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게시판

잊을 수가 있을까?

Author
Han You
Date
2020-06-20 20:40
Views
88

잊을 수가 있을까?



< 부제 : 잊을 수 없는 6ㆍ25 전쟁 >


서론

      1969년 나훈아(본명 최홍기)씨가 불러 힛트 친 가요 중에 "잊을 수가 있을까?"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 가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 밤이 지나가면 헤어져야만 하는 얄궂은 인연을 가진 두 남녀가 헤어짐을 아쉬워“하면서 "잊을 수가 있을까? 잊을 수가 있을까?" 자신들의 아픔을 애절하게 표현한 노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노래는 단 두 사람만의 문제로 일어난 사건을 잊을 수가 없다고 노래한 것임에도, 많은 사람들은 이에 공감하였기에, 이 노래가 한 때 세상을 뒤흔들었던 유명한 노래가 되었던 것이다.


      6ㆍ25 전쟁은 어떠한 전쟁인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김일성이 남쪽에 있는 대한민국을 삼켜, 공산주의 체제의 통일 국가를 만들겠다고, 고요히 잠자고 있는 대한민국을 침략함으로써 시작된 전쟁이다. 이 전쟁은 우리 민족을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어. 어떤 이에겐 죽음을, 어떤 이에겐 슬픔을, 또 어떤 이에겐 고통과 아픔을 안겨 주었고, 나라를 지키던 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인생의 꽃을 피어보지도 못하고 시들게 만든 비극을 초래한 한 맺힌 전쟁이다. 그리고 아름답던 우리 삼천리 금수강산은 폐허처럼 바뀌게 만들었으니, 어찌 이와 같은 비극을 몰고 온 6ㆍ25 전쟁을 잊을 수가 있으리오?.


      여러분들 가정에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있다면 그 아이는 공부에만 열중해야 할 아이라면서 도와주려고 생각할 것이고, 또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모든 부모들의 공통적인 심리일 것이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필자는 중학교 5학년 학생이던 만17세의 소년이었다. 갑작스레 북한의 남침으로 일어난 전쟁이기에 경상남도 일부를 제외한 전 국토가 북한군에게 짓밟혔기에 국가의 존재마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 때 해군 모병관의 호소를 듣게 된 필자는 작은 힘이지만 나라를 구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목숨을 버리겠다는 각오로 전쟁터로 나갔던 것이다.


      그 무렵 입대한 모든 젊은이들이 거이 비슷한 입장이었다. 8월 7일 입대한 해병대 3기생, 8월 15일 필자와 함께 입대한 해군 17기생, 그리고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동해 장사리에 위장 상륙했던 약 700 여명의 학도병들, 모두가  만 17-19세의 젊은 학생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인천 상륙작전을 위시하여 통령 상륙, 목포 상륙, 원산 상륙, 장사리 상륙 등의 작전을 수행하면서,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빗발치듯 쏟아지는 총탄을 뚫고 전진하다가 채 피어나지도 못하고 떨어진 애석한 꽃들이 너무나 많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군인들의 세계에서는 “한 번 쓰고 버려진 소모품 군인”이라는 속 된 말들까지 있었던 것이 기억 된다.


     주 :  필자가 쓴 더 자세한 다른 글 : (아래 문서 이름을 클맄하면 볼 수 있음)


                   본 교회 사랑게시판   #390      2016 09 09    장사 상륙 작전


      당시 17세인 필자도 그들 중 한 사람으로 치열한 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불꽃 튀는 전쟁터에서 시들지 않고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으니,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의 87년 인생 중에 있었던 일들 가운데는 현재 필자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그렇지만 6ㆍ25 전쟁과 관계된 사건들은 지금도 필자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 전쟁이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며칠 후에 또 다시 2020년 6월 25일을 맞게 된다. 필자는 지난 6월 10일부터 6일 동안 또 다시 병원에 입원하여 아직 머리에 남아있는 암세포의 뿌리를 죽이기 위해 열 다섯 번째 항암 치료를 받았던 관계로 육신적으로는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70년 전 북한 김일성의 만행을 밝혀, 6ㆍ25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분들에게 다소 나마 도움이 될 수 있게 하고자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1.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전쟁의 이름

      침략을 당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얼마 동안 이 전쟁을 "6ㆍ25 동란" 또는 "6ㆍ25 사변“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지금은 이 전쟁을 "6ㆍ25 전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전쟁을 일으킨 북한에서는 이 전쟁을 "조국 해방 전쟁" 이라고 말하는데, 그들은 조국의 남쪽이 "미 제국에 점령 당해 식민 통치를 받고 있는 것을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거짓 주장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 부여한 이름이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식민 통치를 받은 적 없음으로, 그들의 주장은 허구인 것이 분명하다.


      우리나라를 도운 미국에서는 이 전쟁을 The Korean War라고 하는데, 그것도 맞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이 전쟁은 남북만이 싸운 것이 아니고, 남북을 비롯한 27개국이 양쪽으로 갈라져서 싸운 전쟁이기 때문에 "The Korean War" 보다 "The War in Korea(한국에서의 전쟁)"이 맞는 것 같다.


      북한을 도운 중국에서는 이 전쟁을 "항미원조 전쟁(抗美援朝 戰爭)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들은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북한)을 도운 전쟁이라는 의미로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전쟁의 명칭이 어떠하든 간에 우리 조국에서 전쟁이 일어남으로써,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전쟁”이라고 생각된다.


2.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한반도 사정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함으로 35년(1910년 8월 29일-1945년 8월 15일) 동안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던 우리 조국은, 일본의 사슬에서 풀려나게 됨으로써 우리 민족은 희망에 들떠 있었다.


      그렇지만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에서 약속되었던 독립은 요원해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패전한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북위 38도선 이북은 소련군이, 이남은 미군이 나누어 실시한 것이 드디어 사상적인 분단으로 발전하더니, 드디어 영구적인 분단으로 고착화되었기 때문이다.



가. 해방 직후의 치안 유지 상태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廣島=ひろしま)와 나가사기(長崎=ながさき)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 것을 본 소련은 일본의 패전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자, 8월 9일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고서는 두만강을 넘어 북한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관동군을 향하여 공격을 시작하여, 겨우 6일 동안 전쟁을 수행하고서는 승전국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원자폭탄의 공격을 받은 일본은 전의를 상실한 상태에서 항복 문제의 합의가 갈리고 있을 때, 구경하고 있던 소련까지 공격을 가해오자 일본 국왕(昭和)은 일본 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격 무조건 항복을 발표했다.


          일본이 항복하자 한반도 북쪽 지역은 이미 들어와 있는 소련군에 의하여 조기에 무장 해제가 이루어졌음으로, 북쪽 지역의 치안 상태는 남쪽 지역 보다 훨씬 빨리 안정이 이루어졌다. 그런 다음 소련군은 남북 간의 왕래와 통신을 단절하고서는, 공산주의 체제의 통일 국가 수립을 위한 준비를 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6년 2월에는 소련군 장교 출신인 김일성(본명 김성주)으로 하여금 인민위원회를 조직케 한 후 공산주의 이념에 대항하는 세력들을 하나하나 숙청토록 하였고, 지주로부터 토지를 몰수하여 분배하는 토지 개혁도 단행하였으며, 주요 산업들을 국유화 하는 등, 공산 체제 국가 수립을 위한 기반을 구축해 나갔다.


          그러나 한반도 남쪽 지역은 어떠하였는가? 미국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해외 각처에 파견되어 있던 병력 중에서 한반도 남쪽 지역에 주둔 시킬 병력을 차출하여 이동 시켰던 관계로, 소련군 보다 약 1개월 정도 늦은 9월 8일에야 한국 땅에 군대를 파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군의 군정 방식은 북쪽 소련군의 군정 방식과는 판이 하게 달랐다. 민주주의 국가의 통치 방식대로 사상의 자유와 인권 존중을 십분 보장하였던 관계로, 남쪽 땅에서는 많은 좌익 인사들이 합법적인 단체를 조직하여 군정 당국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사회 혼란은 상당 기간 계속 되었던 것을, 해방 직후 서울에서 고학하던 필자는 직접 눈으로 보았다.



나. 해방 직후 한반도의 경제 사정


          역사적인 면과 지리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남쪽 지역은 농토가 많고, 북쪽 지역은 산악이 많은 관계로,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있을 때, 남쪽 지역에서는 농업을 장려하였고, 북쪽 지역에서는 전력 생산과 광공업을 육성 시켰기 때문에, 해방 직후의 경제 수준은 단연 북쪽이 남쪽 보다 월등하게 높았다.


          거기에다 원래 남쪽 인구가 북쪽 보다 많은데다, 해방이 되자 해외에 나가있던 많은 동포들이 환국 하면서, 장차 수도가 될 경성(京城=오늘의 서울)으로 몰려들었다. 거기에다 소련 군정의 강압에 반발하여 자유를 찾아 38선을 넘는 사람들이 급증한 관계로 한 때 식량 부족 현상까지 일어났다.


          그래서 미군정은 외국으로부터 잉여 농산물인 밀기루를 원조 받고 또 중고 의복들을 얻어 와서 굶주리고 헐벗는 영세민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사회적인 안정과 질서를 잡아나갔다. 해방 후 남쪽 지역의 생활수준이 이처럼 어려웠던 것을 서울에서 고학 하면서 필자는 직접 피부로 느끼면서 살았던 것이다.


다. 해방 직후 한반도 남쪽 사회의 혼란상


          남쪽 지역에 있던 좌익계 단체와 좌익계 인사들은 법이 정하고 있는 권리라면서,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 달라, 농민에게 살길을 열어 달라, 자유를 달라, 무엇을 해 달라는 등 매일 같이 데모와 동맹 파업, 그리고 동맹 휴학 등을 일으킴으로써, 사회는 점점 혼란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갔던 것을 필자는 작접 눈으로 보았었다.


          그 때 남조선공산당은 경성시 중구 소공동에 있는 정판사(精版社=인쇄소) 건물에서 해방일보라는 신문을 방행 배포하면서 공산당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 곳 공산당원 중에는 김창선(金昌善)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일제 치하 때 정판사 직원으로 일하던 자이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패하여 일본으로 귀환하는 혼란한 흠을 타, 조선은행권 화폐 발행 인쇄 원판을 전판사에서 몰래 훔쳐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공산당과 해방일보 간부들과 합작하여 활동 경비를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위조지폐를 발행하여 몰래 시중에 유통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46년 5월 15일 미군정 당국에 적발됨으로써 이들에 대한 검거령이 내려지자, 그 중 이관술 등 일부는 체포되었고, 권오직 등 일부는 북한으로 도주하였으며, 일부는 지하로 잠복하였다.


          그 때부터 미군정 당국은 범죄 집단에 대한 강한 단속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북한에 있는 북조선공산당은 남쪽 사회의 혼란 조성 방법을 바꾸어, 세포원들을 비밀리에 남파 침투 시킴으로, 드디어 그들의 공작으로 국방경비대 부대가 월북해 갔고, 또 해양경비대 함정들이 북한으로 납치되어 가는 등, 곳곳에서 폭동과 방화 암살 사건 등이 계속 일어남으로써, 사회 혼란은 더욱 심화되었다.


          1946년, 미 군정 당국은 UN의 승인 하에, UN 감시 아래 한반도 전역에서 동시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된 국가를 수립코자 하였으니, 북쪽 소련 군정 당국이 UN 선거 감시단원의 입국을 막음으로, 남북한 동시 총선거로 통일 정부 수립이 좌절되고 말았다. 북쪽 군정 당국이 동시 총선거를 반대한 이유는 북쪽 지역의 인구수와 시도군의 수가 남쪽 보다 적음으로 공산 국가가 되지 않을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반대했던 것이다,


라. 한반도에 들어선 두 개의 정부


          1948년에 이르러 미군정은 다시 UN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한다는 UN의 결의를 이끌어 내었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UN 감시 아래,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제헌 국회를 구성하게 되었고, 7월 17일에는 헌법을 제정 공포하고서는 이에 따라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선포되었다. 이 때 이 선거를 반대하는 제주 지역 좌익 분자들이 일으킨 폭동이 4ㆍ3 사건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자, 북쪽에서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 선포함으로써, 한 지붕 아래 두 가정이 둥지를 틀게 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1948년에 열린 UN 총회에서는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마. 북한에서 남한으로 보내던 전력을 단절


          북측에서는 남쪽만이 UN 감시 하에 총선거를 실시한다 하여, 해방 후 줄곧 남쪽으로 송전하던 전력을 1950년 5월 14일을 기하여 일방적으로 끊은 후, 남아도는 전력을 만주(滿州)로 판매하기 시작했고, 또 남한 침공을 위한 무기 생산쪽으로 그 방향을 바꾸었다. 이로 인하여 남한 땅에서는 전력이 부족하여 서울 시내를 달리건 전차가 길에 서 있기도 하고, 또 등화(燈火)용 전력은 초저녁에만 잠깐, 공장용 전기는 심야에  공급하는 등의 어려운 처지까지 이르렀다. 


바. 북한 거주민의 대대적인 월남


          북한은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고, 또 토지를 개혁한다면서 지주들과 부호들의 재산 몰수, 그리고 일제에 친화한 사람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양민들에게까지 가혹한 제재를 가하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발 부칠 수 있는 곳,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을 찾아, 매일 같이 때를 지어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옮겨 왔다.


          이 때 서울에서 고학하던 필자는 주일이 되면 중구 저동에 있는 베다니교회(지금의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시무)로 나가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가 끝난 후의 교회 친교실은 이산가족 상봉 장소와 같았던 것을 필자는 매주 목격하였다. 헤어졌던 이산가족들이 서로 만나, 얼싸 안고 울면서 지난날에 있었던 사연들을 나누던 모습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


          그 때 필자는 베다니교회에서 북쪽의 실정을 너무나 많이 들었던 관계로, 남쪽에서 태어나 남쪽에서 자라면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을 주님께 감사하면서 살았었다.


          :  필자가 쓴 더 자세한 다른 글 : (아래 문서 이름을 클맄하면 볼 수 있음)


                     본 교회 사랑게시판     #312     2014 01 09    혼란스러웠던 해방 후 5년


3. 6ㆍ25 전쟁이 일어난 직간접 원인

      필자는 해방 직후 서울 종로구 소격(昭格)동에 거처를 두고, 새벽마다  군정청 옆에 있는 적선(積善)동 등 7개동 주민 가정에 극우 신문(대동신문)을 배달하던 고학생이었다. 그런 관계로 매일 같이 일어나는 사건들을 배달하는 신문을 통하여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어두운 새벽 거리에서 좌익분자들에게 배달하던 신문을 몽땅 빼앗기는 등의 테러도 당한 적도 있었다.


가. 전쟁 발발의 원인은 힘의 균형이 깨어져 있었기에


      A. 싸움은 항상 힘이 강한 쪽에서 일으킨다


              전쟁을 일으키는 쪽은 자신의 힘이 더 강함으로 상대방을 능히 제압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있어야 일으킨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해방 직후 남쪽은 북쪽에 비해 경제적인 면, 군사적인 면 등등, 모든 면에서 열세였다.


      B. 해방 직후 사상적인 동향은


              북쪽은 해방이 되자 소련 군정 당국의 지원 하에 바로 인민위원회를 조직한 후, 강력한 통제로 조기에 사상적 통일을 이루었다. 그와 반대로 남쪽은 우익 사상을 가진 자 보다 좌익 사상을 가진 자가 더 많았다.


              그 원인은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이다. 일제 통치 하에 있을 때,  독립 운동을 하던 우리 민족이 일경의 수배를 받게 된 경우, 여권(일본 여권)을 발부 받아 합법적인 방법으로 외국으로 도피할 방법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관계로 먼 구라파나 미주 지역으로는 전혀 나갈 방법이 없었음으로, 가출하는 형식으로 한만(韓滿) 국경을 몰래 넘어 만주(滿州), 중국, 소련 등지로 피신한 후, 그 땅에서 독립 운동을 수행하면서 그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듣고 배웠으니, 모두가 공산주의 사상과 정치 체제, 그들의 투쟁 방법 등을 배울 수밖에 ..........


              해방이 되자 그들이 환국 하면서 장차 우리나라의 정치 무대가 될 서울로 집중하였으니, 자연 남한 지역의 사상 동향이 좌경화 될 수밖에..........


나. 미국 방위선 상에서 한국이 제외되었기에


      1950년 1월 12일 미국 국무부 장관 애치슨(Acheson)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하면서, 미국은 태평양 지역의 방위선을 알류산 열도(Aleutian Islands), 일본 오키나와(おきなわ=沖縄), 필리핀 등을 연결하는 선으로 결정 하였다면서 한국은 이 방위선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을 발표하였다. 만약 한국이 외세로부터 군사적인 공격을 당할 경우에는, 먼저 한국 국민이 이에 대항하고, 그 다음 UN 헌장에 따라 조치하여야 한다는 정책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 후 남쪽에 있던 미군은 군사 고문단 500명 정도만 남고 모든 미군들이 철수하였다.


다. 종합하여 볼 때


      북조선인민공화국 당국자들은


            A.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이념을 가진 국가임으로,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을 십분 이용하여, 강력한 좌익 사상을 가진 많은 세포원들을 밀파하여 혼란을 조성하면서, 침공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에,


            B. 미국 방위선상에서 남한이 제외 되었으니, 침공하기에 아주 좋은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게 되었고,


            C. 소련과 중공의 동의를 얻고, 침공하면 남한에서 활동하는 많은 좌파 인사들이 동조할 것임으로,


            D. 미국이 군대를 파견해 오기 전에 자신들이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되어, 1950년 6월 25일 새벽 막강한 군사력으로 남침을 시작했던 것이다.


4.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되다

가. 막강한 북한군 전력에 밀리는 한국 지상군


        1950년 6월 25일, 북한 최고 실력자인 김일성은 소련과 중공의 승낙을 받은 다음,  25일 새벽 4시 20분, 고요히 잠자고 있는 우리나라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그 목적은 남한에 수립되어 있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인 대한민국을 뒤엎고, 공산주의 체제로 통일 하겠다는 목적이었다.


       그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육로로는 242대의 탱크를 앞세운 막강한 7개 사단의 병력이 북위 38도 선을 일제히 넘어 남하하기 시작하였고, 해상으론 게릴라 병력을 태운 북한 함정들이, 우리나라 후방 요소 요소에 게릴라 병력을 상륙 시킬 목적으로 국적을 가린 상태로 함정들을 남하 시킨 날이 바로 1950년 6월 25일이다.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되자, M1 소총과 칼빈 소총으로 경무장 하고 있던 한국 지상군은 총 한 방 제대로 쏘아보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하여, 6월 28일에는 수도 서울을 북한군에게 내어 주고, 다시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밀려가는 치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나. 전쟁 초기 북한군 진격에 제동을 가했던 전투


      전쟁이 일어난 6월 25일 새벽이었다. 우리나라 해군 묵호경비부는 북한군이 동해안 옥계(玉溪) 지역과 삼척 지역에 게릴라 병력을 침투 시킬 목적으로, 북한군 549 육전대 소속 1,800 여명과, 766 유격대 소속 1,300 여명을 태운 배가 내려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A. 새벽 5시 30분 경비부 요원으로 편성된 전투 부대를 명주군 옥계 남쪽 도직리로 급파하여, 이미 상륙한 적과 전투를 벌려 적 33명을 사살하였고,


              B. 새벽 7시 20분경에는 옥계 근해에 도착한 우리 해군 함정 YMS 509정이, 병력을 상륙 시킨 적함을 발견하고서는 교전을 벌려 적 주력함과 상륙정 1척을 격파하였으며, 발동선 1척을 나포하였다.


              C. 그리고 오후 3시경에는 옥계 북방 해안에 또 다시 병력을 상륙 시키려는 적함을 발견하여, 포격을 가함으로 적의 상륙을 저지하였다.


              D. 북한군이 강릉 지구에 게릴라 부대를 상륙 시키려는 목적은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한국군 8사단을 고립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이 작전으로 동해안을 통하여 남진하려는 적 지상군의 남진 속도를 크게 지연 시키는 효과를 얻었다.


다. 백두산함(PC 701)의 대한 해협 전투


      1950년 6월 25일 국적 불명의 선박이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우리나라 해군은, 당시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유일무이한 주력 함정 701함(백두산호)을 동해로 급파하여, 남하하는 선박의 국적을 확인하기 위해 계속 미행하다가, 드디어 북한 함정임을 확인 하고서는, 치열한 교전 끝에 6월 26일 새벽 대한해협(大韓海峽)에서 적함을 격침 시켰다.


     주:   필자가 쓴 더 자세한 다른 글 :(아래 문서 이름을 클맄하면 볼 수 있음)


                    본 교회 사랑게시판     #270   2012 03 15    한국 전쟁과 참전기


                    본 교회 사랑게시판     #347   2014 10 30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 손에


라. UN의 참전 결정


         A. 한국군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오랫동안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한 바 있는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을 통하여 UN에 눈물로 구원을 호소하였다. 그러자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즉각적으로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회의를 열어 "북한군이 대한민국을 무력 공격한데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이와 같은 북한의 행동은 평화의 파기이다........ 적대 행위의 즉각적인 중지를 촉구하고....... 북한 당국이 침략한 군대를 38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촉구"한다는 결의문 제82호를 찬성 9, 기권 1(유고), 불참 1(소련)로 채택하였다.


         B. 그럼에도 북한의 반응이 없자 6월 27일 다시 안보리는 "무력 공격의 격퇴와 그 지역에서의 국제 평화 및 안전의 회복을 위해 한국이 필요로 하는 지원을 권고"한다는 결의문 제83호를 다시 채택하여 회원국에 통보함으로써, 6월 27일 미군을 시작으로 연합군의 참전이 시작되었다.


         C. UN 안보리는 또 다시 7월 7일 회집하여 "효과적인 군사작전을 위하여“ 군사지원의 조정에 관하여 언급하기를, "UN 안보리 결의에 따라 병력 등을 지원하는 국가들은, 미국 지휘 하에 있는 통합 사령부의 지휘를 받으면서, UN의 깃발을 사용할 수 있다"라는 결의문 제84호를 채택하였다.


마.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


      1950년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UN군이 조직되어, 맥아더 장군의 작전 구상에 따라, 1950년 9월에 실시된  Xray 작전과, 인천상륙작전을 기만하기 위한 장사 상륙작전 그리고 본 작전인 인천 상륙작전이 실행됨으로써, 없어질 직전까지 이르렀던 우리나라가 회생하게 된 것이다.


      주 :  1. 필자가 쓴 더 자세한 다른 글 : (아래 문서 이름을 클맄하면 볼 수 있음)


                     본 교회 사랑게시판     #391    2017 01 18      인천상륙작전의 모티브인 Xray 작전


                     본 교회 사랑게시판     #390    2016 09 09    장사 상륙 작전


                2. 관련 동영상 : (아래 동영상 이름을 클맄하면 볼 수 있음)


                      10:08         '인천상륙작전' 설민석 강의 영상


                       46:47         잊혀진 상륙작전, 작전명 제174호


5. 6ㆍ25 전쟁 경과 일지

      6ㆍ25 전쟁의 실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중요한 사건들의 개요를 날자 순으로 정리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 소련과 중공의 도움을 받기로 약속한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242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7개 사단의 병력이 38선 전역을 넘어 기습 남침을 가해왔다.


      그리고 해상으론 우리 나라 후방을 교란 시키려고 동해 옥계 인근 해상으로 내려온 북한 함정을 교전 격퇴하였고, 또 부산 방향으로 남하하는 북한 게릴라 병력 수송함을 26일 새벽 대마도 인근 해상에서 격침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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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교회 사랑게시판    #347       2014  10  30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 손에


      1950년 6월 28일 : 전쟁이 시작한지 3일 뒤인 28일 서울이 북한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러자 국군 수뇌부는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 남쪽으로 진격할 것을 우려하여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경 국군 공병대로 하여금, 한강에 두개 밖에 없는 한강 철교와 한강 대교(인도교)를 모두 폭파 단절하였다.


      이 폭파가 진행될 때, 50대 이상의 차량이 다리 위에 있다가 폭파와 함께 파괴되었거나, 물로 떨어져 500명 이상의 피난민들이 희생되었다. 이로 인한 여론이 크게 악화되자, 폭파 책임자인 육군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적전 비행죄"로 체포하여, 1950년 9월 21일 전격 사형 집행 하였다. 억울하게 처형 당한 최창식 대령의 가족들이 제출한 재심 청구는 12년이 지난 1962년 무죄 판결을 받음으로 사후 명예가 회복되는 가소로운 일도 있었다.


      1950년 6월 29일 : 맥아더 장군이 은밀하게 한국을 방문하여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현황을 파악한 후, 트루만(Harry S. Truman) 대통령에게 현황을 보고하면서 지상군 투입을 요청하게 되었고, 트루만 대통령은 6월 30일 한국에 지상군 투입을 명령하였다.


      1950년 6월 30일 :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다시 남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1950년 7월 1일 :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8군 제24사단 제21연대 소속 제1대대(대대장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가 급거 부산으로 이동한 후 7월 5일 오산(경기 화성군 소재) 지역으로 올라와 북한군에게 대항하였는데, 540명의 부대원 중 150명이 전사 또는 행방불명이 되었고, 72명이 북한군에게 포로 되는 등, 크게 패했다. 다만 스미스 부대의 출동은 북한군의 남진을 6시간 동안 저지하는 효과밖에 내지 못했다.


      1950년 7월 7일 :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의결에 따라 한국 지원을 위한 UN군이 편성되었다.


      1950년 7월 17일 : 대한민국 정부는 UN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군에 대한 작전 통제권을 이양하였다.


      1950년 7월 20일 : 부산항을 통하여 속속 입국하는 UN군이 북한군에 대항하기 위해 투입되었지만, 전세는 여전 불리하기만 했다. 이 때 UN군의 주축인 미군은 죽미령(경기 화성군 오상 북방 소재)과, 천안, 금강 방어선에서 계속 북한군에 밀려 후퇴하였고, 대전에서는 미 제24사단이 북한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르던 중에 사단장인 딘(William Frishe Dean) 소장이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히면서 대전마저 북한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1950년 7월 25일 : 금강 전선과 대전이 또 북한군에게 넘어갔고, 병력 배치가 거의 없던 호남 지방은 그대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자 대구에 있던 수도는 다시 부산으로 긴급히 이전함으로써,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남쪽 동부에 있는 부산을 중심으로 남북 135km 동서 90km 정도의 좁은 땅만을 영토로 확보하고서는 최후 결전의 전투를 벌리고 있었다. 당시 미 제8군사령관은 낙동강을 따라 새로운 방어 전선을 설정하고, 미국 장병들에게 "더 이상의 후퇴는 있을 수 없으며 이제는 더 물러설 수 있는 곳도 없다. 그러므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950년 8월 5일 : 6ㆍ25 전쟁 중 가장 중요하고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多富洞 戰鬪)가 벌어졌다. 낙동강 방어선 가운데 대구 북방 22km에 위치한 다부동은 대구 방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충지로서, 만일 다부동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지형적인 문제 때문에 아군이 10km 남쪽으로 철수해야만 한다. 그러면 대구가 적 지상포의 사정권 내에 들어감으로써 전쟁이 크게 불리하게 된다. 그래서 북한군은 1950년 8월 5일 다부동 일대에 증강된 3개 사단을 투입, 약 21,500명의 병력과 T-34전차 약 34대와 각종 중화기 약 670문으로 공격을 가해왔다. 국군과 북한군 사이에는 거듭 거듭되는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거듭하다가, 8월 21일부터 국군 제1사단의 전황이 점차 유리한 쪽으로 전개되어 갈 때, 북한군 제13사단 포병연대장이 귀순함으로써 북한군의 전투 의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이 다부동 전투는 55일간이나 계속되었으며, 북한군 2만 4천 여 명과 국군 1만 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인명 피해를 냈다. 그 결과 당시 투입된 북한군 3개 사단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 주어,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6ㆍ25 전쟁사에서 다부동 일원에서 벌어진 전투는 국군의 위대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1950년 8월 18일-9월 15일 :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해군 첩보 부대원들이 벌린 인천 인근 항만 도서에 대한 Xray 작전이 수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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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교회 사랑게시판    #391    2017 01 18    인천상륙작전의 모티브인 Xray 작전


      1950년 9월 14일-3일간 : 5일간의 군사 훈련을 받은 작전 부대원 718명(군번도 없는 학도병=후일 장규군으로 임명 처리됨), 징발한 문산호 선원 44명, 그리고 통신부대원 8명, 작전부대장과 부관 각 1명 모두 772명이 9월 14일 새벽 동해한 장사리 해안으로 상륙하여 수행한 인천상륙작전의 시행을 기만하기 위한 상륙작전이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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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교회 사랑게시판    #390    2016 09 09    장사 상륙 작전


      1950년 9월 15일 :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UN군이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함으로써, 6ㆍ25 전쟁의 전세를 완전 뒤바꿔 놓았다. 낙동강 전선까지 남진하여 공세를 계속하던 북한군은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인천으로 상륙한 UN군은 9월 20일에는 한강을 건넜고, 26일에는 서울을 장악하였으며, 27일에는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 함으로써 수도 탈환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방어선에서 반격 작전을 수행하던 국군과 UN군은 9월 말까지 38선 남쪽에 남아 있는 북한군 잔당을 격멸 하였으니, 사실상 전쟁 이전의 상태로 회복하게 된 것이다. 이제 국군과 UN군이 38선에 접근하면서, 38선 돌파 여부가 새로운 문제로 대두 되었다.


      1950년 9월 말 : 38선을 돌파하고 북진 할지 여부가 문제로 대두 되었다. 북진을 찬성하는 자들은 전쟁을 일으킨 범죄자를 처벌하여야 하고, 또 UN의 목적인 한국의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북진해야 한다. 만약 여기에서 북진을 중단하면 북한군이 군사력을 재정비하여 다시 침략해 올 가능성이 있음으로, UN군의 참전이 장기화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북진을 반대하는 자들은 38선을 넘으면, 소련과 중공이 전쟁에 개입하게 됨으로써, 전쟁이 더욱 확대되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문제가 대두되자 UN군 사령부는 9월 29일 모든 부대에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을 일단 멈추라고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1950년 9월 말경 : 북한 측은 자기네가 틀림없이 승리하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전쟁을 시작하였는데,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사전 약속해 두었던 소련과 중국에 긴급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을 받은 중국 모택동은 10월 4일 비상 최고 군사 위원회를 긴급 소집하여, 일부 위원들의 반대가 있음에도 지원하기로 결정한 다음, 10월 18일 약 30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 병력을 북한으로 급파하기에 이르렀다.


      1950년 10월 1일 : 이에 대하여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이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은 국토 통일이어야만 한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낸 바 있고, "이번 기회에 침략자를 격멸하여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면서, 한국 국민에게는 이렇게 할 권리가 있다는 신념을 피력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은 “UN군 사령부가 어떻게 결정하든, 한국군은 진격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하고서는, 38선 지역에 대기하고 있는 국군 부대의 진격 명령을 정일권(丁一權) 육군 총참모장에게 내렸다. 그러나 정일권 총참모장은 작전통제권이 이미 UN군 사령관에게 이양된 상태임으로, 작전 지휘 상의 혼선을 막기 위해, 동해 전선 38선 바로 북쪽에 있는 고지를 전술적인 문제로 점령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워커(Walton Harris Walker) 장군에게 역설하여 동의를 얻은 다음, 10월 1일 최초로 동해 지역에 있는 국군 부대로 하여금 38선을 돌파 북진 시켰다.


      1950년 10월 7일 : UN 안전보장이사회의는 북한군의 군사력을 무력화 시키는데, 목표를 두고 참전을 결정한 것임으로, 이미 시행하고 있는 UN안보리의 결의가 곧 UN군의 38선 돌파까지 허용하는 법적 근거가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영국을 비롯한 8개국은 미국이 제출한 결의 초안 "한반도의 인위적인 분단을 해소하고 UN의 권능을 확립한다"는 내용의 안을 UN총회에 상정 시켜, 1950년 10월 7일 UN 총회에서 이 결의안이 압도적인 찬성으로 가결케 함으로써 북진이 공식화 되었다.


      1950년 10월 9일 : 10월 1일 정오, UN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 총사령관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성명을 방송하였으나 응답이 없었다. 10월 9일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새로운 결의안에 근거하여 또 다시 북한군의 항복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으나, 역시 아무런 응답이 없자, 10월 9일 전면적인 북진을 명령함으로써, 정체되어 있던 작전이 재개되었다.


      1950년 10월 25일 : 10월 18일부터 비밀리 압록강을 넘어 북한 땅으로 들어 온 중공군은 일주일 동안 산중에 매복해 있다가, 10월 25일부터 공세로 나오기 시작했다. 펑더화이(彭德怀)가 지휘하는 중공군의 병력은 실제 35만 명 정도의 막강한 병력이었고, 그 전법은 주간에는 미 공군의 폭격을 피할 목적으로 깊은 산악 지역에 매복해 있다가, 야간에 출몰하여 한국군과 UN 지상군을 기습 공격하는 전법, 게릴라 부대원들이 주로 쓰는 치고는 빠지는 전형적인 전술로 공세를 가해왔다. 처음 이와 같은 공세를 접한 UN군 지휘부는 중공군의 병력이 약 7만 명 정도라고 오판 하고, 그들에게 전술적인 취약성이 있는 것으로 단순하게 판단하면서, 중공군의 기습을 물리쳤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이에 반하여 중공군 지휘관인 펑더화이는 UN군의 전력을 시험 평가한 결과, "미군은 매우 강력한 무기를 많이 가지고 있지만, 도보 행군을 싫어하고, 또 야간 전투에는 약하고, 과도하게 공군 지원에만 의존 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후, 이를 십분 활용하면서 전쟁에 임하였으니, "적을 알고 자신을 알면 백전백승 한다"는 전술법으로 작전을 유리하게 이끌고 있었다.


      1950년 10월 26일 낮 2시 : 많은 중공군 병력이 평안남도 산중에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국군과 UN군은 38선을 돌파한 후 보름 만에 원수의 수도 평양을 점령하였고, 곧 이어 원산도 점령하였으며, 드디어 한만 국경 압록강까지 진격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고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


      1950년 11월 2일 : 미군을 중심으로 한 UN군은 뛰어난 화력과 많은 폭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미군의 강점과 약점을 십분 이용하여 주로 야간을 이용하여 나팔을 불고, 북과 꾕가리를 치면서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고 있으니, UN군 병사들은 심리 작전에 전의를 잃고, 뛰어난 화력과 공군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계속 후퇴하였다.


      1950년 11월 24일 : 서부전선의 청천강(淸川江) 유역에서는 워커 중장이 지휘하는 약 25만 명의 UN군(미 8군과 한국군, 터키군 포함)과, 약 23만 명의 중공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중공군은 미군은 개인 화기가 강하고 노련하기 때문에, 전쟁 경험이 적고 화기가 취약한 한국군을 집중 공격 함으로써, 드디어 한국군 진영이 뚫리면서, UN군의 최전선 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미 8군은 포위 당하지 않기 위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후퇴는 서울을 다시 북한군에게 내어주는 1.4후퇴까지 이어졌다.


      1950년 11월 26일 : 동부 전선 장진호(長津湖=함경남도 개마 고원 소재) 지역에서는 미 해병 1사단이 북한의 임시 수도인 강계(江界)를 점령하려고 진격하다가, 쑹스룬(宋時輪)이 지휘하는 중공군 7개 사단(약 12만 명)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이 작전에서 미군은 10배나 더 많은 병력을 상대로 싸우면서 포위망을 뚫고 나와야 하니 상상을 초월한 어려운 전투를 수행했었다. 약 2주간의 치열한 전투로 피아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눈보라가 치는 혹한을 이기면서 힘겹게 포위망을 뚫고, 12월 13일 동해안 흥남(興南, 함경남도)으로 탈출한 후, 많은 피난민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선편으로 철수했다.


      1950년 12월 6일 : 중공군과 북한군은 아군에게 빼앗겼던 북한의 수도 평양을 아군이 후퇴함에 따라 쉽게 들어갔다. 그 후 북한군과 중공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12월말에는 개성을 지나 38선을 넘어 남하하였다. 이로서 북진 통일의 가능성이 높던 전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1950년 12월 23일 : 미 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은 의정부 지역에서 전투하고 있는 미 제24사단을 독려하고 다시 다른 부대로 가기 위해 의정부 문산 간 도로를 한국 군인이 운전하는 지프차를 타고 달리던 중, 전방 지역에서 급하게 후퇴하는 한국군 트럭과 정면 충돌하는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이 사고로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 중장이 그의 후임으로 미 8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51년 1월 4일 : 흥남 철수 작전이 성공할 무렵, 서부 전선에서도 중공군에게 밀린 UN군과 국군이 38선까지 밀렸다. 1951년에 접어들면서 중공군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고, 서울이 중공군에게 곧 넘어갈 것이라는 소식이 널리 퍼지자, 서울 시민들 대부분이 피난 길에 올랐다. 두 번째 후퇴하는 피난 길은 얼어붙은 한강 위로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고, 그들이 떠난 서울은 적막의 도시로 변하고 말았다.


      1951년 1월 : UN 공군은 계속해서 북한군과 중공군의 보급로를 공격하였고, 그로 인하여 공산군은 공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UN군은 공산군의 보급원을 완전히 끊기 위해 계속 북한의 공장 지대와 주요 도시인 평양, 원산에 폭격을 가했다.


      1951년 1월 23일 : 서부 전선에서는 미 8군이 공세를 가하기 시작하여, 한강 이남까지 내려왔던 중공군을 한강 이북으로 내 몰았고, 동부 전선에서는 2월 11일 미 10군단의 공세로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여기에서도 중공군은 약체인 한국군에 집중 공세를 가함으로, 한국군 제8사단이 이 전투에서 완전 무너지는 참사를 당하였기 때문에, 계획하고 있던 라운드업 작전(Operation Round Up)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1951년 2월 13일 : 지평리(경기도 양평군 소재) 전투에서는 중공군의 많은 전력이, 미 2사단과 프랑스 대대와 공방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압도적인 미 공군의 지원으로 중공군의 전력이 크게 약화됨으로써, 이 지역은 중공군에게 빼앗기지 않고 지켜냈다.


      1951년 2월 : 중공군은 이에 맞서 2월에 대공격을 감행했지만 UN군은 미 공군의 지원으로 선방 했다.


      1951년 3월 : 1951년 3월 15일 UN군은 서울을 다시 점령하였고, 전세는 계속 UN군 쪽으로 유리하게 기울었다. 그렇게 되자 UN의 휴전 압력이 거세지자, 중국은 휴전 협상에 응하기 시작했다.


      1951년 4월 11일 : 맥아더 장군은 트루만 대통령에게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였으니,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중국에 대하여도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대응하여야 한다면서 트루만 대통령과의 사이에 마찰을 빚은 바 있다. 이로 인하여 맥아더 장군은 1951년 4월 11일 UN군 사령관직에서 전격 해임되었고, 그 후임에 리지웨이 장군이 임명되었다.


            맥아더 장군이 트루만 대통령에게 건의했던 내용 :


               1. 미 해군은 중국의 해안을 봉쇄하고,  2. 중국 본토를 폭격하며,  3. 대만에 있는 장개석 군대를 참전 시키고,  4. 원자탄 사용도 고려한다.


      1951년 4월 이후 : 전쟁은 소강상태로 유지되기 시작했다.


      1951년 8월 13일 : 단장의 능선 전투(斷腸의 稜線 戰鬪)는 1951년 8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사이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과 동면 지역에서 한국군과 미국 2보병 사단, 프랑스 대대, 그리고 네델란드 대대가 중동부 전선의 주 저항선을 강화할 목적으로 894고지, 931고지, 851고지에 배치된 중공군과 북한군 제6, 11사단을 공격하여, 그 고지를 점령하기까지 치열하게 벌어졌던 전투로, 많은 피를 흘린 전투였기에 그 이름을 "단장의 능선 전투"라고 부르고 있다.


      1952년 10월 6일 : 6ㆍ25 전쟁사에서 유명한 백마 고지 전투가 전개되었다. 철원 평야 북쪽 효성산에 있는 395고지에서 국군과 중공군이 벌린 전투이다. 395고지는 철원을 방어하고 서울로 통하는 주요 보급로를 장악하는 데 꼭 필요한 전술 요충지였다. 이 때문에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국군과 중공군은 서로 이 고지를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고, 국군 제9사단은 중공군 1만 3천 여 명을 격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395고지는 국군과 중국군의 집중 포격으로 그 모습이 변했기에, 백마고지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국군 보병 제9사단은 이 전투를 계기로 백마 부대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1953년 4월 20일 : 1953년 4월 20-26일 부상병 포로 교환이 이루어졌다.


      1953년 6월 8일 : 포로 송환 문제가 완전 타결되었다.


      1953년 6월 18일 :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의 동의 없이 반공 포로를 전격 석방하였다. 1953년 6월 8일 이승만 대통령은 원용덕(元容德) 헌병 총사령관을 은밀히 불러, 포로에 관한 제네바 협정 내용을 검토케 한 다음 반공 포로 석방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은 1953년 6월 9일 반공 포로 석방 계획을 수립한 다음, 거사 일을 6월 18일 0시로 결정하고 각 지구대 별로 밀사를 파견하여 작전 명령을 하달하였다. 1953년 6월 18일 0시, 37,000명의 포로 가운데 27,092명의 반공 포로들이 일순간에 석방되었고, 정부에서는 반공 포로 석방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국 정부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거세 문제까지 거론했다는 후문이 있다.


      1953년 7월 13일 : 휴전이 임박하였을 때 중부 전선에서 벌어진 금성(김화군 근동면과 화천군 간동면 지역) 전투가 있었다. 이 전투는 금성 지역 북방에 위치한 중공군이 6ㆍ25 전쟁에서 그들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세계에 과시하려는 정치적인 목적과 중부 전선에 돌출되어 있는 한국군 전선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할 목적으로 국군 5개 사단(수도사단, 제5사단, 제6사단, 제8사단, 제11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금성 지역 돌출부에, 중공군 4개군(제24군 제60군 제67군 제68군) 산하 12개 사단의 병력을 동원하여 공세를 가해왔다. 7월 13일 국군은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금성 돌출부의 양견부가 무너졌고, 뒤이어 후방의 지휘소가 중공군의 기습으로, 금성천 남쪽 백암산과 주파령, 적근산 부근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7월 16일부터 국군 제 2군단이 반격 작전을 전개하여, 미 제8군의 공격 목표인 아이슬랜드 선(간진현-금성천-462고지)으로 진출한 상태에 머무르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 정전협정이 조인 되었다.


6. 정전(停戰)을 맞이한 필자의 심경

가. 정전되던 순간 전선에서 느낀 심경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다가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때 필자는 초계함(PC 705=한나산함)을 타고 동해 거진 앞 바다에 있는 알섬(卵島) 인근 해상을 초계하고 있었다. 아침 10시에 정전 협정이 조인되었고, 밤 10시에 전쟁이 종료되었다. 비록 아침 10시 정전 협정서가 조인 되었지만, 해가 질 때까지 전선에서는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계속 포성이 요란한 가운데서 육해공 모두가 숨 가쁘게 움직이는 전쟁이 계속 되었다.


      27일 초저녁이었다. 필자가 승조한 함정이 전투를 계속하고 있는 인근 지상과 해상은 완벽한 등화관제로 어두움이 깔려 있었다. 오직 불빛이라고는 음력 6월 17일의 달빛만이 주위를 비춰주고 있을 뿐이었다. 필자가 탄 함정은 명령에 따라 알섬 주위를 뱅뱅 돌면서 야간 초계에 임하고 있었는데, 전투가 종료되는 밤 10시가 가까워지자 함내 무전실에서는 라디오를 틀어 놓고 10시 시보를 기다렸다. 10시 시보가 울리자 함장의 명에 따라 굳게 닫혀 있던 함정의 문들이 활짝 열림으로 등화관제가 해제 되었다.


      밖을 내다보니 주위에 있는 모든 함정과 지상에 있는 건물들도 일제히 등화관제를 해제한 관계로, 지상에 있는 건물의 불빛도 보였지만, 그 보다 더 놀라운 것은 해상에 떠 있는 모든 함정들이 일제히 항해등을 점등한 까닭에 좌우현(左右舷)에는 적(赤)등과 녹(綠)등, 그리고 마스트(Mast)와 함미(艦尾)에는 항해등과 한미등이 점등 됨으로써 온 바다가 울긋불긋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 순간 필자의 눈에서는 감격과 기쁨의 눈물이 흘러나왔고, 주변에 있던 전우의 입에서도 "이젠 살았다"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치열하던 전쟁은 끝났다. 전쟁이 계속되던 그 동안 어떻게 지나 왔던가? 살을 파고드는 겨울의 찬바람과도 싸워야만 했고, 또 험한 태풍 속에서 우리 함정을 삼킬 것 같은 풍랑을 뛰어넘으면서 항진할 때는 얇은 3부 철판에 생명을 의지해야만 했다. 때로는 먹은 것을 토하면서 .........., 때로는 밤을 새우면서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 최전선에서 수행되는 작전 중이라 소리도 내지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주여 지켜 주옵소서"를 수도 없이 외치면서 .........., 입대할 때 겨우 17세이던 소년이 어느덧 20세의 풋내기 청년이 되어 있던 정전되던 순간이었다.


나. 정전 후 실의에 빠지게 된 필자의 심경


      이제 정전이 되었으니, 위기 속에 빠져있던 나라도 점차 안정이 될 것임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입대한 나와 같은 청소년들을 사회로 돌아가게 하여 각자 각자가 삶의 길을 열 수 있도록 해 주겠지 .........., 이와 같은 희망 속에서 제대하는 것을 기대했지만 믿을 수 없는 김일성 때문에 ........., 제대 신청을 받지 않음이 계속되는 것으로 보아, 희망의 불빛은 점점 흐려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사람은 자라날 때가 있고, 또 공부할 때가 있으며, 꿈을 이루기 위해 애 쓸 때가 있고, 꿈을 이루어 기쁨을 누릴 때가 각각 따로 있다. 그렇지만 나와 비슷한 또래의 전우들은 한창 공부할 나이에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하여, 전쟁터에서 공부할 시기를 넘기고 말았으니 .........., 다시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게 될지? 행여나 그 꿈이 물거품이 되어 멀리 멀리 날아가게 되지는 않을지? 그와 같은 근심 걱정이 나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좌절 속에 깊이 빠진 가운데 매월 한 차례씩 PCEC 52함(명량함)을 타고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북방 한계선(北方限界線=Northern Limit Line)을 초계하게 되었으니 필자의 생각 속에는 군대 생활에 대한 실증이 날로 더해가고 있었다.


      1957년 3월 9일 결혼도 하였으니 이젠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음에도 부양 가족을 책임지지 못하고 아내를 처가에 맡겨두고 전선과 진해 모항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한심하기 그지없는 무능한 인간이 되었음을 느끼게 되었다.


다. 주님께서 바로잡아 주신 필자의 생각


      제대가 계속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신명기 32장 39절에 기록되어 있는 주님의 말씀이 나의 고막을 울리는 것이었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러자 나의 마음속에서는, 같은 날 해군에 입대하여 함께 훈련 받은 1000여명의 동기생들이 해병대로 넘어가서 인천상륙작전을 위시하여 인천 상륙, 통영 상륙, 여수 상륙, 원산 상륙작전 최선봉에서 총을 들고 싸우다가 유명을 달리한 까닭에, 지금 약 3분의 1 정도만이 살아남았다는 것을 생각 하고서는, "내가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간 주님께서는 이 천한 것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면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 주셨고, 또 홍해도 육지같이 건널 수 있게 인도하셨고, 막강한 적군도 물리쳐 주셨으며, 날아오는 포탄도 비켜가게 하셨고, 바다에서 두둥실 춤을 추면서 나를 죽이려고 떠도는 기뢰의 위력도 꺾어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들을 깨닫게 되면서, 주님께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면서 실의는 점점 사라지고 주님께 대한 감사와 믿음만이 굳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드디어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얻으면서 희미하던 희망의 불빛이 점점 밝아오기 시작했다. 1957년 5월 말 한미 연합 해상 훈련에 참가하게 되었다. 내가 탄 유조선 O-3함(천지함)은 훈련을 마치고 6월 20일 모항인 진해에 돌아오니, 6월 5일자로 소망하던 필자의 제대 명령(해본특명 갑 제83호)이 발령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선 6년 10개월 동안 필자로 하여금 나라를 지키는 파수꾼으로 묶여 있게 하셨다가, 드디어 자연인으로 돌아가게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확인 되었다.


7. 전쟁으로 인한 피해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전쟁은 3년 1개월 동안 치열한 공방이 계속되면서, 전선이 남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북상하는 등의 밀고 밀리는 현상을 몇 차례 반복 하다가,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은 일단 멈췄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또 실종되었으며, 어떤 이는 큰 부상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사는 이도 생겨났다. 그리고 어떤 이는 과부가 되었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갑작스레 고아가 되었으며, 의지하던 자식을 잃은 노인들은 고생 길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쓸쓸하게 여생을 보내야 하는 기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 뿐만이 아니다. 피 땀 흘려 이룩했던 집과 재물들을 순식간에 잃고서는 절망 속에서 재기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 아름답던 마을과 거리들이 폐허처럼 변하여, 곳곳에서 곡성(哭聲)과 한숨이 흘러나오게 되었으며, 후하던 인심은 야박하게 변하였으니, 사람들의 인간성까지 변하게 만든 것이 바로 전쟁이 아닌가 싶다. 3년 1개월의 전쟁이 이와 같이 엄청난 피해를 우리 민족에게 안겨 주었다.


가. 국군과 UN군의 인명 피해


      6ㆍ25 전쟁이 시작될 당시 우리 국군의 수는 10만명이 채 안 되었음에도, 국군 사망자 수가 137899명이라는 것은, 국군의 인명 피해가 심각했다는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참전한 UN군의 총 전사자  178689명, 부상자 555022명,  실종자 28611명, 포로된 자  14158명이다. 그 중에서 미국 군인의 피해자가 36940명으로 참전국 가운데서 가장 크다는 것은, 미국이 한국과의 군사 동맹을 가장 강하게 맺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대목이다.


      세계 제2차 대전부터 미국이 수행한 4대 전쟁 가운데, 6ㆍ25 전쟁 때 가장 많은 인명 손실을 당했다는 사항을 우리는 꼭 알고 넘어가야 한다. 미군은 6ㆍ25 전쟁에서는 9명 중 1명꼴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13명 중 1명꼴로, 베트남 전에서는 17명 중 1명꼴로, 걸프전에서는 5명 중 1명꼴의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 장군의 아들들 142명이 6ㆍ25 전쟁에 참전하였는데, 그 중 35명이 희생되었다는 점에 대하여도 유념해야 할 사항이다. 참고로 북한을 지원한 중공의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도 6ㆍ25 전쟁 중에 죽었다고 한다.


      UN군으로 우리나라를 도운 국가는 군사적인 지원국 16개국, 의료 지원국 5개국,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지원한 2개국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들에게 고마움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나라 정치인과 국민들 가운데 일부는 위기에 처해 있는 우리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국민의 많은 생명을 희생 시키면서 우리나라를 구해 준 미국을 별의 별 말로 헐뜯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이 헐뜯는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북한 위정자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일치하기 때문에, 그들을 가리켜 종북자라고 말하는 것임으로, 결코 잘못된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은혜를 받았으면 고마워 할 줄 알아야지, 은혜를 원수로 갚겠다는 배은망덕의 행위이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 민간인의 피해


      군인들은 국방의 의무를 책임지고 있는 자로 맡은 바 직무를 수행하다가 당한 피해자이지만, 민간인들은 직무와 전혀 상관없이 당한 피해이기에,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 중에서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어린이와 부녀자들이 당한 피해이다.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곳을 지나가다가 무참히 사살된 자, 폭격을 당하여 죽은 자,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은 자, 쌍방 군인들에게 강간을 당한 부녀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어린이, 눈보라가 휘날리는 추위 속에서 의지할 자 없어 울다가 얼어 죽은 어린이, 그 뿐만이 아니다. 전쟁터에 출전한 군인이 전사 또는 실종됨으로써 과부가 되었고 고아가 된 자, 부양해 주던 아들을 잃음으로 밑바닥 생활로 전락한 노인, 그리고 의지하고 살던 집과 재물들이 모두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가정, 그 피해의 유형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다양하다.


      전쟁 발발 당시 남북한의 인구가 3000만명(남=2000만명 + 북=1000만명)이 채 되지 않았는데, 그 중 8.4%에 해당하는 약 250만명이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이들이 당한 아픔과 슬픔은 피해 당사자인 8.4%인 250만명만의 불행이 아니고, 가정적인 면과 혈연적인 면에서 생각해 보면, 전 국민이 피해자이고 모두가 당한 아픔과 슬픔이라고 생각된다.


다. 한국이 입은 물적 피해


      피해액은  410,589,759,000환으로  미화로 환산하면 2,281,054,217 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라. 침략자들의 인적 피해 


    침략자인 북한 측의 인적 피해에 대하여는 북한에서 정확하게 발표한 것이 없다. 그러나 약 60만명에서 80만명의 희생자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침략자를 지원한 중공군의 피해는 중국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약 40만명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부상자까지 합하면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90만명 정도에 이르지 않을까 생각된다.


8. 어느 쪽이 승자이고, 어느 쪽이 패자인가?

가. 일반적인 면에서 볼 때 전쟁이 끝날 때는 승자와 패자가 밝혀진다


      동서고금 어느 때를 막론하고 어떤 유형의 조직이든, 두 사람 이상 모인 곳에는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 이유는 인간 각자의 생각이 다른데다, 자신의 생각하는 바가 이루어질 때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결과가 오게 될 것이라는 고집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다툼으로 나타난다.


      그런 연유로 생긴 다툼의 규모가 작을 경우에는 언쟁이나, 비난으로 나타나지만, 그 규모가 좀 더 커졌을 경우에는 주먹다짐이나 패싸움으로 번질 것이고, 그 규모가 더욱 커지면 당쟁으로, 반란으로, 쿠데타로, 전쟁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와 같은 다툼이 지나간 곳에는 크고 작은 피해가 생긴다. 그리고 다툼이 끝날 때는 한쪽은 승자가 되어 자신이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되겠고, 다른 한쪽은 패자가 되어 다툼으로 인하여 생긴 승자의 피해를 배상해야 하고 또 행위에 상당한 벌을 받는 것이 일반적인 세상의 관례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승자의 주장이 모두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힘 있는 쪽이 승리하기 때문에, 때로는 승자가 주장한 바가 선이 아니고 침략자의 야심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왕위를 찬탈하는 행위는 9족을 멸하는 대역죄이다. 어린 단종대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은 분명 행위로 보아서는 대역죄인이지만, 금상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 막강한 힘의 소유자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벌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까지 생겨난 것이 아닐까?


나. 패자에게 가하는 관례


      전쟁이 끝나면 승전국에서는 패전국에게 전쟁으로 인하여 입은 피해 배상을 요구하고, 다시는 그와 같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자에 대한 형사적인 책임을 묻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다. 그 예를 들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는 독일에게 금전적인 피해 보상금을 청구한 바 있고, 또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국제 군사 법정 심리와 판결을 거쳐, 일본국의 전쟁 주도 A급 전범자 도죠 히데키(とうじょう ひでき-東條 英機-65) 등 7명은 교수형에 처하였고, 그 외 B, C급 전범자에 대하여도 그들이 행한 행위에 따라 각각 그 책임을 물었다. 그리고 청일 전쟁(淸日戰爭)과 노일 전쟁(露日戰爭)은 일본의 침략적인 전쟁이 분명하지만, 양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나라로부터는 타이완(Taiwan=臺灣)과 요동 반도(LiÁodōng=遼東半島)를, 러시아로부터는 사할린(Shkhalin) 섬의 북위 50도 이남 땅과, 쿠릴열도(Kuril Islands)를 받아, 일본의 영토로 만든 적이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바 있거니와,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주장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지만, 세상 관례는 이와 같이 처리 된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 6ㆍ25 전쟁 남북 당사국은 어느 쪽이 승자인가?


      6ㆍ25 전쟁은 1953년 7월 27일을 기하여 사실 상 총성을 멈추었다. 그러나 종전이 아니고 정전이 성립된 것이다. 남북 공히 전쟁으로 인하여 경제적인 면에서는 엄청난 피해를, 그리고 인명 피해 역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상자와 실종자가 발생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그에 대한 책임 유무를 전혀 따질 수도 없고, 또 전쟁 범죄자에 대한 처벌조차 요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이 전쟁으로 인하여 입은 피해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남북 모두 각자가 책임지고 해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전쟁에는 승자는 없고, 모두가 패자일 뿐이다.


라. 6ㆍ25 전쟁을 지원한 나라들 사정은 어떠한가?


      6ㆍ25 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을 지원한 나라는 모두 23개국(16+5+2)이고, 북한을 지원한 나라는 2개국이다. 미국을 비롯한 민주주의 국가들은 민주주의를 국시로 삼고 있는 대한민국을 죽이지 않고 살렸고, 또 소련과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인 북조선인민공화국을 죽이지 않고 살렸을 뿐이다. 25개국 모두가 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자신들의 부담으로 지금까지 지내고 있으니, 이들 역시 승자는 아니고 모두가 패자라고 생각된다.


9. 6ㆍ25 전쟁과 관련하여 생각되는 사항

가. 6ㆍ25 전쟁을 일으킨 자에 관하여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이유는 전쟁이 일어나면 죽음과 아픔과 눈물과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킨 자는 항상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일 뿐, 그 옳고 그름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옳다고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6ㆍ25 전쟁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는 UN이라는 객관적인 국제기구가 북한이 불법으로 남한을 침략하였으니, 피침 당한 한국을 UN에서 돕겠다고 공식적인 결의를 거쳐, 여러 나라가 한국을 구하기 위해 참전했던 것임으로, 북한이 불법적인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 결정에 따라 UN 회원국의 많은 병력이 한국으로 파견되어 왔었다. 그러나 북한군과 중공군의 전력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전쟁은 쉽게 종료되지 않고, 3년 1개월 동안 계속 되다가, 정전한다는 협정으로 일단 총성은 일단 멈추었다. 그런데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아픔과 고통을 당하고 있다.


      1963년 10월 19일 강원도 인제에서 고재봉이라는 사람이 한 군인 장교의 가족 5명을 도끼로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언론과 세인들은 그를 가리켜 "살인마"라고 일컬었다. 그렇다면 6ㆍ25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명에게 참혹한 죽음을 안겨주고 고통과 슬픔을 가한 자를 어찌 "살인마"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오늘 날 대한민국 국민들 가운데는 UN 산하 여러 나라의 도움을 받아 회생한 대한민국에 살면서 큰 자유와 혜택은 마음껏 누리면서,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준 은혜의 나라를 헐뜯을 뿐만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킨 자를 "살인마"라고 부르기는커녕, 그를 "위대한 장군" 이니, "위대한 수령"이라고 찬양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 6ㆍ25 전쟁을 통일 전쟁이라고 하는 말이 과연 옳은 말인가?


      인터넷에 들어갔더니 어느 대학 교수가 올린 글을 읽게 되었다. 그가 말하기를 “분단된 우리나라가 통일됨에 있어서는 북한이 이루려는 적화 통일도 있고, 남한이 이루려는 녹화 통일도 있다”고 전제한 다음, “통일을 위한 수단 방법에는 전쟁을 통한 통일도 있고, 평화롭게 이루는 평화 통일”도 있다고 말한 후, 6ㆍ25 전쟁 역시 통일을 목적한 전쟁이기 때문에 통일 전쟁“이라는 주장이었다.


              A. 국제기구인 UN에서 6ㆍ25 전쟁은 북한이 자행한 불법적인 전쟁이라고 이미 규정한 바 있고,


              B. 또 통일 전쟁이라는 주장은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인 북한의 지도자들이 전쟁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억지 주장이고,


              C. 통일 전쟁이라는 명칭 부여는 남북한 모든 주민들을 상대로 투표를 통하여 얻어진 것도 아니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부여한 역사가들의 견해도 아니다.


              D. 승자의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아닌 것도 분명하고, 또 북한이 승자도 아니다.


      그럼으로 통일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쟁 범죄자들의 일방적인 주장을 추종하는 것으로, 절대 동의할 수 없는 것임을 밝히는 바이다.



다. 남과 북 중 어느 곳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곳인가?


      해방 직후 필자가 서울에서 공부할 때 확인하기를


              A. 일제 식민 치하에서 해방될 때, 남북 간의 경제 수준은 북쪽이 남쪽 보다 훨씬 높았다. 그럼에도 해방 직후 경제적인 면에서 잘살 수 있는 북쪽 땅에서 왜 살기 어려운 남쪽 땅으로 많은 사람들이 봇다리 짐을 싸 들고 넘어왔을까? 그것은 북한이 사람 살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고사항 : 1950년말과 2015년 말   남북한 국민소득 대비  (남한 : 북한)


                               1950년말 :   $39.00 :  $137.00,            2015년말   $25100.00 : $1117.00

              B. 해방 직후 남한 땅에서 북한 땅으로 넘어간 자도 있다. 그렇지만 북한 땅에서 남한 땅으로 넘어온 자들이 훨씬 많다. 


              C.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북한 인구 보다 남한 인구가 더 많았는데, 지금은 그 차이가 더 벌어진 것이 바로 이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6ㆍ25 전쟁을 전후하여 왜 많은 사람들이 북한 땅으로부터 남한 땅으로 이주해 왔을까? 그 이유는 신앙의 자유가 있는 곳, 자유가 있는 곳,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을 찾은 결과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분명하다.


                              2016년 10월 16일 시사정보에서 발표한 남북한 인구 대비표에 의하면, 


                                   1950년 말    인구수           남 : 북            1921만  :  1055만


                                   2015년 말    인구수            남 : 북           5062만 : 2478만


                D.  오늘 날 전 세계의 사상 동향을 살펴보면, 한 때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소련 연방은 해체되어 없어졌고, 사회주의 체재 국가는 점점 없어져 가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한 마디로 말해 나쁜 것은 자연 없어지고, 좋은 것만이 지속되는 자연 원리에 따른 것이다. 이는 바로 자유 민주주의 체재가 사회주의 체재 보다 좋다는 증거이기에 그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고 본다.


      북한 지도자급 인사들의 주장은 통일을 위해 일으킨 전쟁이라고 말하지만, 그 내막적인 목적은 남한을 침략하여 공산 체제로 통일한 다음, 더 많은 인구를 종 같이 부리면서 그 위에서 군림해 보겠다는 야심 속에서 6ㆍ25 전쟁을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으로 통일 전쟁이라는 주장은 도저히 받아 드릴 수 없고, 북한이 일으킨 6ㆍ25 전쟁은 북한의 침략 전쟁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라. 전쟁은 단결해야 이길 수 있다


      전쟁을 이기려면 단결해야 하는데, 우리 민족은 단결력이 매우 약하다. 이조 500년 후기인 선조 때, 이조정랑(吏曺正郞=조정에서 인사 업무를 담당하는 정5품)을 임명할 때,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 중 누구를 임명하느냐의 대립으로부터 당쟁이 시작되어, 이 당쟁이 점점 자라나 조선 말엽이 가까워졌을 때는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등으로 갈기갈기 찢어져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끄집어 내리고, 자기들이 권력을 장악할까?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피범벅이 되기까지 싸움질을 했다.


      당쟁이 계속되니 자연 국력이 약해질 수밖에 .........., 이 당쟁이 몰고 온 결과가,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일본 제국에 먹혀 버림으로 우리 한민족은 35년 동안 일본의 착취 아래에서 고통 당하는 민족적인 서러움 속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옛날 어느 일본 사람이 한국 사람들을 두고 평하기를 "한국인 한 사람이 일본인 열 명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인 열 명은 일본인 하나를 당해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는 한국인은 우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단결력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해방 직후 우리 민족의 사상적 분열이 너무나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에, 1948년 정부가 수립된 후,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는 사상적인 분열로 큰 혼란에 빠져 있는 조국의 안정을 이루기 위해, "뭉치면 살고 헤치면 죽는다"면서 단결을 호소한 적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초등 교육을 받은 필자는 자연 일본 역사를 국사라고 배울 수밖에 ........., 그 때 배운 유명한 이야기 한 가지가 기억됨으로 여기에 소개하려고 한다.


      16세기 일본 무라마찌(むろまち=室町)시대 후기로부터 센고꾸(せんごく= 戰國) 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쥬고구(ちゅうごく=中國) 지방에서 센고꾸 다이묘(せんごくだいみょう=戰國大名)로 이름을 날린, 모리 모토나리(もうり もとなり=毛利元就)라는 명장(名將)이 그의 아들들에게 교훈한 유명한 이야기다. 어느 날 그는 아들 셋을 불러 놓고 처음에는 각각 화살 한 대씩을 꺾어 보라고 하였더니, 모두 어렵지 않게 꺾었다. 그 다음에는 셋을 다발로 만들어 꺾어 보라고 하였더니, 아무도 꺾지 못했다. 그는 자식들에게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이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은 넘보기는 쉽지만, 너희 모두가 힘을 합치면 너희들을 결코 넘보지 못할 것이다". "한 개의 화살은 약하지만, 뭉치면 강하다면서, 너희들도 이처럼 결속을 다져 가문을 부흥시켜야 하느니라"고 말한 유명한 교훈이 있는데, 이를 가리켜 산시 교꾼죠(さんし きょうくんじょう=三子 敎訓状) 또는 미쓰야노 오시애(みつやのおしえ=三矢の訓) 라고 말한다.


      오늘 날 우리 조국의 실태를 살펴보면, 정치계뿐만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조선 말엽 사색 당쟁하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정권을 잡은 다음, 칼날을 휘둘려 상대방을 없이 할지 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만약 우리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이 각성하지 않고 현재의 모습 그대로 나아간다면, 북한을 비롯한 주위에 있는 많은 침략 외세들에게 언제 먹힐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란 찬(贊) 반(反)이 숙의하여 새로운 안(案)인 합(合)을 도출해 내고, 또 다시 찬반이 새로운 합을 도출하면서 발전을 거듭해야 한다. 그런데 극단적인 당쟁으로 싸우고만 있으니, 또 다시 새로운 6ㆍ25의 밤이 언제 닥쳐올지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아무쪼록 정치인을 비롯한 국민 모두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국력 신장에 힘을 기우려 다시는 독재자 김정은이나, 주위에 있는 외세에 침략 당하여 압박 받는 일이 절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마. 국민과 국가와의 관계


      강력한 국가가 있어야 나(我)라는 개인의 인권이 보호 받을 수 있고, 행복이 지속 될 수 있다. 그럼으로 나에게는 힘 있는 국가가 있어야 하고, 힘 있는 국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집을 버리고 모든 국민이 뭉쳐야 한다. 그런 까닭에 미국에서는 미국 시민이 되기 위한 시민권 인터뷰 때, "전쟁이 일어나면 총 들고 전쟁터로 나가 싸우겠느냐?"를 질문하고, 그 질문에 "Yes" 라고 답하지 아니한 자는 탈락 시키고 있다.


      국가의 안보는 국민의 의무이기도 하고, 또 그 만큼 중요한 것임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의 현재 사정은 어떠한가? 군 입대 영장이 나올 시기에 이른 아들이 있는 자는, 어떻게 하면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고 빠지게 할 수 있을까?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뛰어 다니는 현실이다.


      통계상으로 볼 때, 그 결과가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정치인의 아들, 고관들의 아들, 돈 많은 사람들의 아들들이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병역 의무를 면제 받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으니, 이는 사회적인 큰 병패가 아닐 수 없다.


      1950년 6ㆍ25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징병 연령에 해당하지 아니한 소년들까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쟁터로 뛰어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17세의 소년이었던 필자도 입대 지원서를 작성 제출한 후, 언제 죽을 지 알 수 없는 총알이 쏟아지는 곳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갔던 것이다.


      현재는 정전 중인 관계로 가끔 국지적인 충돌이 있기는 하나 그 때처럼 위급한 경우가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군대 생활의 여건 역시 그 때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었다. 1950년대 군대 생활과 오늘날의 군대 생활을 비교해 보면, 쌍놈의 생활과 양반이 사는 것처럼 그 차이가 엄청나다.


      필자가 입대한 1950년 8월, 당시는 국토의 거의 다가 북한군 수중에 들어갔기 때문에, 부식용 농산물을 어디서 조달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하루 세끼 식사는 끼니마다 콩나물국 한 그릇과 밥 한 그릇 그것이 전부였다. 거기에다 걸레같이 너덜너덜 헤진 군복을 입고 참전하였으니, 오늘날과는 천양지차다. 지금의 군 복무 환경은 옛날에 비해볼 때 크게 향상되었으니,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국가 안보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하고 국민 모두가 이에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10.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사항

우리 나라가 북한 김일성의 공격을 당하여 패망 직전까지 이르렀다가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은,


      A.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해야 할 것이고,


      B. 많은 사람들이 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는데, 특히 그 중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C. 그리고 전쟁은 피차간에 큰 비극을 초래하는 것임으로, 할 수 있으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면서 예방해야 한다. 그렇지만 전쟁이 두렵다 하여 비굴하게 전쟁을 피하거나,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짓임을 꼭 기억해야 한다.


      D.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모든 국민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일치 단결 하여, 일어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힘을 모아 싸워야 할 것이다.


      E. 그리고 6ㆍ25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으로 포성이 멈추었다. 그렇지만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라를 지키다가 실종된 군인 약 17만 명에 대한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1. 6ㆍ25 전쟁의 이해에 두움 되는 필자의 글과, 동영상

      A. 본 교회 사랑게시판 게시 글 중 6ㆍ25 전쟁과 관련된 필자의 글 몇 가지를 소개하겠다.


                        (아래 문서 이름을 클맄하면 볼 수 있음)


            (1)   #357       2014 10 30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 손에


            (2)   #357       2015 04 11      하와이 기행 #8 (기습공격을 받아 입은 피해)


            (3)   #365       2015 05 21      휴전 후 북한이 자행한 테러사건


            (4)   #390       2016 09 09     장사 상륙 작전


             (5)   #391       2017 01 18      인천상륙작전의 모티브인 Xray 작전


             (6)   #394       2017 06 09     앞 일을 모르고 사는 인생


      B. 인터넷에서 6ㆍ25 전쟁과 관련된 동영상을 검색해 보면 많은 동영상이 검색될 것이다. 그 중 18개를 선별 하였으니 동영상의 이름을 클맄하면 시청할 수 있게 된다.


                        (아래 동영상 이름을 클맄하면 볼 수 있음)


              (1)   01:20:46      6.25 전쟁 실제 전투영상 다큐멘터리│정의의 진격 1부


              (2)         55:45     6.25 전쟁 국방부 장편기록영화│정의의 진격 2부


              (3)   01:27:20    컬러로 보는 6.25 한반도 전쟁 실제 영상 ㄷㄷ @@ 한국어 나레이션


              (4)         21:20     6.25의 기억 '한국전쟁' 1부


              (5)   01:26:58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 The Korean War


              (6)         23:32     6.25 전쟁의 참상


              (7)          47:53     6.25 전쟁


              (8)           49:11     한국전쟁 영국 Beckmann사 제작 다큐


              (9)           06:20    한국전쟁 발발하자 바로 짐 싸들고 달려올 나라들


             (10)           49:18     NHK 스페셜 6.25 한국전쟁 비밀기록


                       (11)            18:03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 전쟁의 시작 '한국전전쟁 1부


                       (12)            57:19     1950년 혹한의 겨울! 장진호에서 흥남까지


                       (13)            12:09     중공군에 포위된 미해병대, 126km의 포위 돌파 작전, 장진호에서 흥남으로


                       (14)            42:12     6.25전쟁 참전용사 백골병단 전인식 님이 들려주는 6.25 한국전쟁 이야기


                      (15)            47:36     6·25전쟁 문경전투, 전선의 운명을 바꾼 그날


                      (16)            47:26     운명의 여섯 시간, 오산 죽미령 전투


                      (17)             50:08     은밀한 침투, 간첩


                      (18)             47:50     6.25 전쟁, 끝나지 않은 비극


(유한민 목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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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24 17:50
    6 25전쟁에 관한 동영상 당초 10게에서 8개를 더 추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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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및 게시판 사진 포스팅 방법
관리자 | 2019.03.04 | Votes 0 | Views 2605
관리자 2019.03.04 0 2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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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가 있을까? (1)
Han You | 2020.06.20 | Votes 0 | Views 88
Han You 2020.06.20 0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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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길
김영란 | 2020.05.18 | Votes 0 | Views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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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닮 다락방(번개 모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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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SE(체이스뱅크) Zelle 이체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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