上野公園)으로 갔는데, 공원 중심지 복잡한 곳에 목발을 짚은 사람과, 검은 안경을 쓰고 지팡이를 든 사람이 서서, 소리를 고래 고래 지르는 것을 필자는 보았다. 그들은 세계 제2차 대전에 출전했다가, 다리를 잃은 자와 시력을 잃은 사람이었다. 그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어보니 "그 때 나는 덴노헤이가(天皇陛下)에게 충의(忠義=우리 말로는 충성) 다한다고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내가 바보짓을 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외치는 이유는 나라가 자신들에게 만족스러운 대책이 강구해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전쟁 후 한국에서는 어떠하였는가? 한국전쟁이 휴전 된 후, 상이군인에 대한 대책이 너무나 소홀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필자가 1963년 00우체국에 재직하고 있을 때이다. 매일같이 상이군인 몇 사람이 우체국을 찾아와서 "돈 보태 달라"고 떼를 쓰면서, 쇠로 만든 의수 또는 의족으로 책상을 치기도 하고, 돈 줄때까지 책상 위에 걸터앉기도 하였으며,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도저히 업무를 수행 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관계 책임자인 필자로서는 그들에게 돈 봉투를 만들어 건네 주면서 돌려보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만약 25세에 부상을 입은 군인이 85세까지 살다가 죽는다면, 60년이라는 긴 세월을 눈물과 어려움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옛날 한국에는 그렇게도 많던 상이군인들이 지금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많은 분들이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현재 우리들의 눈 앞에는 거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2012년 3월 정치에 입문하겠다고 나선 통합진보당 청년비례대표 경선후보자 김지윤씨가 나라를 수호하는 해군을 가리켜 "해적"이라고 표현한 것을 들었을 때, 해군에 몸 담고 사선을 넘나들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참전하였던 필자로서는 섭섭한 마음 금할 바 없음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만약 많은 국민의 생각이 그 사람과 같다면, 필자 역시 일본 우에노 공원에서 외치던 일본 상이군인들 처럼 "나도 바보 짓을 했다고" 외치고 싶다.


 


    (2) 전쟁 터에서 피해 입은 참전자


    (가) 전몰 군인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 하드라도 나라만 구할 수 있다면, 이와 같은 숭고한 정신을 가지고 앞날이 창창한 꽃 같은 젊은이가 귀중한 생명을 초개같이 버리고 장렬하게 전사한 군인들이 많이 있었다. 전사자들 가운데는 지명도 모르는 곳에서, 또는 적군에게 포위되어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면서 헤매다가 굶어 죽거나 적에게 발각되어 사살 당한 자도 있고, 또 깊은 산골짜기에 혼자 쓸쓸히 유명을 달리한 자도 있으며, 애함과 함께 깊은 바다 물 속으로 가라앉거나, 비행기와 함께 장렬하게 산화한 자, 오늘날까지 그 시체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 상이 군인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군인들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부상을 당하여 불편한 몸으로 한 평생을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필자 역시 전쟁이 치열할 때, 705함 주포에 탄약을 공급하는 탄약수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함포에서 나오는 굉음으로 고막을 상실하여, 평생(지금까지 근 60년)을 난청의 어려움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묵호경비부 통신대에서 근무할 때 통신용 비상 발전기를 수리하다가 왼손 엄지손가락이 회전하는 발전기에 빨려 들어가 뼈가 부서지기도 했다. 그리고 식수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함정 근무를 오랫동안 하면서 위장 질환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필자의 이와 같은 부상은 다른 전상자에 비해 보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한 것임으로, 필자가 부상 당한 정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볍게 당한 것임을 생각하고 도리어 감사할 뿐이다.


 


    (3) 상이군인에 대한 실화 한 토막


상이 군인에 대한 드라마와 같은 실화 하나가 생각난다. 관계자들의 허락을 구하지 못하였기에 실명을 밝힐 수 없음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필자와 학교 동창인 신00씨 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가운데 큰 부상을 입고, 평생을 고생하다가 하늘나라로 먼저 갔다. 그는 옛날 영월중앙교회에서 필자와 같이 기독학생회를 이끌던 독실한 신앙가로서 필자 보다 나이가 약간 많은 친구.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육군으로, 필자는 해군으로 각각 입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헤어진 후 오랫동안 서로의 생사를 모르는 가운데서 약 20년 정도의 세월을 보냈다. 1970년대 초, 필자가 서울 왕십리에 있는 금북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 필자가 섬기는 교회는 상이군인들을 접대하는 특별한 행사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우연히 그 친구를 났는데 앞을 보지 못하는 40대 초반의 목사님을 뵙게 되자, 필자는 그의 이름을 보고 바로 옛 친구인 것을 알고 무척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최전방에서 날아오는 박격포탄이 눈앞에서 터지면서 미남이던 그의 얼굴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시력까지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몇 번이나 자살하려 했는데, 배후에 믿음 좋은 부인이 있었기에, 한 맺힌 고난을 극복하고, 드디어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간증을 그로부터 들었다. 목사가 되기 전 청년시절에는 서울 성북지역 상이군경 단체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여러 명의 상이 군인들이 함께 몰려나가, 중요 기관이나 회사에, 공갈과 협박을 가하여 돈을 뜯은 다음,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런 생활을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그의 성품이 점점 험악하게 변하는 것을 본 부인이, 목사가 될 것을 권하고 또 권하고 거듭 거듭 권하여 드디어 신학 공부를 거쳐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목사가 된 그는 서울 우이동에 있는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필자가 1984년 미국으로 건너왔기 때문에 그분의 정확한 소천 날자는 알 수 없으나, 1987년경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 하였다는 것을, 몇 년이 지난 후 필자가 한국을 방문하여 그 친구를 만나보려고 전화 함으로써 알게 되었다.


 


     신 목사는 귀한 가문의 독자로 출생하였는데, 일찍이 부친을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그가 전쟁터에서 육군상사의 계급장을 달고 싸우고 있을 때였다. 믿음 좋은 순박한 농촌 처녀인 그의 부인은, 총각의 사진만 보고 약혼을 결정했는데, 약혼 후 얼마 안간 시점에 약혼한 남자가 전쟁터에서 중상을 입어 얼굴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손도 불구가 되었으며, 실명까지 당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고 한다. 그러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파혼할 것을 여러 차례 권하였으나, 처녀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연을 내가 어찌 피할 수 있습니까?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을 내가 대신 봐주겠고, 그가 만지고 들지 못하는 것은 내가 대신 만져주고 또 들어주겠다"면서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결혼 후 그녀는 방황하는 남편을 드디어 목회자의 길로 인도하였고, 또 목회하는 동안에는 그의 눈이 되고 손발이 되어, 성공적인 목회자가 될 수 있도록 내조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상이 군인들의 외치는 소리를 들은 필자는 당시 우리 나라의 경제 사정이 일본에 비하여 많이 뒤져 있었기 때문에, 장차 우리 나라는 "참전한 자에 대한 대우가 일본 보다 못하면 못했지 더 좋아질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지금 우리 조국은 경제적인 면에서 크게 신장되어짐에 따라, 늦기는 하였지만 참전 유공자에 대한 예우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차. 특별히 필자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은혜


     6 25 전쟁, 이 전쟁은 참으로 어려운 전쟁, 치열한 전쟁이었다. 그 전쟁을 수행하는 환경은 너무나 열악하였고, 또 무기도 보잘 것 없었다. 치열한 전쟁을 수행하느라 뜬 눈으로 날밤을 새우기도 했고, 배고픔도 이겨야 했으며, 또 차디찬 바다 물속에서 추위와도 싸워야만 했다. 그리고 적으로부터 날아오는 포탄과 생명을 위협하는 기뢰가 깔려 있는 바다 위를 심한 풍랑을 뚫고 지나다녔지만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기에 필자에게 오늘이 있게 된 것이다. 필자와 같이 입대한 많은 동기생들이 전사도 당하였고, 부상도 입었지만, 필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보존하여, 현재 부강한 나라에서 찬란한 문명 혜택을 누리면서 살고 있으니,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인 것이다. 애굽을 떠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를 하나님께서 지켜주심 같이, 필자의 생명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신 그와 같은 유월절의 역사가 필자에게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크신 은혜를 감사 감사 또 감사를 드리는 것임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