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 후 북한이 자행한 테러사건


    주 : 며칠 후이면 6월로 들어선다. 6월을 가리켜 "호국 보훈의 달"이라고 일컸는데, 호국 보훈의 달이 제정된 것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 시킨 분과 또 고통을 당하신 분들의 갸륵한 그 공과 뜻을 기리면서 보상을 해 준다는 뜻에서 제정된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선 그 분들의 공과 뜻을 되새기면서 우리 국민 모두가 그분들을 본받아 나라를 아끼고 사랑하겠다는 생각이 각자의 마음 속에서 솟아나도록 고취하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왜 호국 보훈의 달이 6월 달로 정해져 있는가? 6월에는 현충일도 있고, 6 25 전쟁이 일어난 가슴 아픈 날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2015년) 6월 25일은 한국 전쟁이 일어난 지 65주년이 되는 날이다. 해방 직후부터 북한은 적화 통일 목표를 세우고서, 그 것을 달성 하겠다는 강한 의욕을 행동에 옮긴 것이 바로 6 25 전쟁인 것이다. 그렇지만 전쟁이 UN군의 참전으로 그들의 목표 달성이 빗나가게 되자, 한국 사회를 계속 괴롭히면서 도발과 테러를 자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북한이 그런 집단이지만 전쟁 후에 태어난 분들 가운데는 북한을 바로 알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음으로, 필자는 북한을 바로 알리려는 뜻에서, 휴전 후에 북한이 자행한 도발과 테러가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규모가 큰 것들을 골라 아래에 쓰게 된 것이다.


 


    바라는 바는 이 글을 읽으면서 순국 선열과 참전 용사들의 애국심을 본받아 애국자가 꼭 되기를 소망하는 것과, 또 다른 면에서는 북한이 우리 민족에게 많은 도발과 테러를 가해왔지만, 그 때 그 때 하나님께선 주님을 사랑하는 대한 민족을 지극히 사랑하셨기에, 대한민국을 그와 같은 환난 가운데서 지켜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하는 바이다.


    


Image result for 보훈의 달


1. 북한이 테러를 자행하게 된 배경


 


  가. 테러의 원조 김일성은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


    우리 조국이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이 되자, 바로 미소 양군에 의하여 군정이 실시되었다. 그러다가 3년이 지난 1948년, 남에는 대한민국, 북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수립 되었다. 같은 피를 나눈 민족이 두 개 정부 백성으로 나누어졌다. 그 때 북한 땅으로 귀국한 김일성은 소련의 힘을 등에 업고 북한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는 본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인물로, 그의 아버지 김형직(金亨稷)은 선교사가 세운 평양 숭실학교 출신으로 칠골장로교회 장로였고, 그의 어머니 강반석(康盤石)은 권사였다. 그의 외조부 강돈욱(康敦煜)은 장로, 외삼촌 강진석(康晋錫)은 목사, 그리고 북한의 부주석을 지낸 강량욱(康良煜) 역시 목사로 김일성의 외척이다. 그리고 한 때 김일성은 자신을 소개하기를 "나도 유년시절에는 송산리교회 신자였다"고 말한 바 있다. 


 


  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통치자가 된 김일성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토로한 그가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 하면서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리고 권력자가 된 다음에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기독교 탄압을 가하는 독재 권력자로 변신한 것이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주일학교에서 신앙을 쌓았다는 자가 권력자가 된 후 기독교를 탄압하는 자가 되었다면,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아합 왕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합 왕은 선민 이스라엘 민족의 한 사람으로, 아비 오므리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다음,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그녀가 가지고 들여온 바일 신과 아세라 목상을 그도 섬기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우상을 섬기도록 권장 보급하였고, 또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심을 말살 하려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에게 박해를 가하는 등의 악한 일을 행한 자이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악한 왕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왕상16:29-33).


  


  다. 해방 후 바뀌어진 기독교의 실태


    당시 북한의 기독교 실정은 어떠하였는가? 해방 전까지는 북한이 남한 보다 기독교인의 수가 많았고, 신앙의 열기도 월등하게 뜨거웠다. 그런데 북한 김일성이 집권하고 난 후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자, 북한에 살던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넘어 왔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의 뜨거운 불길이 남한 땅으로 옮겨 붙으면서, 한국 땅에는 기독교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고, 북한 땅에는 남아 있던 교인들마저 신앙을 내버리는 현상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 연고로 남한 땅에서는 성령의 뜨거운 불로 세계에서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견한 국가가 되었고, 북한 땅은 복음을 들고 들어간 선교사들까지 박해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북한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나라가 된 것이다.


  라. 북한의 목적은 적화 통일


    일제가 한반도를 식민 통치 할 때, 한반도 북쪽지역은 전력생산과 광공업 위주의 정책을 폈고 남쪽지방에선 농업 위주의 정책을 폈기 때문에, 일제가 강점하고 있을 때부터 북쪽 지방의 생산성이 더 높았다. 그런 관계로 광복 직후 남북한의 경제 수준은 단연 북한의 수준이 남한 보다 더 높기 마련이다. 이와 같은 유리한 여건을 가지고 출발한 북한 정권은 해방 직후부터 공산체재의 통일 국가를 이루겠다는 목표를 세우고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소련으로부터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무기를 지원 받아, 그것으로 남침 준비를 진행했다. 


 


    그러던 중 소련과 중공이 통일전쟁이 한반도에서 벌어지면, 북한을 도와 주겠다는 약속을 하자, 북한 김일성은 자신들의 뜻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하여, 38선 전역에서 242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중장비로 무장한 7개 사단 규모의 병력이 그 뒤를 따라 내려오면서 6 25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마. 감당할 수 없는 수렁에서 울부짖는 대한민국


    북한군의 침공이 시작 되었을 때 한국군의 사정은 어떠하였는가? 한국군은 M1 소총과 칼빈 소총으로 경무장 하고 있었기에 총 한번 제대로 쏘아보지 못하고, 파죽지세로 깨어지면서 밀리기 시작했다. 한국은 전쟁이 일어난지 며칠 안되어 수도 서울을 공산군에게 비워주고, 남으로 남으로 밀려가, 드디어 경상남도 일부만을 제외한 국토의 대부분을 북한군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d48ed38abe6b886f707628f888b6200b.JPG


6 26 전쟁 초기 북한군의 공세에 밀렸던 한국군


http://www.irvinesarang.org/zx1/?mid=bulletin_guestbook&document_srl=151361


 


    감당할 길 없는 위기를 만난 두 살짜리 어린 대한민국은, 우방 국가를 향하여 위기에서 구해줄 것을 눈물로 호소하자, 의외로 많은 나라들이 참전하여 지원해 주었다. 우리 나라를 위해 전투 병력을 지원한 나라는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네델랜드, 뉴질랜드, 프랑스, 터키, 필리핀, 태국, 그리스, 남 아프리카 공화국, 에티오피아, 콜롬비아, 벨기에, 룩셈부르크(16개국)이며, 비공식적으로 지원한 대만과 일본(2개국)이 있고, 의료 지원을 해 준 나라는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5개국)이었다. 그리고 침략한 북한을 지원한 나라는 중국과 (구)소련(2개국)이다.


 


war625-52.jpg


 1617A8354DB62B260D41DD


한국을 돕기 위해 전투 병력을 지원한 나라들


 


  바. 역전을 반복하는 전세


    UN군이 참전하자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여, 드디어 UN군과 한국군은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다. 다급한 김일성은 소련과 중공을 향하여 지원군을 요청하기에 이르러, 1950년 11월, 30만 명의 중공군이 북한을 돕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전쟁에 개입 함으로써, 전세는 다시 바뀌어졌고, 그 후 남북한 모두 밀고 밀리는 진퇴를 반복하면서 어려운 전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김일성은 남한을 제압할 자신이 있다고 판단하고 일으킨 전쟁인데, 자신들이 압록강까지 밀릴 줄이야, 또 평양이 쑥대밭이 되리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30 만명의 중공군 병력이 지원에 나섰건만 밀고 밀리는 전쟁이 계속 됨으로, 더 이상 전쟁을 끌고 갈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되자 북한의 살길은 하루 속히 휴전이나 종전하는 것이라고 그들의 생각이 바뀌어진 것이다..


 


  사. 급행 열차를 탄 휴전 협상


    미국 역시 시민들의 반전 여론이 들끓기 시작 함으로써, 미국 정부 수뇌부의 생각도 휴전해야 되겠다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미국과 북한 사이에선 휴전 협상에 속도가 붙었다. 그 때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강력하게 북진 통일을 주장하면서, 휴전이나 정전을 극구 반대하고 나서자,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을 묵살하면서 휴전 협상 자리에 한국측 요원 참석을 배제 시키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렷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0시를 기해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반공 포로 27092명을 수용소를 경비하는 미군들의 반대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전격 석방 함으로써,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 사이에는 큰 갈등이 고조되었다. 후문에 의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골치 덩어리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제거 작전까지 검토했다고 한다.


 


    이처럼 미국측이 휴전을 서두르는 바람에, 북한으로서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생각으로 자신들의 참뜻을 숨긴 가운데, 미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양보 받으면서,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조인 되었다. 위와 같은 사정이 있었던 관계로 협정하는 자리에 한국 요원의 참석을 배제한 가운데 조인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요란하던 총성은 3년 만에 드디어 멈추어진 것이다. 북한측 입장에선 휴전이 성립됨으로 위기에서는 일단 벗어났으나, 적화 통일의 꿈은 빗나가고 말았다.


 


    북한측 입장은 휴전은 되었으나, 전쟁으로 인한 엄청난 상흔(傷痕) 복구와, 바닥으로 떨어진 전력(戰力)을 복구하느라 근 10년 동안 정신 없이 움직였다. 어느 정도 허트러진 전력을 만회한 다음, 다시 남한을 침공할 기회를 노렸지만, 남한 경제의 발전으로 적화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다시 오지 않는 것이었다.


    


  아. 한국의 경제력이 바닥에서 도약으로


    필자가 해군에 복무하고 있을 때였다. 1954년에는 함정 수리 관계로 일본에 갔고, 1957년에는 동남아 우방국가인 태국과, 자유 월남, 그리고 자유 중국을 친선 방문단의 일원으로 간 적 있다. 일본에선 어떤 상인이 "너희 나라는 GNP(국민 총 생산액)가 겨우 39불이지, 그러니 너희에게는 이 물건을 팔 수 없어", 또 동남아의 어떤 외국인은 "너희 나라는 GNP 계산이 전혀 되지 않는다지, 우리 나라 보다 훨씬 후진국이네" 이런 말로 멸시를 가해 왔으니, 당시 우리 나라의 경제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 초 남북한 경제 비교


통계 자료 출처 : http://egloos.zum.com/tesada/v/3264835


 


  가. 1960년대 초 1인당 국민 총소득 (GNP)





북   한


남   한


남한과 비교


비   고


  GNP


$325.00


$94.00


3.5배




   나. 1960년대 초 주요 생산품에 대한 국내 총생산 (GDP)




북   한 남   한 남한과 비교 비   고
  조강 능력 56.1 0.8 60배
  화학 비료 86 3.8 22.6배
  철광석 116 14 8.2배
  발전량 116 20 5.8배
  시멘트 207 51 4배
  석탄 1200 590 2배
  어획량 59 45 1.3배
  식량 220 600 0.36배

 

    위의 표는 1960년대 초 통계이다. 자세히 살펴 보면 식량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의 생산량이 남한 보다 북한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리고 당시 인구 통계를 찾아 보았더니, 북한 인구는 약 1056만 명이었고, 남한 인구는 약 2498만 명이었다. 인구수는 한국의 절반도 되지 않으면서 생산량은 남한에 비하여 몇 배가 더 높다는 것은, 바로 북한의 경제 수준이 남한에 비하여 월등하게 높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인구 통계 출처 : 


    http://www.ipa.re.kr/unitystudy/download.asp?filename=41_20106305246.pdf)


  

    한국 경재력이 1950년 대까지는 빈곤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1960년 대 중반부터, 경제 개발 계획이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여, 북한에 뒤져 있던 경제 수준이 그 때부터 북한을 추적하기 시작하여, 1975년에 들어서면서 북한을 앞질러 올라감으로써, 빈곤 국가의 오명애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니 국방 예산도 점차 늘리게 됨으로써, 자주 국방의 기틀도 공고해졌으며, 한미 방위 태세도 확립되어 가니, 북한이 뜻하는 대로의 무력 적화 통일은 점점 요원한 쪽으로 치닫게 되었다.

  


  주 : 우리가 자주 쓰는 경제 용어

    GNP (Gross National Product)는 국민총생산 

    GDP (Gross Domestic Product는 국내총생산 

    GNI (Gross National Income)는 국민총소득

    GDI (Gross Domestic Income)는 국내총소득

            을 각각 가리키는 용어들이다.

 

1970년-2012년까지 한국과 북한의 GDP 비교


자료 출처 :


c9ae67fcb24ef699be1e3dc31f7c47ed.jpeg


1970년 대까지 한국의 GDP는 북한 보다 하위였다



 

  자. 남한 사회에 혼란 조성으로

    북한은 휴전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염원하던 적화 통일의 실현이 어렵게 되자, 이에 대한 돌파구로 마련된 것이 한국 사회의 혼란을 조성하기 위해 도발과 테러를 자행하는 쪽으로 그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그래서 휴전 협정을 위반하면서까지 한국에 대한 도발과 테러를 계속하였는데, 그 유형은 실로 다양하다. 한국 국가 원수의 암살 기도, 주요 시설의 파괴, 항공기와 함정 그리고 일반 선박 등에 대한 테러와 납치 등의 목적을 정하고 남한 사회 혼란 조성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테러를 가한다 하더라도 막강한 힘을 가진 주한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으면, 자신들의 뜻하는 테러 효과가 크게 나타나지 않음으로, 적화 통일의 꿈을 이룰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감지한 북한은, 주한 미군의 철수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차.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

    북한은 휴전이 성립된 이 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도발과 테러로 한국을 혼란에 빠트리려고 괴롭혀 왔다. 그 중에서 좀 더 규모가 크고 또 중요한 것들을 골라 북한이 자행한 도발과 테러를 살펴봄으로써,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형제들에게 북한의 호전성과 테러성을 일깨워 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휴전이 성립된 후에 북한이 자행한 테러 행위를 살펴보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2730F74553CB064D222AC4

 

2. 휴전 후 북한이 자행한 테러

 

  가. 해군 56함을 격침 시킨 사건 (1967년 1월 19일)

 

  주 : "해군 56함 격침"에 관한 내용은, 필자의 글 "하와이 기행 #8  (기습공격을 받아 입은 피해)"라는 글 중에 이미 언급한 바 있는 것으로 다음을 클릭하면 다시 불 수 있습니다.

 

[하와이 기행 #8   보기]


   

    해군 56함 피침사건은 1967년 1월 19일 오후 동해 휴전선 근해에서 명태잡이 어선을 보호하던 해군 56함 당포함(승무원 79명)가 북한군 육상 포대로부터 약 20여분에 걸친 200 여발의 집중 포격을 받고 침몰된 사건이다. 해군 당국이 발표한 바에 의하면, 이 교전에서 56함 승무원 79명 중 39명(장교 2명, 사병 37명)이 전사하고, 14명이 중상, 16명이 경상을 입었으며 무사한 장병은 10명뿐이었다. 

 

    1967년 1월 19일 오후 1시 30분경 북한의 수원단 동쪽 6마일 해상에 나타난 북한 해군 함정 2척이 고기떼를 따라 해상 휴전선 근처에서 어로작업 중이던 민간 어선 약 70여 척을 납치하려고 접근해 왔다. 해군 56함은 이를 발견하고 우리 어선들을 안전하게 대피하도록 하기 위해 북한 해안과 가까운 38도선 해역으로 접근하자, 북한의 해안 동굴진지에 위치한 해안 포대는, 오후 1시 50분부터 20분간 약 200 여발의 포탄을 우리 56함을 향해 퍼부어 왔다. 이에 따라 해군 56함도 응전하였고, 급히 달려온 해군 53함도 3인치 함포로 응사하였으나, 해군 56함은 적의 포탄을 맞고 동일 오후 2시 34분 침몰하였다.

 

56.jpg?type=w2


PCEC 56함(당포함)의 침몰 순간 


http://postfiles8.naver.net/20110118_87/ktx111_12953396603253naJ0_JPEG/56.jpg?type=w2


   


  나. 경원선 철도 폭파 테러 (1967년 9월 5일)


    경원선 철도 폭파사건은 1967년 9월 5일 오후 8시 25분 간첩이 열차 레일 밑에 매설한 것으로 보이는 TNT가 폭발하여 달리던 열차 5량 중 3량이 탈선한 사고가 포천군 청산면 초성리의 경원선 초성역 남방 500m 지점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서울역 발 신탄리 행 311호 열차가 승객 400 여명을 태우고 초성 역에 진입 직전 급커브를 돌 때 기관사 오경섭이 50m 전방에서 도화선이 타들어 가는 불꽃을 발견하고 급 브레이크를 잡아 아슬아슬하게 인명피해는 막았으나, 매설된 TNT가 폭발하는 바람에 앞에 있던 객차 3량이 약 2m 정도 탈선했다. 이 폭발로 열차 하부가 대파되었고 레일 60 여m가 끊겨 엿가락같이 휘었으며, 300 여개의 침목이 마구 흩어졌는데, TNT가 폭발한 지점에는 직경 2.5m, 깊이 50㎝의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사고원인 조사차 현장을 답사한 군․경 합동 수사반은 폭발지점에서 하천을 건너 약 200m 전방의 마차산(磨釵山) 밑 동굴까지 0.5㎜ 동선이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이로써 간첩이 배터리를 사용하여 TNT를 폭파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군 수사기관은 북한 간첩이 후방교란을 위하여 열차를 폭파하려 한 것으로 보고 간첩 색출을 위하여 사고지점 부근을 정밀 수색하였으나 용의자를 찾지 못하였다.


 


  다. 1 21 청와대 기습 (1968년 1월 21일)


 


     [1 21 청와대 기습 사건 관련 동영상 보기 #1(10분 37초)


     [1 21 청와대 기습 사건 관련 동영상 보기 #2(31분 18초)


     [1 21 청와대 기습 사건 관련 동영상 보기 #3(14분 8초)


     [1 21 청와대 기습 사건 관련 동영상 보기 #4(7분 7초)


     [1 21 청와대 기습 사건 관련 동영상 보기 #5(2분 40초)


 


    1960년대 후반부터 남한의 경제발전이 급속도로 성장하여 국력이 신장되었고, 또 지난날 그들이 시행한 대남 공작 모두가 실패로 돌아가자, 새로 찾은 테러 대상이 한국의 국가 원수를 암살하려는 극단적인 것이었다. 국가 원수를 암살하려 한 테러는 


      청와대 기습,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 


      8 15 광복절 대통령 저격, 그리고 


      아웅산 국립묘지 폭파 테러 등 여러 사건들이 있었다. 북한이 이러한 테러 수법을 사용한 목적은 국가 수반인 대통령을 암살 하면 단숨에 사회 혼란이 극에 달함으로 그들이 목적하는 바를 손쉽게 달성할 수 있다는 계산 하에 자행한 것이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제124군부대 특수요원에 의해 자행된 청와대 습격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함으로써 남한을 혼란에 빠뜨려 적화통일의 계기로 삼으려는 의도 하에 시행되었던 것이다.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군 31명이 1968년 1월 17일 밤, 비무장지대 휴전선을 넘어 침투하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다. 그들은 1968년 1월 21일 밤 10시경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청와대 인근까지 다가왔다가,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 검문에 걸리자,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4대의 시내 버스에 수류탄을 던져, 승객들을 살상케 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 날 밤 대 간첩 작전을 지휘하던 서울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을 비롯한 7명의 군경과 민간인이 북한 무장공비에 의해 살해 당하였다. 


    이에 군은 즉각 제6군단장 책임 하에 군경 합동작전을 벌려 무장 공비들을 추격하고 포위하는 작전을 펼쳐, 2월 3일까지 31명의 공비 가운데 1명은 생포하고, 도주한 1명을 제외한 29명을 사살했다. 이들 무장 공비가 침투한 목적은 대통령 관저의 폭파와, 요인 암살, 주한 미 대사관 폭파와 대사관원 살해, 육군본부 폭파와 고급 지휘관 살해, 서울교도소 폭파, 서빙고 간첩 수용소 폭파와 거기에 수용되어 있는 북한 간첩들을 대동 월북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사건은 생포된 김신조의 자백으로 그 전모가 드러났다.


 


2011012100020_1.jpg


대통령을 살해하기 위해 침투한 김신조 일당의 침투로


   


54870617.1.jpg


생포된 김신조가 사살된 공비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가원수를 테러 대상으로 삼은 것은 북한이 구상하고 있는 적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취해진 폭력혁명 전략의 한편이었던 것으로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방력 강화와 250 만명의 향토예비군의 창설, 방위 산업공장의 설립을 서둘러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사이러스 밴스 미국 대통령 특사가 2월 11일 방한하여, 양국간 안전 보장을 위한 공동 성명이 발표되었고, 5월 27-28일 워싱턴에서 제1차 한미 국방장관 회의를 연 다음 이를 연례화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정부는 북한의 남파 게릴라 침투에 대비하여 군내에 공비전담 특수부대를 편성하였고, 전방에는 155 마일 휴전선에 철책을 구축하였다. 또한 정부정책 기조를 경제개발과 동시에 자주국방 기틀을 강화하는 국방정책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라. 미 정보함 푸에불로호 납치 테러 (1968년 1월 23일)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USS Pueblo, AGER-2) 피납 사건은 미 존슨 행정부 시절이던 1968년 미 해군 소속 정찰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원산 앞 바다에서 북한 해군에 나포되는 과정에서 미 해군 1명이 사망하고 82명의 군인들이 무려 11개월이나 억류되었다가 승무원들만 가까스로 풀려난 사건이다. 


 


    푸에블로호는 1968년 1월 23일 북한 원산 앞 공해 상에서 정보 수집 활동을 수행하고 있던 중, 북한 해군 함정에 의해 나포되었다. 나포되는 과정에서 북한 해군의 발포로 승무원 1명이 사망했고 13명이 부상당했다. 미 해군 함정이 공해 상에서 납치되기는 미 해군 사상 106 년만에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푸에블로호는 1월 23일 정오 경 1척의 북한 초계정으로부터 첫 공격을 받았으며 오후 2시 32분에 "엔진이 모두 꺼졌고 원산항으로 끌려간다"는 보고를 보내온 후 무전 연락이 끊어졌다. 


    이에 대하여 미 국무성은 푸에블로호와 승무원들을 즉각 석방하도록 소련을 통해 북한과 접촉하였다. 푸에블로호는 1월 23일 낮 정오 경 한 척의 북한 초계정으로부터 "국적을 밝히라"는 무전 연락을 받고 "미국 소속"이라고 답변했다. 이에 북한 함정은 "정지하라,  그렇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위협해 오자, 푸에블로호는 "우리는 공해 상에 있다"는 답전으로 거절하였다. 


 


    약 1시간 후 북한 함정의 지원을 받은 3척의 무장 초계정과 2대의 미그기가 도착하여 포위하였다. 북한 미그기들이 푸에블로호의 주변을 선회하고 있는 동안 한 척의 북한 초계정이 접근하여, 무장한 군인들이 푸에블로호에 승선하였다. 이 때가 오후 1시 40분이었다. 푸에블로호는 "무력저항을 하지 않았다. 지금 원산항으로 끌려간다"고 보고한 후 오후 2시 32분 "무전을 끊는다"는 마지막 보고 후 연락이 끊어졌다.


 


ager2usnavy.jpg


원산 근해 공해 상에서 북한에 납치된 미 해군 푸에불로호


 

    이 사건이 일어나자 미국은 일본에서 베트남으로 항해 중이던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USS Enterprise CV-6)와 3척의 구축함의 진로를 변경하여, 원산만 부근에서 대기토록 하였고, 25일에는 해군과 공군 예비역 14,000 여명에게 긴급 동원 명령을 내리고, 전투기와 각종 항공기 372 대의 출동 준비 태세를 갖추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오산과 군산 기지에 2개 전투기 대대를 급파하는 등 군사적 조치를 취해 나갔다. 28일에는 추가로 2척의 항공모함과 구축함 1척 및 6척의 잠수함을 동해로 이동시킴으로써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30 여 차례의 비밀 회담 끝에 납치된 승무원들이 325일 만인 1968년 12월 23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 함으로써 마무리 되었다. 당시 미국은 반전 여론 때문에 월남전에서 철수를 고려하고 있던 시기이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 상태를 원치 않은 가운데, 많은 것을 양보하면서 협상에 임했던 것이다.


 


    푸에블로호 사건이 일어나고 31년이 되던 1999년 10월 북한은 원산 항에 있던 푸에블로호를 김정일 지시에 의해 대동강 "충성의 다리" 근처로 옮겨 반미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푸에블로호는 경화물선을 개조한 해군 정보수집 보조함으로서 무게 906톤, 길이 54m, 폭 10m, 속도 12.2 노트이고, 승선 인원은 장교 6명, 사병 75명, 민간인 2명 총 83명이 타고 있었다.


 


  마. 정선선 철도 폭파 테러 (1968년 8월 5일)


    경원선 철도 폭파 테러 사건이 있은지 약 1년 후인 1968년 8월 5일 오전 1시 25분, 강원도 정선군 남면 문곡리 정선선 별어곡 역 북방 400m 지점에 있는 남천 제3철교에, 장치한 폭약을 순찰하던 철도국 직원이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하였다. 이 폭파 장치는 폭약과 뇌관에 도화선을 연결시킨 것으로, 철교 3개소에 1m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서울 발 정선 행 제5-9호 열차는 벌어곡 역에 오전 2시 2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1968년 8월 5일 새벽, 역 직원인 장효덕이 초롱불을 들고 철로를 따라 순찰하던 중, 폭파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여 제거함으로써 열차 폭파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북한은 후방교란 등을 통해 남한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기 위해서 열차 폭파 테러를 기획했던 것이다.


 


  바. 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테러 (1968년 10월 30일)


    1968년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무장공비 침투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만큼 인원 규모와 그 잔인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북한은 대남 공작이 강경파에 의해 주도되면서, 본격적으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지하 조직과 불순 세력을 동원하여 한국 국민들을 선동하여 일어나게 함으로써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하여 일어난 사건이라고 미화시키려는 획책이었다. 그리고 전쟁 도발의 구실을 모색하면서, 북한에서 구축한 지하 조직에 대한 사기 진작과 지원을 강화하여, 그들의 이탈을 방지하려는데 주력하였던 것이다. 이에 북한은 폭력혁명의 일환으로 무자비한 테러 및 파괴 활동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사상적인 면에서 중간층을 늘리고, 당국에 대한 협력을 저지하며, 전후방에서 동시에 전투하는 모택동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군경부대의 전력 분산과 병력 소모 및 피로를 촉진 시켰고, 위조 지폐의 대량 사용으로 남한의 경제질서까지 혼란에 빠트리려고 기도하였다.


 


    북한은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울진 삼척지구에 무장 공비 120명을 15명씩 조를 편성, 침투시켜 군복 신사복 등산복 등을 갈아입으면서 게릴라전을 펴게 하였다. 침투한 무장 공비들은 11월 3일 새벽 주민들을 모아놓고 남자는 남로당, 여자는 여성동맹에 가입하라고 총검으로 위협하였다. 주민들이 공포에 질려 머뭇거리자 대검으로 찌르는 등 만행을 자행하고 뒤늦게 도착한 주민은 돌로 머리를 쳐서 죽였다. 심지어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이렇게 말했다는 이유로 속사 초등학교 계방분교 2학년 어린이 이승복(당시 10세)까지 무참히 살해했다.


  


2303933852EDF1F80A646C


무장공비에게 희생된 이승복을 기리는 상


   


    주민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릴레이식으로 신고하여 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군경의 출동을 가능케 하였다. 군경과 예비군은 본격적인 토벌 작전을 시작하여, 12월 28일까지 약 2개월간에 걸친 작전 끝에 공비 113명을 사살하였고, 7명을 생포하였으며, 침투한 120명을 모두 소탕하였다. 이 작전에서 우리측도 군인과 경찰, 그리고 일반인 등 모두 20여명이 사망하는 많은 희생자를 냈다. 북한이 잔악한 공비를 침투시킨다 하드라도 이를 격멸 한다는 튼튼한 안보태세를 실증하였다. 울진 삼척 무장 공비 침투사건은 북한이 우리 나라의 산악지대와 농촌에서의 게릴라 활동을 전개할 수 있겠는지를 탐색하였다는 점과, 또 한국이 월남전에 참전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에게 저항할 수 있겠는지를 시험했던 것이라고 분석된다.


 


  사. EC-121 정찰기 격추 사건 (1969년 4월 15일)


    1969년 4월 15일 발생한 EC-121 정찰기 격추 사건 역시 한반도에 급박한 상황을 연출했다. 승무원 31명을 태우고 일본에서 출발한 미 해군 EC-121 정찰기 1대가 동해 북방 한계선(NLL) 부근에서 북한에 의해 격추돼 승무원 전원이 사망하였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한반도 주변에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급파하는 등 한반도에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갔다.


 


8 EC-121.PNG


EC-121 정찰기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10/10/05/201010050500008/image/201010050500008_10.jpg


                                                    


    이 사건 외에도 다음과 같은 미 군용기 피격 사건들이 있었다.


       1959년 6월 15일에는 P4 정찰기가 동해상에서,


       1963년 5월 17일에는 H23 헬기가 비무장 지대에서,


       1965년 4월 28일에는 RB 47 정찰기가 동해상에서,


       1969년 8월 17일에는 OH 23 헬기가 DMZ 남방에서 각각 격추 당하였고,


       1974년 5월 9일에는 OH 58 헬기 및 AGIG 헬기가 임진강에서,


       1977년 7월 4일에는 CH 47 헬기가 북한 영공에서 피격 당하였다. 그리고


       1981년 8월 26일에는 SR-71 정찰기가 동해 공해상에서 북한이 발사한 미사일에 맞아 격추되었다. 그리고


 


       1984년 12월 17일에는 군사분계선 남쪽을 비행하는 미 정찰헬기 OH-58C를 강원도 금강군 이포리에서 북한군이 미사일을 발사하여 격추 시킨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북한군과 미군 사이에는 정찰 관련으로 군사적 마찰이 심화되었던 유명한 사건이다. 이 사건 발생 직후 미 하원 빌 리처드슨 의원이 북한을 방문, 북측과 협상을 타결함으로써, 사건 발생 13일 만인 12월 30일 헬기 조종사 보비홀 준위와 함께, 격추 당할 때 사망한 하일먼 준위의 유해가 송환되어 왔다. 또


 


       2003년 3월2일에는 북한 MIG-4가 미 공군 소속 RC-135S 정찰기를 요격하기도 했다.


 


  아. 대한항공 YS-11기 납북 테러 (1969년 12월 11일)


    이 사건은 1969년 12월 11월 12시 25분, 강릉발 김포행 대한항공 소속 YS-11기가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을 태우고 대궐령 상공을 비행하고 있을 때, 고정 간첩인 조창희에 의해 강제 납북된 사건이다. 그러나 북한은 동 여객기가 월북한 다음날인 12일 착륙지점은 밝히지 않고, "두 조종사에 의한 자진 입북"이라는 간단한 보도만 내보냈다. 정부는 즉시 이러한 북괴의 공중 해적 행위를 규탄하고 기체와 승무원 및 승객 전원의 송환을 촉구하는 한편, 국제 적십자사를 비롯한 국제 기구에 송환을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납북행위 자체가 군사 정전협정에 위반되는 것임을 지적하고 군사 정전위원회를 통한 송환교섭도 아울러 벌였다. 그러나 우리의 성의 있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기체와 51명의 탑승객을 감금해 놓고 미리 조작한 각본대로 자진 입북으로 위장하기 시작했다.


 


    1969년 12월 20일 북한은 조종사의 기자회견을 보도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조종사 유병하와 부조종사 최석만은 12월 11일 우연하게도 같은 조로 편성되어 강릉을 갔다 오게 되었으며, 이들은 군대에 있을 때부터 이심전심으로 서로 뜻이 통했기 때문에 자진 월북을 결행하였다. 그리고 북한 기자들의 질문도 한결같이 월북을 정당화할 수 있는 질문이었고, 두 조종사는 각본대로 북한 현실의 찬양과 한국 실정의 왜곡선전으로 시종일관하였다. 1969년 12월 25일 북한 중앙통신사는 성명을 발표하여 인질외교의 본색을 드러냈다. 그들은 성명에서 조종사에 의한 의거 입북을 기정 사실화 하고, 제3자의 개입 없이 그들이 지정한 민간 대표들과 직접 소환교섭을 벌이자고 정치적 흥정을 해왔다. 


194C60354EE4AF3D10DD9E


 


    그 후 북한은 1970년 2월 5일 납북승객을 송환하겠다고 국제 적십자에 송환 통보를 하고서도, 지정한 날짜가 지나도록 송환하지 않았다. 1970년 2월 14일 17:00 탑승자 51명 가운데 39명이 판문점을 통해 납북 65일 만에 다시 자유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날 39명의 귀환 승객들은 20:00가 넘어 서울에 도착 15일 오후 기자회견을 통해 KAL기 납북 경위와 북한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승객들은 사건 당시 항공기가 대궐령 상공에 이르렀을 때 객석 앞 자리에 앉아있던 조창희가 갑자기 조종실로 들어간 직후부터 방향이 바뀌는 것을 느꼈고, 동해 상공에 이르렀을 때 2대의 북한 전투기가 KAL기를 호위하는 것을 보고서야 납북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북한은 민간 항공기의 범죄적 납북을 은폐하기 위해 두 조종사에 의한 의거 입북을 주장하면서도 납북한 범인 조창희는 물론 승무원 4명(전원)과 승객 7명 도합 12명을 송환하지 않았다. 그들의 명단은 승객 중 범인인 조장희와 기장 유병하, 부기장 최석만, 승무원 성경희, 정경숙, 승객 채현덕, 장기영, 임철수, 황원, 김봉주, 이동기, 최정웅씨다. 


 


    당시 필자는 중앙부처 000실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같이 근무하던 동요 현00씨라는 분이 강릉으로 출장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납북되어, 원치 않은 북한 생활 65일을 맛 본 후, 승객 39명이 귀환할 때 돌아왔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로부터 자세한 내용을 들은 바 있었다.


 


  자. 국립 묘지 현충문 폭파 테러 (1970년 6월 22일)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사건은 6 25 전쟁 20돌을 앞둔 1970년 6월 22일 03:50경 호국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 현충원에 수 미상의 무장공비가 잠입, 현충문에 폭약을 장치하려다 실패하여 폭약이 폭발함으로써,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북한이 획책한 테러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에 대하여 대 간첩대책본부는 이들 무장 공비들이 6 25 전쟁 20주년 행사를 기해 국립 현충원을 참배하는 요인들을 암살하기 위하여, 고성능 폭발물을 현충문에 장치하여, 전파나 유선을 통해 폭파시키려 했던 것이다. 


 


    군경 예비군 합동수색대는 22일에 국립 현충원에 침투했던 무장 공비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경기도 일원에서 수색작전을 전개하였는데, 동년 7월 5일 오후 김포지역에서 무장 괴한 2명을 보았다는 모 초등학교 어린이의 신고를 받고 수색망을 좁혔으며, 김포 서쪽 10 km 지점에 있는 산에 그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포착한 공수 특전 단원들은 그들과 교전 끝에 모두 사살하였다. 이날 아군은 공비 소탕하는 작전에서 기관단총 1정, 권총 1정, 대검 1개, 미화 150달러, 한화 51만원, 그리고 라디오 1대 등을 노획하였다. 이러한 북한의 대남공작은 북한이 본격적으로 남한사회의 불안을 조성하기 위해 대통령을 비롯한 요인 암살에 주력하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10 현충문 폭파.PNG


  차. 해경 제863호 경비정 공격(침몰) 테러 (1974년 6월 28일)


    해경 제863호 경비정 피격사건은 1974년 6월 해경 경비정이 북한 해군 함정에 의해 격침된 사건이다. 국방부는 1974년 6월 28일 오전 10시 30분 경 동해의 해상 군사분계선 남쪽인 거진 동쪽 25마일 해상에서 어로 보호 경비 중이던 해경 경비정 200톤급 제863호가 북한 해군 함정 3척에 의해 포위되어 교전 중이라는 보고가 있은 뒤 통신이 끊어졌는데, 제863호 경비정은 북한 해군 함정의 포격으로 격침되었음이 분명하다고 발표하였다.


 


    제863호 경비정은 속초기지 소속으로 건조된 지 얼마 안 되는 시속 20노트의 초계정인데 6월 28일, 28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거진 근처의 어로 저지선 근방에서 어선단을 경비하던 중 "북한 함정 3척에게 포위되어, “북한 함정이 우리 배를 포위했다"고 타전한 후, 다시 "교전 중"이라고 보고한 다음, 피격 당 함으로서 교신이 끊어졌다. 국방부는 사건 발생 보고를 받자, 즉각 해군 함정과 공군기를 출동 시키고, 해경 경비정을 현장에 급파하였으나 사고해상은 이날 따라 심한 안개가 끼어 있었고, 높은 파도 때문에 구조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북한 함정이 해상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어선을 납치하려다가 경비정을 공격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북한 중앙통신은 6월 28일 오전 해상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한국 경비정 한 척을 침몰 시키고 수명의 승무원을 사로잡았다는 내용의 보도가 있었다고, 일본 모 기관이 발표하면서 포로된 인원에 대하여는 아는 바 없다고 덧 붙혔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에 유엔 한국대표부는 6월 28일 오전 북한이 동해 공해상에서 초계정 제863호를 격침한데 대하여 "즉시 이 만행을 사과하고 초계정의 생존자와 사망자 유해를 송환하라"는 내용의 강경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카. 광복절 기념 행사장에서 대통령 저격 테러 (1974년 8월 15일)


    이 사건은 1974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다 미수로 끝난 사건이다.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거행되는 8 15 경축식전에 귀빈을 가장하고 잠입한 재일 교포 문세광(文世光)이 광복절 경축사를 낭독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저격하려다가 실패하고 붙잡힌 북한의 대표적인 테러 저격 사건이었다. 경축식장 1층 뒤쪽의 해외 교포석에 자리잡고 있던 저격범 문세광은 10:20경 좌석에서 갑자기 일어나 박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발사 하였는데, 1탄은 불발하였고, 2탄은 박 대통령이 사용중인 연설대 우측에 맞았으며, 3탄은 단상에 앉아 있는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머리에 명중하였디. 육 여사는 경호원들과 여자 합창단원의 부축을 받고, 서울대학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 박 대통령은 저격범이 체포된 뒤, 태연히 경축사를 끝까지 읽어 내려갔고, 경축식전 행사는 예정대로 모두 끝났다.


 


    이 사건은 불과 22초라는 짧은 사이에 벌어진 것이지만,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5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으나, 오후 7:00경 49세를 일기로 운명하고 말았다. 그리고 합창단원 중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학생인 장보화 양이 경호원이 쏜 총탄에 희생되기도 했다.


 


    8 15 저격사건은 범인 문세광이 재일 교포이고, 그가 범행에 사용한 권총은 일본 경찰관서에서 훔친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입국할 때 사용한 여권은 일본 정부가 발행한 여권이라는 점에서, 한일 관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박 대통령 저격사건 수사본부는 17일 밤 저격범 문세광이 북한의 지령에 따라 박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고 발표하였다. 김일두 수사본부장은 문세광이 김일성의 지령에 의해 북한과 일본을 왕래하는 북한 선박 만경봉호에 승선하고 있는 성명 미상의 북한 공작지도원과 조총련 오오사까시(おおさかし=大阪市) 이구노구(いくのく=生野区) 서지부 김호룡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 왔음을 자백했다고 밝혔다. 이어 김 본부장이 밝히기를 범인 문세광은 이들로부터 거사 자금으로 두 차례에 걸쳐 모두 130 만엔을 받았고, 당초 1974년 3월 1일 삼일절 경축식전에서 범행하려고 계획하였으나, 총기 구입이 뜻대로 되지 않아 8월 15일로 연기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문세광은 1974년 5월 5일 오오사카 항에 정박 중인 만경봉호에서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박 대통령을 저격하라”는 지령을 다시 받고, 1974년 7월 18일 오오사카시(おおさかし=大阪市) 남구경찰서 고진 파출소에 몰래 들어가 권총 2정을 절취했다고 한다. 그리고 1974년 7월 24일 김호룡으로부터 일화 80 만엔과 여권 발급, 그리고 거사 방법 등에 관한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수사결과 대통령 저격사건은 문세광의 자백에 따라 조총련의 지령 하에 이루어진 것임이 밝혀졌고, 범인 문세광은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1974년 12월 21일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문세광에게 적용된 죄목은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목적 살인, 살인미수, 출입국 관리법 위반 등이었다.


 


11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PNG


테러범 문세광


 


11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PNG


저격범의 총탄에 희생된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


  타. 판문점 도끼 테러 살인 사건 (1976년 8월 18일)


    판문점(板門店) 도끼 테러 살인 사건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인근 공동 경비 구역  내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 군인이 휘두르는 도끼에 맞아 즉사 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된 미루나무는 공동 경비 구역에 있는 25년생 15m 높이의 나무로서 남한과 북한 양측이 상대방을 감시하는 데에 지장을 주고 있는 나무였다. 8월 18일 오전 10시경 미군 경비 중대장 아더 보니파스(Arthur Bonifas) 대위와 소대장 마크 배럿(Mark Barret) 중위 그리고 한미 군인 장교와 사병 여러 명이 미루나무 전지 작업을 수행하는 노무자들을 감독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북한군 박철 중위와 다른 장교 1명, 그리고 15명의 이 나타나 작업 중지를 요구하고 나섰다. 미루나무의 위치는 UN 관활선 안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보수 작업을 계속해도 무방하다고 판단한 보니파스 대위는 직권으로 작업을 계속 시켰다. 그러자 북한군은 인근 초소에 연락하여 북한  20 여명을 불러 왔다. 박철 중위의 작업 중지 재요청을 보니파스 대위가 다시 거부하자 박철의 공격 명령에 따라 북한군 들이 북한군들이 타고 온 트럭에 실려 있던 곡괭이와 몽둥이, 그리고 노무자들이 쓰던 도끼 등을 빼앗아 보니피스 대위와 배럿 중위에게 공격을 가하여 현장에서 살해 하였고, 그 외에도 한미 군인 다수가 중경상을 입었으며, 또 UN이 사용하는 트럭 3대도 파손하였다.


 


12 판문점.PNG


    이 사건이 일어나자, 판문점에서는 휴전 이후 최초로 군사적 긴장 상태로 돌입했다. 주한 미군은 8월 19일 휴전 이후 최초로 데프콘 3호로 격상 발령한 다음, "폴 버니언 작전(Operation Paul Bunyan=거인=巨人= 나무꾼의 이름에서 따옴)"을 수립하고서는,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폭격기 F-111 20대를 대구에 배치하고, 항공모함 전단을 서해에 배치, 그리고 병력 증파도 준비하는 등의 대대적인 군사력을 동원하였고, 또 한국군 특전사 요원 64명의 결사대까지 지원 받아, 대대적인 지원 하에 문제의 미루나무를 베었다. 


 


    만일 미루나무를 자르는데 북한이 다시 도발할 경우에는 바로 반격에 돌입하여, 포병대가 개성의 북한군 막사와, 인근에 있는 북한 측 포병대를 가격하고, 북한 전차부대의 남하를 대비한 작전 계획까지 수립하고서는, 데프콘 3호를 2호로 격상하면서, AH-1 공격헬기 7대와, 다목적 헬기 20대의 직접 엄호를 받으면서, 특전사 병력과 함께 미루나무를 제거한 다음, 북한군 초소 4개까지 파괴하였다. 그렇지만, 북한은 미루나무 벌목은 물론, 초소 파괴에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당시는 냉전이 치열하던 시대지만, 북한의 동맹국인 소련과 중국도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에 대해선 북한을 도울 명분이 없는데다, 전쟁까지 불사한 미국의 강경 대응에 소련과 중국의 침묵을 본 북한은, 김일성의 유감 성명을 발표 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파. 광천지구 무장공비 침투 테러 (1978년 11월 4일)


    충남 광천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북한 노동당 소속 무장공비 1개조 3명이 군사 정찰 및 사회 혼란을 목적으로 1978년 11월 4일 오후 7시경 충남 홍성군 광천읍 부근 해안으로 아군에게 발견 당하지 않고 침투한 사건이다. 이들은 11월 7일 오후 2시 반경 광천 소재 말봉산에서 화목을 채취하던 부녀자 3명 중 2명과 조우하자 노출을 우려한 나머지 여인들을 살해하고 현장을 떠났다. 이 때 위기를 모면한 1명의 여인이 하산하여 오후 9시 반에 경찰에 신고하였으며, 군용 물품이 발견됨으로써 무장공비의 침투사실이 알려져 이튼 날부터 군 경 예비군의 합동 작전이 전개되었다. 


 


    무장공비 3명은 12월 4일 밤에 북한으로 복귀할 때까지 31일간에 걸쳐 작전이 전개되고 있는 아군 후방 지역에서 230㎞에 달하는 장거리를 육로로 이동하면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들은 작전기간 중 광천, 공주, 평택, 오산 등지에서 민간인 5명을 추가로 살해하면서 무려 30회 이상 북한 당국과 무선 연락을 교신 하면서 아군 매복조와 몇 차례 조우하였으나 교묘히 피하여, 12월 4일 자정쯤 김포 감암포에서 안내 간첩 2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북으로 돌아갔다.


 


    이 사건은 보병 3개 사단과 특전사 소속 5개 공수 특전 여단 등 병력 27,000 여명과 충남과 경기 일원의 경찰 및 예비군 180,000 여명 등 207,000 여명이 작전이 투입하여 봉쇄, 수색 및 매복 작전을 전개하였으나, 단 1명의 적도 사살하지 못함으로써 많은 문제점을 남겨 준 사건이다. 이후 북한은 특수 제8군단 예하에 저격여단과 제17정찰여단, 그리고 공정대대와 상륙여단까지 증편함으로써, 1980년대 초에 비정규전 병력을 10 만명이 넘도록 구축하였다고 판단되고 있다. 북한은 이들 비정규전 요원들을 수송하기 위하여 고속 상륙정을 포함한 각종 선박과 AN-2기를 비롯한 각종 수송기를 계속 도입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남한지역 어디에든지 지상 침투와 해상 및 공중 수송으로 비정규전 요원들을 신속히 투입하여 남한을 단시일 안에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본다.


 


  하. 미얀마 아웅산 국립묘지 테러 (1983년 10월 9일)


    이 사건은 1983년 10월 9일 미얀마를 친선 방문중인 전두환 대통령과 수행원들이 아웅산 국립묘소를 참배할 때 암살하려고 자행한 테러 사건이다. 이 사건은 사전 침투하여 이 국립묘지에 있는 건물 천장에 폭약을 설치하여 원격 조종으로 폭발 시켜, 대통령과 그 일행을 폭사 시키려는 계획 하에 자행한 것이다. 마침 대통령이 현장에 늦게 감으로서 부총리와 장관 등 수행원 17명을 순국케 하였고, 또 14명을 부상시키는 천인공노할 테러를 감행한 사건이다.


 


    미얀마 당국의 수사 결과 이 사건은 북한 독재자 김정일의 친필 지령을 받은 북한군 정찰국 특공대 소속 진모(某) 소좌, 강민철 대위, 신기철 대위 등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밝혀졌다. 미얀마 정부는 이 사건의 수사를 매듭지으면서 11월4일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는 한편, 양곤에 있는 북한 대사관 직원들의 국외 추방을 단행했다. 그 뒤 12월 9일 양곤지구 인민법원 제 8 특별 재판부에서는 테러범에 대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이 사건으로 코스타리카, 코모로, 서사모아 등 3개국이 북한과의 외교를 단절하였으며, 미국 일본 등 세계 69개국이 대북한 규탄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11월 13일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 최전방을 이례적으로 시찰하는 등 한미 공동 자유수호 결의를 재확인하였다. 


 


images?q=tbn:ANd9GcRl3HrdFU1hKGQ8zBbv-THc87TGuiI-UMzyJ58S1CcAnZ54hGbG


   


images?q=tbn:ANd9GcRYC2TYzfTH3ozjb6LCUBskUHzc45e0olocMcBqAU9jEFmayS00


1983년 10월 9일 북한이 미얀마에서 미얀마를 방문한 


우리 나라 대통령을 비롯한 요인들을 폭사 시키려고 자행한 테로 사건 


  


  거. 대구 미 문화원 폭파 테러 (1985년 9월 22일)


    1983년 미얀마 아웅산에서 대통령을 시해하려던 테러 사건 후 꼭 2년이 되었을 때, 다시  대구 미 문화원을 폭파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는 한 미간의 외교 분쟁을 노리고 북한이 행한 테러 사건으로 밝혀졌다. 9월 22일 오후 9시 33분 경 대구시 삼청동 2가에 위치한 미국 문화원 정문 앞에서 강력한 폭발물이 터져 대구 영남고등학교 1학년 학생 허병철 군이 현장에서 숨지고, 대구 중부 경찰서 김철호 순경 등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고로 미 문화원 건물 앞 벽이 허물어지고 이 건물과 인근 한국은행 대구 지점, 그리고 현장에서 100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경북의대와 의대부속병원 등 건물의 유리창 500 여장이 깨지기까지 했다.


 


    수사당국은 1980년 12월 9일 광주 미 공보원 및 1982년 3월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에 이어 발생한 미 문화원 사건이라는 점을 중시하고 관계기관과 합동으로 다각적인 수사를 펼쳐 나갔다. 사건은 오후 9시 25분 경 숨진 허군이 여학생 보조가방으로 쓰이는 가로 세로 각 26㎝ 두께 5㎝의 감색 헝겊 가방을 현장에서 300 미터 떨어진 대구시경 정문 근무자 김일환 일경에게 가지고 와서 신고했다. 김일경에 따르면 허군은 길을 가다 이상한 가방이 있어 주워왔는데, 미 문화원 앞에는 이 보다 더 큰 가방이 하나 더 있다고 해서 시경은 관할 경찰서인 중부경찰서에 연락하여, 시경으로부터 간 김철호 순경과 신고한 허군과 함께 미 문화원 현관 앞 계단에 이르는 순간 그 곳에 있던 가방이 터진 것이다. 


 


    이 사건은 사건 발생 초기부터 무장 간첩의 소행이라고 판단했는데, 1983년 12월 8일 대간첩 대책본부는 다대포 해안에서 생포된 진충남과 이상규 등 2명의 생포간첩 증언에 의하여, 대구 미 문화원 폭파사건이 북한 소행임을 최종 확인하게 되었고, 또 미 문화원을 폭파함으로써 한미간의 외교분쟁이 일어남은 물론 남한사회의 혼란을 조성하기 위함이 그 목적이라고 밝혔다.


 


  너. 대한항공 858기 공중 폭파 태러 (1987년 11월 29일)


    북한에 의한 항공기 테러가 1980년대 이전까지는 단순한 항공기 납치였으나, 1980년대 이후부터는 그 수법이 항공기 폭파라는 반인륜적 반문명적 형태로 바뀌어졌다. 또한 그 목적도 인질 납치와 항공기 억류에서 대량 인명 살상 등을 통하여, 남한이 불안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왜곡 시켜서, 한국을 고립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한반도의 긴장을 조성하려는 방향으로 그 테러 수법이 바뀌었다. 특히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둔 시점에 북한이 대한항공 858기를 공중에서 폭파시킨 사건으로, 이 사건은 서울 올림픽을 방해할 목적으로 저질러진 대표적 사례이다. 


 


    이 테러사건은 1987년 11월 28일 밤 이라크 바그다드(Baghdad)를 출발한 대한항공 858기가 아랍 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Abu Dhabi)에 기착한 뒤 방콕으로 향하는 도중 북한 공작원 김현희(金賢姬)가 사전 장치한 폭탄에 의하여 공중에서 폭파된 사건이다. 이 여객기는 11월 29일 오후 2시 1분 미얀마 벵골만(Bay of Bengal) 상공에서 방콕(Bangkok) 공항에 보고하기를 "45분 후 방콕에 도착하겠다. 비행 중 이상 없다"는 연락을 보낸 후 소식이 끊어졌다. 이 여객기에는 중동에서 귀국하던 한국인 근로자 등 승객 93명과 외국인 2명, 승무원 20명 등 모두 115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 여객기 잔해가 태국 해안에서 발견되었다고 태국 내무부가 발표하였고, 30일 오후 858기의 추락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12월 1일 사고 비행기에 한국 입국이 금지된 "요주의 인물"인 일본인 2명이 탑승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수사는 급진전되었다. 문제의 두 일본인은 "하치야 신이치(はちや しんいち=蜂谷 真一)"와 "하치야 마유미( はちや まゆみ=蜂谷 真由美)"라는 여권을 가진 남녀로 바그다드에서 탑승한 뒤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렸으며, 이중 마유미의 여권은 위조 여권임이 바레인 공항에서 밝혀졌다. 


 


    이들은 바레인에서 요르단으로 탈출하려다가, 소지한 여권이 위조라는 사실이 적발되어 체포되었다. 그러자 담배 갑 속에 숨겨두었던 독극물을 삼켜 자살을 시도하여 남자는 숨지고 여자는 중태에 빠졌다. 한국으로 신병이 넘겨진 "마유미" 여인은 중국어와 일본어를 사용하며 중국인 행세를 해오다가 12월 23일 범행을 자백했다. 그의 본명은 김현희이며,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 소속 공작원이었다.


 


htm_201207201415820102011.jpg


대한항공기 폭파범 김현희(북한 공작원)가 체포되다


   


    북한은 한국에서 열리는 "88 서울 올림픽 개최를 방해하기 위해 KAL기를 폭파하라"는 김정일의 친필 공작 명령을 받고, 음독 자살한 김승일과 함께, 기내 좌석 선반에 라디오와 술병으로 위장한 폭발물을 놓고 내림으로 공중에서 폭발되도록 했던 것이다. 그 후 김현희는 1990년 3월 27일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전향의사 표명과 김정일의 도구로써 이용된 점이 정상 참작되어 1990년 4월 12일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더.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 사건 (1996년 9월 18일 침투 확인)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 사건 동영상 보기 #1( 7분 19초)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 사건 동영상 보기 #2( 8분 48초)


  


    잠수함으로 무장 공비를 침투시킨 사례는 이 외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고 하나 필자가 파악하지 못한 관계로 여기에서는 강릉지구에 침투한 사건만을 기록하겠다. 1996년 9월 18일 새벽,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부근 해안도로를 운행 중이던 택시기사가 해안 가까이 의아한 선박과 거동이 수상한 자들이 있음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였다. 


 


    한편 비슷한 시간인 새벽 1시 17분쯤에는, 강동면 대포동 아군 해안 초소에서 이상한 불빛과 연기가 있는 것을 관측하고, 대대 상황실로 그 상황을 보고함으로써 군에서는 후속 확인 조치를 취해 나가고 있었다. 이 때 신고를 접수한 경찰관이 택시기사와 함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현지에 이르렀고, 또 군 부대에서도 소대장이 현지 확인을 위해 이미 나와 조사하고 있었다. 출동한 군경이 함께 좌초된 북한 잠수함에 의하여 공비들이 침투를 필하였다는 사실을 18일 새벽 2시쯤 확인하게 되었다.


 


    군은 즉각 대 간첩 소탕작전에 들어갔다. 당일 오후 3시 45분쯤, 공비 11명의 시체가 항공정찰 중이던 헬기에 의해 발견되었고, 뒤 이어 공비 이광수가 생포되었다. 생포된 이광수는 공비들의 시체를 보고, 북한 잠수함에 탑승하여 강릉에 침투한 자들이라고 확인하면서, 해상처장 김동원 대좌와, 안내원, 승조원들의 시체임을 확인하였다. 그들을 모두 AK 소총과 TT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인민무력부 정찰국 해상처 제22전대에 소속되어 있는 군관들로써 공작 요원과 안내원들이었다. 그들이 이용한 잠수함은 길이 35m, 폭 3.8m의 300톤 규모의 상어급 잠수함으로, 특수 공작에 이용하기 위해 개조된 것으로, 침투시켰던 공비들을 복귀시키기 위해 해안 접근을 시도하다가 좌초되었던 것이다.


 


 images?q=tbn:ANd9GcRliTJsHlTqg7xK1r9B1_BUktm_SyLsdH328iDKDacwdAMDFkwa


  


    그 때부터 11월 5일까지 무려 49일간 계속 소탕작전을 실시하여 공비 1명을 생포하고, 13명을 사살했으며, 그들 공작조에 의하여 살해된 공비 11명을 포함, 총 25명의 공비가 일망타진 되었다. 그러나 아군의 피해도 많았다. 군인 12명, 예비군 1명, 경찰관 1명이 전사했고, 민간인 4명이 피살되었다. 특히 평창군 진부면 탑동리 인근에서는 송이버섯을 채취하기 위해 입산했던 주민 3명이 공비들에 의해 살해된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이광수의 진술과 휴대 장비들을 볼 때, 그들의 침투 목적은 군 비행장, 발전소 등, 주요 시설에 대한 정보수집, 또 우리 군의 경계태세에 대한 시험, 필요 시 요인 암살과 주요 시설 파괴 등에 있다고 한다.


 


  러. NLL 침범 해상 태러 (제1차 연평해전-1999년 6월 7일)


 


  주 : "제1차 연평해전"에 관한 내용은, 필자의 글 "하와이 기행 #8  (기습공격을 받아 입은 피해)"라는 글 가운데 이미 언급한 바 있는 것으로 다음을 클릭하면 다시 불 수 있습니다.


 


[하와이 기행 #8   보기]


 


            [제1차 연평해전 동영상 보기 #1(1분 11초)


            [제1차 연평해전 동영상 보기 #2(9분 11초)


            [제1차 연평해전 동영상 보기 #3(8분 38초)


            [제1차 연평해전 동영상 보기 #4(18분 3초)


            [제1차 연평해전 동영상 보기 #5(8분 38초)


   


    이 사건은 1999년 6월 초, 북한 경비정 6척이 꽃게잡이 어선을 앞세우고,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옴으로써, 우리 해군 함정이 경고하면 퇴각하기를 무려 9일 동안 반복적으로 계속하였다. 1999년 6월 7일 다시 연평도 서방 10㎞ 해상을 통해 침범함으로써 우리 해군 함정이 "충돌식 밀어내기" 전술로 저지하자, 북한경비정이 한국함정을 향해 선제사격을 가함으로, 남북 함정간의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 교전에서 북한 해군은 어뢰정 1척이 침몰하고 경비정 4척이 대파되었으며 북한군 20-30여명이 사망하였으며, 한국 해군은 경비정 몇 척이 경한 상태의 파손을 입었고, 또 해군 7명이 부상 당하였다. 이 충돌로 망신을 당한 북한 함정들은 북쪽으로 퇴각하여 추가 도발을 해오지 않음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이 때 한계선을 무단 침범한 것은 "정전협정"의 정신과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한 구역을 인정"키로 한 바 있는 "남북 기본합의서"(1992년)에 합의된 사항을 위반한 범법 행위였다.


 


    북한이 이 사건을 일으킨 목적은 대북 포용정책 하에서의 한국정부의 국방의지가 어떠한지?, 그리고 북방 한계선을 무시함으로써 정전 협정 체제를 무력화 시켜보겠다는 의도와, 또 향후 남북협상에서 실익을 취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해 보겠다는 점, 그리고 유고 패전에 따라 위축되어 있는 북한 내부 결속을 목적한 긴장 조성용, 마지막으로 꽃게 새우 조기 등 고급 어종이 풍부한 서해 5도 인근 황금어장 확보 등 다목적 카드로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북한이 이 교전에서 우리 해군에게 참패를 당함으로써 "선군 정치"와 "필승 불패"를 선전해 온 그들의 선전이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노출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측에서는 북한에 대하여 포용정책을 실시하면서도,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우리 해군의 전투력이 북한보다 한 수 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좋은 계기가 된 바 있다.


 


  주 1 : 해상 군사 분계선(NLL 선)에 관하여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김명섭 교수의 학설) 


 


       NLL은 7·27 정전협정문에 근거를 두고 있는 선으로, 육상의 군사 분계선(MDL)과 동해 및 서해에 설정되어 있는 해상의 군사분계선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 중 서해 5도를 잇는 선과 북한 연안선 사이에 설정된 NLL을 정확히 이해 하려면, 7 27 정전 협정을 도출하기 위해 1951년부터 시작되었던 정전 협상 과정을 먼저 검토해야 정확하게 이해 할 수 있다. 1951년 7월 본격적인 정전협상이 시작된 이후 2년 여 만인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7 27 정전 협정은 한반도 휴전 체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협정문에는 분명히 남한 정부의 서명은 빠져 있다. 정전 협정의 서명자는 마크 클라크 UN군 사령관과 김일성 북한군 최고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등 미국, 북한, 중국의 3개국 대표자의 서명뿐이다. 한국 정부를 대표한 서명자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한국이 정전 협정 계약 당사자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나, 그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그 이유는 정전 협정에 서명한 UN군 사령관은 그의 통솔 하에 있던 16개국 참전군 사령관들을 대표하는 것임으로, 한국을 비롯한 16개 참전국 모두가 계약 당사자가 되기 때문이다.


  


       또 “해상의 휴전선은 정전 협정에 첨부된 지도 상에 명기되지 않았지만, 해상의 휴전선이 정전 협정과 무관한 선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휴전 협정을 체결할 당시 UN군은 압도적 제해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육상의 교전선 보다 훨씬 이북까지의 해상을 UN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서해 방면은 남포 서측 "초도" 앞바다까지, 동해 방면은 원산 영흥만 인근 "여도" 앞바다까지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처음 북한 측은 "전전상황(戰前狀況. the state before the war) 복귀 원칙"을 주장하면서 양측이 북위 38도선으로 복귀할 것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거듭된 협상을 통해 다음과 같이 합의 되었다. 정전협정 제2조 13항 (ㄴ)목에서는 "본 정전 협정이 체결되어 효력을 발생한 후 10일 이내에 상대방은 후방과 연해 도서(沿海 島嶼) 및 해면(海面)으로부터 그들의 모든 군사 역량 보급물자 및 장비를 철거한다"는 내용을 명기하였고, "상기한 연해 도서라는 용어는 본 정전 협정이 효력을 발생할 때에 비록 일방이 점령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1950년 6월 24일에 상대방이 통제하고 있던 도서"라고 정의해 놓았다. 그러므로 이 정전 협정 체결을 통해 "1950년 6월 24일" 정전협정 체결 당시 UN군이 장악하고 있던 38도선 이북에 있는 북한 연안 도서("초도", "대화도", "여도"), 그리고 북한이 차지하고 있던 옹진 반도 인근 "기린도", "선위도" 등은 1950년 6월 24일 현재 비록 대한민국 통제 아래 있던 도서지만, 정전 협정 제2조 13항 (ㄴ)목의 후속 규정에 따라, 서해 5도를 제외한 옹진 반도 인근의 연해 도서들은 모두 UN군이 공산 측에 양보했던 것이다.


  


       또 "해면(海面)’에 대한 후속적 경계 설정이 명확히 이뤄지지 않았는데 육상에서처럼 "소유한대로 소유한다"는 원칙을 적용할 경우 유엔군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해의 남포 앞바다와 동해의 원산 앞바다에서 연안도서를 제외한 "해면"은 UN군 관할로 남는 것이 옳았지만, UN군 사령부의 양보로 북한의 관할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북한의 해상 봉쇄 상황을 피하기 위해 UN사 측은 정전 협정 제2조 제13항에 명기된 서해 5도를 잇는 선과 공산 측 관할의 연안선 사이에 위치한 NLL을 38도선 이남으로까지 하향 설정해 "모든 병력을 철수"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만일 NLL을 UN군 사령관이 설정한 선이라고 해서 이를 부정하는 것이라면, 위에서 언급한 북한 연안 "해면"은 다시 UN 관할 아래 들어가야 할 것이고, 북한은 해양 봉쇄적 상황에 처하게 되어야 할 것이다. 


 


주 2 : 해상 군사 분계선(NLL 선)에 관한 근거되는 규정    


    1991년 12월 13일 서울에서 체결된 남북 기본합의서와 1992년 9월 17일 평양에서 체결된 그 부속합의서 상에는 남북의 관할 및 해상 경계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다음





  •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1953년 7월 27일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 (11조)




  • 남과 북의 지상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 (부속합의서 9조)




  • 남과 북의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불가침 구역은 해상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온 구역으로 한다. (부속합의서 10조)




 


  주 3 : 남과 북 서해지역 군사력 현황


20130706220005.jpg


   


  머. 제2차 연평해전 (참수리호에 대한 공격 - 2002년 6월 29일)


  


  주 : "제2차 연평해전"에 관한 내용은, 필자의 글 "하와이 기행 #8  (기습공격을 받아 입은 피해)"라는 글 중에 이미 언급한 바 있는 것으로 다음을 클릭하면 다시 불 수 있습니다.


 


[하와이 기행 #8   보기]


 


            [제2차 연평해전 동영상 보기 #1(9분 4초) 


            [제2차 연평해전 동영상 보기 #2(14분 59초)


   


     연평도 근해는 계절에 따라 각기 다른 고기들을 많이 잡을 수 있는 어장의 보고이다. 그래서 제2 함대는 5-6월 꽃게잡이 철을 맞이하면 서해 경계 태세를 곱절로 강화하여, 최전방에는 고속정을 배치하고 그 후방에 초계함과 호위함(1500t)들이 경계에 임하고 있었다. 2002년 6월 29일 우리 해군의 교전수칙은 “북한이 선제공격을 할 때만 교전할 수 있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제1차 연평해전 때처럼 밀어내기 전법을 시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북한 경비정이 우리 함정에게 선제 포격을 가함으로써 참수리 357호 조타실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이 때부터 양측 함정 사이에 교전이 시작되어, 곧 바로 인근 해역에 있던 해군 고속정과 초계정들이 교전에 합류하였다. 현장에 도착한 진해함은 장착된 전자광학 망원경(EOTS)에 의지하여 적함을 향해 포격을 가하니, 명중되었다는 확인 신호가 떠올랐다. 진해함은 적 함대를 섬멸하기 위해 76㎜ 함포 3발을 더 발포하였더니, 10시 43분 경 북한 경비정 1척이 화염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자 북한 경비정은 10시 50분 경 북방한계선을 넘어 북상함으로써 교전은 25분만에 끝났다. 한편 우리 해군은 피격된 357호와 같은 종류의 함정 358호가 357호를 예인 하였으나 357호는 끝내 침몰함으로써, 고 윤영하 소령 등 6명은 애함과 함께 전사한 것이다.


 


images?q=tbn:ANd9GcTNKp2JPn9NcYj2i43HfcHqtxY6VDIwasvaP9uumty9hGzoWItN4Q 


침몰 53일만에 인양된 참수리호 고속정


 


images?q=tbn:ANd9GcSQusJAMnfuUQQ2PSZ_Je3FnRiNG-E1CNNjrtWU6AFeWbGBkvcdWsYPhCAG


참수리호 선체에 뚫려 있는 총탄 흔적


   


  버. 천안함을 어뢰로 공격하는 군사 도발 (2010년 3월 26일)


  주 : "천안함 폭침 사건"에 관한 내용은, 필자의 글 "하와이 기행 #8  (기습공격을 받아 입은 피해)"라는 글 중에 이미 언급한 바 있는 것으로 다음을 클릭하면 다시 불 수 있습니다.


 


[하와이 기행 #8   보기]


 


            [천안함 피격 사건 동영상 보기 #1(10분 55초)


            [천안함 피격 사건 동영상 보기 #2(3분 5초)


  


    2010년 3월 26일 오후 9시 22분, 해군 1천200톤급 초계함 천안함이 백령도 서남방 2.5㎞ 해상에서 초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북진하고 있었는데, 몰래 침투한 북한 잠수함이 어뢰를 발사하여 침몰되었다. 이로 인하여 승조하고 있던 우리 해군 104명 중 58명은 구조되고, 나머지 46명은 전사하였다. 이에 대한 원인을 놓고 유언비어와 더불어 많은 억칙들이 나돌고 있으나, 우리나라 민군 합동 조사 위원과 외국 기술자를 특별 초청하여, 40일간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조사하여 북한에 의한 사고임이 확인된 것이다.


 


IE001191704_STD.jpg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된 천안함 희생 장병 46위 


  


140732404F653E8C10F1CA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된 천안함을 인양 작업 중 


  


  주 : 천안함 침몰사건 조사결과 (민군 합동조사단의 발표 내용)


       (1) 민군 합동조사단은 국내 10개 전문기관의 전문가 25명과 군 전문가 22명, 국회추천 전문위원 3명, 그리고 미국, 호주, 영국, 스웨덴 등 4개국 전문가 24명이 참여한 가운데 과학수사, 폭발유형 분석, 선체구조관리, 정보분석 등 4개 분과로 나누어 조사활동을 실시하였다. 이 발표내용은 조사단에 참여한 국내외 전문가들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접근방법으로, 조사활동과 검증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도출한 결과이다. 해저로부터 인양한 선체의 변형형태와 사고해역에서 수거한 증거물들을 조사 및 분석한 결과, 천안함은 가스 터빈실 좌현 하단부에서 감응 어뢰의 강력한 수중폭발에 의하여 선체가 절단되어 침몰한 것으로 판단된다.


       (2) 침몰원인을 어뢰피격으로 판단한 이유는, 선체손상 부위를 정밀계측하고 분석해 보았을 때, 충격파와 버블효과로 인하여, 선체의 용골이 함정 건조 당시 보다, 위쪽으로 크게 변형되었고, 외판은 급격하게 꺾이고 선체에는 파단(破斷)된 부분이 있다. 그리고 주갑판은 가스터빈실내 장비의 정비를 위한 대형 개구부 주위를 중심으로 파단(破斷)되었고, 좌현측은 위쪽으로 크게 변형되었으며, 절단된 가스 터빈실 격벽은 크게 훼손 변형되었다. 함수, 함미의 선저가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꺾인 것도 수중폭발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3) 함정 내외부의 표면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함정이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방지해주는 함안정기에 나타난 강력한 압력 흔적, 선저부분의 수압 및 버블흔적, 열 흔적이 없는 전선의 절단 등은 수중폭발에 의한 강력한 충격파와 버블효과가 함정의 절단 및 침몰의 원인임을 알려주고 있다.


     (4) 생존자와 백령도 해안 초병의 진술내용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생존자들은 거의 동시적인 폭발음을 1-2회 청취하였으며, 충격으로 쓰러진 좌현 견시병의 얼굴에 물이 튀었다는 진술, 백령도 해안 초병이 2-3초간 높이 약 100m의 백색 섬광 기둥을 관측했다는 진술내용 등은 수중폭발로 발생한 물기둥 현상과 일치하고 있다.


     (5) 또 사체검안 결과에 의하면 파편상과 화상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골절과 열창 등이 관찰되는 등 충격파 및 버블효과의 현상과 일치하였다.


     (6) 한국지질자원 연구원의 지진파와 공중음파를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지진파는 4개소에서 진도 1.5 규모로 감지되었으며, 공중음파는 11개소에서 1.1초 간격으로 2회 감지되었다. 지진파와 공중음파는 동일 폭발원이었으며, 이것은 수중폭발에 의한 충격파와 버블효과의 현상과 일치한다.


        (7) 수 차례에 걸친 시뮬레이션 결과에 의하면, 수심 약 6-9미터, 가스 터빈실 중앙으로부터 대략 좌현 3미터의 위치에서 총 폭발량 200-300kg 규모의 폭발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8) 백령도 근해 조류를 분석해 본 결과, 어뢰를 활용한 공격에 제한을 받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다.


        (9) 침몰해역에서 어뢰로 확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물로 어뢰의 추진동력부인 프로펠러를 포함한 추진모터와 조종장치 등을 수거하였다. 이 증거물은 북한이 해외로 수출할 목적으로 배포한 어뢰 소개 자료의 설계도에 명시된 크기와 형태가 일치하였으며, 추진부 뒷부분 안쪽에  "1번"  이라는 한글표기는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북한의 어뢰 표기방법과도 일치한다. 이러한 모든 증거는 수거한 어뢰 부품이 북한에서 제조되었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10) 또 이러한 결과는 일부에서 지속적으로 제기해 온 좌초나 피로파괴, 충돌, 내부폭발과는 전혀 관련이 없음을 확인해 준다.


      (11) 결론적으로, 침몰해역에서 수거된 결정적 증거물과 선체의 변형형태, 관련자들의 진술내용, 사체 검안결과, 지진파 및 공중음파 분석결과, 수중폭발의 시뮬레이션 결과, 백령도 근해 조류분석결과, 수집한 어뢰 부품들의 분석결과에 대한 국내외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보면


        A. 천안함은 어뢰에 의한 수중 폭발로 발생한 충격파와 버블효과에 의해 절단되어 침몰되었고,


         B. 폭발 위치는 가스터빈실 중앙으로부터 좌현 3m, 수심 6-9m 정도이며,


         C. 무기체계는 북한에서 제조한 고성능 폭약 250kg 규모의 어뢰로 확인되었다.


          D. 아울러 지난 5월 4일부터 운영해 온 미국, 호주, 캐나다, 영국 등 5개국의 "다국적 연합정보 분석 TF"에 의해 확인된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E. 북한군은 로미오급 잠수함(1,800톤급) 20여척, 상어급 잠수함 (300톤급) 40여척과 연어급(130톤급)을 포함한 소형 잠수정 10여척 등 총 70여척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번에 천안함이 받은 피해와 동일한 규모의 충격을 줄 수 있는 총 폭발량 약 200-300kg 규모의 직주어뢰, 음향 및 항적유도어뢰 등 다양한 성능의 어뢰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F. 이와 같은 사실과 사건 발생해역의 작전환경 등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작전환경 조건에서 운용하는 수중무기체계는 소형잠수함정으로 판단된다.


          G. 또 서해의 북한 해군기지에서 운용되던 일부 소형잠수함정과 이를 지원하는 모선이 천안함 공격 2-3일전에 서해 북한 해군기지를 이탈하였다가 천안함 공격 2-3일 후에 기지로 복귀한 것이 확인되었다.


        H. 그리고 다른 주변국의 잠수함정은 모두 자국의 모기지 또는 그 주변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I. 5월 15일 폭발 지역 인근에서 쌍끌이 어선에 의해 수거된 어뢰의 부품들, 이는 각각 5개의 순회전 및 역회전 프로펠러, 추진모터와 조종장치는 북한이 해외로 무기를 수출하기 위해 만든 북한산 무기소개책자에 제시되어 있는 CHT-02D 어뢰의 설계 도면과 정확히 일치한다.


          J. 이 어뢰의 후부 추진체 내부에서 발견된 "1 번" 이라는 한글 표기는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또 다른 북한산 어뢰의 표기방법과도 일치하고 있다. 러시아산 어뢰나 중국산 어뢰는 각기 그들 나라의 언어로 표기하고 있다. 북한산 CHT-02D 어뢰는 음향항적 및 음향 수동추적방식을 사용하며 직경이 21인치이고 무게가 1.7톤으로 폭발장약이 250Kg에 달하는 중(重)어뢰이다.


      (12) 이러한 모든 관련사실과 비밀자료 분석에 근거하여, 천안함은 북한제 어뢰에 의한 외부 수중폭발의 결과로 침몰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또한, 이상의 증거들을 종합하여 볼 때 이 어뢰는 북한의 소형 잠수함정으로부터 발사되었다는 것 이외에 달리 설명할 수 없다.


 


  주 : 천안함 침몰에 관한 상황도


실제 크기로 보시려면 클릭해 주세요


   


  서. 연평도에 포격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피격 사건 동영상 보기 #1] (2분 20초)


 


    북한 군은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34분쯤 서해 연평도 북방 개머리 해안포 기지에서 연평도 쪽으로 해안포와 곡사포 2백 여발을 발사해 옴으로, 우리 군은 교전규칙에 따라 2시 40분부터 K-9 자주포로 80 여발의 대응사격을 가했다.  북한군의 공격은 우리 군이 이 지역에서 해상사격 훈련을 실시하던 중에 가해온 것으로, 북한군의 포 사격은 2시34분부터 2시55분까지 집중적으로 이뤄졌고, 이어 오후 3시10분부터 3시 41분까지는 간헐적인 사격이 계속 가해왔다. 이 교전이 1시간 정도 계속되는 동안, 우리 군은 북한 당국에 도발을 중단하라는 전통문을 보낸 바 있고, 3시55분 경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남측 단장 명의로 북측 단장에게 이 시간 계속하고 있는 도발 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 계속 도발을 계속한다면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IE001257597_STD.jpg


  


    한국 공군도 F-15K와 F-16 편대를 서해 5도 지역에 급파하여, 서해 상공에서 초계 비행을 계속하면서 비상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북한이 발사한 포탄은 연평도 인근 해상은 물론 내륙의 마을과 산등을 덮쳤다. 이로 인하여 한국 해병대원 2명의 전사자와 16명의 부상자가, 그리고 민간인 2명이 사망했고, 3명이 가벼운 부상을 당한 바 있다. 그리고 민간 주택도 상당수 피해를 입었으며, 여기저기에서 산불이 일어났다. 연평도 주민 1천7백 여명은 연평도에 설치된 20 곳의 방공호로 대부분 대피한 바 있었다. 그러나 약 1주일이 지난 후 확인된 바에 의하면, 민간인 부상 “경상 3명”이 아니고 19명이 입원치료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우리 군은 북측이 해안포를 발사한 원점에 대응사격으로 집중가격 함으로서 북한측도 상당한 피해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은 포 사격에 앞서 이날 오전 8시20분 한국군이 이날 벌인 사격 훈련에 대해 “남측이 북측 영해로 포 사격을 하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경고하는 전통문을 보내온 적이 있었고, 이날 저녁에는 북한 관영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은 “한국 측이 먼저 군사적 도발을 해 왔기 때문에, 군사적 대응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함에 따라, 우리 나라 합참은 “훈련은 백령도와 연평도 사이에서 이뤄졌고 또 포 사격은 백령도 서쪽과 연평도 남측으로 이뤄졌다”고 반박하였다. 청와대는 이번 공격을 대한민국에 대한 명백한 무력도발로 규정하고, 특히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포격을 가한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사항으로, 우리 군은 북한의 추가 도발 시에는 단호히 응징할 것이다. 북한 당국은 이번 사태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홍상표 청와대 홍보수석이 밝혔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밤 합동참모본부를 전격 방문하여 “북한이 다시는 도발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응징을 해야 한다. 아직도 북한이 공격태세를 갖추고 있어 추가도발이 예상되므로 몇 배의 화력으로 응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면서, 백 번의 성명보다 행동으로 대응하는 것이 군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국방부는 국지도발 최고 대비 태세인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전군에 경계태세를 강화하는 한편 한미연합사령부와 연합위기관리태세 선포를 검토키로 했다. 연합위기관리가 선포되면 정보감시 태세인 워치콘과 정규전에 대비한 전투준비 태세인 “데프콘”의 격상이 검토된다. 또 통일부는 25일로 예정된 남북 적십자 회담을 무기한 연기하고, 내일 하루동안 한국 측 기업 관계자들의 개성공단 방문을 금지토록 조치했으며, 외교통상부는 유엔과 관련국들과 협의하여 국제평화를 규정한 유엔헌장 위반 여부를 가려서 이 문제를 유엔에 회부할 것인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인천광역시장은 통합방위위원회의를 긴급소집하고 군부대 요청에 따라 연평도 지역에 통합방위태세 을종을 선포하였고, 인천지방경찰청도 오후 3시10분을 기해 비상근무에 들어가는 갑호비상을 발령했다.


 


  어. 중요 인사 납치 테러


    북한은 휴전 이후 지금까지 해상과 공중, 그리고 해외에서 모두 4백70 여건에 걸쳐 3,738명에 이르는 한국인을 납치하여 대부분은 사상 세뇌교육과 간첩교육을 시킨 후 돌려보냈으나, 아직까지 수많은 인질을 억류하고 있는 세계적인 납치 테러국으로 통하고 있다. 북한은 한국인 납치뿐 아니라, 1970년경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노동당 작전부내에 외국인 납치조직을 만들어 놓고 여러 나라 외국인들을 납치했었다. 미국의 아시아 감시위원회와 미네소타 변호사 국제 인권위원회가 1988년에 펴낸 "북한의 인권"에 의하면, 1970년대 초 5명의 레바논 여인이 평양에 끌려가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에서 납치되어온 여인들과 함께 간첩교육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으며, 1978년 홍콩에서 납치된 최은희 신상옥 부부도 평양 초대소에서 마카오로부터 끌려온 중국인과 요르단 여인을 만났다고 폭로했다.


 


    특히 북한은 일본인에 대한 납치공작도 끊임없이 자행하고 있다. 이 가운데 KAL기 폭파범 김현희에게 일어를 가르쳤던 "다구찌 야에꼬"(78년 피납)와 일본 중의원에서 폭로되어 일 북간 외교 문제화된 "요꼬다 메구미(니이가다현 거주, 77년 피납 당시 13세 중학생)", 그리고 현재 북한에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최종 확인된 "데라코에 다케시(63년 피납 당시 13세 중학생)" 등이 납치사건의 대표적인 희생자들이다.


 


    한국인에 대한 납북사건 중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는, 


        1969년 12월 대한항공 소속 YS-11기를 공중에서 납치했을 때 근무 중이던 여승무원 정경숙과 성경희 등 12명을 현재까지 북한에 억류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또 


        북한은 서해나 동해의 휴전선 부근에서 어로 작업 중이던 어부 3,662명과 해군 20명 등 총 3,682명을 납치하여 억류하고 있으며, 또 


        1987년 1월 "동진호"가 백령도 부근에서 조업하다가 북한 무장 경비정에 의하여 납치되어, 선장 김순근씨와 어로장 최종석씨 등 선원 12명이 억류되어 있다.


        해외에서의 한국인 납치는 1978년 1월과 7월 홍콩에서의 영화배우 최은희씨와 신상옥씨 부부가 납치되었고, 


        1979년 노르웨이에서 연수 중이던 전 수도여고 교사 고상문씨가 납치되었는데, 그가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는 것을 1995년 8월 국제 사면위원회가 확인하였다.


        1995년 7월 중국 연길시에서 순복음교회 안승운 목사 납치 등을 들 수 있다. 또 


        1983년 10월 19일 노동당 중앙당 청사 내 김정일 집무실에서 김정일은 납치되어 온 최은희에게 말하기를 "납치명령을 내가 내렸다"고 김정일이가 실토했다고 한다. 이처럼 북한의 주요한 납치 및 테러공작은 모두 김정일이가 직접 지휘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한편 국가안전기획부 발표에 의하면 


        "지난 1987년 미국 유학 중 납북된 것으로 알려진 이재환씨를 비롯해 납치 및 월북자 22명이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중인 것으로 확인 되었고, 


        "특별 독재대상구역" 등 다양한 호칭으로 함남 요덕, 함북 회령 등 산간오지에 10개의 정치범수용소를 설치하고서는 20 여만명을 재판 절차 없이 집단 수용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은 쌀 수입 대금 수천만 달러를 빼돌린 혐의로 태국 주재 북한 대사관 과학기술 참사관 홍순경 일가를 강제로 납치하여 북한으로 끌고 가려다가 실패한 일이 있다. 이에 태국정부는 기자회견을 통해 "홍순경씨 납치는 태국 주권과 국내 국제법 및 1961년 체결된 빈 국제협약에도 위배되는 것이라면서 북한측의 조속한 공식 사과와 함께 이 같은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약속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었다. 이에 대하여 처음에는 북한이 특사를 파견하여 사건을 무마시키려 했으나, 태국과의 두 차례의 협상을 마친 후 "북한측은 홍씨 집 불법 침입과 일가족 납치가 태국 관리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며, 북한 외교관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며 자신들의 개입을 전면 부인하면서 강경 자세로 돌아섰다. 이는 북한측이 전형적인 전술로 북한 공관원들의 형사적 책임을 면해보려는 술책으로 보인다.


 


    북한이 이처럼 국제적 비난을 무릅쓰고 납치행각을 벌이는 목적


       첫째는 북한을 방문하는 외국 손님들을 접대케 한 후 첩보를 수집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KAL기 폭파범 김현희의 일어 교사였던 일본인 다꾸찌 야에꼬 처럼 해외로 내보내


는 공작 원에게 언어 교육을 시키는데 활용하기 위해서이며


       셋째는 납치한 한국인들에 대한 세뇌교육 및 간첩교육을 시켜 한국에 남파 시켜 파괴 공작


에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24403D4553CB06931333DD


  

3. 북한에 대한 한국의 대응

 

  가. 역대 대통령의 시정 실태

    우리 조국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열한 분의 대통령이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라는 선서로 취임한 바 있다. 물론 그 중에는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신 분도 있지만, 많은 분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등에 눈이 어두워,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분이 있으니 애석하기 그지 없다. 속담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있다. 부정을 척결하고 본을 보여야 할 대통령이 부정의 중심에 서 있게 된다면 결코 청렴한 사회가 될 수도 없고, 또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데 혈안이 되면 자연 나라를 보위하는데 해이해 질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나라의 중임을 수행하고 계시는 대통령께서는 취임할 때 선서하신 바와 같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사를 처리해 주시기 바라는 바이다. 첫 째도 나라 사랑, 둘 째도 나라 사랑, 셋 째도 나라를 사랑한다는 심정으로 어떻게 하면 국가에 유익이 될 수 있을까를 마음 속에 새기고, 통치에 임할 것을 모든 국민은 소망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고, 대한민국은 날로 번영해 질 것이며, 또 국민 모두는 평안한 가운데서 살게 될 것이다. 대통령께선 현직에서 퇴임하신 후, 길이 길이 존경 받는 대통령이라고 모든 국민이 우러러 볼 것이다.

 

  나. 제도적 장치 없는 북한 원조의 문제

    북한에 살고 있는 약 2500 만명(2013년 인구 통계 2470 만명)의 동포들은 분명 우리들의 형제이며 피를 나눈 동포이기에,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도와 주어야 한다. 그리고 북한을 다스리는 권력자도 분명 피를 나눈 동포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을 적화 통일하겠다는 야욕을 가지고 테러를 조성하는 중심 인물이기 때문에, 제도적 장치 없이 무작정 북한을 도와 주면, 그것이 고통 당하고 있는 북한 백성들에게로 가지 않고 권력자들의 이득만 높혀주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오늘 도와 준 원조금이 내일이면 미사일과 어뢰와 핵무기 등으로 변하여, 우리 민족, 우리 젊은 이들의 심장을 뚫겠다는 흉기로 변하여 날아 오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제도적인 장치를 만든 연후에 도와 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북한이 자행하는 도발을 막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 화친에만 치우치면 손해 보는 장사가 된다

    한국은 6 25 전쟁이 일어난 1950년부터 지금까지 6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계속 북한에 시달려왔다. 그 중 휴전이 성립된 1953년 7월부터는 한국의 젊은 이들이 NLL선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받치면서 지켰던 것이다. 그런데 어떤 통치자의 입에서 "그 선은 설정부터 잘못 되었다", "영토적 의미가 없는 선이다", "미군이 일방적으로 그은 선"이라는 등등의 이유를 들면서, 그 선의 권리를 포기 또는 양보할 수도 있다는 등의 의사를 표명 함으로써, 국론은 양분되면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다. 

 

    필자는 1950년 8월부터 1957년 6월까지 해군 현역으로 복무하면서 원산 근해에서 작전에 임한 적도 있었고, 또 휴전 후에는 NLL선을 지키기 위해, 하나 밖에 없는 목숨까지 걸고 청춘을 받친 사람 중의 하나다. 그런데 국군을 통수한다는 대통령의 입에서 어떻게 그와 같은 발언이 쉽게 나올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그 말을 듣자 너무나 황당하여 울분을 터트린 적이 있다.

 

    북한은 한국 사회의 혼란을 조성하기 위한 방책으로 여러 가지 요구사항을 내놓으면서, 요구하는 조건이 관철되지 않으면 "미사일 쏘겠다"느니,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등의 위협과 공갈을 가하는 것이 그들의 상투적인 수법이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UN 총회에 참석한 북한 대사가 상투적인 그들의 전용 수법인 공갈을 사용한 적도 있다. 지금까지 북한이 한국을 향해 위협하고 공갈친 사건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든다면 NLL선 문제와 풍선으로 보내는 삐라 문제에서 가장 많이 있었고, 다음으론 미군 철수 문제와, 개성공단과 관련 있는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라를 이끌어 가시는 통치자인 대통령께서는 북한의 수법인 공갈 협박에 넘어가서 손해 보는 장사가 되지 않도록, 매사를 결정할 때 주의 하여 현명한 판단으로 결정지어 주셨으면 하는 것이 소망인 것이다.

 

2730F74553CB064D222AC4

   

4. 행복으로 가는 길

 

  가. 국권을 잃으면 행복도 잃게 된다

    필자는 국민학교 6학년일 때, 조국의 해방을 맞았다. 태어날 때부터 일본의 국적을 자연 취득한 필자는, 국민학교 초년 시절까지는, 국기는 일장기, 국가는 기미가요, 국어는 일본어, 나라 꽃은 벗꽃, 국사와 지리 공부는 일본사와 일본 지리를, 공부 하면서, 부끄럽지만 일본 사람인 줄 알고 자라났었다. 그런데 학년 수가 올라가면서 왜 "내선일체"라고 말하면서도, 일본인 전용학교가 따로 있고, 일본인 전용 주거용 사택(발전소 직원 사택)이 따로 있으며, 왜 필자의 가정은 입이 있어도 자유롭게 말할 수가 없고, 또 발이 있어도 경찰서로부터 여행 허가를 받지 않고서는 떠날 수 없는지?, 많은 의문들이 생겨 났다.

 

    그러던 어느 날, 조부님이 나이 어린 필자를 불러놓고,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 당한 것과, 조부님이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금해 보내다가 구속 되었던 사연, 그리고 기독교 가정이 특별히 당하는 수난 등을 자세히 말씀 하신 후, 함구령과 동시 요 주의의 경고를 하심으로 몰랐던 의문들이 모두 풀리게 되었다. 그 후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치달았을 때는 일 할만한 사람들은 모두 외지로 끌려갔기 때문에, 후방의 모든 일은 노약자들의 손에 의하여 처리될 수 밖에 없었다. 노예처럼 부역(賦役)도 감당하였고, 힘에 부치도록 지은 농작물은 공출(供出)이라는 명목으로, 일제가 많은 양을 빼앗아 갔기 때문에, 식량 부족 현상이 생겨 칡뿌리로 연명하다가, 허리띠를 졸라매었고, 또 냉수를 벌떡 벌떡 마시면서 허기찬 배를 채우고 살 수 밖에 없었다. 이 외에도 일일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사연들 속에서 고통을 감수하면서 살았다........

 

    이 모든 것은 나라 잃은 백성들이 당하는 서러움이었다. 1910년 일본의 강압에 굴복하여 체결된 일본과 한국의 합병 문서 내용을 살펴 보았더니, "일본국 황제폐하와 한국 황제폐하는 양군간의 특수한 친밀과 서로 간의 행복 증진 그리고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한국을 일본제국에 합병한다고.....(日本國皇帝陛下及韓國皇帝陛下ハ兩國間ノ特殊ニシテ親密ナル關係ヲ顧ヒ相互ノ幸福ヲ增進シ東洋ノ平和ヲ永久ニ確保セムコトヲ欲シ此ノ目的ヲ達セムカ爲ニハ韓國ヲ日本帝國ニ倂合スル....)"고 써 있는 것을 확인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양군간의 행복 추구가 아니고, 일본국 만을 위한 행복 추구로, 문서상에 써 있는 조약과 실제가 전혀 다른 내용이다. 

 

    만약 오늘 날 우리들에게 북한이 내미는 감언이설도 일본의 기만전술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북한의 기만전술에 만약 속는다면, 지난 날 일본에게 당한 과거의 쓰라린 고통을 다시 당하게 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나. 한국 실정을 모르는 미 군정 

    해방 직후 3년 동안 한반도는 태평양전쟁의 승전국인 미소 양국 군대에 의하여 치안이 유지 되었다. 물론 미국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기에, 이북에 주둔한 소련군처럼 강압적으로 다스리지는 않았다. 미군은 군정을 시행 하면서도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많은 자유를 부여했다. 그와 같이 자유를 부여한 것을 북한으로부터 밀파된 좌익계 사람들이 그 자유를 역으로 이용하여 법이 정하고 있는 태두리 안에서 많은 좌익 기관 단체들을 설립하고는, 그들이 중심에 서서 데모와 충돌, 동맹 파업, 동맹 휴학, 테러, 폭력, 암살 등의 가지 각색 범죄 사건을 일으킴으로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혼란을 틈타 조선 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과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 등 7명이 입수 보관 중이던 조선은행권 화폐 발행 인쇄 원판으로 소공동 소재 조선 공산당 당사(정판사 건물)에서 대규모 위조 지폐를 발행하여 시중에 유통하다가 종로경찰서에 의하여 적발되었다. 경찰에서 그 배후 조직을 규명하기 위해 수사를 확대해 나가자, 관련자 인사 일부는 북한으로 도주했고, 또 일부는 잠적하였으며, 또 일부는 검거 됨으로써, 서서히 좌익계 조직들이 관련 되었음이 포착되면서, 좌익계 조직들이 와해 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우리 나라 사정을 전혀 모르는 외국 군대가, 더구나 정치인이 아닌 군인들이었기에, 그와 같은 결과가 나타난 것으로, 그들 역시 우리에게 행복을 만들어 주지 못했던 것을 필자는 체험한 바 있다. 그리고 좌익계 인사들은 북한 지령을 받고 활동하면서 언제나 한국 정부를 타도하려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 때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다. 나라가 부강해져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여전 어려움은 많았다. 일제 사슬에서 해방된지 얼마되지 않았고, 외국에 나가 있던 많은 동포들이 일시에 귀국하였으며, 북한으로부터 자유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월남해 왔으니, 먹을 것도 부족했고, 입을 것도 부족했으며, 일자리도 부족 하였다. 그런 관계로 외국에서 보내오는 구제 식량으로 창자를 채워야 했고, 또 큰 구제품 옷을 주려서 추위를 막아야만 했다. 또 전력이 부족한 연고로, 초저녁에만 전기가 들어오니 사람들의 활동과 공부하는 시간이 제약을 받았던 시절이다. 이와 같은 삶을 가리켜 어떻게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설상가상 정부가 수립 되고  2년이 채 안되었는데, 6 25 전쟁이 일어나, 소꼽 장난 하듯 쌓아가던 경제 발전이 하루 아침에 깨어지면서, 갑자기 1인당 국민 소득이 $39로 곤두박질 함으로써, 순식간에 세계 최 빈곤 국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도 결코 행복을 주는 시기는 아니었다.

 

  라. 행복의 문이 열리다

    1961년 5월 16일 총칼을 든 군인들이 정부를 뒤 집아 엎는 정변이 일어났다. 발표한 포고문을 보고난 다음 마음 한편에선 두렵기도 하였고, 또 다른 한편에선 매일 같이 일어나던 데모와 소요가 사라졌으니 안심되기도 했다. 얼마 안가 생전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행된다는 내용이 발표되었기에, 그것이 무엇인지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1960년 대 중반에 이르러 그 열매가 거두어지면서. 점점 국민소득이 올라가더니, 삶의 질은 향상 되기 시작했다. 그 때부턴 옛 날에 당한 고통과 밑바닥 생활이 끝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당시 한국 민족이 누리고 있던 삶의 질은 선진국 사람들이 누리는 삶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해방 전후 우리 민족이 경험한 일들과는 하늘과 땅과의 차이였다. 

 

  마. 잡은 행복을 잃지 않으려면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의 시장 경제를 추구하는 나라다. 북한의 3대 세습 독재국가와는 그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 요즈음 지상이나 인테넷에 올라오는 북한에 관한 뉴스를 눈 여겨 보면, 북한에서는 피의 숙청이 계속되면서, 고모부도 잔인하게 죽였고, 또 많은 사람들이 존엄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형체도 남지 않도록 고사총 또는 화염 방사기로 처형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게 된다. 

 

    이와 같은 것을 보아, 대한민국은 북한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자유가 많은 나라인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북한의 사주를 받고 있는 불순한 사람들은 우리 나라를 흔들어 혼란에 빠트린 다음, 북한이 이루려는 적화 통일에 부응하기 위해 유언비어의 유포와 여러 가지 모양의 혼란을 조성하는데, 혈안이 되어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1960년대 중반부터 얻기 시작한 행복한 삶이 그 동안 많이 성장하였고, 또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누리고 있는데, 이 행복한 삶은 한국민 개개인의 행동 여하에 따라, 계속 누릴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할 것이다. 

  

  바. 법이 정한 바에 따라야

    민주주의는 법이 정하고 있는 태두리 안에서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사안이 결정되면, 그 때부턴 결정된 그 안(案)을 인정하면서 소수의 의사를 버려야 한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시위를 해야 할 경우도 있을 수 있겠으나, 시위를 한다 하더라도 국익을 먼저 생각하고 시위의 행동 여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폭력적인 시위가 되어서도 결코 아니 될 것이며, 반대를 위한 반대가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국민 모두가 나라를 사랑하면서 국가의 유익이 성취 되도록 서로 서로 협조하는 것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바른 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 전복 기도, 대통령 하야 주장, 법이 금하고 있는 폭력 행위, 계속되는 촛불 시위로 법치 기능을 마비 시키는 행위와 법정 사항을 넘어선 파업 선동 등등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또 용납될 수도 없는 행위로 국가의 불이익만 초래하는 암적인 행동이다. 

 

    이제 우리 모두 서로가 협조하면서 민주주의를 실현 시켜야 할 것이다. 찬성과 반대를 논의한 끝에 합의사항을 도출하여 지금 보다 더 향상된 좋은 방안을 만들어 국가 발전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민주주의 원칙이며 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매사에 애국심을 가지고 국가의 번영과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해 나갈 때, 북한이 가해오는 도발과 테러를 극복해 나갈 수 있고, 드디어 승리의 기쁨의 날이 찾아오게 될 것으로 믿는다.

 

  사. 하나님께 기도해야


    1950년 이래 한국은 북한이 일으킨 전쟁으로 전 국토가 황폐화 되었던 어려움도 당한 바 있고, 또 휴전 후에도 북한이 계속 일으킨 도발과 테러로 많은 어려움을 당했었다. 그렇지만 그 때 마다 오뚝이처럼 환난으로부터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는 믿음의 선열들이 많이 있었고, 또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인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북한은 쉽게 승리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일으킨 전쟁이었지만 그 예상이 빗나감에 따라, 한국 사회에 테러와 도발로 혼란을 가하면서, 다른 한편에선 핵무기를 개발하였고, 또 3대 세습까지 굳건하게 정착 되었다며 큰 소리를 치고 있다. 하지만 그 권력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면, 신앙의 반석 위에 세워지지 아니한 연고로 무너지고 말 것임을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7:24-27 참조).


  


    하나님의 말씀 마7:7에는 "구하면 주시겠다"고 했고, 마21:22에선 "믿고 구하면 반드시 주신다"고 말씀 하고 있으며, 또 렘29:12에서는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을 것"이라고 말씀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 인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열심을 다하여 기도해야 할 것이다. 기도하라고 내리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얼바인사랑의교회 모든 성도들은 가깝게는 자신의 가족과 교우와 이웃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으며, 또 먼 곳에 있는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하게 기도하고 있다. 

  

5.jpg


 얼바인사랑의교회 성도들이 조국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


 


    그리고 전 세계 곳곳에 살고 있는 믿음의 형제들이, 지금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기도하기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마귀와의 전쟁에서 꼭 승리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고, 또 북한 공산 치하에서 억압 받는 형제들에 대하여도 빨리 해방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평화로운 통일이 이루어 지게 할 것이고, 북한 땅에서 억압 받는 동포들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해방의 날이 속히 임하게 될 것으로 믿는 바이다.


 


24403D4553CB06931333DD


ê°?ì?¬.gif


  


233E184553CB064D15B4DB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나라와 민족이 구원을 얻으리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