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자녀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 주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간단하게 이룰 수 있는 일이라고 우습게 보아도 결코 아니 되며, 또 한 세대가 지나간 후에야 비로서 그 성과가 확실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꾸준히 노력하는 자가 얻을 수 있는 열매인 것이다.

   필자가 잘 알고 있는 분이 자신의 자녀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 실제 노력하던 실화 한 토막을 소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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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시대인 1938년 이었으니 그 때 나의 나이는 29세였다. 그 때 나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정양리에 있는 발전소 한국인 전용 사택에서, 세 살 위인 남편과 2명의 아들을 데리고 살고 있는 가정 주부였다. 남편은 이곳에 세워진 지 얼마 안된 영월화력발전소 기관부에서 발전기 운전요원으로 24시간씩 막 교대 근무하는 직장인이었다. 


   


   일본 식민 정책에 따라 공공연하게 노동자의 노동력이 착취 당하는 시절이기 때문에, 받는 노임을 가지고 생활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웠고, 또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가 너무나 먼 곳에 있기 때문에, 큰 아이는 경북 영주군풍기면에서 농자를 짓고 계시는 시부모님께 맡겼음으로 항상 큰 애를 그리워 하며 살고 있었다.


   


   남편도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났고, 저 역시 믿음을 가지고 자라났기 때문에 둘 다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있었고, 또 귀한 믿음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꼭 물려주겠다는 생각 안에서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희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교회가 약 10리 정도(3.8Km) 떨어진 군청 소재지에 있는 교회였다., 거리도 멀고 가는 중간에는 나루 배를 타고 동강을 건너야 하는 어려움도 있음으로 교회 생활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남편의 직장은 격일 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이와 함께 교회 가는 날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지만, 남편이 출근한 날이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신작로(차도)라고는 하나 포장되지 않고 자갈이 깔린 험한 길을 도보로 가야 했다. 그럼으로 다섯 살 짜리 아이는 걸리면서 한 손으로는 그 아이의 손을 잡아야 했고, 등에는 한 살 짜리 아이를 업었으며, 또 다른 한 손으로는 어린아이의 기저기와 점심, 그리고 성미(당시에는 교역자에게 일정한 사례비를 드리지 못함으로 성도들이 매 끼니마다 한줌씩 양곡을 떠서 모은 것으로 교역자의 식량을 제공했다) 주머니 등을 넣은 보자기를 들어야만 했다. 만약 눈 보라가 치는 날, 영하의 추운 날, 폭양이 내려 퍼붓는 무더운 날, 비가 오는 날이면 더욱 어려운 길이었다.



   남편의 출근 시간은 아침 7시였다. 그러므로 남편이 출근하는 날은 새벽 다섯 시 전에 일어나야 했고, 남편이 퇴근하는 날 아침은 늦잠을 잘 수 있었다. 



   남편이 출근하는 날, 주일 아침은 너무나 바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새벽 같이 일어나 조반을 지어 6시 즘에는 아이들까지 모두 깨워서 아침 밤을 먹어야만 했다. 남편이 출근한 다음, 아이들을 모두 씻기고는 저는 두 아이를 데리고 교회를 향해 출발해야 한다. 다섯 살 짜리 아이는 어리기 때문에 잘 걷지를 못한다. 가다가 추운 날이면 춥다고 울고, 더운 날에는 덥다고 울고, 또 다리 아프다고 울기 때문에, 한편 미안하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했다. 그러면 하는 수 없이 길가에 잠간 서서 쉬었다가는 또 다시 걸어야만 했다.



    더구나 집으로부터 6-700 m 정도 떨어진 곳은, 야간 개갈 강아지(호랑이과에 속하는 짐승)가 나오는 외진 길임으로, 남자들도 두려워 하는 산 모퉁이 길이었다. 그런 곳을 여자의 몸으로  철부지 두 아이를 데리고 간다는 것은 두려움이 아닐 수 없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앞만 보고 열심히 가다 보니 지루한 노정도 줄어들면서 목적지가 가까워 진다.


   


   드디어 목적지 가까이 있는 동강 나루에 이른다. 선가를 지불하고 강을 건너면 교회 가까이 이르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강물이 범람하였을 때를 대비하여 쌓아놓은 높은 제방이 있는데, 그것을 넘어야만 동리로 들어갈 수 있다. 십리 길을 걸어온 아이는 힘이 부쳐서 제방을 넘지 못하고 주저 앉는 경우가 허다했다. 저는 하는 수 없이 있는 힘을 다해 한 손에는 보자기를 들고, 등에는 젓 먹이를 업고, 또 다섯 살 짜리 아이까지  안고 계단을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제방 위에 올라 서면 교회 종탑이 보임으로 힘을 다해 제방을 내려가서 교회 마당으로 들어간다. 목적지에 도착하였으니 모든 것을 다 이룬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어떤 때는 11시에 시작되는 주일 예배가 이미 시작된 후이고, 또 어떤 때는 여유 있는 시간에 들어가기도 했다. 땀을 식힐 겨를도 없이 아이 하나는 주일학교로 보내고, 한 아이에게는 젓을 물리고 예배당 마루 바닥에 주저 앉는다. 너무나 피곤한 가운데서 예배를 드리다 보니, 어떤 때는 나도 모르게 한참 졸다 보면 예배의 마지막 순서인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지 않는가?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예배는 끝났다. 이 교회는 옛날 시어머님이 오랫 동안 전도부인으로 시무 하시던 교회이기 때문에 성도들이 저에게 베풀어 주시는 사랑은 대단했다. 그래서 주일 오후에 교인들 가정에서 저에게 제공해 주시는 점심을 자주 먹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때로는 제가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었다. 그 때는 아이들과 함께 교회를 담임하시는 전도사님 사택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은 후 잠간 쉬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전쟁을 벌려야만 했다. 집으로 돌아 올 때는 낮 시간임으로 두려움은 없었으나, 피로가 누적 되어 있음으로 역시 고달픈 길이었다. 그와 같은 과정을 모두 거처 집에 돌아오면 해가 이미 넘어간 후임으로, 교회 갔다가 오는 것으로 하루 모든 시간이 다 지나간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매 주일 한 차례식 반복해야 함으로 매우 어렵고 고달픈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 흘리시고 생명까지 버리신 주님께서 당하신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 당하는 추위나 더위, 당하는 피로, 모든 것이 겁나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에게 귀중한 믿음을 물려 주어야 한다는 일년 뿐이었다.


   


   먼 곳에 살지만 주일마다 빠지지 않고 출석하는 저희 부부를 가상히 보신 신길봉 전도사님(교회 담임전도사)은 저희 가정을 위로 격려해 주시기 위해, 매월 한 두 차례, 멀고 먼 저의 집까지 꼭 심방을 오셔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위로 격려해 주셨다. 저희 부부를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에 고달픈 먼 길을 마다 하지 않고 거듭 거듭 심방 오시는 것을 보고 저희 부부는 더욱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다. 



   전도사님이 심방 오실 때 마다 저는 성도가 교역자를 대접하는 것은 성도가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라는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졸은 기회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심방 오신 전도사님을 따뜻한 밥을 지어 대접하는 것이 그렇게도 기쁘고 즐거웠다.



   1940년 봄 둘째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다. 둘 째 아이도 다시 시부모님께 맡길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한국 민족은 망국의 설움을 안고 한 맺힌 가운데서 살고 있었다. 간악한 일본은 세계를 재패 하려고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키고서는 한국 민족에 대한 압박을 가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독교를 통해 일어나는 항일 사상을 봉쇄하기 위해 기독교에 대한 핍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찬송가 책은 중간 중간 가사 내용을 읽을 수 없도록 먹물로 지웠고, 아예 찢어 없이한 곳도 있었다. 또 목사님과 장로님들을 잡아 가두기 시작했으며, 예배 때는 강단 뒤 한 곳에 칼을 찬 일본 고등 경찰(항일 사상을 다루는 경찰)이 자리 잡고 앉아 예배의 모든 과정을 감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의 머리 속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새로 태어난 사내 아이들을 죽였던 정책이 생각났다. 그와 같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살려 민족의 지도자를 삼기 위해, 모세를 하수 가에 버리게 하셨고, 또 애굽 공주가 그를 발견하여 아들로 삼게 하신 다음, 친 어머니 요게벳으로 하여금 모세의 유모가 되게 하셨다는 내용이었다.



   유모가 된 요게벳은 모세에게 젖꼭지를 물리고서는 처다 보는 모세를 향하여 "너는 이스라엘 백성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민족 사상을 고취했던 것이 생각났다. 장로님이신 시아버님 마저 영주경찰서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일본의 발악하는 핍박이 가중되면 행여나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이 믿음을 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심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시아버님이 집에 아니 계시기 때문에 시 어른 댁도 어려움이 있음으로 맡겼던 두 아이를 모두 데려와서 학교까지 10리 길이 되는 먼 거리지만 통학을 시킬 수 밖에 없었다. 얼마 동안 통학하는 아이들을 보니 너무나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한 달에 남편이 자전거를 이용하여 15번만 먼 길을 출퇴근 하면, 두 아이는 매월 26번씩 가까운 곳에서 편히 통학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1942년 동강 나루가 있는 영월면 덕포리에 농가 하나를 마련하여 이사 함으로서 1941년 새로 얻은 아들까지 합하여 대식구가 함께 덕포리에서 살기 시작했다.


   


   덕포리에서 교회 가는 길은 동강 나루만 건너 제방만 넘으면 갈 수 있었다. 다만 한 척의 배가 왔다 갔다 하는 것임으로 기다리는 시간이 많다는 것이 문제일 뿐, 적게는 30분 정도, 경우에 따라서는 1시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옛날 처럼 고달픈 길은 아니었다. 


  


   어느 주일날 아침이었다. 교회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서기 직전, 주일학교에 들어갈 아이들에게 헌금할 돈을 주려고 주머니를 뒤졌더니 낡은 지폐 몇 장밖에 없었다. 그것 가운데서 아이들에게 헌금 할 돈을 주었더니 큰 아이가 말하기를 "엄마, 할아버지가 말씀 하시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언재나 제일 좋은 것을 미리 준비했다가 드려야 한다면서, 할아버지는 자주 금융조합에 가서 빠닥빠닥한 새 돈을 바꾸어 오셨다가 그것을 주시는데, 이런 헌돈을 드려도 돼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나는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나는 것을 보고 너무나 고마웠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 때부터 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의 말씀 대로 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게 되어, 쓰다가 남은 것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고, 쓰기 전에 미리 제일 좋은 것으로 골라, 그리고 은밀한 가운데서 분에 넘치게 드리기로 작정하고 그것을 실행하기에 최선을 다하게 되었다.


   


   이 헌금 문제를 아이에게 배운 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다시 아이들에게 물어 보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언제 언제 교회 가니" 하고 물었더니, 큰 아이가 하는 말 "매일 아침에 한번 갔다 오시고, 또 수요일 밤에도 가고, 주일날이면 세 번 가요"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또 "집에서는 언재 예배 드리니" 하고 물으니, 큰 아이가 대답하기를 "저녁 먹고 난 다음, 식구 모두가 모여 앉아, 찬송 한 장 부르고, 매일 성경 한 장을 보는데 한 절씩 돌아가면서 읽고, 그 다음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읽은 성경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시고, 그 다음에는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매일 한 사람씩 기도하고, 주기도문 외워요"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래? 전기도 없는데 밤에 어떻게 성경 읽니?" "등잔불 켜놓고 읽어요" "너도 기도해 봤니"하고 큰 아이에게 물으니, "예"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럼, 너도 기도했니?" 하고 둘째 아이에게 물으니", 역시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장로님과 교역자 생활하신 분들이 다르구나", 지금까지 나는 아이들에게 믿음을 꼭 물려 주겠다고 열심을 다 했는데, 그분들에게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일본 정부의 학정이 점점 가중되자 나는 필사의 각오로 주님께 간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남편은 직장에서 철야 근무를 하느라 집에 없고, 아이들은 나란히 누어 깊은 잠에 빠진 고요한 밤 시간, 나는 일어나 무릎을 꿇고 주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큰 아이로부터 다섯 째 아이(1943년에 또 아이 하나를 얻음)까지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가면서 차례 차례 "주님 품 안에서 믿음을 가지고 잘 자라게 해 달라"고 간곡히 기도했다. 간혹 자던 아이가 깨어 "엄마 뭐해" 하고 묻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는 아이들이 엄마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아이들이 자라가면서, "그 때 엄마가 중얼거리던 것은 바로 자신을 위한 기도였구나" 그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아이들의 마음 속에서는 "기도하는 엄마, 자신들을 사랑하는 엄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어머니가 원하고 있는 그 믿음을 자신들도 가지고 지키면서 살다가, 다시 다음 세대에 꼭 물려 주어야 한다는 각오를 갖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944년 경이었다. 나루로 건너던 동강에 드디어 다리가 놓여졌다. 이제부터는 교회까지는 15분만 걸어가면 되고, 아이들이 가는 학교까지도 25분 정도만 걸으면 갈 수 있으니 참 편하게 된 것이다. 시부모님의 신앙생활 모습을 아이들로부터 들은 다음 나는 크게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지났는데, 늦게 나마 다리가 놓여졌으니 나도 새벽기도회도 가고, 교회 정기집회에는 빠짐없이 가기로 마음 먹고 시부모님들의 하시는 대로 나도 실행하게 되었으니 너무나 기쁘고 기뻤다.


  


   세월은 흘러 나는 모두 7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자녀들 모두가 장성하였고, 믿음 안에서 바로 자라나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충성 봉사하는 것을 나는 보게 되었고, 그들도 다시 자신들의 자녀에게 믿음을 물려주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고 크게 기뻤다. 



   나의 자녀가 자라나 다시 그의 자녀들에게 믿음을 물려주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예로 들겠다. 


한 아들의 가정에서는 다음과 같이 실행하는 것을 나는 보았다. 매 식사 준비가 완료되면 가족들을 일일이 찾아 식사하라고 말하지 않고, 구찬송가 436장 3절을 식사가 차려진 장소에 있는 가족들이 크게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면 각기 방에 있던 가족들이 모여든다. 그러면 돌아가면서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한 후 식사를 시작한다.


   참고로 436장 3절 가사를 소개하겠다.


        좋은 옷을 입히시고    맛난 음식 먹이사   고이 길러 주시오니   주여 감사합니다 


   계속 이렇게 하였더니 아이들이 자라면서 어떠한 자리 어떠한 모임에 나갔다 하드라도 감사 하기 전에는 절대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주님께 대한 감사 생활이 점점 깊어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아들의 가정에서는 다음과 같이 실행하는 것을 나는 보았다. 결혼한 그의 자녀들이 직장에 나가기 위해 어린 아이(나에게는 손자 손녀임)들을 맡기고 간 후 아이에게 우유를 먹일 때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순서를 거친 다음 먹이는 것이었다. 저의 며느리가 어린 아이를 안은 다음, 우유 병을 들고서는 위의 찬송가를 먼저 부르고, 그 다음 간단하게 감사 기도를 드린 후에 아이에게 젖을 물린다. 처음에는 아이가 빨리 젓 달라고 울었다. 그렇지만 날이 갈수록 아이는 모습은 달라져서, 찬송 소리가 끝난 다음, 할머니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있은 후에, 젖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절대 울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 아이들이 모두 철저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여기 기록한 것 말고도 나의 자녀들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믿음을 물려주기 위해 애 쓰는 모습을 본 나는,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올리면서 기쁘게 살다가, 때가 이르매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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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


   1) 이 내용은 실제 있었던 내용을 줄거리로 삼아 작성한 것입니다.  


   2) 사정상 실제 인물의 이름을 밝히지 못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3) 자녀들에게 믿음을 넣어주는 방법 중에는 행동으로 신앙생활의 본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한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