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기행 #12  (하와이와 관련 깊은 이승만)

12. 하와이와 관련 깊은 리(이)승만


 


   필자 주 :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이름을 "이승만"이라고 쓰지 않고 "리승만"이라고 썼다.


    2013년 3월 10일 필자 일행이 탄 유람선은 Hawaii Honolulu 항에 도착하였다. 선박 안에서 주일 예배를 드린 다음 상륙하여 Hawaii 땅을 밟는 순간,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이승만 박사가 하와이 땅에서 독립 운동을 하셨다는 것과, 또 해방 직후 필자가 서울에서 고학할 때, 잠시 정계에 몸 담고 있던 아버지를 따라 정치인 이승만 박사가 머무르고 계시던 돈암장으로 갔던 일과, 또는 대한 독립 촉성국민회의가 모인 운현궁으로 가서 회의장 밖에서 놀다가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을 만나 뵙던 일들이 생각 났다. 그리고 6 25 전쟁이 일어난 후 필자가 해군에 몸 담고 있을 때는 대통령이 되신 이승만 박사가 진해 별장에 자주 오셔서, 해군 통제부 동문에 있는 군인교회에서 해군 장병들과 함께 주일 예배를 드리던 일들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분에 대한 내용을 아는 대로 여기에 쓰려고 한다. 


 


    그는 일지기 미국으로 유학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과 중국 등지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운동을 하였다.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72세의 나이로 그리던 조국으로 들어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가 4 19 혁명으로 하야한 후, Hawaii로 망명하였다. 그는 망명지 Hawaii에서 고국으로 돌아 가기를 그렇게도 원하면서 살다가, 신병으로 향년 91세에 생을 마감하시고, 시신이 되어 조국으로 돌아와, 지금은 동작동 국립 현중원에서 고요히 주무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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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 여사와 결혼한 직후에 찍은 사진



 


  가. 이승만의 출생과 독립 운동


       1) 이승만의 출생


    이승만(李承晩, 리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陵內洞)에서, 이씨 조선의 왕족 양녕대군의 후손인 몰락한 양반 이경선과 김해 김씨의 3남 2녀 중 셋째 아들(막내)로 태어났다. 아명은 승룡(承龍)이고, 또 다른 이름은 일수(一秀)라고도 하며, 호는 운남(雩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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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찍은 가족 사진


이승만 연구원에 보관되어 있다가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된 사진(출처 : 코리아 프러스 방송)



 


       2) 이승만의 독립 운동


    대한제국 시절에는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로, 교육 계몽운동 등을 수행하면서 독립협회 활동을 했다. 대한제국 말기 도미하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그 후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으로 인한 어려운 국내 사정을 외국에 알리는 외교 독립에 힘을 쏟다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1919년 9월부터 1925년 3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된 후, 국제 연맹에 위임통치를 건의 한 것으로 인하여, 임시 의정원에 의하여 탄핵·파면 되었다. 


 


    그 후 그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3년 3월 6일 다시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고, 1933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34년 4월 2일 임정 외교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국제 무대에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면서 일본의 침략 야욕을 국제 사회에 알리는데 힘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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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 시절




       3) 초대 대통령에 관한 동영상 보기


 


                 (다음을 클릭하면 볼 수 있습니다) 


         1) 초대 대통령 이승만 (광북 전 = 58분 50초)


         2) 초대 대통령 이승만 (건국과 분단 = 58분 18초)


         3) 초대 대통령 이승만 (6 25와 4 19 = 58분 11초)


         4) 초대 대통령 이승만 (경력 소개 = 2분 2초)



  나. 망명 중이던 이승만의 귀국


       1) 제2차 세계 대전의 종료


    1945년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8월 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세계의 눈은 일본의 멸망을 기정 사실로 보면서 그 시기만을 문제로 남겨 두고 있었다. 그러자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의 강대국들은 전후 처리를 협의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미 소 양국이 합의 결정한 포스담 회담(Potsdam Conference=1945. 7. 26)이다. 그 골자를 한 마디로 말하면 한반도를 미국과 소련이 분할 점령한다는 내용이다.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세계 제 2차 대전은 끝났다. 36년 동안 일본의 식민 치하에 있던 우리나라는 광복의 기쁨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 동안일 뿐,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들어와서 각각 일본군이 가지고 있는 무장을 해제한 다음, 군정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그 분할이 정치적인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민족 분단의 비극이 싹트는 시발이 된 것이다.


  


       2) 이승만의 귀국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자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은 1945년 10월 16일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와서 윤치영(尹致暎) 등 독지가의 주선으로 돈암장에 입주하였다. 그러자 그가 미국에 체류할 때부터 그를 따르던 허정(許政), 장덕수(張德秀), 윤치영(尹致暎), 이기붕(李起鵬) 등이 돈암장을 드나들면서 그를 돕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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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당시의 이승만 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



 


       3) 대한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 구성


    1945년 10월 23일 각 정당 단체 대표 200 여명이 모여, 1주일 전에 귀국한 이승만을 정점으로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한 후,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조직 초기에는 조선 공산당 당수인 박헌영(朴憲永)도 자리를 함께 하였다. 그러나 박헌영은 친일파부터 먼저 숙청해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을 굽히지 않고 뻣치다가,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박헌영을 비롯한 좌익계 인사들을 대동하여 대열에서 이탈해 나갔다. 


 


       4) 신탁통치 찬반 운동으로 가열


    1945년 12월 29일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한국을 신탁통치 하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는 발표가 나오자, 이승만은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1946년 1월 3일 반탁 대열에서 이탈하여 찬탁으로 그 입장을 바꾸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1946년 1월 14일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자들을 향하여 매국노라고 규탄하자, 서로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김구,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은 남북 공동 정부 수립만을 고집하면서, 북한을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협상하였으나, 끝내 김일성(金日成)과의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의 사상과 이념은 좌우와 중도 세 갈래로 찢어지면서 파벌간에 대립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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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 통치를 반대하는 우익계 데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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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 통치를 지지하는 좌익계 데모



      


       5)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발족


    1946년 1월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리자, 이승만과 김구 미소 공동 위원회를 반대 선언하였고, 1946년 2월 1일 비상 국민회의를 열어, 이승만, 김구, 김규식, 조만식(曺晩植), 권동진(權東鎭), 김창숙(金昌淑), 오세창(吳世昌), 홍명희(洪命熹) 등을 비상 국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8일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회를 통합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를 설립하면서 이승만 박사를 총재로 추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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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분단된 남북은 사상과 이념으로 분열이 격화


    분단된 남북은 미국과 소련의 입김을 받아 점점 체제 경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 때 북한을 장악한 소련군은 남조선 로동당(약칭 남로당)을 조종해서 반대 세력을 일찌감치 숙청하고서는 사상과 체제에 맞는 세력을 규합하여 짧은 시일 안에 안정을 구축하였다. 그렇게 한 다음 남한사회의 혼란을 획책하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통일국가를 이루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남한 흔들기에 손을 뻗기 시작했다. 그 방법이 바로 세포 요원을 남한으로 침투시켜 요인에 대한 납치와 테러, 그리고 중요 시설에 대한 파괴와 공작 등을 그 실천 방법으로 채택하였다.


 


    한편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어떤 형태로 남한을 통치했는가?  본시 미국의 정치 체제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다. 그럼으로 남한에 주둔한 미군은 남한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자유 민주주의 형식에 따라 군정을 펴나갔기 때문에,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처럼 강력하게 통제하지를 않았다. 그런데다 북한의 밀지를 받고 움직이는 남로당 세력들로 인하여, 사회 질서는 안정되지 않고 점점 혼탁한 가운데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래서 남한 곳곳에서는 매일 같이 좌익과 우익, 그리고 중도파 각 단체들이 따로따로 집회를 연 다음 데모를 벌이다가, 그 연장 선상에서 일어나는 충돌로 상호 비방과 폭행 등의 불미한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 남으로써 사회질서는 점점 혼란 속으로 깊이깊이 빠져들어 가다가, 드디어 요인암살과, 납치, 동맹파업 휴학, 중요시설에 대한 방화, 신문사 습격, 폭행과 테러, 위조 지폐 발행 등의 크고 작은 사건들이 연일 일어났다.


 


  다. 사상이 다른 분단 국가의 탄생


       1) UN 결의로 통일을 위한 남북한 총선거 


    사회 혼란이 도를 넘자 사회 혼란을 주도하면서 극한 투쟁을 벌리는 세력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남로당 세력이라는 것을 파악한 미 군정 당국은, 사회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칼을 뽑아, 불순 세력의 검거를 시작하였다. 그러자 그 일부는 구속되었고, 또 일부는 지하로 숨어 들었으며, 일부는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도주함으로써, 어지럽던 사회는 점점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미군과 소련군에 의하여 군정통치를 받고 있던 남북한은, UN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으로 통일 정부를 세운다는 UN 결의가 있게 되었다. 그 결정에 따라 UN에서 파견하는 총선 감시단이 내한 입국하려 하였으나, 반대하는 무리들의 저지로 북한 지역에는 입국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남한만이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총선거 실시한 결과


(보기 : 수자 = 당선자 수,      0 = 후보는 있었으나 당선자 없음,  . = 후보자 없음)



서울 경기 강원 충남 충북 전남 전북 경남 경북 제주
후보 당선
무소속 2 16 5 8 8 9 8 17 11 1 493 85
대한독립촉성국민회 2 7 6 10 2 5 6 6 11 1 197 55
한국민주당 4 2 · 0 1 10 4 3 5 · 84 29
대동청년단 1 3 1 1 1 1 1 0 2 1 68 12
조선민족청년단 · 0 · 0 · 1 2 3 · · 16 6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 · · 0 · 1 1 · 0 · 10 2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 · 0 0 · 0 · 0 1 · 8 1
대한청년단 · · 0 0 · · · · · 1 5 1
조선민주당 1 0 · · · · · 0 · · 5 1
교육협회 · · · 0 · · · · 1 · 2 1
단민당 · 0 · · · 1 · · · · 2 1
한국독립당 · 1 · · · · · 0 · · 2 1
대성회 · · · · · 1 · · · · 1 1
부산1·5구락부 · · · · · · · 1 · · 1 1
조선공화당 · · · · · · · 1 · · 1 1
민족통일본부 · · · · · · · · 1 · 1 1
전도회 · · · · · · · · 1 · 1 1
대한독립촉성애국부인회 0 0 · · · · · 0 · · 5 0
애국부인동지회 0 0 · · · · · · 0 · 4 0
조선불교중앙총무원 · · · 0 · · · 0 0 · 4 0
대한독립청년단 0 · · · · · · 0 · 0 3 0
한독정수협 0 · · 0 · · · · · · 3 0
유도회 · · · · · · · 0 0 · 3 0
조선예수교장로회 · · · · · · · 0 0 · 2 0
기독교연맹 · · · · · 0 0 · · · 2 0
대한정의단 0 · · · · · · · · · 2 0
조선여자국민당 0 · · · · · · · · · 2 0
대한독립서북협회 0 · · · · · · · · · 1 0
민주주의자유독립당 0 · · · · · · · · · 1 0
조선건국청년회 0 · · · · · · · · · 1 0
청년당 0 · · · · · · · · · 1 0
청년조선총연맹 0 · · · · · · · · · 1 0
여성단체총연맹 0 · · · · · · · · · 1 0
한국기독교연합회 0 · · · · · · · · · 1 0
조선법학회 · 0 · · · · · · · · 1 0
민족통일건국전선 · · 0 · · · · · · · 1 0
대한민국총동원본부 · · · 0 · · · · · · 1 0
민족사회당 · · · 0 · · · · · · 1 0
민중당 · · · 0 · · · · · · 1 0
상무사 · · · 0 · · · · · · 1 0
대한부인회 · · · · · 0 · · · · 1 0
조선변호사학회 · · · · · 0 · · · · 1 0
기독교청년회 · · · · · · 0 · · · 1 0
조선불교교무원 · · · · · · 0 · · · 1 0
고려진보당 · · · · · · · 0 · · 1 0
민주의원 · · · · · · · 0 · · 1 0
청우당 · · · · · · · 0 · · 1 0
이재민동포자치회 · · · · · · · · 0 · 1 0
10 29 12 19 12 29 22 31 33 3 949 200

 


       2) 제헌 국회가 구성되다


    1948년 5월 31일 구성된 제헌국회는 최 고령자인 이승만을 제1대 제헌국회(制憲國會)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윤보선(尹潽善)을 자신의 국회의장 비서로 채용하였다. 그 후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에 의하여 내각 책임제가 언급되기 시작하자, 이승만은 대통령 중심제를 주장하고 나섰다. 국회의장 이승만은 1948년 6월 16일 헌법 기초위원회에 참석하여, 대통령 책임제를 강력히 주장하여, 그 뜻을 관철하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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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 국회 의원으로 당선된 자



       3)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한편 북한에서는 자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 정부를 수립하자, 배후에서 조정하는 소련의 뜻에 따라 같은 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김일성 정권이 세워진 것이다. 남북한에 각기 세워진 두 정권은 미 소 양국의 개입으로 이념의 차가 점점 벌어지게 되면서, 사상적인 대립도 심화되어 갔다. 드디어 북한은 남한사회의 혼란을 더욱 부채질하기 위해 남한 사회 요소 요소에 자신들의 세력을 심어 둔 세포 조직을 동원하여, 정계, 학계, 종교계, 실업계, 군부 등, 사회 구석구석 모든 분야에 그 세포 망을 확장한 후,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함으로써 크고 작은 사건들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하여 일어난 사건들을 열거한다면, 여수 순천 군부대 반란사건, 제주도 43사건, 군부대의 집단 월북 사건, 해군 함정의 납북 사건, 철도 파업, 각급 학교의 동맹휴학 이와 같은 사건들이 끊임 없이 일어났다.


    


       4)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승만


    이승만은 1948년 7월 20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나서 김구안재홍(安在鴻)을 누르고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제헌 국회의원에 의한 간접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 하였는데, 그 득표수는 다음과 같다.



득표 순


이 름


     정     당


득표수


득표율


결정


비                       고


1 이승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180 91.84% 당선  
2 김   구 한국독립당 13 6.63%    
3 안재홍 무소속 2 1.02%    
4 서재필 무소속 1 0.51% 무효 미국 국적자 임으로 무효 처리

총 투표자 수


196      
부통령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 이시영(李始榮)씨가 2차 투표 끝에 한국톡립당 소속 김구씨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승만 김  구 안재홍 서재필 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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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당선자 부통령 당선자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1948년 8월 15일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정부수립을 선언하였다. 대통령직에 취임한 이승만은 1960년 4 19 혁명이 일어나, "하야하라"는 물결에 밀려 1960년 4월 26일 하야할 때까지, 1대, 2대, 3대 대통령을 역임한 대통령이다. 초기에는 집권 여당이 없었으나, 1949년 친 이승만계 정당인 대한국민당 창당하였고, 1952년 이르러 대한 독립촉성국민회를 중심으로 한 이승만의 직계 정당인 자유당이 창당 되었다. 그는 반공(反共) 반일(反日)적 정치 성향으로 나라를 이끌었다. 일본과는 외교하자는 의견까지 전적 묵살할 정도로 철저한 반일 외교 노선을 견지하는 정치를 펼쳐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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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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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라. 6 25 전쟁 발발


       1) 전쟁에서 밀리는 국군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조국의 적화 통일이라는 목표를 세우고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소련으로부터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무기를 지원 받으면서 남침 준비를 착착 진행하였다. 북한은 이렇게 준비한 군비로 1950년 6월 25일(일요일) 새벽 4시,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침략하는 전쟁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6 25 전쟁 또는 한국 전쟁이라고 일컸는다.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된지 2년이 채 안된 나이 어린 대한민국을 향하여, 북한군은 242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중장비로 무장한 7개 사단 규모의 병력이 그 뒤를 따라 침공해 왔다. 그에 대항하는 한국군은 M1 소총과 칼빈 소총으로 경무장 하고 있었으니, 마치 어른 앞에 서 있는 어린아이와 같이 나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총 한번 제대로 쏘아보지 못하고, 파죽지세로 깨어지면서 남으로 남으로 밀려나, 대전으로, 대구로, 다시 부산으로 밀려가, 드디어 경상남도 일부를 제외한 전 국토가 북한군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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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 전쟁이 일어나자 수도 서울을 비워주고 피난 길에 오른 이승만 대통령 부처



       2) 구원을 호소한 이승만 대통령


    한국 위정자들은 그 정도까지 위급한 상태에 이른 다음, 겨우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다급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을 통하여 UN에 구원을 호소하였는데 그것이 열매를 맺어, UN에서 한국지원 결의안을 채택한 다음, 1950년 9월 UN의 깃빨을 단 군대가 한국에 파견하기에 이르러, 한국군과 함께 낙동강 전선에서 항전하기 시작했는데, 6 25 전쟁은 의외로 많은 나라들이 한국을 위해 UN의 깃발을 달고 참전하였다. 그 때 우리 나라를 지원한 연합국은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네델랜드, 뉴질랜드, 프랑스, 터키, 필리핀, 태국, 그리스, 남 아프리카 공화국, 에티오피아, 콜롬비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16개국이고, 비공식적으로 지원한 대만과 일본이 있었으며, 의료 지원을 해 준 나라는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인도, 5개국이었다.


 


       3) 오르락 내르락 하는 전선


    6 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만 3년 1개월 2일간 전투가 계속 되었다. 그 동안 양쪽은 38도선을 각각 세 차례씩 넘나들면서 남으로는 낙동강까지, 북으로는 압록강까지 오르내리면서 전 국토의 80%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전투를 전개했다. UN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은 은밀하게 작전계획을 수립하고서는, 그가 직접 진두 지휘하여 1950년 9월 16일 인천 상륙작전을 전개하였다. 드디어 이 작전이 성공하여, 북한군 후방을 UN군이 공략하자, 보급로가 차단된 북한군은 힘없이 무너지면서 패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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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한 맥아더 장군과의 포옹


  


    드디어 우리 한국은 잃었던 수도 서울과 국토를 되찾게 되었고, 또 사기가 충천한 UN군은 38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계속하여 드디어 평양을 점령한 후, 압록강 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자 다급한 북한의 김일성은 중공에 구원을 요청하여, 중공군 30만명이 1950년 11월 압록강을 넘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북진하던 UN군은 중공군이 물밀듯이 밀고 오는 인해전술을 도저히 당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통일을 눈 앞에 두고 있던 UN군과 국군은 1951년 1월 눈물을 먹음코 점령지로부터 후퇴하기 시작했다. 후퇴한 UN군은 현 휴전선 근처에서 진퇴와 공방을 거듭하면서 북한군과 대치하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 됨으로써 총성은 멈추었다.


 


    6 25 전쟁 중 전선이 크게 변화된 것에 따라 그 시기를 나누어 설명하면 대략 다음과 같고, 아래 그림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단계는 북한군의 남침기(1950, 6. 25 ~ 9. 15)로 북한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낙동강 선까지 이르렀던 시기를 말한다.


       둘째 단계는 유엔군의 북진 및 반격기(1950. 9. 15 ~ 11. 25)로 한국군과 유엔군이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낙동강 전선으로부터 38도선을 넘어 만주 국경인 초산과 혜산진을 잇는 선까지 진격하였던 시기를 말한다. 


       셋째 단계는 중공군의 침공 및 유엔군의 재반격기(1950. 11. 25 ~ 1951. 6. 23)로 중공군의 개입과 더불어 단행된 공산군의 대공세로 유엔군이 평택-제천-삼척을 잇는 선(37도선)까지 후퇴한 다음 재반격으로 다시 38도선을 회복한 기간을 말한다.


       넷째 단계는 휴전협상과 교착전기(1951. 6. 23 ~ 1953. 7. 27)로 휴전회담의 진행과 더불어 쌍방이 38도선 부근에서 고지 쟁탈전을 전개하며 휴전에 이르는 기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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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될 때까지의 지상 전세의 변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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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공포로 석방


    휴전 협상이 시작되자 가장 큰 난제는 포로 송환이었다. 1951년 12월 18일 처음으로 포로 명부를 교환하면서 유엔군 측은 크게 놀랐다. 유엔군 측에서는 공산군에 포로가 된 인원이 국군 88,000여명과 미군 11,500여명 등 도합 10만 여명이 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었는데, 1951년 12월 18일 북한으로부터 넘겨받은 명부에는 11,559명이 고작이었다. 이에 반해 유엔군측에서는 포로로 잡힌 공산군 병사가 132,474명으로 이미 그 명부를 북한에 넘겨준 상태 임으로, 1:1 교환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거기에다 북한의 주장은 포로로 잡힌 국군들이 전향하여 자원하여 북한군에 재 입대하였으니 그들은 포로가 아니라는 주장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미국 국내에서는 전쟁의 장기화로 휴전에 관한 압력이 높아졌기 때문에,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대통령은 포로 문제로 협상이 지연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관계로, 약간의 수정안을 제시하여 북한의 동의를 받은 다음, 1953년 6월 8일 포로 송환 협정에 서명하였던 것이다.


 


    그 협정 내용의 골자는 


       첫째, 송환을 바라는 포로는 휴전 후 60일 이내에 송환하며, 


       둘째, 송환을 바라지 않는 포로는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겨 90일간의 설득기간을 갖는다. 


       그래도 처리되지 못하는 포로는 30일간의 재 유예기간을 두어 최종 결정을 한 후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이 성립됨으로 말미암아 통일의 좋은 기회가 물거품이 되는 것을 통탄히 여겨, 휴전을 극구 반대하면서 북진을 주장하였던 관계로, 미국 측에서는 휴전 협상하는 자리에 한국 정부의 참석을 제외 시킨 상태로 추진해 나갔다. 


    이에 분개한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를 석방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표명했다.  


      첫째는 반공포로를 북한으로 넘겨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한국민의 의사는 무시한 채 송환 협정이 체결 되었고, 


      이와 같은 뜻을 사전 미국에 항의 경고 하였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음으로 부득이 하게 취한 조치라고 했다. 그리고 반공 포로를 석방 하는 것은 국민들이 원하는 바이고, 또 통일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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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 포로임을 문신으로 입증한 포로



    포로 송환 협정이 체결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이 협정한 포로송환협정을 무시하고 석방하기로 결심했다. 1953년 6월 8일 협정된 당일, 이승만 대통령은 원용덕(元容德) 헌병 총사령관을 불러, 포로에 관한 제네바 협정 내용을 검토한 다음, 원용덕 장군에게 “오늘부터 모든 헌병은 헌병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따라 행동할 것”을 명령하면서, 반공 포로 석방 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따라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은 1953년 6월 9일 육군 헌병사령관 석주암(石主岩) 준장과 부사령관 송효순 대령 등을 호출하여, 반공포로 석방계획을 설명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수립케 한 다음, 거사 일을 6월 18일 0시로 결정하고 각 지구대 별로 밀사를 파견하여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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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방된 포로들을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령



 


    1953년 6월 18일 0시, 37,000명의 포로 가운데 27,092명의 반공 포로들이 일순간에 석방되었다. 반공 포로들이 대한의 품에 안기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반공 포로들이 석방되자 각 지역의 경찰과 주민들은 그들을 돌보며 지원해 주기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부분의 반공 포로들이 탈출에 성공한 사실을 보고 받은 다음, 미리 준비해 두었던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자 북한은 판문점 휴전회담에서 "석방된 포로의 재수용"을 요구했지만, 한국은 "한국의 애국청년을 북한 공산치하로 보낼 수 없다"고 완강히 거절했다. 그렇지만 북한은 전세가 약화되어 전쟁을 계속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던 관계로, 이 사건을 이유로 휴전을 깨뜨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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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자신의 책임 하에 석방 하였음을 천명



    도리어 미국측이 협정한 것을 한국이 깨뜨렸기 때문에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미국 정부에서는 한국정부의 돌발적인 단독 행동에 대해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였고, 클라크(Mark Wayne Clark) 유엔군 사령관은 이 사건이 휴전회담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즉시 성명을 발표하기를 "이 사건은 한국정부의 단독 행동이었으며, 수용소에 있던 미군들이 포로들의 탈출을 막으려고 애썼으나 허사였다"는 내용이었다. 며칠이 지난 후인 6월 25일 미국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 로버트슨(Robertson)이 내한하여 외적으로 보기엔 원만하게 봉합하였으나, 클라크 장군의 회고록과 뒤 늦게 나타나는 다른 여러 문서와 증언 등에 의하면,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거세 문제까지 거론했다는 후문도 있다.


 


  . 평화선 설정


    한 때 필자가 탄 705함이 제주 근해로 출동하여 평화선 경비를 하였는데, 이 평화선(平和線)이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한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선언한 것으로, 이는 "대한민국에 인접해 있는 해양과 관계된 주권 선언"이다. 선언 된 경계선은 대한민국과 주변 국가간의 수역을 구분하고, 자원 및 주권 보호를 위한 경계선이었다. 미국과 중국 일본에서는 이 경계선을 "이승만 라인"이라고 폄하하여 불렀다. 마치 이것은 오늘날의 배타적 경제 수역과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와 같은 해양 경계선을 선포하면서, 인접 국가 간의 평화유지를 위한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평화선"이라 부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 수역에 대한 어족(魚族)의 보호와 생물 자원의 육성을 기함으로, 영세 어민을 보호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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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라인이나, 크라크 라인과는 다른 평화선



    그런데 평화선 경계선 안에 독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 임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그러자 일본은 이 선언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공해 자유의 원칙을 내세워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은 한국보다 발달된 수산업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연간 23만 톤 이상의 어획고를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경계선이 시행 되면 일본은 경제적 타격이 클 것이고, 또 독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소멸 될까봐 일본은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은 1월 28일 독도(일본에선 다게시마=たけしま=竹島라고 했음)가 자기들의 영토라고 선언하면서, "한국의 일방적인 주장은 침략 행위"라고 선언하고 나옴으로, 우리나라 전국 곳곳에서 "평화선을 사수하자"는 대규모의 국민 운동이 전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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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선 사수를 웨치는 국민들



    일본을 향해 강경한 입장을 표명해 오던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10월 14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2호로 "포획 심판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그리고 포획 심판소와 고등 포획 심판소를 설치 하였으며, 1953년 해양경찰대를 설치하여 180톤급 경비정 6척으로 평화선을 침범하는 외국 선박과 밀무역을 철저히 단속하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일본은 거세게 반발하면서, 일본 어선으로 하여금 "평화선 경계 안으로 밀고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이 때 신설된 해경 경비정 6척으로는 도저히 그 단속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드디어 기동력이 강한 해군 함정까지 출동 시켰다. 그래서 필자가 승조하고 있던 705함도 평화선 경비에 임한 적인 있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해상 보안청 소속 군함과 어업 지도선까지 파견하기에 이르렀으니, 언제 한일간에 전쟁이 터질지 알 수 없는 준 전쟁지역이 되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평화선을 침범하는 외국 선박에 대한 나포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그래서 우리 해군 함정과 해경 경비정들은 일본 선박 328척을 나포하였고, 일본인 3,929명을 잡아 목포와 제주 등지로 끌고 와서 재판에 넘겼다.


 




경향신문 1953년9월17일 제1면


경향신문 1953년 9월 17일자 제1면 기사  


    (위 신문 보도 내용을 한글로 기록하면)


    정부고위 당국자는 15일 비공식담화 가운데서 평화선을 수호하기 위한 한국정부의 태도는 추호도 변경 되지 않았으며 앞으로 여하한 사태가 초래 될지라도 변경되지 않을 것을 확신하는 바이라고 언명하고 정부가 평화선을 수호하기 위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재천명 하였다.


       1) 일본어선이 한국의 어족을 보호하기 위한 평화선 내에 침입하였을 때는 단호히 나포 혹은 격침한다.


       2) 평화 시는 평화선내라 할지라도 영해 외의 해역이면 어로를 목적하지 않은 외국 선박 항해를 허락할 수 있으나 한국은 현재 전시인 만큼 전쟁 수행상 요청에 의하여 한국 해군이 경비하는 선(전 크라크 라인) 내는 여하한 선박도 무단 항해할 수 없다.


       3) 평화 선내에서 어로 할 것을 지양치 않는 한 일본정부나 민간인의 여하한 교섭이나 항의 기타 제삼국의 중재에도 한국은 결정적으로 응할 수 없다.


       4) 일본 정부가 진심으로 한국의 평화선을 어족 보호선으로 인정할 것을 전제하면서 어업 문제는 평화적이면서도 항내적인 문제로 확립하려는 의도 하에 해결을 요망하여 정식으로 회담을 제기한다면 한국 정부는 대의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그런데 국방부장관은 이미 방위 수역을 경비중인 해군함정에 대하여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절의 외국 어로선은 나포 혹은 격침하라는 엄명을 발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당시 우리 해군 함정과 일본 트롤어업선 제6 아케보노마루(6 あけぼのまる)간의 충돌로 일본 어민 21명이 익사한 사건도 발생하였고, 또 해경 경비정이 그들을 잡는 과정에서 일본인 44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한일간의 마찰이 오랫동안 지속되다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고, 새로운 한일 어업 협정이 성립 되면서 이 문제가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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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55년 2월 22일자 제1면 기사



  사. 기독교 정신을 국정에 적용


    이승만 대통령은 신학을 공부하신 분이기에 건국 초기 국가의 여러 가지 제도를 입안하면서 친(親)기독교 제도를 많이 적용토록 했다. 그래서 대통령 취임식을 기독교 식으로, 성탄절을 공휴일로, 군대에는 군목을, 교도소에는 형목을, 경찰서에는 경목을 두도록 하였다. 6 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군목제도가 창설되었다. 그 후 1951년 4월 기독교와 천주교에서 군종 목사 25명과 군종 신부 12명이 첫 군종 장교로 임관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군종 장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을 때인 1968년 5월에 불교계의 요청을 받아들여 군승(불교 승려)이 입대 정착하게 되었으며, 그 후 군종 장교 제도는 병역법과 군인사법의 제정과 더불어 법률상의 제도로 확고하게 정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 : 이승만 대통령의 학력은 1897년 배재학당 졸업, 1907년 조지워싱턴 대학교 철학 학사, 1908년 하버드 대학교 영문학 석사, 그리고 1910년 프린스턴 대학교 국제정치학 박사를 마친 다음, 1949년에는 서울대학교 명예법학 박사, 1954년에는 조지워싱턴 대학교 명예법학 박사와, 컬럼비아 대학교 명예법학 박사, 그리고 1958년에는 사이공대학교 명예정치학 박사 학위를 각각 받은 바 있다. 


    신학을 공부하신 분이라는 기록은 있으나 어느 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1899년 한성 감옥에서 복음을 영접하고, 그 때부터 신앙 생활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리고 해방 후 한국에 들어와서는 정동교회 장로로 지낸 바 있다.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필자가 섬기던 영월중앙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던 전덕성 목사님도 전쟁이 일어난 직후 군목 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해군 대위 계급장을 단 군목으로 임관하여 진해 해군 동문교회를 담임하시게 되었다. 그 때 함정을 타고 있던 필자는 매주 동문교회에 나가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믿음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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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교회 예배 모습



  


  아. 화폐 개혁 단행


    옛날로부터 한국 땅에서 있었던 화폐 개혁은 모두 네 차례 있었다. 1차 화폐 개혁은 1900년 대(정확히 날자는 필자가 모름)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일본 정권에 의하여 단행된 화폐 개혁이었다. 그런 관계로 우리 나라가 일제 치하에 있을 때는 조선은행권과 일본은행권이 함께 사용되었었다.


 


    그리고 2차 화폐 개혁은 6 25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 있었는데, 당시 우리 나라 법화는 일제 시대 때 쓰던 조선 은행권(일본 은행권은 제외)이 그대로 통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 전쟁이 일어난 직후, 북한군에게 점령 당한 지역에서 침략군이 우리 나라 화폐를 불법으로 남발한 사실이 있었기에, 그들이 퍼트린 적성 통화의 유통 방지와, 북한군이 약탈해 간 화폐의 무효화 처리, 그리고 적의 통화 공작을 차단하여 혼란에 빠진 경제정책을 바로잡기 위한 목적으로, 구 조선은행권을 회수하고. 새로운 한국 은행권을 발행 하는 개혁이었다. 그런데 이 화폐 개혁을 시행함에 있어서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전쟁으로 인하여 전선이 오르락 내르락 하였기 때문에, 화폐 개혁이 단시일 내에 종료하지 못하고, 1950년 9월 15일에 시작하여 1953년 1월 16일까지 전선의 변화에 따라, 지역별로 나누어 장기간에 걸쳐 시행 되었다. 이 화폐 개혁 과정에서 현금의 상당부분이 예금으로 흡수되어,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막는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었던 개혁이었다. 


  


    또 3차 화폐 개혁도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53년 2월 15일에 단행 되었다. 이 때의 화폐 개혁은 전쟁 수행 과정에 남발된 통화와, 그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때 개혁은 화폐 단위를 원(圓)에서 환으로 바꾸었고, 구 화폐를 신 화폐로 교환할 때 100 :1의 비율을 적용하도록 조치하였으니, 명목 절하를 동시에 실행한 개혁이었다. 이 화폐 개혁은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화폐 표시 금액 단위가 높아져서, 계산 상, 그리고 회계 처리 상 곳곳에서 불편함과 거래 비용의 증가 등이 일어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단행된 것이다. 이 개혁을 시행할 때, 금융기관에서 인출되는 예금을 제한하는 봉쇄 계정을 실시하여, 전체 예금의 24% 정도를 동결하여, 시중의 과잉 구매력을 흡수하여 인플레이션을 수습하였고, 거기에서 얻은 자금을 경제 부흥 방향으로 돌리는 효과를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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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2월 15일 화폐 개혁으로 발행된 신권 화폐 모습



    당시 필자는 해군 705함을 타고 있을 때이다. 진해에 정박하고 있는 우리 함정에 긴급 작전 명령이 하달되었다. 705함장은 함정을 부산으로 급거 이동하여, 해군본부로부터 인수한 화물을 함장 책임 하에 묵호 세관에 인계하고 그 결과를 즉시 보고하라는 명령이었다. 우리 함정은 명령 대로 부산으로 이동하여, 부산 해군 본부에서 인수한 화물을 묵호세관에 인계한 후, 그 결과를 해군 본부에 전문으로 보고 하였다. 이틀이 지난 후 100 : 1의 화폐 개혁이 단행 되었는데, 우리가 부산에서 인수하여 묵호로 수송한 화물이, 동해안 일대에서 교환해 주기 위해 은행에 교부한 신권 화폐였다.


 


    마지막으로 시행한 4차 개혁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2년 6월 10일 시행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자. 이승만 대통령 하야


    이승만 대통령 주위에서 권력의 단맛을 누리던 무리들이 자신들의 영구 집권을 이루기 위해, 중임 개헌, 4사5입 개헌, 더 나아 가서는 선거 부정까지 자행하게 되자,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 도처에서 일어나, 드디어 1960년 4월 19일 서울 도심지를 위시하여 전국 각처에서 일제히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정부는 더욱 강경하게 시위를 진압하기에 이름으로, 1960년 4월 26일 지식인들인 대학 교수들이 일제히 이 시위에 동조하면서, 대통령은 이에 굴복하여 하야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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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선거로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는 신문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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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에 굴복하여 대통령직에서 하야 하겠다는 결의를 발표한 보도




    이에 대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 와서 우리 여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 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한가지 내가 부탁 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 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 3 15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게 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단기 4293년 4월 26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차. Hawaii 망명 후 시신이 되어 귀국


    이승만 박사는 하야 후 1개월 정도가 지난 1960년 5월 29일, 민심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자리를 피하려고 Hawaii를 향해 급하게 출국하였다. 한국을 떠날 때 그의 생각으로는 영구 망명으로 생각하지 않고 한 달 정도 잠시 피하는 걸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허정(許政) 과도 내각과 제2 공화국 장면(張勉) 정권은 이승만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관계로 Hawaii에서 망명 생활하던 이승만 박사는 드디어 향수병에 걸리고 말았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서 1962년 3월 17일 비행기표까지 끊어놓고, 3월 16일에는 "사과 성명"까지 발표했으나, 1962년 3월 17일 당시 군사 혁명 주체 세력인 박정희는 특별 지시를 통해 입국을 거부 함으로써 이승만의 귀국은 좌절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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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병에 걸려 투병 중인 이승만 박사



    망명지 Hawaii에서 거주지를 정하지 못하여, 거처를 옮겨 다니던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여사는 Hawaii 한국인 교포 단체의 유지인 최백렬(崔伯烈), 오중정(吳重政), 윌버트 최 등의 도움으로, 한 빌라에 머무르다가 이승만의 병세가 악화되어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1965년 7월 19일 Hawaii Honolulu 요양원에서 향년 91세로 눈을 감고 말았다. 바로 미국에서 데스마스크를 만든 뒤 유해는 비행기편으로 Hawaii Honolulu를 출발, 1965년 7월 22일 경기도 김포비행장을 통해 입국하였으며, 1965년 7월 27일 이승만 박사가 생전에 장로로 섬기던, 서울 정동교회(소속 기독교 대한 감리회)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가족장으로 서울 시가를 한 번 돈 다음,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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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기 위해 모인 군중들



  카. 국내 정세 파악이 너무나 어두웠다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 나라가 일본의 강점 하에 있을 때, 중국과 미국에서 대한 독립을 위하여 헌신한 바가 지대하고, 또 해방이 되자 바로 환국하여 혼란한 가운데서 나라를 세우는데 이바지 한 공로는 매우 컸다. 그리고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나 국토의 거이 다가 점령 당하여 패망 직전에 이르렀을 때, 유엔에 호소하여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였고, 또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어려워진 나라를 복구하기 위해, 외국에 경제적인 지원을 요청하여 여러 나라로부터 먹을 것, 입을 것, 그 외 많은 물자 등을 얻어와서 헐 벗고 굶주리는 백성과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하는데 이바지한 공로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분도 인간이기에 육체적인 노쇠는 막을 길이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국내에서 살지 않았던 관계도 있고, 또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한국인이 아닌 오지리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 국내 사정이 너무나 어두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귀국 초기에는 인의 장막 속에 갇히지 않고 자기 자신의 고집과 판단대로 정확하게 국정을 이끌어 나갔다. 그렇지만 연륜이 올라감에 따라 주위 사람들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측근을 잘 만나 바를 길로 보좌했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지만, 정권에 맛을 본 정권욕이 넘치는 측근들에게 싸였던 관계로, 막중한 대통령의 직무를 바르게 수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중도에 하야하는 불행한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당시 한간에 흘러 다니던 이야기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대통령의 한 측근이 대통령이 쓸 중절모자를 사왔는데, 대통령이 그 가격을 묻자 그는 물가의 불안정을 숨기기 위해, 가격을 사실과 다르게 아주 낮은 가격으로 샀다고 고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대통령이 불시에 남대문 시장에서 중절모자 파는 상인에게 그 가격을 물었더니, 상인은 실제 가격을 사실대로 고하였다고 한다. 그것을 들은 대통령은 "왜 내 모자 보다 많이 비싸" 하고 물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한간에 돌아 다니는 헛말일 수도 있지만, 대통령이 국내 정세에 너무나 어두웠다는 단면을 보여주려는 뜻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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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재임 시절 모습


이승만 대통령 묘소


동작동 국립 묘지에 고요히 잠드신 이승만 대통령



(이해를 돕기 위해 사진은 다른 곳에서 연결한 것입니다).


다음은 "하와이 기행 #13 (하와이의 Banyan Tree)"이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