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애 전도부인의 눈물어린 발자취

필자 주 :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죽마다 눈물 고였다" 이것은 1939년 백년설이가 불러 힛트 친, "나그네의 설음"이라는 유행가 가사의 일부이다. 이 노래는 어느 사나이가 나그네의 생활 속에서 당한 고난을 잘 묘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필자가 여기에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1920년대에 있었던 실화의 한 토막으로, 필자가 잘 아는 힘없는 아낙네가,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들로 산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흘린 고난의 눈물을 그의 발자취에서 찾아본 것입니다. 그의 젊음은 황무지를 개척하여 복음의 씨를 뿌리는데 모두 받혔고, 예수 믿는 것을 반대하던 남편도 주님의 일꾼으로 변화시킨 감동 어린 내용입니다 (사정상 내용 중 일부 인사에 대하여는 실명을 밝히지 못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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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887년 평안도 지방에 살고 있는 부잣집 가정에서 2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오빠와 언니가 각각 한 명씩 있었고, 밑으로도 남동생과 여동생이 각각 한명씩 있었다. 저의 아버지(김기풍씨)는 구한말 시절, 평안도 지방을 떠나, 가족을 데리고 경북 풍기(후일 풍기군이 영주군으로 개명됨)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새로운 곳에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성공 함으로서  궁핍함이 없이 살았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1887년임으로, 이씨 조선 제26대 고종대왕 즉위 제24년이었다. 내가 출생하기 이전부터 일본은 임진왜란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호시탐탐 한국 땅을 넘보면서 침략을 거듭해 왔다. 드디어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이라는 미명으로 그들의 마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07년 고종황제가 헤아에 밀사를 파견한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은 고종황제를 강제로 폐위 시킨 후, 순종황제를 즉위 시켰던 것이다. 연이어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고, 1910년 8월 29일에는 한국과 일본이 합병하였다는 이름으로 우리 국권을 찬탈 함으로서, 순종황제는 왕위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우리 한국 민족은 일본 총독의 지배 하에서, 망국의 한을 품고 살게 된 것이다. 1909년 할빈 땅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 사살하자, 일본의 식민 정치는 점차 학정에 학정을 가중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1904-5년경, 경북 지방에서 으뜸간다는 양반 가문의 후손인 동갑내기 남편과 결혼하여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다. 남편은 허울 좋은 양반일 뿐, 가진 것이 없는 빈 털털이기 때문에, 신혼 생활 처음부터 남의 집 셋방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1906년 산달이 가까워짐으로 친정으로 들어가서, 첫 아들을 얻은 후, 다시 순흥면 내리와 풍기면 용천동, 풍기면 창락동 등지를 전전하면서 어렵게 살았다. 그 후 우리는 아래에서 밝힐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하여 가족이 뿔뿔이 헤어져 살아야 하는 어려움도 겪었다. 

 

나의 친정 가족들은 경북 풍기 지방에서 계속 살았다. 1907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에서 파송된 안대선 선교사와 서울새문안교회 전도 요원들의 전도로, 풍기 지방에 복음이 처음으로 들어왔는데, 그 때 동부동 자인촌에 살고 있던 나의 친정 아버지 김기풍씨와, 김창립 등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여,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 때 나의 친정 식구들 모두가 주님을 영접하였기에, 1909년 3월 나의 오빠 김용휘씨는 김창립씨와 힘을 모아 서부동에 있는 초가 15간 짜리 집을 사서 예배당으로 헌당함으로써, 풍기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그 때 나는 출가한 사람이지만 가세가 어렵다 보니 친정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관계로 친정 왕래가 잦았던 나로서는, 친정 식구들과,  거이 비슷한 시기에 주님을 영접하였기에, 남들보다 빨리 믿음이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아이 하나 딸려 있는 20대 초반의 젊은 아낙네였다. 그 후 1920년 3월 17일 친정 오빠 김용휘씨가 풍기교회 초대 장로로 장립하였으니, 나의 친정 식구들의 교회 사랑하는 마음은 남달랐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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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 위에 기록 내용은  "풍기성내교회 홈페이지"  - "교회 안내" -  "10년 단위 역사"  -  "1900년-1910년대"  에 들어가면 거기에서도 볼 수 있다.  ( http://www.sungnae.or.kr/10year.ht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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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남편은 유교사상에 깊이 젖어 있었고, 또 완고한 전통적인 양반가문의 후손이기 때문에, 젊은 아낙네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을 좋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신앙생활에는 어려움이 많았던 것을 솔직히 고백한다. 한 예를 들면 어느 날인지는 기억할 수 없으나, 내가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새벽기도회에 나가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긴 남편은, 내가 새벽에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외출용 치마를 모두 감추었기 때문에, 부엌에서 입던 더러운 치마를 입고 나간 적이 있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가 승하하였다. 이 때 항간에는 일본 사람들에게 고종황제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어, 젊은 애국 지사들은 이에 항거할 것을 결의하고 고종황제 인산(국장) 때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제히 만세를 부르면서 봉기했는데, 이것이 삼일독립만세 사건이다.

 

이 때 봉기한 우리 민족 지도자들은 왜구들의 탄압을 피하여 해외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중국으로 건너간 분들은 1919년 4월 13일 상해에서 임시 정부를 수립한 다음, 1920년 상해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 명의로 된 대한독립을 위한 자금 모집 의뢰서를 만들어, 나라 안팎 피 끓는 젊은이들에게 널리 뿌림으로써 군자금 모집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운동은 왜구들의 감시가 너무나 심함으로 표면화하지 못하고 지하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나는 가정 주부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내막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남편은 저녁 먹은 다음 외출하였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아예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되자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는가? 결코 그럴 사람은 아니다", "아니면 혹시 도박에 빠진 것은 아닌가? 결코 그럴 사람도 아니다"라고 나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자 부부간의 애정의 갈등이 은연 중에 커가고 있었다.

 

1921년 4월 중순 어느 날이었다. 남편은 전날 저녁에도 외출하였다가 새벽녘에 집에 돌아왔다. 남편은 아침밥을 먹은 후, 변소에서 오물을 퍼, 오물 지게를 지고 밭으로 나갔다.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다시 지고 나갔다. 그런데 낯 모르는 사람이 집으로 찾아와서 남편을 찾는 것이었다. "지금 남편은 오물을 지고 들에 나갔으니 곧 돌아올 겁니다"라고 나는 아무 영문도 모른체 대답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남편이 마당으로 들어서자, 뒤 따라 들어온 일본 경찰이 남편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것이 아닌가.

 

나는 놀라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경찰이 말하는 것과 또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전해 주기를, "당신의 남편은 그간 상해 임시정부에서 쓸 군자금을 모집해서 상해로 보냈다"고 한다. 돈 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때로는 모금에 응해 줄 것을 요구했고, 때로는 강요도 했으며, 협박하여 받은 돈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돈 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이 겉으로는 응하는 척 하고서는, 뒤로 일본 경찰에 밀고 함으로써 벌어진 일이라고 전해준 것이었다. 

 

나는 생각하였다. 피 끓는 대한의 청년이라면 누구나 응당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고, 후회하지도 않았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잠시나마 남편을 반신반의 했던 나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리고 장한 남편, 나라를 사랑하는 남편을 가진 것을 기쁘게 생각하면서, 남편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남편은 재판 과정을 거친 다음 7년 징역형의 선고를 받고 안동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남편이 옥에 갇히자, 30대 중반에 들어선 나로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며 또 중학 과정을 공부해야 할 10대 소년 아들을 어떻게 공부시킬 것인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자 나는 우리 주님이 살길을 열어 주시리라 믿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때는 우리 나라 선교 초기였는데, 전국에 몇 개 안 되는 뿌리 내린 지방 교회 장로로 오빠가 있었기 때문에, 오빠는 선교사들과, 또 교계 지도자들과 깊은 교우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관계로 어려움에 처한 나에게 기쁜 소식이 빨리 날아왔다. 그것은 원주에 있는 미국 선교사로부터 강원도 영월 지방으로 가서 전도부인으로 봉직하면 좋겠다는 요청이었다. 그리고 미국 선교사들은, 내가 걱정하던 아들은, 대구 계성중학교에 입학 시키고,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공부할 수 있게 배려하였으니,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염려 없이 전도사업에 힘 쓸 수 있게 된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나는 전도부인으로 부름 받은 것을 감사하면서, 제일 먼저 내가 취한 것은 나의 이름을 바꾼 것이었다. 김화백(金花伯)이라는 나의 이름을 "주님을 사랑한다는 뜻을 가진 김주애(金主愛)"로 바꾼 것이다. 이제 나는 복음을 들고 황무지를 개척하기 위해, 강원도 영월교회로 찾아가서 임명장을 받은 다음, 명에 따라 충북 단양군 영춘면에 체류할 근거지를 정한 다음, 단양, 제천, 영월, 정선, 평창, 등지를 순회하면서, 주로 새로운 교인을 얻기 위해 전도하는 일과, 또 신설된 교회를 인도하는 일이었다. "주여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지 잡던 무식한 어부였지만, 주님께서 그를 불러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저도 무식한 사람이오니 주님께서 힘 주시고 능력 주셔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첫발을 내어 디뎠다.

 

그 때 영춘에는 영월교회의 지교회로 발족한 신설교회가 엄대환씨 가정에서 모이고 있었다. 담임 교역자가 없음으로, 영월교회 담임자 조근영 목사님이 영월과 영춘을 오가면서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임명되자 곧바로 부임하게 된 곳이 영춘교회로서, 나는  거기에서 예배를 인도하면서 복음 전파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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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 

 1) 이 내용은 충청 타임즈  "홈페이지"로 들어가면  -  "기독교의 발자취<34>" -  "영춘제일교회편" -  "단양서 뿌리내린 94년의 역사"란 제목 하에 보도된 기사에서도  이 내용 일부를  읽을 수 있다.

   ( http://www.cc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32640 ) 

그런데 이 기사 내용 중 전도부인의 이름 가운데 중간 글자가 "미"자로 오기 되었기에 정정을 요청한 바 있습니다.

 

2) 이 내용은 "연당교회 홈페이지" -  "교회소개" -  "연당 100년"란에 들어가면, 연당교회 100년사 가운데 초창기 연약한 교회를 지켜온 인물 가운데 유대수씨(장로)라는 분이 나오는데, 그 분은 1922년 영춘교회에서 복음전도자 김주애씨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거듭난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전도부인 김주에씨는 모리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1925년을 전후하여 원주지방에 적을 두시고, 원주지방의 소속인 영월로 오셔서, 연당 영춘 등을 순화하면서 전도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 http://www.ydmc.co.kr/html/church_church.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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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오늘날과 같이 버스나 기차가 다니는 것도 아니고, 길이라는 것은 좁고 험하며 곳에 따라서는 갈대 숲을 헤치고 지나가다가 뱀을 만나는 경우가 흔하였으며, 또 겹겹 산중의 험준한 재(고개)를 수 없이 넘어야만 했다. 가다가 보면 냇물이 가로막고 있어서 차가운 냇물 속에 발을 넣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으며, 가난한 산골 마을의 주식이 옥수수와 감자임으로 그것으로 허기찬 배를 채워야만 했다. 겨울의 추위를 막기 위해서는 천의(옛날 부인들이 방한용으로 입는 옷)를 입어야만 했고, 여름의 더위는 삼베 적삼을 입고 참아야만 했다. 가다가 길이 막혀도 연락할 길이 없고, 몸이 아프다고 해도 견딜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두움이 찾아왔을 때는 달빛에 의지하는 것이 전부였다. 앞에 펼쳐지는 험한 길목에는 금방이라도 불한당이 나올 것 같은 두려운 길이었고, 늑대가 짖어대는 소리를 들을 때는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땀으로 함박 젖은 몸은 냇물이 있는 곳이라야, 밤 시간을 이용해서 씻을 수 있었고, 해가 넘어간 다음 아침이 될 때까지는, 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 산골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활임으로 그들과 똑 같은 생활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비록 내가 이와 같은 어려운 가운데서 살았지만 한 번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우리 주님께서는 나 위하여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버리셨고, 또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이하의 말씀에는, 바울 사도가 당한 고난이 자세하게 적혀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그와 같은 지독한 고난을 한 두 번도 아니고 거듭 거듭 당하면서도, 묵묵히  복음을 전한 것을 보고 나는 지금 내가 당하는 고난 따위는 가히 거기에 비교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춥고 추운 겨울 날, 차가운 찬바람을 헤치면서 막막한 산골 길을 걸어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처량함을 느끼게 되었다. 남편은 안동에 있는 차가운 감옥에서 어떻게 지나고 있는지? 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대구에서 공부는 잘하고 있는지? 셋밖에 안 되는 우리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살아야만 하는 서글픈 생각이 나의 머리 속으로 찾아온다. 그 때 마다 나의 처지를 잘 표현하고 있는 찬송가(440장)가 가사가 떠오르면서 나도 모르게 그 찬송이 나의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1절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도 외로워   정처 없이 다니니

  후렴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2절   예수 예수 내 주여   섭섭하여 울 때에   눈물 씻어 주시고   나를 위로 하소서

3절   다니다가 쉴 때에   쓸쓸한 곳 만나도   홀로 있게 마시고   주여 보호 하소서

이 찬송가를 반복하면서 걸어가다 보면 어느 듯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반가운 믿음의 형제들을 만나면,길에서 느꼈던 외로움과 슬픔과 고난은 말끔히 살아지곤 했다.

 

나의 생활 속에서는 자주 로마서 9장 3절 말씀이 머리에 떠올랐다. 바울 사도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주님께 기도하신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옥에 갇혀 있는 남편과 혼자 떨어져 있는 아들을 생각하면서 기도해야 한다는 욕구가 솓구쳐 올랐다. 그리고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베드로가 옥에 갇혀 있을 때 교회가 그를 위하여 기도했고, 사도행전 16장에는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당사자들과 교회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더니 갇혔던 그들 모두가 석방되면서,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까지 구원 얻게 된 말씀이 생각났다. 지금 옥에 갇혀 있는 남편과, 혼자 쓸쓸히 지내고 있는 아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께 기도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남편과 아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주님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옥에 갇힌 남편을 주님께서 구원해 주셔서, 앞으로는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일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대구에서 혼자 공부하는 아들을 위해서는 "주여 부모가 돌보지 못하고 있는 어린 심령을 주님께서 인도하여 주옵소서, 친구 잘못 사귀면 영원한 멸망의 자리에 이르게 될 수 있음으로,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주의 일꾼으로 자라나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를 하루에도 몇 차례씩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고난을 극복하면서, 계속 전도사역에 열심을 다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머리카락은 흰색으로 변한 40대가 되었다. 그 동안 주님께서 지켜 주시면서 소망 안에서 살도록 힘을 주셨기에, 젊은 아낙네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능력을 주셨고, 또 13개의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세워지도록 인도하신 주님의 넓으신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7년형의 선고를 받고 영어의 몸이 된 남편은 3년 여의 세월이 지난 후, 주님께서 가석방의 길을 열어 주셨다. 그리고 공부하던 아들에게도 공부를 마치는 은혜를 내려주셨다. 그러나 부자 모두 유숙할 집도 없고, 의지할 가족도 없는 가련한 처지였다. 저의 남편은 아내가 지금 주님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또 자신이 감옥에 들어가 있는 동안 주님께서 자신의 아내와 자식을 지켜 주셨다는 것과, 또 7년 형을 받은 자신을 조기에 석방케 하신 것 모두가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일 자리를 구할 동안 처가에서 기거하면서, 주님을 위해 살기를 다짐하게 되었다. 드디어 남편은 처가의 도움으로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좋아하던 술 담배를 모두 끊고서는, 교회 출석에 힘쓰면서 교회를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예수 믿는 아내를 핍박하던 자신을 주님은 벌하지 않고, 도리어 사랑해 주시면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깨닫고는, 어찌 내가 주님의 일에 지장을 주면서 아내를 집으로 오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굳건한 결심 아래, 아내가 지금 담당하고 있는 일이 정상 적인 궤도에 오르기까지, 기러기 부부로 지나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10대 후반에 들어선 아들은 "젊은 놈이 놀고 먹을 수는 없다"는 생각과 "어머니가 집에 아니 계시는데, 젊은 자기까지 외가에 덧붙어 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일 자라를 찾아 나선 것이다. 드디어 취직하였다는 것이 곡마단(서커스단)을 따라다니면서, 그 시설을 설치하고 철거하는, 막노동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계속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노동자가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보니, 어미인 나로서는 새로운 걱정이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주여 나는 어떻게 하여야 하오리까? 지금 사춘기에 들어선 아들을 그대로 방치했다가 행여나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어떻게 할까 심히 걱정되오니, 주님께서 인도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오늘은 서강을 건너 각한재를 넘어 연당으로 가야 했고, 다음에는 옥동과 각동을 거쳐 영춘으로 가야만 했으며, 또 그 다음에는 정선 그림바위로 갔다가 상동 골두바위로 가야 하고, 다시 상동 녹전으로 가는 등, 계속 바쁘게 산 넘고 물을 건너 발길을 재촉하면서 순회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나는 선교 구역을 계속 순회하면서, 새로 믿기 시작한 가정과 병자, 슬픈 일을 당한 자들을 심방하여 위로하며, 격려하였고, 또 예배를 인도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황제 인산 때 다시 6.10 만세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항일 운동이 크게 힘을 얻음으로 크고 작은 많은 사건들이 벌어졌다. 그렇지만, 남편은 가석방으로 출옥했다는 딱지 때문에 스스로 근신하면서, 교회 일에만 충성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토록 기독교를 반대하던 남편은 1940년경 풍기 북문교회(北門敎會)에서 장로로 장립하게 되었음을 감사하고, 또 젊은 아들은 기독교 학교인 계성학교에서 믿음의 기초를 바로잡아 주었기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바르게 장성하여 주님의 귀한 일꾼이 된 것 역시 주님의 크신 은혜의 결정이라고 고백한다.


일본이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킨 후 패색이 짙어가자 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잡아 없이한 후, 모든 사람을 야마도 다마시(大和魂)라는 사상을 구심점으로 국민 정신을 무장시켜 전쟁을 승리로 이끌겠다는 정책에 따라, 교회의 목사 장로들을 체포하여 옥에 구금할 때, 남편은 또 다시 그들의 마수에 잡힌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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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

 1). 전도부인으로 봉직하신 김주애 전도부인은 강원도 영월에서 10년 정도, 그리고 해방 전후 풍기북문교회에서 두 차례에 걸쳐 약 2년, 도합 12년간 성역에 봉직 하였고,

 2). 김주애 전도부인의 외 아들은 후일 영월중앙교회에서 장로로 봉직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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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월 30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어둡고도 추운 겨울 밤 9시가 조금 넘었을 때, 경상북도 안동 남쪽에 있는 조그마한 운산(雲山)역에는, 대구역을 출발하여 청량리로 가는 열차가 어김없이 기적을 울리면서 들어왔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승객의 승하자가 모두 끝난 다음 역장의 신호에 따라 열차는 기적을 울리면서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이제 마지막 열차가 지나갔으니 장내를 정리하고 귀가하려는 역무원들은 눈을 맞으면서 장내를 살피고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흰눈으로 덮인 철로 위에는 천의를 쓴 한 노파가 쓸어져 있지 않은가? 그 주위는 그가 흘린 피로 흰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녀의 하반신은 열차에 갈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나있다.



이 할머니가 지니고 있는 성경 찬송가 책에는 "풍기북문교회 김주애"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기에 쉽게 신원이 확인되었다. 남편과 사별한 후 다시 풍기북문교회 전도부인으로 시무하고 있었는데, 휴가를 얻어 안동 일직에 있는 친척집을 방문하여 정담도 나누면서 복음을 전한 다음, 귀가하던 길이었다. 눈 보라 치는 어두운 밤, 열차에 오르다가, 열차 밑으로 미끌어저 떨어짐으로써, 나그네 인생 60년을 끝내고, 하나님 나라로 가신 것이다.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파란 많은 역경을 극복하면서, 강원도 산골을 넘나들던 김주애 전도부인으로, 이 세상 사람들이 그 분을 뵐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 하반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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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 오늘날에도 후진국 여러 곳에서는 아직도 많은 선교사들이 이 보다 더 어려운 고난 속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만약 우리들이 과학 문명이 발달한 나라에서 편히 살고 있다 하여, 선교와 전도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많은 선교사들이 계속 눈물과 고난 가운데서 수고하게 될 것입니다. 선교의 사명은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부여된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직접 선교지에 나가서 수고하는 선교사가 있는가 하면, 후방에서 기도와 재정적인 지원으로 보내는 선교사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사정 때문에 직접 선교지로  나갈 형편이 되지 않는다면, 지원하는 선교사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우리 모두 선교사업에 꼭 동참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