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기행 #11  (하와이의 초기 이민)

오늘도 즐거운 날이 되십시오

 

11. Hawaii의 초기 이민


  서론


    필자가 탄 유람선이 Hawaii Honolulu 항구에 입항하는 순간 Hawaii 에는 일본인과 한국인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우리 한인들의 초기 Hawaii 이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Hawaii에 있는 한인 기독교회와 한인상공회의소 등을 통해, 여러 가지 자료들을 입수 하였기에 그 내용을 정리하여 여기에 소개하려는 것이다. 


      1) 복음의 문이 열린 한국


    먼저 하와이 이민자들에게 돈독한 신앙을 주입 시켜 미국으로 이민 보낸 인천 내리교회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선행되어야 하겠다. 1885년 4월 5일, 선교사의 신분으로 조선 땅에 처음으로 내한한 언더우드(Underwood, 미혼, 장로교) 선교사와 아펜젤러(Appenzeller 부부, 감리교) 선교사가 있었다.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는 복음의 불모지인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 한국으로 오기 전, 잠시 동안 일본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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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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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선교


    1882년 조선 땅에서는 "한·미수호 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서서히 서구문명의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고, 또 다른 면에서는 개화당이 이르킨 갑신정변(1884년 12월 4일)이 3일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김옥균(金玉均)은 일본으로 망명 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면에서는 민영익과 친분이 있던 이수정(李樹廷)씨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을 때, 위기에 처한 명성황후를 지게에 짊어지고, 거름이 나가는 것처럼 가장하여 궁궐 밖으로 모셔와서, 충주까지 피신 시킨 공로로 고종황제의 허락 하에 신사유람단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서 문물 탐방과 더불어 자유로운 학술 연구를 하고 있었다. 


 


  필자 주 : 우리 조국 백성들을 어떤 곳에서는 "조선인"이라, 어떤 곳에서는 한국인" 또는 "한인"이라 그 호칭을 다르게 사용하고 있는가?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한다. 


 


    우리들의 조국 대한민국의 역사를 살펴 보면, 이씨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국을 둘러엎기 전까지는 우리 민족을 고려인이라고 칭하였다. 


    그러다가 조선 왕국이 건국된 때로부터 제26대 고종 즉위 33년(병신년=1896)까지는 국호가 조선국이었기 때문에 조선인이라고 표현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국 26대 국왕 고종이 정유년(1897) 10월 12일,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Korean Empire)으로, 군주에 대한 칭호는 황제로, 연호는 광무(光武)로 정하였음을 세계 만방에 선포하였다. 그럼으로 그 날부터 대한 제국 마지막 순종 황제가 재임하던 1910년 8월 29일까지는 대한제국의 백성이니, 한인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리고 일제 식민치하(1910년 8월 29일-해방 시까지)에 있을 동안은 일제가 식민지 백성을 폄하하면서, 일본인과 구별하기 위해, 일본인은 나이지징(ないちじん=내지인=內地人)으로 우리 민족은 한또징(はんとうじん=반도인=半島人) 또는 죠센징(ちょうせんにんじん=조선인=朝鮮人)이라고 구별하여 불렀다. 그렇지만 대외적으로는 일본과 한국이 합방하였음을 부각 시키기 위해 우리 민족까지 포함한 모두를 일본 황국 신민(日本 皇國 臣民)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후, 세계 만방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 선포 하였으니, 다시 우리 민족의 칭호는 한국인으로 변경된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집고 넘어 갈 사항이 있다. 옛날 고종 황제가 세운 대한제국과 오늘의 대한민국을 구별하기 위해, 대한제국을 구한국(舊韓國)이라는 새로운 약칭 용어가 생겨났다. 그리고 역사적인 내용을 표기 하는 글 속에서는 그 연도를 구별하기 어렵거나 오랜 기간에 걸쳐 계속되는 사건일 때는  조선인한국인 또는 한인이라고 여러 가지 용어를 혼용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2) 한글 쪽 복음 성경이 만들어지다


    이 때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씨는 농학박사이자 개신교 신자인 쓰다센(つだせん=津田仙)씨로부터, 성경책을 건네 받아 그것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인이 되었고, 또 성경책을 우리 나라 말로 번역해야 되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어 드디어 성경 번역에 착수했다. 그 때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일본에 있으면서 조선 선교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들을 그들로부터 입수하였고, 또 그가 번역하여 만든 쪽 복음 성경책을 들고 내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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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정에 의하여 처음으로 번역 발간된 쪽 복음 성경 책이 조선 땅으로 들어왔다


      3) 초기교회들이 한국 땅에 세워지다


    드디어 이수정씨가 번역한 최초 한글 성경 단권(마가복음서-쪽 복음)이 만들어 지자.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마가복음서(쪽 복음)를 한 아름 안고, 1885년 4월 5일 부활절 날 조선 땅으로 들어왔으니, 이것이 공식적인 개신교회 선교의 장을 열었다는 기록이다. 입국한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선교사는 인천 내리에 있는 가정 집에 머물면서, 감격의 찬송을 부르면서 교회를 태동 시킨 것이, 자라나 드디어 인천 내리교회가 된 것으로, 이렇게 세워진 내리(內里)교회(감 1885)는 솔내(松川)교회(1884),새문안(新門內)교회(장 1887)정동(貞洞)교회(감 1887)와 함께 한국 기독교회사에 길이 길이 빛나는 한국 선교 초기에 세워진 교회로 기록된 교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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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인천 내리교회 예배당 모습 


 


    그 때는 갑신정변 직후라 서울의 정세가 불안정 하여 외국인 여성이 자유롭게 생활하기 곤란한 상황이었기에,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는 인천에서 1주일간 머물다가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단신으로 내한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바로 한양(오늘의 서울)으로 들어가서 고종 황제의 어의(御醫) 겸 주한 미국공사를 맡게 됨으로써, 광혜원을 운영하고 있는 알렌(H. N. Allen) 선교사의 집에 머물면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여 1987년 9월 27일 새문안교회를 태동 시켰다.


 


      4) 하와이 이민자에게 신앙을 심어준 인천 내리교회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갔던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가 1885년 6월 21일 재입국하여, 인천 내리에 있는 초가집에서 한국어를 배우면서 간접적인 선교사역을 시작하여, 1885년 7월 7일 선편으로 부친 풍금(오르간)이 도착하자. 1885년 7월 29일 찬송가 "만복의 근원 하나님"을 풍금에 맞추어 부르면서 인천 지역에서 공식적인 첫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인천 내리교회의 모태인 것이다. 그 후 아펜젤러 선교사는 서울로 올라 가서 선교 활동을 계속하여 1887년 10월 9일 정동교회를 태동 시켰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Hawaii로 많은 초기 이민자를 보낸 인천 내리교회에 대한 사정을 알아야 되겠기에 내리교회에 대한 설명을 지금까지 언급한 것이다.


     


  가. 노동력이 부족한 Hawaii 농장주


    19세기 중반부터 미국의 기업인들이 Hawaii로 들어가 사탕수수를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점점 기업이 번창하여 드디어 설탕 수출이 Hawaii 총 수출액의 95%나 차지할 정도로 번창하게 되었다. 농장주들이 처음에는 Hawaii 본토인들을 고용하였으나 점점 일손이 부족하게 됨으로, 외국에서 노동력을 수입하여야만 했다. 그래서 중국인, 포르투갈인, 일본인 등을 데려와 부족한 노동력을 채웠다. 


    그런데 유별나게 많은 중국인들이 미국으로 몰려와서,  Hawaii 뿐만 아니라 미국 본토까지 밀려오는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들의 유입을 두려워한 연방정부가 1882년 5월 6일, Chinese Exclusion Act라는 법을 만들게 됨으로써, 그 후 10년 동안 중국인들의 이민이 금지 되었다. 그렇게 되자 다시 노동력 부족 현상이 일어남으로써 Hawaii에서는 1890년대를 전후하여 많은 일본인들이 들어와서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인들도 그 수가 늘어남에 따라 동맹 파업을 자주 하여 농장주들을 괴롭게 만들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고용 계약 기간이 만료 되면 임금 인상을 요구 하다가 관철되지 않으면, 노동 환경이 더 좋은 본토, 특히 California로 이주함으로 Hawaii 사탕수수 농장에는 노동력 부족 현상이 계속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농장주들은 그 때까지 노동력 수출 실적이 전혀 없는 한국에서 노동력을 확보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나. Allen 선교사가 고종 황제의 윤허를 받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선교사들이 Hawaii로 많이 들어왔고, 선교사들과 농장주들의 만남도 활발하게 이루어 지게 되었다. 한국에 파송 되었던 미국 의료 선교사 알렌이 1901년 말 잠시 휴가를 얻어 미국에 귀국하였다가, 1902년 2월 한성(漢城=서울)으로 돌아가던 길에 San Francisco에서 Hawaii 사탕수수 농장주 협회로부터 Hawaii의 노동력 부족 현상을 알게 되었고, 또 한인 노동자들이 오게 된다면 좋겠다는 부탁까지 받게 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Allen 선교사는 처음으로 조선 땅에 들어 온 장로교에서 파송한 의료 선교사로서 갑신정변 때 부상을 입고 거의 죽게 된 민영익을 살려 준 공로로 조선 왕조로부터 크게 신임을 얻은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기 때문에 한성에 돌아오자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지금 백성들은 개국 진취를 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흉년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으니 원하는 사람들을 Hawaii로 이민 보내어 척식 사업과 신문화를 도입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여 1902년 11월 고종황제의 윤허를 받았다. 




49b319148c4f0.jpg고종 황제 images?q=tbn:ANd9GcT7efzBMdAsWNltC_FLwVtlnYSyUp8gVlo-UyJsHb83v7fLQ6JS알렌(Allen) 선교사 kyosan33.jpg존스(Jones) 목사

  다. 내리교회 Jones 목사의 설득으로 지원자 확보


    황제의 윤허를 받았기 때문에 1902년부터 이민자를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Hawaii 농장주들은 조선의 항구 도시 거리마다 Hawaii 의 풍물, 작업 내용, 미국 화폐로 임금을 지급한다는 포스터를 붙이고 노동자를 모집했다. 매월 "조선 돈으로 57원 가량"($16)을 받게 되며, 농부들이 "유숙하는 집과 땔감 나무와 식수와 병 치료 경비 등은 모두 농장주가 지급"한다고 말하면서 이민을 장려했다. 당시 조산 땅에는 대기근으로 가난과 기근에 시달리고 있던 노동자에게 일확 천금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겨졌다. 그렇지만 조선인들 머리 속에는 조상이 묻힌 고향을 등지고, 바닷길로 열흘이 넘는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은 조상들에게 큰 죄를 짓는다는 생각 때문에 아무도 지원하지를 않았다. 


    그럴 때 내리 감리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선교사 존스(Geroge Heber Jones=조원시= 趙元時) 목사가 나선 것이다. 그는 이민 모집 광고에 있는 것 말고도 자녀들의 학교 교육도 무료이고, 영구적인 직업 얻기가 더욱 쉬워지게 되며, 또 법률상 여러 가지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설득하자, 내리 교회 교인들을 포함한 121명이 Hawaii로 이민하겠다고 지원하게 되었다.


  


  라. Hawaii 첫 이민자는 86명이 정착


    최초의 한인 이민단은 통역관 2명을 포함하여 모두 121명이었는데, 그 중에는 50여 명의 내리 감리교회 교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1902년 12월 22일 새로운 보금자리 틀 곳을 향해 떠나게 되었는데, 당시 사정으로는 조선에서 Hawaii로 직행하는 선편이 없었던 관계로, 일본을 경유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 배 켄카이마루(げんかいまる=玄海丸)를 타고 제물포(오늘의 인천)를 떠나,  1902년 12월 24일에 나가사키(ながさき=長崎) 항에 도착 하였다가, 고베(こうべ=神戶)로 옮겨가 종합 신체 검사를 실시한 결과 그 중 20명이 탈락하여, 101명으로 줄었다. 다시 고베 항에서 미국 상선 Gaelic호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Hawaii Honolulu 항에 도착하여, 신체 검사를 실시한 결과 또 다시 15명이 탈락 됨으로써, 86명(남자 48, 부인 16, 자녀 22)이 상륙 허가를 받아 최초의 미국 이민자로 확정 되었다. 




1903년 첫 이민자들을 싣고 호놀룰루 외항에 도착한 갤릭호의 모습.

1903년 1월 13일 첫 이민자를 태우고 Honolulu 외항에 도착한 미국 상선 Gaelic호



  


  마. 신앙을 보배로 여긴 Hawaii 이민자들


    인천에서 Jones 목사의 전송을 받으며 떠난 50 여 명의 내리교회 교인들은 Hawaii로 가는 동안 매일 배 안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항해하였다. 그 이민자 중에는 신앙심이 강한 "내리 감리교회"의 안정수 권사와 김이제 권사가 있었는데, 그들이 중심이 되어, 선내 예배가 시작 되었으니, Hawaii 한인 감리교회의 시작은 태평양 상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 Honolulu에 도착하였을 때 미리 Jones 목사의 연락을 받고 나온 Pearson Hawaii 감리사가 마중을 나왔다. 교인들이 중심이 된 첫 이민단은 Hawaii에 도착하자 각기 배정 받은 농장과 일터에서, 하나님께 예배들 드린 다음, 일을 시작하면서 교회 개척도 병행해 나갔다. 


  


  바. 이민자가 있는 곳엔 예배처소가 세워지다


      1) 미국 땅에 처음으로 탄생한 한인 예배처소


    이들은 Oahu 섬 Waialua Plantation에 있는 Mokuleia Camp에 여장을 풀고 첫 생활을 시작하면서, 예배 처소도 세웠으니 이것이 한국인 중심의 최초의 예배 처소이다. 이민의 행렬은 1905년 을사 보호조약으로 한국이 국권을 잃은 때까지 계속 되었는데, 그간 65 차례에 걸쳐 7천명이 넘는 한국 노동자들이 Hawaii로 이주 하였기 때문에, 한인들이 있는 캠프는 어디에서나 예배 처소가 세워져, 한인 감리교회의 터를 닦는 믿음의 공동체로 성장해 나갔다. 또 Hawaii 지역을 관활하고 있는 감리교회 감리사가 예배 인도와 신앙적 지도자를 계속 보내줌으로써, 교회는 날로 성장 하면서, 예배와 전도, 교육사업, 처소 확장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룩하면서, 반일 애국 운동과 독립 운동의 중심 역할까지 수행해 나가는 민족성이 강한 교회로 틀을 잡아갔다. 당시 Hawaii 땅에는 장로교회에서는 선교를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건너온 장로교회 교인들도 자연 감리교 교인이 되었던 관계로, 미국 땅에 세워진 이민 초기 교회는 하루가 다르게 부흥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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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이민자들이 Hawaii에 도착한 후 Oahu 섬 서북쪽 해안 지역 Waialua에 정착했다 



 


      2) 역경과 시련을 통하여 굳건해 지는 신앙


    농장주들은 한인 노동자들이 무엇보다 교회를 먼저 세우고 주일마다 예배 드리는 것을 무척 기뻐하였다. Hawaii에 속속 도착한 한인 노동자들은 Hawaii 각 섬에 있는 40여 개 농장으로 분산되어 한 곳에 30여 명으로부터 많은 곳은 2-3백 명까지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노동에 종사하였다. 그들이 수행하는 작업은 자연생 잡목들을 자르고, 농지에 대한 정지 작업으로 농토가 조성되면, 거기에 관개 시설을 하고서는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일이었다. 1903년에 그 곳에 정착한 한인들의 생활은 매우 비참한 생활이었지만, 그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었기에, 소망 안에서 고생을 참으면서 활동하였고, 농장지 인근에는 반드시 교회를 세우는 것을 잊지 않고 실천에 옮겼기에 신앙은 굳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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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waii 초기 이민자들이 사탕 수수 밭에서 일하던 모습



 


  사. 계속 증설되는 한인교회


    사탕 수수 농장 노동자로 들어온 이민자들은 Hawaii에 도착하여 사탕 수수 밭에서 채찍을 맞으며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면서도 교회를 세워 신앙 생활과 선교 활동을 펼치고, 학교를 세워 민족 문화 교육을 시작했으며, 독립 기금을 마련하는 등 조국의 독립과 안녕을 위해 힘썼다. 이들은 바로 "제2의 청교도들"이었다. 


    Honolulu에서 북서쪽으로 40여 마일 떨어진 Waialua - Kahuku 지역에 교회가 처음으로 세워져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1903년 11월에는 Honolulu 시내 한복판에 한인 감리교 선교회가 세워졌다. 이 교회는 오늘날까지 그리스도 연합 감리교회로 건재하고 있어, 미주 한인 최초의 교회로 인정 받고 있다. 이어 Eva 농장 지역, Waipahu 농장 지역, 그리고 Big Island 섬, Maui 섬, Kawhi 섬에도 한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교회가 세워졌으며, 이들을 위하여 감리교 연회에서는 신앙 지도자를 파송하여 교회를 이끌어 가게 했다. 이후 한인 교회는 이민 사회의 센터, 예배 공동체, 이민 교육, 한국 문화와 역사의 교육장, 반일 애국 운동 및 독립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1903 하와이 한인감리교회


  1903년 처음으로 세워진 하와이 한인 감리교회



 


  자. 한인 이민교회의 역할


    사진 결혼이 시행됨에 따라 조선으로부터 들어오는 신부들도 있고 하여, 교회는 날로 활성화 되어 감으로써, 드디어 독립 교회가 태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각종 단체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때 신민회, 대한인 국민회, 동지회 등이 태어났다. 1910년 한일 합방 전후에서부터 1919년 독립 운동 전후까지의 이민 교회는 민족의 고난과 운명을 같이하는 민족 교회였다. 신앙이 사회 속에서 사회 성화 운동의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이민 교회의 역할은 어떻게 해서든지 나라와 민족과 그리고 교회가 함께 살아가는 것에 중점을 두고 활동 하였는데, 곧 선교 활동과 문화 운동과 민족 운동으로 병행해 나갔다.


 


      1) 교회는 무엇보다 선교하는 신앙 공동체였다. 


    한인 감리교회가 형성되자 각 섬에 흩어져 있는 동포들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전도 요원들을 선택하여 이들을 파송 하였다. 불과 2-3년이 지났을 무렵에는 40여 개의 농장에 각각 교회 또는 전도소를 만들고 주일마다 예배 집회를 갖게 되었다. 단시일 내에 이토록 교회가 한인 사회 속에 확산된 것은 이민 교회의 선교적 열정과 함께 한인들의 열정적인 성격이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시 이민자들이 외롭고 고달픈 생활을 하다 보니, 신앙 생활과 더불어 사귐의 장소를 교회가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통하여 고독과 낙심 속에 있는 이민 생활의 괴로움을 극복하였고,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언어 소통이나 문화적 차이 문제로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던 그들이 교회에 와서 동족끼리 서로 인간적인 사귐을 가질 수 있었고, 또한 서로 도울 수 있는 삶의 터전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2) 교회는 한인을 위한 교육과 문화 활동의 터전이었다. 


    초기 이민의 반수 이상이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교회마다 야간 학교를 설치하고 그들에게 한글을 가르침으로써 수년 후에는 모든 한인들이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교회가 학교를 설립하고 어린이들에게 미국의 일반 교육 과정을 가르치는 동시에 한글과 한국 문화를 가르침으로써 민족적 정체성을 가진 미국인이 되도록 교육했다.


 


      3) 초기 한인교회는 민족 운동을 병행해 나갔다.


    이민 교회에서의 메시지는 민족 주의와 부딪히지 않았다. 사실 서로 동맹 관계를 맺었다. 더 나아가 기독교 선교사들은 독립 운동을 하는 민족 주의자들과 하나가 되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다.


    처음 Hawaii에 이민 온 한인들은 미국에 정착할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돈을 많이 벌어 경제적으로 자립한 이후에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주권이 일본으로 넘어간 1910년부터는 돌아갈 생각을 포기 하고, 미국에 정착할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사진 결혼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한국에 돌아가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Hawaii에 적응하려는 모습으로 교회가 토착화 되어 갔다. 이제는 나그네 생활 보다는 미국 생활에 적극적으로 정착하고 동화해서 가나안 복지를 건설 하겠다는 신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점차 교회는 정착되어 갔으며 이민사회에는 공동 생활과 상호 협력을 위한 동화와 한인 상조회, 친목회 및 교회 연합 단체 총공회와 정치 단체 등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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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하와이 한인 기독 교회 교인들



  차. 이민의 문호가 막히다


    Hawaii로 향하던 한인 노동자의 이민 물결이 1905년 하반기부터 점점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정부의 허락도 없이 일부 악덕 상인들이 Hawaii로 가려는 이민자들을 모집한 후, Mexico로 보낸 사기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민자들은 Hawaii로 가는 줄 알았는데, 악덕 상인의 장난으로 Mexico로 끌려가 노예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조선 정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거기에다 Hawaii로 이민 간 한인들 역시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 거의 노예나 다름없는 취급을 당한다는 소문까지 접하게 되자, 조선 정부는 백성을 노예로 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민 길을 막은 것이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1905년에 체결된 이른바 을사 보호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조선 정부에게 이민을 중지하도록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Hawaii서 한인 노동자가 증가하면 일본인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이유로 일본인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인하여 1907년 Hawaii 노동 이민은 거의 끊기고 말았다. 그 때부터는 한인들의 노동 이민은 중지 되었고, 아주 극소수의 개인적으로 오는 이민자 뿐이었다. 


    그렇게 되자 Hawaii에 이주한 노동자들은 장차 고국으로 돌아갈 뜻을 가진 일시적인 나그네 생활이 아니라, 이 땅이 나의 고향이라는 의식과 함께 미국 생활에 적극적으로 정착해서 동화하면서 토착화 하기를 시도하였다.


 


  카. 사진 결혼을 통해 들어온 여성들


    한국인의 Hawaii 초기 이민은 1902년 12월 22일 출발을 시작으로 1905년 7월 정부의 금지령이 내려 중단될 때까지 모두 7천226명이  Hawaii로 건너왔다. 그 가운데 여성은 남자의 십분의 일에 불과한 637명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혼 남성의 결혼 문제가 심각해졌지만 이민간 남성들이 짝을 찾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고국까지 간다는 것은 시간과 돈도 많이 들 뿐만이 아니라, 농장주들의 노동력 확보 문제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쉽지 않았다. 그래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사진 결혼이었다.


    사진결혼의 방식은 대개 이렇다. 보통 남자가 자신의 사진을 중매쟁이를 통해 고국의 처녀에게 보내 선을 보이고, 처녀는 남자가 마음에 들면 자신의 사진을 보내 서로 결혼에 합의한다. 그러면 신랑은 신부가 하와이로 건너올 수 있도록 초청장과 함께 이민에 필요한 여비와 비용 등을 신부에게로 송부한다. 이민 수속을 마친 신부는 신량의 사진을 들고, Hawaii로 건너오는 방법으로 진행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사진 결혼이 성사되어, 한국인 신부 951명이 Hawaii로 건너왔는데, 건너온 그들은 연분홍 빛 희망 보다, 천박하고 견디기 힘든 고생의 날들이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신부들은 들어온 날로부터 낮에는 사탕 수수밭에서 노동을 해야 했고, 밤에는 삯 바느질을 해가면서, 오로지 가족과 자식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



사진결혼이 시작되자 첫 케이스로 1910년 11월 28일 23세의 최사라라는 여성이 Honolulu로 건너와서 하와이 국민회 총회장이던 이내수(38세)씨와 결혼한 것으로 사진 결혼의 문이 열렸다. 그 뒤 1924년 미 의회의 동양인 배척법안이 통과되어, 이민이 중단될 때까지 951명의 신부가 하와이로, 건너와서 결혼하였고, 그 중 115명은 미국 본토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사진 결혼으로 이주한 신부의 대부분은 경상도 여성들이 주를 이루었다.


여성들이 사진만 보고 짝을 찾아 먼 이국 땅을 밟게 된

        첫째 목적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고, 


        그 다음은 성차별과 일제 탄압을 피하려는 것이었으며,


        또 종교의 자유를 누리는 것과 교육 받을 기회를 얻으려는 목적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런데 Hawaii에 도착한 신부들은 크게 실망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사진 속 모습과 다른 경우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신랑들의 모습이 사진과 너무나 달랐던 것은 이민 올 때 젊은 시절에 찍은 보기 좋은 사진을 골라 보냈던 경우가 많았던 것이 주된 원인이었고, 그 다음은 그 동안 강한 햇빛 아래에서 장기간 심한 노동에 종사함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몰골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잘 생긴 친구의 사진을 대신 보낸 자도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부잣집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자신들의 집이라고 자랑하면서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Hawaii까지 건너온 그들은 혼인을 깨고 되돌아갈 수는 없었기에,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남편과 함께 어렵고 험난한 이민 생활 개척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와이 이민은 한국 근대사의 아픔이자, 도전의 역사였다. 그들의 땀과 눈물이 오늘날 한인 이민사회 밑거름이 됐다. 사진은 결혼식 피로연을 갖는 듯한 초기 하와이 이민자들의 모습.<중앙방송>


Hawaii 초기 이민자의 결혼 예식 후 열린 피로연 장면



  타. Hawaii로 간 사진 신부에 대한 실화


(이 자료는 "책과 함께 출판사" 박은봉 기획실장이 쓴 글에서 중간 중간 퍼왔음)


    열 다섯살인 최안나(가명)는 Hawaii로 가는 배에 올라, 멀어지는 부산항을 바라보며 깊숙이 넣어뒀던 사진을 꺼내 보았다. 그는 지금 사진 속 남자와 사진으로 맞선을 보고 결혼하러 가는 길이었다. 배에는 최안나 같은 소녀들이 다섯 명 타고 있었다. 1915년,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지 5년 뒤의 일이었다. 태평양을 건너는 데 석 달이 걸렸다. 신부들이 뱃멀미에 시달릴 때마다 인솔자는 꿈의 섬 Hawaii, 신비로운 낙원 Hawaii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거기선 옷이 나무에서 열리고, 주렁주렁 열린 과일들이 주인이 없어 땅에 떨어져 썩는다고. 또 품삯은 쓸데가 없어 고스란히 쌓인다고. 이윽고 도착한 신부들은 트럭을 타고 이민국으로 향했다. 거기서 신랑감 혹은 시아버지 될 사람을 기다려야 했다. 배우자나 그 가족의 서명이 있어야 이민국을 떠나 Hawaii 땅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민국 대기소의 철창 안에서 최안나는 "그이"를 눈 빠지게 기다렸다. 닷새째 되는 날, 드디어 그이가 나타났다. 사진과는 달리, 웃으면 얼굴에 밭고랑 같은 주름이 패고 손마디가 굵은 마흔 여섯의 사탕 수수 농장 노동자였다. 최안나는 소중히 품고 있던 사진을 꺼내 보니, 나타난 사람은 사진 보다 십 년은 더 늙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 Hawaii 사탕수수 농장에는 7천 명이 넘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1902년부터 나라의 권장 아래 집단 노동 이민이 실시된 결과였다. 물론 그 전에도 인삼 파는 상인이나 유학생이 Hawaii 땅을 밟았지만, 이민이라는 형태의 집단 이주는 1902년 12월 22일 제1차 Hawaii 이민단 121명이 제물포를 떠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뒤 거의 달마다 이민단을 실은 배가 Hawaii에 도착했다. 1905년까지 Hawaii로 간 한국인은 배로 65척, 7200여 명 정도가 건너왔었다. 


    초기 Hawaii 이민자의 대부분은 미혼 남성이었다. 이들의 가장 심각한 고민은 결혼. 이들은 고향에 사진을 보내 신붓감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미국 이민국과 사탕 재배 회사도 사진 결혼을 적극 권장했다. 그러자 남자들이 어떻게라도 꼭 결혼이 성사되도록 하기 위해, 젊은 시절에 찍은 사진이나, 잘 생긴 친구의 사진을 빌려 보낸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낡은 사진 한 장을 믿고 바다를 건너온 신부들은 신랑의 모습에 실망했지만 그대로 따를 수 밖에......... 그런 관계로 사진 결혼으로 맺어진 신부들은 신랑과의 나이 차가 일반적으로 많았던 관계로, 일찍 혼자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한다. 


    사진 결혼한 신부들은 무슨 생각으로 머나 먼 Hawaii까지 건너왔을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있었겠지만 거기에서 공통점을 찾는다면, 가난과 막막한 미래를 떨치고 새로운 세계로 가고팟던 동경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희망을 갖고 미지의 땅을 찾아온 신부들이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끝도 없이 펼쳐진 수수밭에서의 중노동과 민족적인 차별 대우가 기다렸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커다란 막사에서 집단생활을 했다. 큰 방에서 수십 명이 같이 자고 공동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부부에게는 조그만 독방을 주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6시부터 작업을 시작해서 하루 10시간 일했다. 점심 시간은 30분. 감독의 감시 아래 한 줄로 늘어서서 작업하되, 작업 도중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하거나 담배를 피우는 일은 금지되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노예처럼 채찍질 당했다. 일을 마치고 막사로 돌아오면 식사를 하고 목욕한 뒤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하루 품삯은 남자가 1달러 25센트, 여자가 50~65센트였고, 그 가운데서 매월 식비로 6달러를, 세탁비로 1달러를 내야만 했다. 


    “최안나는 일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농장일 외에도 부업으로 돼지, 닭, 염소 같은 가축을 기르거나 두부를 만들어 팔았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자 더욱 힘이 들었다. 탁아 시설이 절대 부족한데다 보육비가 비싸서 아이를 데리고 농장 일을 하다가 아이가 도랑에 빠져 죽거나 다치는 것을 눈으로 보고 또 귀로 들었기 때문이다. 의료 혜택을 받기 어려워 유아 사망률도 매우 높았다. 최안나의 남편은 Hawaii에 도착한 최초의 집단이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지 않았다. 하는 일이 힘 든다고 불평하는 건 서로를 불쌍하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일에 대한 이야기도 전혀 하지 않았다.


 


    집에 있는 시간이라곤 밤 9시에서 새벽 4시까지 뿐이니 "같이 살기 위해 만난 것이 아니라 같이 일하기 위해" 만난 사람들 같았다. 최안나 뿐 아니라 사진 결혼한 신부들의 결혼 생활이 모두 그랬다. 이들은 먹고 사는 일, 자식 가르치는 일,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고통 받는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되찾는 일, 이 세 가지를 위해 뼈 빠지게 일했다. 고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애국 성금을 거두고, 상해 임시정부에 운동 자금을 모아 보냈으며, 재미 독립 운동가들의 활동 경비를 부담했다. Hawaii와 미국 서부 지역이 독립 운동의 주요 무대가 될 수 있었던 건 이들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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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에 이민 온 이대순씨와 1915년 사진만 보고 건너와서 결혼한 차순남씨


  파. 조국을 위해 희생한 초기 이민자 


    1920년에 들어서서는 3.1운동의 영향으로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 운동이 시작 되었으며 조국이 일본의 침략으로 독립을 상실하게 된 데 자극되어 무엇으로든지 독립 운동에 적극 이바지 하겠다는 결의에 따라, 1세와 2세들 모두가 교회를 구심점으로 성경 공부를 실시 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교육을 병행해 나갔다. 이렇게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하는 가운데서 한인 사회는 정체성을 찾아가며 어느 정도 단합심과 단결력을 결성하게 되었다. 


 


  하. 독립 운동가 박용만 장군 


    일본이 우리 나라를 강점하고 있을 때 미국 땅에서 독립 운동의 선봉에서 활동한 인물을 꼽는다면, 도산 안창호(安昌浩), 운암 이승만(李承晩), 우성 박용만(朴容萬) 세 사람을 들 수 있겠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주로 교육 분야를 통하여 자라나는 젊은 이들에게 애국 애족 사상을 고취하는 방법으로 활동하였고, 운암 이승만 박사는 일본의 식민 정치의 부당성을 국제 무대에 알리는 외교적인 활동에 치중했었다. 그리고 우성 박용만 장군은 소년병학교를 세워 조선의 젊은 이들에게 군사 교육을 시행하여 일본에 대항하는 독립군 병력 양성을 위해 군사적인 면에서 활동하였다.


 


    여기서는 Hawaii 땅에서 독립 운동을 전개한 박용만 장군에 대하여 언급하겠다. 처음 박용만 장군은 Nebraska주에서 소년병학교를 개설하여 활동하다가, Hawaii로 건너와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국 국민 군단을 설립하여 뜻 있는 사람을 모아 그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켰다. 그러다가 L.A.에 머물러 있는 이승만 박사를 Hawaii로 초청하여, 함께 동지회를 조직한 후, 한국의 독립 운동과 한국인에 대한 교육, 문화 발전에 많은 업적을 수립하면서, 점차 그 조직력을 넓혀 미주 여러 지역에 동지회 지부를 세운 다음, 그 조직을 통하여 확보한 자금으로 상해 임시 정부를 위한 재정적 지원에 나섰고, 또 이승만 박사가 설립한 한인 기독 학원도 도왔다. (이승만 박사에 대하여는 제12부에서 별도로 논하려고 한다.)


   



1917년 박용만 장군의 모습


Hawaii에서 국민군단을 창설한 박용만 장군 (국가보훈처에서 입수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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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군단을 통하여 양성된 사관들의 씩씩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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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병학교 군사 훈련을 담당한 핵심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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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에는 힘으로 싸워야 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훈련하는 국민군단(사열식 광경)


(국가보훈처에서 입수한 자료)


 


  거. 피땀으로 이룬 쌈지 돈을 조국을 위해 


    이승만 박사가 Hawaii에 있을 당시 설립한 기독학원을 매각하여 그 매각 대금 18 만불을 1953년 Hawaii와 인연이 깊은 인천에 기증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인천 지역에 위치한 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기금 조성을 위한 모금이 시작되어, 드디어 천과 와이의 첫 글자를 딴 인하대학교라는


인천에 자리잡은 교육기관을 설립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동지회는 대한민국 총영사관 건물 구입에도 도움을 주었다. 이와 같이 초기 이민자들은 조국을 위해 한 푼 두 푼 피땀 흘려 모은 쌈지 돈을 풀어, 해방되기 전까지는 조국 독립을 위해 송금한 액수가 무려 3백만 달러가 넘는다고 하고, 그 후에도 계속 조국을 위해 협조하고 있으니, 우리는 숙연해질 수 밖에 없다. 우리들의 선조 이민자들이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면서 믿음을 키웠고, 또 생활비를 아껴 모은 돈으로, 조국의 독립과 2세 교육을 위해, 그들은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 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인하대학교 연혁"  


연혁 내용 보기 ]


URL : http://www.inha.ac.kr/intro/history/history1950.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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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 당시의 인하공업전문대학 (Inha Technical College=仁荷工業專門大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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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인하대학교 (Inha University=仁荷大學校)


(동영상과 그림은 이해를 돕기 위해 연결한 것입니다).


  


방문하신 여러분을 환영하며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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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하와이 기행 #12 (하와이와 관련 깊은 이승만)이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