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태"를 보고 생각난 것


   필자는 얼마 전 인터넷 세계에서 2016년 2월 24일부터 2016년 4월 14일까지 한국 KBS2 TV가 매 수요일과 목요일에 방영한 창립 43주년 기념 특집 기획 드라마 "태양의 후예=태후"가, 첫 방송이 나갈 때의 시청률은 12.6%였으나, 방송을 거듭 하면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일대에서는 최고 41%가 넘은 시청률을 기록한 적도 있었고, 평균 30%를 상회 하는 시청률을 기록하였다는 기사를 읽었다. 도대체 이 드라마가 어떤 드라마이기에 이와 같이 놀라운 시청률을 기록 하였는지 너무나 궁금하여, 인터넷을 통하여 드라마 전 16편과 스페셜 2편 그리고 에필로크 1편을 모두 보았다.


   이 드라마는 김은숙과 김원석 두 분이 공동 집필한 극본을, 이응복과 백상훈 두 분의 공동 연출로 제작한 드라마인데, 주연은 송송 커풀(송중기와 송혜교)과 구원 커풀(진구와 김지원)이었다. 내용의 줄거리를 간단히 설명하면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각자가 맡은 사명과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 하면서, 사랑의 성공 길을 추구해 가고 있는 젊은 이의 모습을 그려낸 드라마였다. 중앙 아시아에 있는 "우르크"라는 가상 국가를 배경으로 하였는데, 그 환경은 전쟁과 질병으로 얼룩져 있는 지역이었고, 그곳에서 기상 이변과 지진까지 겹친 어려움 속에서, 붕괴된 건물더미 밑에 깔려,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하여, 특전사로부터 파견된 군인들과, 해성병원에서 파견된 의료진들이 최선을 다하여 맡은 사명을 감당하면서, 서로 간에 얽혀 있는 전우애와 동료애, 그리고 사랑하는 남녀가 사랑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을 다하는 모습들이 담겨 있어, 흥미 진진 하면서도 마음에 감동을 주는 작품이었기에 저로는 느낀 바가 많았다.


1. 드라마의 기획 의도


   먼저 이 드라마를 제작하는 제작 팀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드라마를 제작 하였는지, 그 의도부터 먼저 살펴 보니, 그 기획 의도는 다음과 같았다. 


 




드라마 태후의 기획 의도 


   모든 꿈은 돈으로 통하고, 행복은 성공 순이라고들 말한다.


정글 같은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으로서의 미덕과 가치들은 쉽게 외면하고 지낸다.


   약자의 죽음은 은폐되고, 강자의 독식은 합리화되며


   비겁하게 타협한 자의 출세는 지혜롭다 칭송 받고,


   의롭게 저항한 자의 몰락은 무모하다 폄하 당하는


   탐욕이 선이라 말함에 이제 아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 세상에.. 영웅이 필요하다.


 


   진짜 영웅이 필요하다.


   돈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되, 돈의 노예로 살기를 거부하며,


   힘의 권위를 명예롭게 지키되, 부당한 힘에는 결코 굴복하지 않으며,


   성공을 향해 전력을 다하되, 성공의 자리에는 더 큰 책임의 무게가 따름을 항상 명심하고,


   다른 이의 즐거움에 크게 웃어줄 수 있고, 작은 아픔도 함께 울고 안아줄 수 있는.


   유치원 때 이미 다 배워 알지만, 점점 잊고 지냈던 우리 마음 속 진짜 영웅을 만나고 싶다.



2. 드라마를 보면서 느낀 점과 생각난 것


   가. 드라마의 줄거리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내용들


     (1) 군인은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지경에 이른다 하더라도 국가와 국민을 보위해야 하는 중차        대한 사명과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드라마를 시청하는 동안 다시 확인 하였다. 이 드라마를 시청하다 보니 60 여년 전 기뢰가 둥실 둥실 떠다니고 북한에서 발사하는 해안 포탄이 내가 타고 있는 함정 쪽으로 날아오는 원산 인근 바다를 항해하면서 북한의 원산항만을 봉쇄하던 그 때의 일들이 나의 머리 속에서 영화처럼 스쳐가곤 했다. 진해 군항을 떠날 때 나는 내가 탄 전투함이 해군본부로부터 원산 항만을 봉쇄하라는 작전 명령을 받고, 최전선을 향하여 떠났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곳을 떠났다가 다시 살아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떠난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동해 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생각났다.1951년 12월 26일 바로 그 원산 앞 바다에서 필자가 탄 705함과 똑 같은 유형의 704함이, 북한에서 방류한 기뢰와 접촉하여 승조원 전원이 전사한 해역이다. 그리고 1950년 10월 18일에는 YMS 516정이 같은 해역에서 침몰 하였고, 또 미 해군 함정으론 1951년 2월 2일 양양 앞 바다에서 패트리지함이 침몰, 1952년 6월 12일에는 미 구축함 워크호가 흥남 근해에서 큰 인명 사고가 일어났으며, 또 1952년 9월 16일에는 원산 인근 해역에서 미 구축함 바톤호가 실종되는 일이 일어났었다. 동해 특히 원산 인근 해역은 많은 함정들이 피해를 입은 해역이기 때문에, 그런 곳을 향하여 침몰한 704함이 수행하던 똑 같은 임무를 부여 받고 출동하였던 까닭이다. 군인은 나라를 보위하기 위해 있고, 상사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음으로, 내일 죽을 지 알 수 없는 곳이지만 가라고 명령하면 지니고 있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가야 하는 것이 바로 군인이기 때문이다.


 한 번 출동하면 근 한 달 동안 밤낮 가릴 것 없이 격한 풍랑이 일고 있는 적전 해역을 돌아 다니면서, 밤만 되면 해안으로 접근하여 전투를 벌렸기 때문에, 출동 기간 내내 올빼미처럼 밤낮이 바뀌는 생활 속에서, 때로는 식음을 건네는 등 어려웠던 일들이 항상 계속되곤 했다. 주님께서는 갈릴리 바다 노한 풍랑을 잔잔케 하심으로 격랑에 시달리던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셨던 것처럼, 원산 성진 단천 북청 근해에서 격랑에 시달리는 못난 저에게도 주님께서는 친히 찾아오셔서,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 하시면서 안심 시켜 주셨고, 또 북한 해안 포대에서 발포한 포탄들이 머리 위를 지나갔고, 북한군이 방류한 기뢰들이 바다 위를 떠다녔지만, 주님께서 친히 저를 생명 길로 인도해 주셨던, 젊은 시절의 일들이 "태후" 드라마를 보는 동안 계속 저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2) 드라마 속에 나오는 특전사 정문에는 "절대 충성"과 "절대 복종"이라는 표어가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을 필자는 보았다. 이 "절대 충성"과 "절대 복종"은 국가 조직 특히 군대라는 조직에서는 철저히 지켜져야 할 사항으로, 이 원칙이 지켜질 때 군은 최상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명령을 내리는 상관에게는 정당한 명령만을 하달해야 한다는 원칙이 지켜져야 하고, 부하 군인에게는 절대 복종이라는 의무가 지워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상관이 내린 정당한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에 상응한 제재가 가해질 것이 분명하다.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 상관이 내린 명령이 부당한 명령 임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으로 그 명령에 복종 함으로써 일어난 사고나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그 명령을 따라 행한 부하에게도 그 책임이 있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 인들은 주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고, 만약 교회 안에서 진리의 복음을 그릇되게 전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절대 현혹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이리가 양의 탈을 쓰고 교회 안으로 침입한 자들이 많이 있어, 그를 따라가다는 결국 멸망의 자리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실례 : 1 (근무 중인 상관이 보인 추태)


필자가 해군에 입대하여 신병 교육을 마친 후 신병교육대 본부 병기계에 근무하고 있을 때인 1950년 겨울이었다. 눈 보라가 휘날리는 겨울의 초저녁 잠시 쉬고 있는 시간인데, 갑자기 당직병의 호각 소리와 함께 "비상소집 전원 연병장에 모여"라는 명령이 하달되는 것이었다. 훈련병을 포함한 1000 여명의 장병들이 완전무장하고 연병장에 집합하여, 당직사관(해군에서는 “주번장교”라 하지 않고 “당직사관”이라고 함)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전세는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경남 일대까지 침공해 왔던 북한군들이 미쳐 북상하지 못하고 산중으로 숨은 잔당들이 있던 때였다. 그런 관계로 행여나 진해 가까운 곳에서 어떤 전투가 벌어졌는가를 궁금해 하고 있었는데, 당직사관인 000 소위가 인원보고를 받은 다음, “전원 웃통을 벗고 각 중대별로 연병장 주위를 세 바퀴 구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런데 명령하는 말 소리는 혀가 꼬부라진 소리였으니 그것이 바로 문제였다. 당직사관이 모든 병력에게 비상 소집령을 내린 것과, 웃통을 벗기고 구보 시키는 일에 대하여는 훈련상 문제 될 것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직사관이 근무 중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장병들을 향하여 횡설수설 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현상을 목격한 위병 중대장 000 병조장(오늘 날의 상사 계급)이 신병교육대장(000 소령) 관사로 전화를 걸어 그와 같은 사실을 대장에게 보고하니, 대장이신 000 소령은 "내가 곧 교육대로 나갈 것이니, 위병 중대장 책임 하에 당직사관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자 위병 중대장은 위병들에게 명하여, "당직사관이 차고 있는 완장을 떼어내고 모자를 벗기고(모자에 계급장이 있음으로), 또 계급장(옷 깃에 달려 있는 계급장)을 뗀 후, 포박하여 어디론가 끌고 갔다. 조금 있다 나타난 신병교육대장은 “각 중대별로 해산” 을 시킨 다음, 그날 밤 당직사관 임무를 대장 자신이 직접 수행하는 것을 필자는 목격한 적 있다.



   




실례 : 2 (범죄가 되는 명령을 맹목적으로 복종한 자가 진 책임)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그 휘하에 있는 박선호, 유성옥, 이기주, 김태원, 박흥주등은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청와대 안가에서 대통령과 그곳에 있던 대통령 경호실장과 경호원, 운전원 등 6명을 총기로 사살한 사건이 있었다. 이 때  명령을 내린 자는 분명 그들의 직속 상관인 중앙정보부장이었다. 그러나 그 명령이 부당한 명령 임에도 이를 복종 하면서 대통령과 경호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살해에 가담 하였기 때문에, 그들 전원은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극형(현역 대령인 박흥주는 총살형, 여타는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던 사실이 있었다.



     (3) 드라마 속에서 특전사 유시진 대위(배우 송중기)는 애인 강모연(배우 송혜교)과 함께 극장으로 들어가 영화를 보려고 하던 차였다. 그 때 유 대위가 가진 전화기의 벨이 울리고 전화를 받은 유 대위는 "미안 합니다. 영화 관람은 다음 기회에 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강모연에게 말하자, 강모연은 유 대위에게 "또 백화점 갑니까?"(백화점이란 용어는 작전을 숨기는 은어)라고 묻자 "예"라고 대답하고, 애인과의 아쉬운 작별을 나눈 다음,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어디론가 떠나갔다. 군에서 시행하는 작전에는 참가자들이 생명을 빼앗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상관이 내린 명령에 절대 복종 하면서 충성하는 것이 바로 군인이 준수해야 할 것임을 재확인 하면서, 저는 1957년에 있었던 다름과 같은 일이 생각났다.


        저는 1957년 3월, 경북 의성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신혼 여행도 가지 못하고 바로 귀함(歸艦) 하여 백령도 인근 해역 작전 해역으로 출동한 적이 있었다. 1개월 간의 작전 임무를 모두 마치고 돌아와서, 1개월 정도 지각한 신혼여행이지만, 벗 꽃 만발한 진해로 아내와 함께 달콤한 여행 길에 올랐다. 진해까지 내려 왔으니 내가 타고 있는 군함을 구경 시켜 주려고 아내를 데리고 통제부 안에 있는 제1부두로 들어가서, 부두에 계류하고 있는 PCEC-52 함으로 들어갔다. 참으로 나에게 얄궂은 일이 또 벌어진 것이었다. 함대 사령부로부터 필자에게 O-3함 통신요원으로 전속명령이 하달되어 있었고, 며칠 후 출항하여 동남아 일대 여러 나라로 가게 되는 장기간의 원양 항해가 예정되어 있으니, 빨리 부임 하라는 독촉 명령까지 내려져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지각한 신혼여행이지만 다시 조퇴까지 해야만 했던 옛날 일이 머리 속에 떠 올랐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어야 하는 것이 바로 군인이니, 하달된 명령에 복종할 수 밖에 .........


     (4) 드라마 속에 나오는 모든 의료진들은 인간의 삶의 가치를 향상 시키기 위한 사명감을 가지고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에 깔려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또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을 열심히 돌보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의사 강모연 앞에 충상을 입고 위기에 처한 깽단 두목이 잡혀 왔는데, 깽단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자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한결 같이 "그 사람 죽게 내버려 두라"고 간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생명을 구하는 것이 의사의 본분인 것을 천명 하면서, 위급한 상태에 처해 있는 악명 높은 깽단 두목의 생명을 구하는데 최선을 다하여 치료해 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다. 또 대한민국의 적국인 북한군 상위 안정준(배우 지승현) 생명도 귀하게 여기면서 그도 열심을 다하여 구해 주는 모습도 감명 깊게 보았다.


      그 후 얼마간의 시일이 지난 후 의사 강모연으로부터 생명을 구원 받은 깽단 두목이 다른 사람들과의 금전적인 이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을 인질로 잡아 갔다. 대한민국 국민이 인질로 잡혀 갔으니, 대한민국 군인이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 하여 유시진 대위가 인질 구출 작전을 시작하자, 대한민국 정부 일부 고위 관료가 외국과 관련 있는 문제이기에 외교적 마찰이 일어날 수 있고, 또 경제 협력에 대한 문제 등이 일어날 수 있다 하여, 구출 작전의 실행을 극렬하게 반대하고 나섰지만, 유시진 대위는 그의 동요들과 합심하여 인질로 잡혀간 강모연 의사를 무사히 구출하는데 성공하였다. 필자는 드라마를 통해 이 내용을 보면서 몇 년 전 있었던 아덴만의 여명작전이 생각났기에 그 요지를 아래에 간단히 적게 되었다.


   




실례 : 3  (아덴만의 여명 작전) 


   2011년 1월 15일, 대한민국 상선, 삼호해운 소속 삼호 주얼리호(1만통 급)가 소말리아 인근 공해상에서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되어 소말리아로 끌려가는 것을, 우리 해군 청해부대 최영함이 2011년 1월 21일 그곳으로 급히 달려가서 선박과 인질로 잡혀 있는 모든 선원들을 무사히 구출한 작전이다. 그 전에도 많은 상선들이 이 해역을 지나가다가 해적에게 납치 당하여 많은 돈을 몸값으로 지불하고 해결되는 일들이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고 있던 문제였다.


 


   이 작전의 시작은 2011년 1월 18일 밤 8시경, 해적들이 우리 상선을 감시 하면서 소말리아로 항해하고 있었다. 그 때 해군 청해부대 최영함이 해적선박의 뒤를 추적하고 있었는데, 해적선이 몽골 선박 하나를 더 납치하기 위해 자선(子船)을 배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최영함에서는 링스 헬기를 띄워 해적선 자선에 위협 사격을 가함으로 해적들의 관심이 모선과 자선 양쪽으로 분열 시키려는 작전을 펼쳤다. 그 때 청해부대 소속 특수전 요원들은 고속정에 올라 타고 삼호 주얼리호에 접근해 가자 해적들이 총격을 가해 옴으로써, 상호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때 최영함으로부터 공격을 받던 해적들이 흰기를 쳐들고 항복 하는 척 하기에 우리 해군의 공격이 잠시 멈추는 사이, 해적들은 AK 소총을 발포 함으로써 우리 해군 특수부대원 3명이 총상과 찰과상 등을 입게 되었으니, 그들의 기만 전술에 말려들고 말았다. 그러자 최영함에서는 일단 작전을 중지 하고서는, 해적 자선만을 나포 하면서 AK-47 소총 3정과 사다리 등을 확보하는 것으로 일단 공격을 멈추었다,


  


   그 때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구출 작전의 보고를 받은 이명박 대통령은 작전의 실행을 승인 함으로, "아덴만 여명작전"이라는 작전이 정식으로 시작 되었다. 2011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최영함과 대한민국의 해군특수전여단이 투입되어, 약 5시간의 교전을 거쳐 해적들을 제압하고 21명의 선원 전원을 구출하였다. 이 작전을 통하여 8명의 해적을 사살하고 5명을 생포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해군의 사망자는 전혀 없이 성공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주얼리호의 선장이 복부에 관통상을 입는 부상을 당하였던 것이다.


 


   작전이 전개되고 있던 과정 중에, 해적이 발사한 총탄에 부상을 입은 삼호 주얼리호의 석해균 선장은 응급 처치 후 오만의 제2도시 살랄라에 있는 술탄카부스 병원에서 1차 수술을 받고, 29일 항공 편으로 한국으로 이송되어 아주대학교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석해균 선장은 작전 과정에서 목숨을 걸고 기지를 발휘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던 사건이다.



     (5) 또 우르크에 파견된 의료진과 군인들은 사명감에 불탄 가운데서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을 때,  심한 질병으로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아니한 그 나라 무바라트 의장이 해성병원에서 파견된 의료진 앞에 나타났다. 강모연 의사(배우 송혜교)로부터 그의 생명을 구하는 길은 지금 당장 수술하는 길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진료 소견이 나왔다. 그러자 그 나라 관리들은 아랍인 의사만이 의장을 수술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인 의사의 수술을 강경한 자세로 막기 시작했다. 그와 반하여 한국인 의사 강모연은 생사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지체 없이 수술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결국에 이르러 그 나라 관리들과 한국인 파견 군인들 사이에 총구를 겨누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만약의 경우 수술 실패로 그가 사망할 경우에는 국가 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는 염려 때문에, 한국 정부 내에서도 층층 고위직에 앉아 있는 많은 분들이 절대 간여하지 말고 손 떼라고 엄중 경고 하였지만, 유시진 대위(배우 송중기)의 전적 후원으로, 의사 강모연은 수술을 시작하여 위기에 처해 있던 무바라트 의장을 살리는데 성공했다. 그 때 유시진 대위는 상관의 강력한 명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긴 나머지, 만약의 경우 수술 실패로 자신에게 미칠 불이익이 생긴다 하더라도 감수하겠다는 각오로 강모연 의사가 수술하도록 적극 지원했다. 수술은 성공하여 무바라트 의장의 생명은 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시진 대위는 명령 불복종이라는 죄로 영창에 들어가는 곤경에 처하였고, 또 그것으로 인하여 소령으로의 진급이 누락되는 쓰라림도 맞게 되었지만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6) 예나 지금이나 조직 내부 요소 요소에는 많은 계층의 사람들(지휘관, 참모, 보좌관, 공직자, 회사원, 군인, 임원, 평직원)이 자신의 이권, 또는 무사안일, 상사의 비위 맞추기 등에 초점을 맞추고 정의와 사명을 무시 하면서 잘못된 곳으로 치닫고 있는 것을 우리는 수 없이 보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세상 속에서 특전사령관 윤길준 중장(배우 강신일)은 처음에는 부당한 일에 일시 간여한 적 있지만, 개심한 후에는 전혀 아부하지도 않고 옳은 길을 선택하고서는 꿋꿋하게 그 의지를 지향 하면서, 자신이 내린 명령에 대하여는 자신이 전적 책임을 지겠다고 공언하는 것을 필자는 보았다. 결국 최고 통치자가 와서 윤길준 중장의 손을 들어 주었으니 통치자의 정의로운 모습도 드라마 속에서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 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척도로 삼아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바로 주장하는 사람이 꼭 되어야 하겠다.


   나. 사적 공적 문제를 구별 못하던 자가 개심......... 


    드라마 속의 특전 사령관 윤길준 중장(배우 강신일)은 부하인 서대영 상사(배우 진구)가 자신의 딸 윤명주 중위(배우 김지원)의 짝으론 장교가 아닌 상사이기 때문에 부족하다 하여, 공적인 자리에서, 상관이라는 직책을 이용하여 서대영 상사에게 "나는 상사 사위는 볼 수 없으니, 군복을 벗고 명주(배우 김지원) 외가 회사에 입사 하던지, 아니면 명주와 결별하던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사적인 요구사항을 공석에서 강요한 적이 있었다. 서대영은 고민을 거듭하다가 “군복을 벗겠다”고 약속은 하였으나, 결국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렇지만 윤길준(강신일) 중장은 그에게 “조국은 이미 상사 서대영을 인정했고 사령관인 나는 상사 서대영이 내 사위가 되어 영광이다”라는 말로 딸 명주와의 사랑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잘못 되었음을 뉘우치고 고쳤다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다.


   다. 국익을 위해 때로는 개인의 희생과 공로의 은폐 요구.......


    드라마 속의 의사 강모연은 그녀의 애인 유시준 대위가 국가를 위해 외국에 있는 백화점(특전사에서 시행하는 00작전을 숨기기 위한 은어)에 갔다가 행방불명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유시진 대위가 작전을 위해 작전지역으로 떠나기 직전 잠시 헤어짐을 아쉬워 하면서, 애인 강모연을 만난 자리에서, "다치지 안을께요", "꼭 돌아 올께요", "안 죽고 꼭 살아올께요"라고 굳게 다짐하고 떠났는데,........ 뜻하지 않게 특전사 대대장이 강모연을 찾아와서 유시진 대위가 전사하였다는 통고를 하니, 그녀는 비통한 가운데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군 당국에서는 "1주일 후에 공식 발표를 하게 된다면서, 국익을 위해서는 작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여야 함으로, 유시준 대위의 전사는 훈련 중에 당한 교통 사고"로 처리 된다는 통고 하였다.


   그리고 군에서는 강모연에게 이 작전에 대한 보안 유지를 위하여, 비밀 유지 서약서에 서명을 해 달라면서 서약서 용지를 제시하자, 강모연은 대대장에게 질문 하기를 "그 사람이 죽음으로 누구의 생명을 구했나요", "예", "그 사람이 죽음으로 평화를 지켰나요", "예",  "그 사람의 죽음으로 조국을 지켰나요", "예", "그런데 왜 보안을 유지해야 되나요", 이 질문과 답변이 끝난 후, 눈물을 흘리면서 서명하는 모습도 필자는 보았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은 국가는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만의 유리 함을 얻기 위해 절대 비밀이 유지 되어야 할 사항을 여과 없이 폭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을 필자는 현실 속에서 수 없이 보고 있다. 당장 얻게 되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국가의 비밀을 여과 없이 폭로하면, 오늘 폭로한 것으로 인하여 내일에 이르러서는 폭로한 자신의 자식이 전선에서 적탄에 맞아 죽게 된다는 사실을 왜 모르고 있는지......... 


   다른 언론사 보다 먼저 취재하여 보도 하였으니, 자신의 업무 실적이 올라간다, 물론 기자로서의 우수성과 신속성은 인정 받을 수 있겠지? 그렇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국가는 이미 완결 처리하여 시행하고 있는 작전 계획을 백지화 하고서는, 새로운 작전 계획을 입안 작성하여야 국가의 안위를 지킬 수 있게 될 것이고, 또 이미 생산하여 실전에 배치한 무기가 그 설계서의 폭로로 무용지물이 되어, 새로운 무기를 대체 개발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하게도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무분별한 비밀 폭로가 오늘 날 우리들의 현실 속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는 것을 필자는 염려하고 있다.


 


   아래 실례로 든 사항은 국익을 위해 무려 66년 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들이 세운 공은 베일에 가려졌고, 국가를 위해 생명을 내어 놓고 싸웠지만, 충신이 아닌 역적의 자리로 내 몰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66년간을 살아야만 했던 숨은 희생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몽금포 작전이 그 때 바로 백일 하에 공개 되었다면, 국제적인 여론에 밀려 북한의 남침으로 일어난 625전쟁이, 남한의 북침으로 발생한 전쟁이라고 대한민국이 전적으로 뒤집어 쓰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전은 우리 나라의 선박을 불법으로 납치해 간데 대한 보복성 공격으로, 625전쟁이 일어나기 10개월 전인 1949년 8월 17일 새벽 몇 시간 동안에 벌어졌던 국지전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 625전쟁의 시작이라고 억지를 부릴 수 있단 말인가? 북한은 트집 잡기를 좋아 하고, 또 오리 발 내 미는 것이 그들의 상투적인 수법이기에 당시 우리 나라 입장에서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비밀로 처리할 수 밖에........ 


    



실례 : 4 (국익을 위해 비밀에 부쳐진 공훈) 


 


몽금포 작전


 


   625 전쟁이 일어나기 10개월 전인 1949년 8월 17일 새벽, 38 이북 서해안 장산곶 북서쪽 룡연군 몽금포(夢浦) 항에서, 우리 해군 함정 5척의 엄호를 받으면서 특공대원 20명이 침투해 들어가, 우리 나라 선박을 납치해 간 원점을 찾아 타격을 가한 보복성 공격이 벌어졌었다. 그 후 이 사건은 오랫동안 국익을 위해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1992년부터 구 소련에서 생산한 기밀 문서들이 점차 비밀로부터 해제 되면서 625전쟁의 시작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것임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졌다. 그 때부터 서서히 이 사건이 햇빛을 보기 시작 하였으나, 그 후에도 복잡한 국내 사정 때문에 이 사건은 계속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2015년 이르러 비로서 인천 월미공원에 전승탑이 세워졌고, 당시 관계자들에게는 국가 최고의 훈장이 수여 되는 일이 있었다.


  


   가. 신생 대한민국의 나약한 군대


    1945년 조국이 해방된 후 손원일(孫元一)을 중심으로 한 몇 몇 인사들이 해사협회(海事協會)를 구성하여 다시 해방병단으로 개칭한 후, 미군정 관할 안에 있는 도서와 해안 경비를 담당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9월 5일 대한민국 해군으로 승격 되었으니, 이름은 해군이지만 전력은 어린아이와 다름 없는 보잘 것 없는 군대였다. 이 때 미군들 세계에서는 대한민국 국군을 향하여 "허수아비 군대"라고 깔보고 있었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를 전후하여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불상사들이 군 내부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1948년 5월 7일에는 JMS 311정( 통천정=일본제 소해정)이 납북 되었고,


1948년 4월 3일에는 제주에서 43사건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을 동원 했는데, 6월18일 제주에서 육군 제9연대장이 좌익 부하에게 암살되어, 다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여수에서 출동한 제14대 연대의 대대장 세 명이 역시 좌익 부하에게 살해 당하였다. 다시 이들을 제압하려고 출동 시킨 광주 주둔 제4연대 부대원 일부가 이탈하여 반란군에 가담하여 여수 순천 반란 사건으로 확대 되었다. 미군은 대한민국 군부의 이와 같은 나약함을 계속 목격했기 때문이다.


    1948년 5월 15일에는 YMS 517정( 고원정=미국제 소해정)이 납북 되었고,


    1949년 5월 4일에는, 춘천과 홍천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2개 대대가 집단 월북 하였으며,


    1949년 5월 11일에는 YMS 508정(강화정=미국제 소해정)이 납북 되었고,


   1949년 5월 20일에는 JMS 302정(통영정=일본제 소해정)의 납북 미수 사건이 부산에서 일어났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건들이 벌어질 때는 많은 군인들의 희생도 뒤 따랐던 것이니, 외부인 특히 국내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의 눈에는 한국 국군이 나약하고 무능한 군대로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나. 해군이 관리하는 주한 미군사고문단장의 전용선을 잃어버린 불상사가 발생


    1949년 8월 10일 돌연 주한군사고문단장 로버트 준장(Brigadier General William L. Roberts)의 전용선(해군 인천경비부가 위탁 받아 관리하던 배)이 사라지는 어이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1949년 8월 초부터 해군에서는 정부수립 1주년 기념 행사로 관함식(시행 예전일 1949년 8월 16일)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평소 로버트 준장이 애용 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미 국방성장관이 선물로 보내 준 배라고 자랑하면서, 필요할 경우에서는 대통령의 편의를 보아 드리겠다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약속까지 했던 배이다.


 


    이렇게 되자 해군 인천경비부에서는 로버트 준장에게 이 사실을 즉시 알리지 못하고, 연평도, 덕적도, 백령도 항구 등을 모두 수색 하였지만 그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서해 첩보부대장 이태영 소령으로부터 북한 땅 황해도 몽금포 항에 그 배가 머물러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고, 해군 인천 경비부 소속 안성갑 3등병조가 자취를 감춤으로 그가 로보트 준장의 전용 배를 몰고 월북했다는 사실도 확인 되었으며, 그는 남조선로동당원의 여동생을 짝사랑 하고 있었는데, 북한으로부터 로버트 준장의 전용선을 몰고 북한으로 넘어오면 그녀와 결혼시켜 주겠다는 지령을 받고 범행을 실행한 것도 밝혀졌다. 그 후 안성갑은 또 다른 함정을 몰고 오라는 지령을 받고 한국에 잠입 하였다가 1950년 봄 서울에서 해군 특무대에 체포되었다.


   


   다. 이승만 대통령의 진노


    자신의 배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 로버트 준장은 이 사실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알렸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은 육군 총참모장(오늘날 참모총장의 옛 직위명) 이응준(應俊)과 해군총참모장(옛 직위명) 손원일(孫元一)을 경무대(景武臺=오늘날 청와대의 옛 호칭)로 불러, 앉으라는 말도 없이 세워놓고 질책 하기를,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육군과 해군 총참모장들이 김일성만 도와주니 말이야. 동해에서는 태극기 단 함정이 올라가고, 서해에서는 성조기 단 보트가 올라가고.... 이래서 되겠는가?" 질책 받는 군 수뇌부들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사표를 내야 되겠다는 각오를 굳히고 돌아왔다고 한다.


   라. 작전 계획의 수립과 작전의 진행


    해군총참모장 손원일이 경무대로 호출 되어 들어갈 때 함께 갔던 정보감 함명수 소령의 제안에 따라, 몽금포 항내로 특공대를 침투 시켜 로버트 준장의 전용선을 도로 찾아 오는 작전 계획을 수립 하였는데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작전 수행의 목표는 로버트 준장의 전용 배를 도로 찾아 오는 것이고, 여의치 않으면 그 자리에서 폭파키로 했다. 그 행동대는 함명수 소령이 지휘하며 20명의 특공대원(정보부대원)이 함정 5척의 엄호를 받으면서 야간에 기습 상륙하여 작전을 수행키로 했으며, 엄호하는 함정은 PG 313 충무공정, JMS 301 대전정, JMS 302 통영정, JMS 307 단천정, YMS 507 광주정이 담당하기로 했다.


  


1949년 8월 16일 02시 정대사령 이용운 중령의 승인 아래 5척의 함정과 특공대원들이 인천항을 출항하여 백령도에 이르러 대기 하다가, 8월 17일 새벽 백령도를 떠나 몽금포 근해에 도착하여, 8월 17일 새벽 6시 무장 상태를 점검한 후 몽금포 항구로 진입을 시작했다. 그러자 북한 해안경비병과 북한 함정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해오는 것이었다. 함명수 소령이 이끄는 특공대원들은 5척의 고무배에 나누어 타고 물결을 헤치며 항내로 돌격해 갔고, 5척의 함정들은 앞서 가는 고무배를 뒤 따르면서 포격으로 특공대원들을 엄호 했지만, 북한군의 거센 사격에 잠시 진입이 주춤했다.


  


JMS 302 통영정은 특공대원들의 안위를 위해 더 가까운 곳에서 좌우 양현에 있는 기관총으로 엄호를 가하면서 특공대원들의 뒤를 바짝 따라 항내로 진행하고 있었다. 상륙 지점 수십 미터를 남겨 두고 고무배 5척 가운데 4척이 기관 고장으로 멈춰 버렸다. 그리고 특공대를 지휘하고 있는 함명수 소령이 탄 고무배 하나만이 전진하다가 북한군이 가해오는 집중 사격으로 함명수 소령도 양쪽 넓적다리에 관통 총상을 입었다. 그러자 JMS 302 통영정 정장인 공정식 소령이 고무배로 옮겨가서 함명수 소령을 PG 313(충무공)으로 옮긴 다음, 다시 302 통영정을 지휘하여 화력이 강한 37mm 대전차포를 엄호 하면서 부두로 돌진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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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에 참가했던 JMS 302 통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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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에 참가했던 PG 313 충무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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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 작전을 수행한 결과


    JMS 302 통영정의 대전차포 사격으로 북한 경비정 4척을 격침 또는 대파 시켰고, 302정 병사들이 북한 제18호 경비정(35톤급)에 수류탄을 투척한 후 북한 배로 들어가 북한군 장교 1명과 승무원 4명 도합 5명을 생포한 후, 북한 제18호 경비정을 나포했다. 그러나 항내를 아무리 뒤져도 로버트 준장의 전용 배는 보이지를 않았으니, 이미 남포항을 거쳐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으로 옮겨갔기 때문이었다. 부상 당한 특공대장 함명수 소령은 PG 313 충무공정에서 군의관의 성공적인 응급 처치와 병사들의 헌혈로 성공적인 치료가 이루어졌다. 


    이 몽금포 작전은 당시 대한민국의 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 아래 이루어진 작전으로 북한에서 자행한 도발에 대한 응징성 공격으로 분명 성공한 작전이었다. 그러나 무쵸(John Joseph Muccio) 주한 미 대사가 몽금포 작전은 "한국군의 불법적인 38선 월경 사건"이라면서 우리 정부에 항의를 가해옴에 따라 작전을 수행한 장병들은 하루 아침에 충신의 자리로부터 역적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북한은 한국 해군이 시행한 이 작전을 "625전쟁의 도화선"으로 들고 나오면서, 625전쟁은 남한의 북침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나왔다. 그래서 한국 정부에서는 이 작전을 더 공개하기를 지양하면서 역사적인 평가를 나올 때까지 "잊혀진 사건", "비밀에 부쳐진 사건"으로 베일 속에 가리게 했던 것이다.


  


   바. 625전쟁의 발발은 남침이냐? 부침이나?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대한민국에 대한 전격적인 남침(南侵)으로 시작 되었다. 그런데 6·25전쟁의 발발 원인을 두고 여러 논란이 일어났는데, 북한은 아직까지도 남쪽의 공격에 대한 북한의 반격으로 전쟁이 시작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1980년대부터는 한국 안에서도 이른바 "수정주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자연 발생적 내전설(內戰說)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冷戰)이 종식 됨으로써, 구(舊)소련에서 생산한 많은 기밀 문서들이 공개 되면서, 소련의 문서와 중국의 문서 등을 통해, 이런 주장들이 허구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특히 1993년 1월 러시아 문서보관소에서 625전쟁은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시작 되었음을 입증하는 결정적 문서가 발견되면서 그 전모가 남침으로 시작 되었다는 것이 확인 되었다.




북한의 남침을 입증하는 문서 내용


   1. 김일성이 1950년 2월4일 스티코프 평양주재 소련대사를 통해, 스탈린에게 보낸 긴급 암호 전문 내용


     "남반부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기존 7개 보병사단 외에 3개 사단의 병력 증강이 필요하므로 이에 소요되는 무기와 탄약 등 군수물자를 공급해달라"는 요청.


   2. 위 1항 전문에 대해 닷새 후인 1950년 2월9일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보낸 전문


     "성공이 전면적으로 보장되는 조건에서 귀하의 남침 제의에 동의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북한이 요청한 3개 사단 증강을 위한 지시는 내려졌다"고 통보.


   3. 1950년 5월 30일 북한 주재 소련 대사가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


    "김일성은 6월30일경에 남침 공격을 개시하려 하고 있다. 공격 개시를 늦추는 것은 남한에서 북한의 의도를 탐지해 그들의 군대를 증강할 우려가 있고, 7월이면 장마가 시작돼 공격을 9월로 연기해야 되는데, 이는 매우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4. 1950년 10월 중국 주은래와 소련 스탈린 간의 면담 요지와 조복된 전문 내용


    주은래:  "원래 협의한 대로 중국은 조선전쟁에 지상군을 참전 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면 소련의 공군지원은 언제부터 이루어지는가?" 


    스탈린:  "중국의 조선전쟁 개입도 재고해야 할 것이다"


                (스탈린은 준비가 아직 안됐다는 이유로 원래 합의했던 소련 공군의 지원을 거절했다. 그 이유는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과 유엔군 참전 등으로 한국전쟁이 세계 대전의 양상을 띠면서 전세가 공산군에 불리하게 전개될 것으로 판단되어 마음이 달라진 것이다) 


    모택동: "중국은 소련 공군의 지원 없이도 중국 지상군은 조선전쟁에 참전하겠다"


              (그로부터 한참 후 소련 공군은 위장 복장으로 참전하였다). 


   5. 1950년 10월 14일 스탈린이 평양주재 소련대사에게 보낸 전문 내용


     "다음 사항을 김일성에게 전해주기 바람. 많은 주저와 여러 잠정적 결정 끝에 중국의 동지들이 마침내 병력을 파견, 지원키로 한다는 최종 결심을 하였음. 본인은 이 최종적이면서 또한 조선에 유리한 결정이 내려진 것을 기쁘게 생각함. 중국군을 위한 필요 장비들은 소련으로부터 제공될 것임. 귀하의 성공을 기원함".


  


   이 내용들은 구 소련이 와해된 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군사보좌관이던 볼코고노프 장군이 모스크바 정부 문서고에서 발굴해낸 비밀 문서들이다. 이 외에도 많은 문서들이 더 있으나 여기에서는 기재 생략한다.



  


   구 소련에서 생산한 여러 가지 기밀 문서들에 의하면, 6·25전쟁은 북한의 김일성과 박헌영이 소련 스탈린의 허락을 받고 소련과 중공(中共)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다음, 면밀히 계획하고 전격적으로 남한을 기습 침공한 전쟁이라고 밝혀진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이 확인됨에 따라, 서서히 몽금포 작전의 재평가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복잡한 국내 사정으로 계속 햇빛을 보지 못하고 가려져 있다가 작전이 시행된 후 66년이란 긴 세월이 지난 2015년 9월 15일 비로서 전승비가 인천 월미공원에 세워졌고, 또 작전에 참가한 관계자들의 서훈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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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인천 월미공원에 세워진 몽금포작전 전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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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 성실하게 남에게 은혜를 베풀면.....


      드라마 속의 유시진은 3개월 정도면 모든 작전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애인 강모연에게 말하고 작전지로 떠났다. 그런데 애타게 기다리는 강모연에게는 비운의 전사 통지가 날아 왔으므로, 슬픔 속에서 살다가, 알바니아로 나가 거기에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의료 지원 봉사로 마음의 아픔을 잊으려고 활동하고 있었다. 내일이 애인이었던 유시진의 기일이 되어 그녀는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지역으로 들어가서 떠나간 애인을 그리워 하면서 돌 단을 쌓고 거기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추모하고 있었다. 그 때 뒤를 보라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 보니 먼 곳에서 한 사나이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여 자세히 보니, 그는 틀림 없는 죽었다고만 믿고 있던 애인 유시진이었다. 서로가 달려가서 포옹하면서 순식간에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였다.


 


     작전에 참전한 유시진과 서대영은 폭격이 시작되기 직전 어느 누군가에 의하여 방공호 속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어딘지 모르는 지하 감방에 수감되어, 피투성이가 된 채 약 150 여일을 감옥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제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두 사람 앞에 그들을 구하기 위해 한 남자가 나타났는데, 그는 바로 다름 아닌 북한군 상위 안정준(배우 지승현)이었다. 안정준은 얼마 전 총상을 입고 생명의 위기에 이르렀을 때, 자신을 살려준 유시진을 돕기 위해 그곳에 나타나서, 생명의 은인인 유시진과 또 함께 있는 서대영의 목숨을 구하여 각기 사랑하는 사람들의 곁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이다. 그리고 안정준은 유시진을 구해 줌으로써 자신이 위기에 처하였을 때 자신을 직접 치료해 주었던 의사 강모연의 은혜도 한꺼번에 갚은 셈이다.  


      그래서 유시진과 해성병원의 간판 의사 강모연은 힐링 데이트를 즐기게 되었고, 옛날 나바지오 해변에서 사랑을 나누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서 난파선 위에 조약돌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별똥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처다 보고, 파도 소리 들려오는 해변가에서, 난파선에 걸터앉은 두 사람은 로맨틱한 포옹을 나누면서 서로의 사랑을 재확인하는 순간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평화를 지켜야 하고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군인의 자리, 의사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한 자들, 병든 자와 노약자를 보호하면서, 쉬지 않고 봉사한 자들이기에 죽음에 문턱에서 생명의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세상적으로는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 되었으며, 또 행복한 보금 자리를 꾸밀 수 있는 만남의 결실이 이루어 지게 되어, 행복 속으로 들어가는 은혜를 입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3. 그리스도 인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주님께 충성해야


   필자는 "태양의 후예"라는 드라마를 보고 참으로 깨닫고 느낀 바가 많았다. 젊은 시절에는 먹고 사는 것에 바빴던 관계로 세상 일에만 충실하였지, 주님을 위해 충성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기 그지 없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주님께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막중한데 이 몸은 그저 규칙적으로 예배당 문턱만 밟으면서 들락날락 한 것 같다. 어느덧 83계단을 넘은 관계로, 무릎 관절은 점점 찌끈 찌끈해 지고, 종아리와 발에서는  쥐가 자주 일어나며, 앉았다가 일어 설 때는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함으로 비틀 거리는 등의 어려움을 갖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보행의 자유로움도 점차 줄어가는 것을 느끼게 되니, 앞으로 남은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이제는 힘을 써 보려고 해도 육신의 활동이 뜻대로 따라 주지 않으니, 입에서는 껄 껄 소리만 나오고 있음을 솔직히 고백하는 바이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할 일을 나누어 주실 때, 각자의 재능과 형편을 보고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적절하게 나누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으니, 지금은 지금 형편에 알맞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곧 주님께 충성하는 길이 된다는 것을 믿고, 남은 시간을 주님께 드리면서 충성을 다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힘쓰려고 한다.


 


   고린도전서 4장1절-2절 말씀에는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하셨으니,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 인들을 향하여 충성하는 것은 그리스도 인들의 의무 임을 밝히셨고, 또 요한계시록 2장 10절 말씀에서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으니, 충성하라고 명령 하시면서 충성한 자가 받을 결과까지 밝혀 주셨다.


   그리고 마태복음 25장 14절-30절까지의 말씀에는 주님께서 직접 교훈해 주신 달란트 비유가 기록되어 있다. 주님께서 우리 그리스도 인들에게 직분을 나누어 주실 때, 각자의 능력을 감안하여 재능에 알 맞게 어떤 사람에게는 목사, 장로, 권사, 어떤 사람에게는 집사, 또 어떤 사람에게는 반주자, 교사,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평신도,  등등 이와 같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할 일들을 나누어 주셨다는 말씀이다. 예를 들면 대기업의 회장에게는 권한과 책임과 의무가 모두 크게 부여 되었고, 말단 신입사원에게는 모두 적게 부여 되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받은 직분을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알맞게 주셨다는 것임으로, 능력이 없어 못한다는 핑계는 결코 댈 수가 없다는 말이다. 


 


   각 종들이 받은 달란트의 크기는?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를 주면서, 그것으로 무엇을 하든지 좋으니 열심히 일하라고 당부하고 길을 떠난 것이다. 그 후 주인이 돌아와서 결과를 보고 받을 때, 


 


   각자의 성과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즉시 일하여 배의 소득을 올렸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것을 땅에 감추어 두고 매일 게을리 지내며 놀기만 했기 때문에, 주인이 맡기고 간 그 한 달란트 만을 달랑 들고 나타났었다.


 


   결과를 본 주인은 종들을 어떻게 상벌 하였나?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맡은 종에게는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잘 하였도다, 나의 즐거움에 함께 참여하라"고 칭찬 하면서 부드럽고 인자한 목소리로 대하였다. 그러나 한 달란트 맡은 종에게는 엄하고 노여움이 가득찬 무서운 목소리로 꾸짖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네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그리고 넌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왜 성과의 차이가 있는가? 


    이와 같은 차이의 결과는 충성이 있느냐? 없느냐? 에 따라 달라진 것이다. 얼마 만큼 최선을 다 하였는가를 보고 결정된다는 말씀이다. 열심히 했다면 설사 다섯 달란트를 모두 잃어 버렸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인자 하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오히려 측은하게 여기시고 더 좋은 달란트를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분이시니, 열심을 다하여 충성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교훈하신 달란트 비유를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충성을 다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냥 성경의 이야기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가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주님께 충성하는 주님의 참 제자가 되시기를 소망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